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04화
#104.
루시는 설원의 저주를 받은 이후 처음으로 얼지 않은 다른 이의 살결을 느낄 수 있었다.
‘따듯해.’
그 손길에서 루시는 따듯함을 느꼈다. 어찌나 포근한지 영원히 이대로 있고 싶었다.
위우우우웅.
하지만 아무리 세계수라도 영원히까지는 무리인지, 다시 한번 공간 이동 마법진이 빛을 내기 시작한다.
파아앗.
“?!”
무형의 힘에 의해 솔라의 몸이 마법진 밖으로 밀려났다.
“솔라시우스!”
루시는 안타까운 얼굴로 솔라를 불렀다. 하지만 무모하게 마법진 밖으로 나가진 않았다. 대신 최대한 큰 목소리로 메시지를 전하기로 했다.
“한동안 윈테이라에는 못 들어갈 거 같아!”
하고 싶은 말이 너무 많았지만 당장 이런 얘기밖에 할 수 없는 것이 아쉬웠다.
그래, 나머지 얘기는 왕궁에서 하자!
지금보다 더 오래, 서로의 손과 얼굴을 쓰다듬으면서.
“일이 끝나면…… 꼭! 왕궁으로 와 줘! 그때와는 다르게, 웃으면서 그 누구보다 너를 환영할 테니!”
작별 인사를 하는 루시의 얼굴에 애틋한 미소가 그려졌다.
파아앗.
동시에 눈부신 빛이 루시를 삼켰다.
* * *
다시 순백궁. 여왕의 침실.
공간 이동 마법진이 침실 바닥에서 빛을 뿜었고, 루시가 모습을 드러냈다.
“허억…… 허억…….”
잠깐 동안 있었던 일이지만 워낙 강렬하고 충격적이라, 그녀는 숨을 거칠게 헐떡일 수밖에 없었다.
뭐지? 어떻게?
믿어지지 않는 일, 얼떨떨한 의문과 별개로, 혼란과 황홀함이 동시에 후폭풍처럼 밀려온다.
손을 멍하니 들어 볼에다 가져다 댄다.
솔라가 주었던 따듯함과 포근함이 여운으로 남아 있다.
그 여운은 그녀의 볼을 분칠하듯 덮었다.
루시푸르네는 새로 추가된 또 하나의 추억과 작은 평화를 되새기며 침실 안을 살폈다.
‘설원의 저주도, 설원의 가호도 멀쩡해.’
제일 먼저 살핀 것은 설원의 가호였다.
그녀가 순백궁을 잠시라도 비우면 흔들리는 것이 설원의 가호였다. 하지만 이번엔 멀쩡했다. 설원의 가호를 완전히 벗어난 요정 숲 중심부에 갔다 왔음에도 말이다.
‘세계수 덕분일까?’
그녀는 방금의 공간 이동을 세계수의 짓으로 추측했다.
‘어쨌든 다행이야.’
설원의 가호가 멀쩡하고 설원의 저주가 심해지지 않은 것을 확인한 루시는 크게 안도했다.
그리하여 편한 마음으로 눈을 감고는 아까의 기억을 마음껏 되새겼다.
육안으로 처음 본 솔라의 모습, 솔라의 목소리 그리고 솔라의 손길.
하지만 그녀의 작은 평화는 오래가지 못했다.
똑똑똑!
“폐하, 저 베네사입니다!”
시녀장의 다급한 노크 소리가 침실 안을 울렸기 때문이다.
“무슨 일이냐!”
“데스모 공작령에서 급보입니다!”
“급보?!”
루시는 강렬한 불길함을 느꼈다.
“데스모의 역도들을 토벌하러 간 징벌군이…… 패배했다고 합니다.”
언제나 불길한 예감은 틀리지 않았다.
* * *
데스모 공작령의 공작성.
한 여인이 공작성에서 가장 높은 탑에 올랐다.
탑의 창문으로 바람이 들어와 세게 불었다.
고층의 강한 바람이 여인이 쓴 깊은 후드를 거칠게 끌어당기다가 마침내 벗긴다.
검은 머리카락에 붉은 눈동자, 뾰족한 귀가 모습을 드러낸다.
한때는 세계수의 저주로 회색 머리카락을 하고 요정의 귀를 잃었던 존재, 오랜 세월 다양한 모습으로 대륙에 혼란을 파종했던 악녀, 악황후 옥타나이자, 루한의 재상이기도 한 아리아 데스모가 그곳에 있었다.
“…….”
그녀는 무표정한 붉은 눈으로 탑 창가로 고개를 내밀었다. 작고 넓게 펼쳐진 데스모 공작성을 내려다보았다.
구으으으으.
구오오오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인간이었던 데스모의 사람들이 이지를 잃고 낮은 괴성을 흘리며 서 있었다.
요정 숲을 침공했던 수인족 군단과 비슷한 상태다. 굳이 물어보지 않아도 옥타나의 주술 때문인 것이 분명하다.
좀 더 시야를 멀리하면 공작령 성채 바로 아래에 철창에 갇혀 있는 이들이 보였다. 몇몇은 돌로 만든 제단에 거꾸로 누워 피를 흘리고 있었다. 마치 인신 공양을 위한 제물처럼.
루한의 여왕이 자신을 징벌하기 위해 보낸 토벌군이었다.
철창 안에는 아직 제물로 올리지 않은 루카스와 하이마가 갇혀 있었다.
씨익.
이를 본 옥타나는 진한 미소를 지었다.
‘설원의 가호란 본래 세계수의 가호를 참고해 만든 결계.’
그녀는 위험을 감수하면서까지 본신으로 루한에 왔다.
‘하이엘프이자, 에이션트 엘프였던 내 영혼을…… 그 빌어먹을 년이 가지고 놀다 만들었었지.’
평소처럼 인형술을 쓰지 않고 본신으로 온 데에는 이유가 있었다.
‘마계에서, 마침내 나는 세계수의 저주를 이겨 냈다. 설원의 가호 안에서 자유로울 수 있게 되었다는 말이지.’
자신이 직접 나서야 설원의 가호 속에서 싸울 수 있을 테니까.
‘루시푸르네, 그 아이는 올 거야. 암, 그렇고말고.’
그래서 악황제도, 둠도, 일부러 부르지 않았다.
여긴 오직 자신만의 무대여야 하니까.
‘역겨운 베아트리체의 대를 마침내 끊어 버릴 수 있어!’
직접 이 손으로 기나긴 복수를 완성하고 싶었으니까.
“세계수…… 마하…… 그리고 베아트리체…… 요정 숲, 제국, 루한!”
그녀는 이를 갈면서 자신의 원수들을 읊었다. 이들 중 둘은 이미 죽고 없었다. 하지만 둘의 흔적은 여전히 대륙에 남아 찬란히 빛났다.
옥타나는 그걸 도저히 볼 수 없었다.
그래서 오랜 세월 힘을 기르며 준비하고 또 준비했다.
그 과실이 마침내 피어나기 시작했다.
제국은 충분히 몰락했다. 제국을 향한 복수는 성공했다.
요정 숲은 아쉬웠다. 큰 타격을 준 것은 맞으나, 세계수를 불사르지 못했다. 무엇보다 세계수가 가장 소중히 여기는 묘목을 빼앗지 못했다.
하지만 괜찮다. 루한에서의 일을 마치고 힘을 모으고 모아서 다시 침공하면 된다. 완성된 묘목을 품은 세계수를 불태우는 것이 어쩌면 더 짜릿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니 지금은 그저 루한을 향한 복수를 하자.
“지금에 집중해야지. 안 그래, 아낙시아?”
그녀는 스스로를 향해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파아아앗.
그렇게 중얼거리고 있는데, 공작성의 정문 쪽에서 눈부신 빛이 일었다.
공간 이동 마법진이 땅 위에서 빛났고, 그 안에서 한 여인이 빛을 열고 모습을 드러냈다.
막 공간 이동을 완료한 루시푸르네의 주위에서 설원의 저주가 일었다. 그녀에게 접근하려던 데스모의 군사들이 순식간에 얼어 부서졌다.
“…….”
옥타나는 중얼거리던 것도 잊고 멍하니 여인을 응시했다.
청은발에 사파이어 눈동자, 백설처럼 하얀 피부, 그녀가 세상에서 가장 증오하는 혈통.
“특히나 루시푸르네, 너는 유독 닮았어. 루한의 첫 번째 여왕, 베아트리체와.”
베아트리체의 후예들은 언제나 똑같은 특징을 보였고, 루시푸르네는 옥타나가 본 역대 여왕 중 가장 베아트리체와 닮았다.
마치 환생이라도 한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그래서 더욱 증오가 치밀어 오른다. 당장이라도 설원의 저주를 뚫고 여왕의 목을 비틀고 싶어 미칠 것만 같았다.
오늘따라 루시푸르네에게서 베아트리체의 냄새가 유독 강하게 풍겨 왔다.
모처럼 먼 옛날의 기억이 희미하게 떠올랐다.
* * *
미움받고 싶지 않아, 버림받고 싶지 않아, 그래서 헌신했다. 그래서 순종했다.
그랬기에 배신당했다.
아낙시아는 태어나서부터 느꼈다. 자신을 향한 시선이 곱지 않음을.
그래서 갓난아기 때부터 숨 쉬듯 눈치를 보는 습관을 지니게 되었다.
“세계수의 사생아!”
“어떻게 세계수에게서 에이션트가…….”
“여왕께서는 무슨 생각이신지 모르겠군.”
동족들의 차갑고 경멸 섞인 시선에도 애써 웃어 보였다.
밤마다 세계수 그루터기에 엎드려 눈물을 흘리는 한이 있더라도.
거짓말을 할 수 있지만 결코 하지 않았다. 누구보다 진실되게 살려고 노력했다.
“가까이 오지 말아라.”
“너로 인해 내 영혼이 물들 것이 두렵구나.”
“미안하지만 네 영혼의 냄새는 우리에게 위험하다.”
그렇게 발버둥 쳤음에도, 엘프들은 그녀를 경계했고 멸시했다.
어느 날부터 숲 바깥이 소란스러웠다.
속세와 거대한 장벽을 세운 수목 도시에도 단명종들의 소식이 바람을 타고 들려왔다.
흑마법사들이 난리를 일으켜 대륙이 초토화되었다고 한다. 인간 왕국 중 절반 이상이 멸망했다고 한다.
처음으로 인간들이 하나가 되어 힘을 합쳤다고 전해졌다. 수인족도 드워프도 인간들이 내건 깃발에 합류했다고 한다.
요정 숲도 마냥 이를 외면할 수 없었다.
그래서 그들은 결정했다. 아낙시아를 인간들에게 보내기로. 잠깐의 망설임도 없이.
수개월에서 수년씩이나 걸리던 장로회의 회의도 이때만큼은 일주일도 안 돼 결론이 났다.
아낙시아는 에이션트지만 하이엘프다. 흑발에 붉은 눈동자를 한 에이션트 엘프에 대한 처우는 요정 숲 내에서만의 비밀. 세상에 알려지지 않았다.
말단의 엘프부터 하이엘프까지 에이션트의 존재에 대해서는 언급 자체를 피했다. 거짓말을 하지 못하니 철저한 침묵으로 숨긴 것이다.
한마디로 생색내기엔 아주 좋았다.
결국 아낙시아는 팔리듯 요정 숲 밖으로 나가야만 했다.
그렇게 빌었는데, 그렇게 순종했는데, 그토록 진심으로 모두를 대했는데.
제물로 팔려 가듯, 호위나 수행원 하나 없이 요정 숲으로 나온 아낙시아는 막막했다.
평생을 수목 도시에서 커 온 그녀에게 단명종의 세계는 낯설었다.
“저기 봐! 저분이 요정 숲에서 온 엘프래!”
“저렇게 아름다운 사람이 존재하다니……. 천사, 천계에서 내려온 천사님이 분명해!”
“요정님! 저희에게 축복을 내려 주실 수 있겠습니까?”
인간들은 아낙시아를 보면서 경외 어린 시선을 보였다.
물론 더러운 욕망의 시선도 있었지만, 하이엘프가 내뿜는 정화의 기운은 그런 저급한 욕망마저 가라앉게 만들었다.
“그것도 그냥 엘프가 아닌, 하이엘프라니……. 요정 숲에서 엄청난 결정을 했군.”
“오만한 귀쟁이 놈들이 어쩐 일이지?”
“그나저나 엘프 중에 흑발에 붉은 눈을 한 엘프가 있었나?”
“드물지만 아주 없는 건 아니라고 하더군. 하지만 하이엘프 중에서는 처음 봐.”
“뭐, 애초에 하이엘프 자체를 처음 보는 거니까.”
경외 어린 반응을 보이는 인간들과 달리, 고대부터 요정들과 사이가 좋지 않던 수인족과 드워프는 미간을 구기며 의심하고 경계했다.
어찌 되었든 과도한 관심이 아낙시아에게 집중되었고, 그녀는 마치 동물원 원숭이라도 된 기분을 느꼈다.
“축복을 내리지요. 다들 여기로 모여 주세요.”
하지만 아낙시아는 당혹스러울지언정 괴롭거나 슬프지는 않았다.
“이건…… 저에게 주는 건가요? 고마워요. 잘 먹을게요.”
적어도 차갑고 멸시 가득했던 시선은 아니었으니까. 오히려 사랑과 호의, 경외로 가득한 시선과 감정의 향연은 아낙시아를 설레게 했다.
“이 마법 술식은 비효율적이네요. 제가 좀 더 쉬운 술식을 알려 드릴게요.”
태어나서 처음 받는 호의에, 아낙시아는 진심으로 감사하면서 마찬가지로 호의로 보답했다.
“아낙시아 님을 위해!”
“빛과 숲의 동맹이여, 영원하라!”
어느덧 그녀는 인류동맹에 없어서는 안 될 성녀가 되어 있었다.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정신없이 하루를 보낸 초저녁이었다.
그날은 아낙시아에게 운명과도 같았던 날이었다.
“처음 뵙겠습니다, 하이엘프 아낙시아. 지금부터 당신의 호위를 맡게 된 기사, 룬 마하라고 합니다.”
그녀에게 한 젊은 기사가 나타났다.
금발 금안을 한 방랑 기사, 몸에서 광휘가 오로라처럼 피어나는 특이한 인간.
“룬 마하 경, 당신의 얘기는 많이 들었어요. 저를 호위하기 위해 오신다는 소식도 듣긴 했는데 이렇게 빨리 오실 줄은…….”
실력 또한 뛰어나서 당시 대륙에서 그와 견줄 자가 없었지.
“그, 잘 부탁드려요. 하이엘프 아낙시아라고 해요.”
마하와의 첫 만남 당시, 아낙시아는 이상하게 가슴이 뛰는 것을 느꼈었다. 마치 오직 이날을 위해 살아온 것만 같았다.
그녀는 애써 붉어진 볼을 노을빛으로 가리며 마하와 악수를 나눴다. 그렇게 잡은 남자의 손은 크고 거칠었지만 따듯하고 포근했다. 놓기 싫을 정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