제102화
#102.
황위를 넘기겠다는 오라버니의 상상도 못 한 선언.
‘황궁의 보고도 다 내 거고, 제국 마탑의 마도서도 볼 수 있을 거야. 온갖 희귀한 마법 재료들도!’
루나는 여황제가 되었을 때를 떠올리며 손익을 계산해 보았다.
‘하지만 자유가…… 마법 실험도, 여행도, 마음껏 하지 못할 거야. 황폐화된 나라를 재건하려면 최소 10년은 누리기는커녕 과로에 시달리겠지…….’
부와 권력을 떠올릴 때에는 눈이 곡선을 그었지만, 이윽고 황제가 됐을 때 짊어지게 될 무게를 떠올리니 심각한 눈을 했다.
그녀는 힐끔 리리아를 보았다.
요정들의 여왕, 세계수의 무녀. 그렇기 때문에 감히 자유로울 수 없는 신세.
‘심지어 마음에 없는 남자와 정략결혼도 해야 할지 몰라!’
뒤이어 후계에 대한 문제까지 생각이 이르자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으으…… 싫어.’
돈과 권력이 아무리 좋아도 자유가 없을 것 같은 삶, 루나는 결코 원치 않았다.
‘무엇보다 나는…… 사령술과 음영술을 익혔어. 아무리 솔라 오라버니가 비호해 준다고 해도…….’
게다가 그녀가 익힌 마법도 걸렸다.
‘솔라 오라버니도 이게 싫어서 옥좌를 거절한 건가?’
그렇게 역지사지의 입장으로 생각을 하자, 도저히 오라버니의 선언을 반대할 수가 없었다.
“……나도 안 할래. 자유로운 지금이 좋아.”
결국 루나는 입을 삐쭉 내밀며 한 걸음 물러섰다.
“그럼, 불만 없는 거로 알겠어.”
루나마저 침묵하자, 솔라는 고개를 돌려 미나스를 보았다.
“이제부터 미나스트림, 네가 1황자 솔라시우스가 되도록.”
“하지만! 사람들이 인정하지 않을 겁니다, ……형님.”
미나스는 강한 우려를 표했다. 뒤에 조심스레 형님이라는 단어를 붙이며.
“나와 세계수가 그렇다는데 지들이 어쩌겠어? 안 그런가, 동생?”
이복 동생의 우려에도 솔라는 대수롭지 않다는 반응이다. 그도 뒤에 나직한 어조로 동생이라는 말을 더했다.
“……그런!”
“이건 권고가 아닌 명령이야.”
“……!”
솔라의 확고한 명령. 미나스는 뭐라 반박하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었다.
꿀꺽!
마음속 깊은 곳에선 진작 흔들리고 있었으니까.
‘정말인가? 정말로? 내가 황제가 된다고?!’
진위가 의심되지만, 어쨌든 유혹은 강렬했으니까.
여전히 이복형제의 언행이 그의 상식으론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저 ‘눈앞의 이복 형님과 동생은 적통 황족의 자리보단 자유가 좋은 모양이구나!’라고 애써 해석 중이다.
‘그보다…… 방금 나를 동생이라고 불러 주었지?’
한편으론 방금 솔라의 입에서 나온 동생이라는 호칭에 괜히 가슴이 뛰었다.
“이 동생이라는 말도 처음이자 마지막이군. 앞으론 네가 형일 테니.”
눈에 띄게 흔들리는 미나스를 향해 솔라가 웃으며 말했다.
“…….”
미나스는 그토록 원했던 상황이지만 숨이 턱턱 막히는 부담감에 어쩔 줄 몰라 했다.
결계가 쑥 하고 꺼졌다.
불투명한 막 안에 있던 이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요정 여왕이 세계수의 가호를 뽐내며 제일 뒤에 서 있었고, 그런 리리아를 로뮤가 옆에서 경호했다.
제일 앞에는 미나스트림이 있었다. 미나스의 왼쪽에는 금발 금안 상태로 변한 루나시르네가 있었고 오른쪽에는 솔라시우스가 있었다.
천 년 만에 재현된 영광의 순간.
귀족, 마법사, 기사 할 것 없이 경건한 표정으로 무릎을 꿇었고, 전장에서 정신없이 전리품 챙기던 병사들도 휩쓸리듯 무릎 꿇었다.
“지금부터 세계수의 가호 아래서 새로운 서약을 선포하겠다.”
미나스트림, 지금부터 솔라시우스라고 불릴 남자가 목소리에 마나를 담아 외쳤다.
그는 떨리는 숨소리를 애써 진정시켰다. 결계 안에서 합의한 내용대로 말하면 된다. 그렇게만 하면 자신은 황제의 자리에 오를 것이다. 새로운 천년 제국의 시작을 열 것이다.
많은 의혹이 있겠지만, 수긍하지 못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어쩌겠는가? 세계수가 허락하고 광휘의 기사가 인정할 텐데.
“개정된 서약에 따라, 제국을 이끌 새로운 태양검이 결정되었도다!”
미나스는 충분히 해볼 만하다고 생각했다.
“……?”
“……!”
그런 미나스를 보며, 무릎 꿇은 모두가 의문을 가졌다.
어째서 저자가 나서는 거지? 진정한 적통은 암흑대공을 무찌른 광휘의 기사님이 아닌가?
“내 이름은……!”
미나스는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그리고 앞으로 자신이 평생토록 쓰게 될 이름을 외치려 했다.
그러다 외치기 직전, 문득 솔라를 보았다.
그의 금색 눈동자가 미나스를 응시하며 작게 고개를 끄덕인다. 옆에 선 루나시르네를 보았다. 그녀는 아직도 불만인 듯 입을 삐쭉 내밀었다.
로뮤는 인간들의 정치 놀음에 관심 없다는 투로 무표정하니 서 있었고, 리리아는 그저 평화롭게 미소 지을 뿐이다.
그렇게 자신의 뒤에 선 이들을 보고 있는데,
‘?!’
미나스의 머릿속에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과연 이게 맞나?’
찰나의 순간, 그의 금색 눈동자가 흔들렸다.
‘어쩌면…… 이건 함정일지도 몰라!’
쿠웅!
갑자기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납득이 되지 않는다. 이해도 안 된다. 그랬기에 더욱 의심하고 조심스러워야 했다.
‘1황녀는…… 정말로 자유가 더 좋아서 포기한 걸까?’
자신과 똑같이 황위를 제안받았던 루나의 반응이 떠올랐다. 처음엔 기뻐하다가 얼마 후 심각해졌던 그녀의 모습에서 강렬한 힌트를 얻었다.
‘이건…… 시험이다!’
그리하여 찰나의 순간, 미나스트림은 어떤 결론에 도달했다.
이 모든 건, 내 야심과 충심을 시험해 보려는 게 분명하다!
‘멍청한 놈! 이걸 이제야 눈치채다니!’
미나스는 나름의 추론을 냈고 연쇄 작용으로 그의 생존 본능이 비상벨을 울렸다.
“내 이름은 솔…… 흡!”
방금까지 자신의 이름을 솔라시우스라 말하려 했던 그의 혀가 확 꺾였다.
“내 이름은…… 미나스트림!! 미나스트림 디 미테일 룬 마하! 전대 황제 미테일의 사생아다.”
그는 진실을 말하기로 결심했다.
“그리고 여기 계시는 광휘의 기사 로안 샬루트가 바로! 진짜 1황자 솔라시우스이시니!”
미나스는 오른편에 선 솔라를 모두에게 가리켰다.
“……??”
갑작스러운 미나스의 트롤 짓에 솔라는 어안이 벙벙한 얼굴을 했다.
“이분이 곧 마하의 적통이자 미테일의 적장자이며, 나와 너희가 충성을 바쳐야 할 자다!”
이복 형님을 향한 동생의 얼굴에는 ‘나 잘했죠?’라는 듯한 메시지가 진하게 깔려 있었다.
“이 모든 것은 한 치도 틀림없는 진실이니, 내 영혼의 신성을 걸고 심장의 마나를 바쳐 맹세한다!”
심지어 예정에도 없던 신성과 마나의 맹세까지 해 버렸다.
“형님…… 지금까지 감히 당신을 사칭한 이 죄 많은 아우를 용서하여 주십시오!”
이 정도는 되어야 유혹에 흔들렸던 과오를 수습할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덕분에 이제는 되돌릴 수도 없는 상황이 되었다.
이에, 인간들은 ‘그럼 그렇지’라는 듯한 반응으로 미나스가 소개한 솔라시우스를 경건히 바라보았고.
‘이걸 이렇게 꺾는다고?!’
루나시르네는 미나스의 행동이 의외라는 듯 눈을 크게 뜨고서 고개를 갸웃했다. 과연 솔라 오라버니가 이걸 어떻게 받아들일지 궁금해하면서.
‘역시 인간은 재밌어.’
무심한 반응이었던 로뮤 또한 지금만큼은 흥미 가득한 표정을 지었다.
“이거 참…….”
반면, 리리아는 곤란하다는 반응을 보였다.
“…….”
당사자인 솔라는 표정을 잔뜩 구겼다.
‘형님의 표정이 굳은 걸로 봐선…… 나를 죽일 명분이 사라진 것이 마음에 들지 않나 보군.’
황당함에 일그러진 솔라의 표정을 미나스는 다르게 해석했다.
‘역시! 이게 정답이었어.’
그는 살았다는(?) 안도와 함께, 이미 틀어져 버린 솔라와의 관계가 걱정되었다.
‘비록 지금은 형님께 찍혔지만, 이제부터라도 내 충심을 증명하면 살려는 주실 거야. 어쩌면 괜찮은 영지 하나 정도는 주시겠지.’
형님의 광휘에 묻어 가자! 미나스는 어떻게든 솔라에게 잘 보이기 위해 최선을 다하기로 다짐했다.
“제국의 적통이여, 서약의 주인이여, 부디 제국을 구원하소서. 부디 황위에 앉으소서.”
그는 솔라를 향해 무릎을 꿇으며 외쳤다.
“제국의 적통이여, 부디 제국을 구원하소서.”
“서약의 주인이여, 부디 황위에 앉으소서.”
이는 도미노처럼 귀족, 기사, 마법사, 병사들에게까지 퍼졌다.
* * *
암흑대공이 참전했다. 악황후 옥타나도 거기에 있다. 수인족이 대거 참전했고 수인족 왕 가오이도 그중에 있다.
제국에서 탈출한 유민과 저항군이 요정들과 합류했지만, 압도적으로 불리하다.
요정 숲에서 각종 소식들이 점점 들려오고 있었다.
그 소식들은 대체로 좋지 못했다. 루시푸르네는 불안해졌다.
‘솔라가 무사해야 할 텐데…….’
그러고 보니 막판에 악황제와 악황후가 나타나지 않은 게 걸렸다. 둘을 세계수가 막았다고 마냥 추정할 수도 없었다. 요정 숲에서 들리는 소식을 보니 아닌 것 같았기 때문이다.
악황제, 악황후, 암흑대공 그리고 파괴왕, 이 모두가 요정 숲에 있다고 한다. 아무리 솔라라고 해도 이건 위험하다.
당장 윈테이라의 냉기가 어떨지도 걱정이다.
그녀는 급히 침대 옆에 놓인 마검과 연결된 보주를 살폈다.
금이 가고 파손되었지만, 전혀 작동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동기화는 힘들더라도 윈테이라의 상태를 간략히 볼 수는 있을 거다.
그렇게 얼마간 보주와 씨름을 한 루시는 마검 윈테이라의 냉기를 볼 수 있었다.
‘맙소사! 윈테이라의 냉기가 바닥이야!’
남은 냉기를 본 루시는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분명 세계수 속에서 설원의 폭주를 마시며 어느 때보다 가득 찼던 냉기였다. 그랬던 냉기가 바닥을 보이다니. 설마 했던 불길함이 현실이 되어 다가온다.
‘충전을…… 당장 가서 충전해야 해!’
마법 통신으로 오는 소식을 기다릴 여유조차 없었다.
‘하지만 어떻게? 괜히 내가 갔다가…… 엉뚱한 이들이 설원에 휘말리면……?’
루시는 발을 동동 굴렀다. 이미 마탑의 마법사들에겐 하루에도 몇 번씩 요정 숲으로 마법 통신을 보내라 얘기해 놓은 상황.
그러나 요정 숲에서는 얼마나 상황이 위태로운지 응답 한 번 없었다.
‘선전관 통해서 몇 날 몇 시에 혼자 있으라 할까? 하지만 어느 세월에? 심지어 그곳은 전쟁 중이라고!’
그녀는 방 안을 서성이며 초조하게 고민했다. 한쪽 손으로 습관적으로 손목의 팔찌를 만지작거렸다.
우우웅.
나뭇잎으로 된 녹색 팔찌가 은은한 빛을 내는 것 같았지만 고민에 빠진 루시는 눈치채지 못했다.
어느새 그녀는 공간 이동 마법을 새긴 마법진 위에서 서성거리고 있었다.
딱히 그녀가 의도해서 서게 된 것은 아니었다.
그저 초조하게 고민을 하며 방 안을 서성이다 보니, 자신도 모르게 그 마법진 위에 섰을 뿐이다.
지금 왕궁 밖에서는 데스모 공작령과의 내전이 막 시작되었다.
그녀의 침실로 날아오는 급보 중에는 요정 숲뿐만 아니라 데스모 공작령에서의 소식도 있었다.
그럼에도 여왕의 신경은 저 멀리 요정 숲으로 유독 쏠렸다.
그리고 그런 루시푸르네의 집요한 갈망은 전혀 예기치 못한 일을 만들어 냈다.
우우우웅.
루시가 무의식적으로 선 공간 이동 마법진이 빛나기 시작한 것이다. 손목의 세계수 팔찌도 공명이라도 하듯 같이 발광하면서 울었다.
“?!”
공간 이동 마법진이 갑자기 빛나기 시작하자, 루시가 당황해 외쳤다.
“뭐, 뭐야?!”
맹세컨대 그녀는 어떤 짓도 하지 않았다. 애초에 좌표도 설정하지 않았다.
위우우우웅.
“잠깐……! 이게 무슨……?”
피슉.
마법진은 그렇게 눈부시게 빛나더니, 루시의 말을 다 듣지도 않고서 그녀를 삼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