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03화
#103.
비슷한 시각, 세계수가 위치한 정원.
거대한 전투가 끝나고, 요정 숲과 수목 도시는 재건이 한창이었다.
승전 소식은 장로들의 검토가 끝난 일주일 뒤면 마법 통신으로 루한에 전해질 것이다. 일주일 후라니. 장로들의 일처리치고는 아주 혁신적인 속도였다.
“마음 같아선 지금 당장 응답해 주고 싶은데…….”
리리아는 루한에서 온 마법 통신을 보며 미안한 표정을 지었다. 전투 시작부터 전투가 끝난 지금까지 루한과 연결된 통신구는 잠시도 쉬지 않고 빛을 냈었다.
장로들이 이례적으로 아주 빠르게 처리한다고 했지만, 짧은 시간을 사는 인간에겐 이조차 길고 답답할 것이다.
‘하지만 강제할 순 없지. 너무 급격히 바뀌는 건 좋지 않으니까.’
지구식 표현을 빌리자면, 세계수와 리리아는 엑셀이고 엘프 장로들은 브레이크다. 둘 다 필수적으로 필요했다. 특히나 긴 세월을 살고 정신적으로 예민한 엘프들에겐 더더욱.
그랬기에 리리아는 아주 급하고 중요한 부분이 아니면 기존 엘프들의 문화를 존중했다. 장로들의 권한과 권위 또한 무시하지 않았다.
‘루시푸르네가 걱정이 많은 모양이긴 하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장수종들의 사정. 저 쉴 새도 없이 빛나는 마법 통신이 누구에게서 온 것인지 잘 아는 리리아는 그저 미안하고 안타까울 뿐이다.
그렇게 리리아가 미안한 눈으로 마법 통신구를 보고 있을 때였다.
스스스슷.
갑자기 세계수의 나뭇잎 떠는 소리가 머리 위에서 들렸다.
“……??”
이에 리리아가 고개를 들어 세계수를 보았다.
스스스슷.
황금색 세계수가 나뭇가지를 흔들며 리리아에게 뭐라 말하듯 메시지를 전한다.
“네에?!”
세계수의 메시지를 해석한 리리아는 고운 미간을 찌푸렸다.
그만큼 세계수가 그녀에게 전한 말은 생각지도 못한 내용을 담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니이~ 우리가 무슨 중매쟁이도 아니고…….”
그녀는 고개를 절레 젓다가, 결국 정령을 시켜 수목 도시에 있을 솔라시우스를 불렀다.
* * *
재건 중인 수목 도시 안에서, 솔라시우스는 요정 숲을 떠날 준비를 하고 있었다.
루나와 쥴리아 그리고 로뮤는 보상을 챙기려 잠시 자리를 비운 상황. 아마 꽤 오랫동안 오지 않을 것 같았다.
리리아가 요정 숲의 보고를 일행에게 개방하면서 가져가고 싶은 게 있으면 얼마든지 가져가도 좋다고 통 크게 말했기 때문이다.
언젠간 지구로 가야 하는 솔라는 요정들의 보물을 챙길 이유를 못 느꼈기에 따로 남아서 떠날 준비를 할 뿐이다.
대신, 자신의 아공간 인벤토리를 루나에게 주면서 자신의 몫까지 챙기라고 지시했다.
보고를 무제한으로 개방하겠다는 여왕의 결정을 의외로 장로들부터 엘프들은 반대하지 않았다.
은혜를 입었으면 갚아야 한다. 빚지는 것을 극도로 싫어하는 엘프들의 모토였고, 그들 또한 솔라와 일행들의 활약을 인정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전처럼 매몰차게 대하지도 않았다.
하지만 그런다고 루나와 쥴리아, 로뮤의 감정이 사그라지는 것은 아니다. 애초에 요정들의 태도도 매몰차지 않을 뿐, 여전히 친근함과는 거리가 멀었다.
덕분에 일행은 미련 없이 빠르게 떠날 준비를 했다.
특히나 최근엔 더욱 서두르게 되었다.
솔라가 보물 창고 구경도 마다하고 따로 먼저 짐을 챙기고 시즈와 맨카의 상태를 살피는 것도 다 이유가 있었다.
리리아가 전해 준 소식에 따르면 루한의 상황이 좋지 않았기 때문이다. 데스모 공작령에서 반란을 일으켜 내전이 막 발발했고, 무엇보다 문라이트 후작령에서 이변이 생겼다고 들었다.
그랬기에, 서둘러 요정 숲 밖으로 나가서 이런저런 지시도 내려야 했다.
못난 이복 동생에게 루한의 변경백으로 진군할 것을 명령할 것이다.
저항군과 함께 온 유민들도 이 행렬에 포함이다. 루한의 변경백은 언제나 사람이 부족하니까. 어쩌면 데스모 공작령을 징벌하는 데 지원군으로 쓸 수도 있겠지.
그렇게 서둘러 떠날 준비를 하고 있는데, 리리아가 보낸 것으로 보이는 바람의 정령이 솔라를 찾아왔다.
휘이이잉.
솔라는 바람의 정령이 전해 주는 리리아의 메시지를 느꼈다.
“세계수 정원으로? 혼자서?”
갑작스러운 리리아의 부름을 의아하게 여기며, 그는 세계수 정원으로 향했다.
반드시 혼자서만 오라는 그녀의 말이 수상했지만 일단은 혼자 도착했다.
세계수 정원에 도착하자 솔라는 주위를 둘러보며 자신을 부른 이를 찾았다.
“리리아? 무슨 일이지?”
이제는 존대보다 반말이 편하다.
“……?”
하지만 정원에는 아무도 없었다.
저 중심부에 커다란 황금색 나무만이 은은한 빛을 내고 있을 뿐이다.
우우우우웅.
그렇게 멀뚱히 두리번거리고 있는데, 세계수 정원 구석에서 갑자기 마력이 감지됐다.
‘공간 이동?!’
솔라는 마력과 함께 그려진 마법진을 보곤 마법의 정체를 파악했다.
자동으로 회색 마검 제노사이드를 뽑았다.
‘냉기가 거의 없는데…….’
한편으론 침을 삼켰다. 지금 솔라의 상태는 아슬아슬했다. 마검 루시의 냉기가 바닥이었기 때문이다.
부디 저 마법진에서 등장할 이가 적이 아니길 바랄 뿐이다.
“……?”
그렇게 여차하면 태양 이능을 발동할 준비를 한 솔라는 시간이 지날수록 이상함을 느꼈다.
눈부신 공간 이동의 빛이 점점 사라지기 시작했는데, 빛이 사라질수록 시원함을 느꼈기 때문이다.
시간이 흐를수록 시원함은 더욱 강해졌다.
이제는 슬슬 서늘함까지 느껴질 정도로.
‘냉기가 채워지고 있다?’
동시에 허리춤의 푸른색 마검에 냉기가 충전되기 시작했다.
파스스슷, 파드득.
마법진 위의 눈부신 빛이 서서히 옅어지기 시작하고, 사방 10미터의 풀과 꽃들이 급속도로 얼어붙기 시작했다.
세계수는 멀리 떨어져 있어서 타격이 없었다.
파아앗!
마침내 빛이 흩어졌다. 마법진 중심부에 한 여인이 모습을 드러냈다.
청은발에 사파이어 눈동자를 한 여인. 설녀를 연상시키는 백설 같은 피부. 요정 여왕 리리아와 맞먹는 아름다운 기품과 외모.
그녀는 세계수 정원에 오자마자 크게 당황한 반응을 보였다.
그러다가 저 앞에 솔라가 서 있는 것을 보고는 몸이 굳어 버렸다. 여인의 얼굴에는 경악, 반가움, 흥분, 걱정 등이 무지갯빛처럼 반짝였다.
“……!”
솔라는 그 여인을 통해 누군가를 떠올렸다.
‘예나체리나?’
눈앞의 여인은 세계수 속에서 보았던 그녀와 매우 닮았다.
‘하지만 아니야.’
그러나 자세히 보면 예나가 아니라는 것을 바로 알 수 있었다.
눈앞의 여인은 예나와 다른 점이 곳곳에 있었다.
애초에 게임에서 일러스트로도 지겹도록 봤었기에 여인의 정체를 눈치챌 수 있었다.
그녀의 정체는 딱 하나다.
“루시……푸르네……?”
솔라는 자신을 멍하니 응시 중인 여인의 이름을 불렀고.
“솔라시우스……!”
루시푸르네 또한 떨리는 사파이어 눈동자로 그의 이름을 불렀다.
저 목소리, 어찌 모를까?
게임을 통해 지겹도록 들었던 목소리다.
“…….”
“…….”
놀라운 만남이었지만, 둘의 입은 좀처럼 열리지 않았다.
잠깐의 침묵이 두 사람 사이에 불었다. 설원의 저주는 어찌나 지독한지, 세계수 바로 앞에서도 여전하다. 세계수의 정원 일부가 설원에 잠겨 버렸다.
뭐부터 말해야 할까?
어떤 얘기를 할 수 있을까?
무엇보다 여기엔 얼마나 있을 수 있을까?
온갖 고민들이 루시의 머릿속을 헤집었다.
저벅, 저벅, 저벅.
그리고 그런 루시의 고민을 저리 치우기라도 하듯, 눈앞의 남자가 그녀를 향해 걸어오기 시작했다.
“잠깐!”
루시는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솔라를 보며 어찌할 바 몰랐다.
그토록 바라던 상황인데 믿어지지 않았다.
‘지금 솔라, 태양샘 반지를 안 꼈어!’
무엇보다 솔라의 상태가 걱정되었다. 지금 솔라는 태양샘 반지를 끼지 않았다.
꽈드드득, 꽈악.
실제로 자신에게 다가오는 솔라의 옷깃이 일부 얼어붙는 게 보였다.
“……!”
이를 본 루시는 심장이 멈출 것 같은 공포를 느꼈다.
7미터, 5미터.
그가 점점 가까이 오고, 마침내 3미터.
회귀 전의 솔라가 가장 가까이 왔던 거리까지 좁혀졌다.
그럼에도 솔라는 발을 멈추지 않았다.
그의 옷과 머리카락 또한 차갑게 얼어붙기 시작했다.
“!!”
이를 본 루시는 결국 참지 못하고 눈을 꾹 감았다.
“오지 마!!”
그리곤 다급히 외쳤다.
2미터 거리를 두고 루시의 외침을 들은 솔라는 걸음을 멈췄다.
청은발의 눈부신 미녀의 단호한 목소리. 잔뜩 겁을 먹은 거칠게 떨리는 어조. 질끈 감은 두 눈.
‘사방이 설원이군. 옷도 얼었고.’
그는 루시가 왜 저러는지 이해했다.
공기 중에 떠다니던 습기는 진눈깨비가 되어 허공을 두둥실 떠다니다 천천히 가라앉는다.
솔라는 잠시 발을 멈추곤 눈을 꾹 감은 여인을 관찰했다.
‘그런데 어떻게 여기에?’
의문이다. 순백궁에 있어야 할 여자다. 설원의 저주로 그 어디도 자유롭게 가지 못하는 여자다. 그런데 이 먼 곳까지 어떻게 왔을까? (볼카에서 솔라는 의식을 잃었었기 때문에 루시가 왔었다는 사실을 몰랐다.)
‘마법.’
일단 마법일 거다. 루시는 대마녀니까. 하지만 이것만으론 설명되지 않는다. 타이밍, 좌표 등등, 공간 이동 마법은 까다롭다.
당장 그만 해도 태양샘 반지와 지구에서 온 인격 때문에 공간 이동을 할 수 없었다.
‘날 부른 게 이 때문인가?’
이어서 저 멀리 세계수를 보았다.
스스스슷.
세계수가 잎사귀를 흔들며 그런 솔라에게 인사한다.
대충 어떻게 된 건지 알 것 같았다.
그는 다시 시선을 돌려 눈앞의 가녀린 설원의 여인을 보았다.
2미터의 거리. 이제는 추위마저 느끼는 거리.
순간 반지를 낄까 생각했지만.
‘아니.’
솔라는 끝내 태양샘 반지를 끼지 않았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반지의 힘 없이 그녀에게 다가가 보고 싶었다.
저벅, 저벅, 저벅.
그는 홀린 사람처럼 발걸음을 옮겼다.
그의 발이 차갑게 굳은 설원에 자국을 남겼다.
“오지 마, 제발……! 오면 안 돼!”
다시 발을 움직이는 솔라를 향해 루시가 애원하듯 소리친다.
저벅, 저벅, 저벅.
솔라는 그 말을 무시했다.
휘위이이잉!!
2미터에 불과한 거리지만 루시 주위에서 부는 강한 바람이 그의 접근을 저지하려 든다.
우우웅.
허리춤의 윈테이라가 애처롭게 운다. 허리춤의 마검은 이미 냉기를 가득 머금은 상태.
저벅, 저벅, 저벅.
솔라의 얼굴 전체에 서리가 가면처럼 두껍게 쌓였다. 강한 냉풍에 움직임도 느려졌다.
“솔라! 반지, 반지라도 껴!”
루시는 솔라를 향해 애원하듯 외쳤고.
“괜찮아.”
솔라는 괜한 오기가 생겨서 태양샘 반지를 끼지 않았다.
파아아악.
대신 마나를 끌어 올렸다. 태양 이능으로 스킬을 쓰진 않았다. 그저 몸속의 모든 빛과 열의 마나를 한가득 끌어 올렸을 뿐이다.
그러자 두 사람 사이를 막던 설원의 질풍이 서서히 송풍으로 바뀌기 시작했다.
루시는 이번에 처음으로 실제로 그를 보는 것. 회귀 후 처음으로 가까이서 육안으로 보는 것은 좋다.
그러나 이렇게 바보처럼 가까이 접근하는 것은 좋지 않다. 적어도 태양샘 반지라도 꼈다면 지금처럼 걱정되진 않았을 텐데!
도대체 무슨 고집인지, 눈앞의 남자는 반지를 끼지 않았다.
루시는 어지러움까지 느끼며 솔라가 다가오는 것을 보았다.
파아아앗.
그가 2미터를 막 넘었을 때, 처음으로 태양 이능을 발현했다.
그러자 자신을 감싼 설원의 저주가 눈에 띄게 약해지는 것을 느꼈다. 솔라와 루시의 사이를 가로막던 결계 같은 바람이 송풍처럼 부드러워졌다.
그리하여, 2미터, 1미터, 30센티미터, 결국엔 15센티미터까지.
“아아……!”
솔라는 어느덧 루시의 코앞에 섰다.
서로의 숨소리마저 바로 느낄 수 있는 거리.
루시는 떨리는 눈동자로 솔라를 보았다.
그도 따듯한 눈동자로 그녀를 보았다.
스윽.
솔라는 불현듯 손을 들더니 루시의 볼에 손을 댔다.
탁.
그의 손이 백설에 닿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