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05화
#105.
시간이 흘렀다. 단명종에게는 제법 긴 시간이, 장수종에게는 좀 지났나, 싶을 시간이.
숲 밖의 세상은 처음 아낙시아가 우려했던 것과 달리 오히려 좋았다.
요정 숲보다 더 좋았다. 멸시와 경계 어린 시선은 없었고, 모두가 그녀를 경외하고 우러러보았다.
그녀는 자신이 알고 있는 요정의 지식을 전수해 주었고 종종 전장의 최선두에도 함께 섰다. 그녀가 전장에 모습을 드러내면 인간은 물론 드워프와 수인족까지 모두가 존경이 담긴 눈으로 그녀를 보았다.
절망으로 신음하는 대륙에서 그녀는 처음으로 행복을 느꼈다.
그리고 무엇보다 진심으로 사랑하는 사람이 생겼다.
“사랑하오, 아낙시아. 내 심장을 그대에게 바치겠소.”
“저도요, 마하. 제 영혼을 당신에게 바칠게요!”
“내가 당신을 지켜 주겠소.”
“저도 당신을 지켜 줄 거예요.”
마하는 아낙시아를 호위하면서, 아낙시아는 마하의 호위를 받으면서 둘은 자연스레 가까워졌다.
“숲 밖으로 와서 많은 것을 느꼈어요. 단명종의 시간은 짧아요. 하지만 누구보다도 열정적이고 성장이 빨라요. 저도 이를 본받으려고요.”
“이거 나중에는 오히려 내가 당신에게 보호를 받겠군.”
“제가 당신을 지켜 줄게요. 목숨을 바쳐서라도.”
“그건 나도 마찬가지요, 아낙시아.”
아낙시아와 마하는 매일 밤 달빛 아래서 사랑을 속삭였다.
나중에는 그녀가 그를 보호하겠다, 반쯤 농담 삼아 한 대화지만, 그녀는 점차 농담으로 치부할 수 없게 되었다.
점점 전투가 위험해질수록, 전투를 치른 마하의 몸에 상처가 많아질수록, 아낙시아는 사랑하는 이를 지키기 위해 더욱 수련에 매진했다.
‘마하를 지켜 주려면 그의 약점을 내가 채워 줘야 해. 앞으로 흑마법과 냉기 마법을 집중적으로 익히자!’
적을 완벽히 상대하려면 누구보다 적에 대해서 잘 알아야 한다.
그래야 사랑하는 사람을 지켜 줄 수 있다.
‘흑마법은 직접 사용해선 안 돼. 흑마도사들의 저주와 주술에 대비하는 방향으로 익히자. 지식만 머리에 넣는 거야! 직접 발현하는 마법은 냉기 마법 하나면 족해!’
그녀는 마하의 약점을 보완하기 위해 마하의 속성과 반대되는 어둠과 냉기 마법을 유독 수련했다. 흑마법은 이론 위주로, 냉기 마법은 실전 위주로.
사랑하는 남자를 잃고 싶지 않았고, 자신을 사랑해 주는 숲밖의 모두를 지키고 싶었기 때문이다.
하이엘프에게 ‘욕망’이 생긴 것이다.
엘프의 재능, 장수종의 시간, 에이션트의 잠재력이 ‘욕망’과 만나 유례없는 시너지를 발산했다.
시간이 흘러 대륙을 지옥으로 만들었던 흑마도사들의 군단이 밀려나기 시작했다. 그 업적의 중심엔 마하와 아낙시아가 있었다.
마침내 누리게 된 귀중한 평화.
“아낙시아, 이때가 아니면 하지 못할 것 같아서 말인데…… 나와 결혼해 주겠소?”
이때를 놓치지 않고 마하는 아낙시아에게 청혼했다.
아낙시아는 기쁨의 눈물을 흘리며 수락했다.
둘은 전 인류의 축하를 받으며 결혼했다.
요정 숲에서는 예외적으로 이를 허락했다. 축하 사절단까지 보냈다, 가증스럽게도.
부부가 된 마하와 아낙시아는 모든 것을 바쳐 대륙을 수호했고, 대륙에서 흑마법의 씨를 말리기 위해 열성을 다했다.
그러다 정신을 차려 보니 어느덧 나라를 건국하고 있었다.
“제 평생을 당신과 제국을 위해 헌신할게요!”
그녀는 사랑하는 남자와 함께 세운 제국을 진심으로 아끼고 사랑했다. 제국은 그녀에게 자식과도 같았다.
‘제국이 독보적으로 발전하기 위해선…… 엘프들의 발전된 지식과 기술이 필요해. 요정 숲의 귀한 자원도.’
그래서 이 제국이 천년만년 이어지길 바라고 또 바랐다.
단명종인 남편이 일찍 죽는다고 해도 그의 흔적이 짙은 황가와 제국이 세상에 남아 있다면 홀로 남은 시간을 버틸 수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인간과 엘프 사이의 새로운 서약이 필요합니다. 숲의 형제들이여, 이 하이엘프 아낙시아를 믿어 주세요.”
할 수 있지만 결코 하지 않았던 거짓말을, 사랑하는 이를 위해 처음으로 했다.
“여러분의 협력이 필요합니다. 그래야만 두 번 다시 대륙에 혼란이 재발하지 않을 겁니다.”
그것도 동족들을 향해서.
“당신들이 저를 좋아하지 않는 것은 잘 압니다. 하지만 사적인 감정을 뒤로하고 저와 제국이 제시한 사항을 봐 주세요. 분명 필요성을 느끼실 겁니다.”
아낙시아는 인간들과 살면서 배운 다양한 화술에 거짓말을 섞어 요정들을 속였다.
“저는 제 반려가 죽어도 요정 숲으로 돌아오지 않겠습니다. 제국에 남아 장수종과 단명종의 사이를 잇는 다리 역할을 하겠습니다. 저 같은 에이션트가 요정 숲에 오지 않는다는 건…… 오히려 반기던 일이 아닌가요?”
요정들은 아낙시아를 믿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그녀의 말이 거짓이라고 생각하진 않았다.
“여러분은 그저 제가 요청하는 인력과 지식, 자원만 제국에 공급해 주면 됩니다.”
요정들은 제국에게 자신들의 것을 ‘하사’한다는 개념으로 이해했다. 아낙시아도 그들에게 그렇게 설명했었고.
하지만 실상은 반대였다. 요정 숲이 제국에게 조공을 바치는 것처럼 설계되어 있었다.
황실의 적통이 이어지는 한 요정 숲은 이 서약을 지켜야만 했다.
세계수와 당시의 요정 여왕은 그런 아낙시아의 속셈을 몰랐던 것인지, 아니면 알면서도 모른 척한 건지, 침묵으로 방관했다.
제국과 요정 숲을 잇는 ‘아낙시아의 서약’이 그때 이뤄졌다.
서약의 선물로 당시 엘프 여왕은 노화를 늦춰 주고 젊음을 일부 되돌려 준다는 세계수의 열매를 마하에게 선물했다.
제국은 답례로 고대부터 내려온 아티팩트 ‘신성의 로사리오’를 요정 숲에 건넸지만, 아낙시아가 이를 중간에서 가로챘다.
엘프에게 준 것은 맞았기에, 인간들은 의문을 가지지 않았다.
아낙시아의 서약이 이뤄졌고 시간이 흘렀다.
아낙시아와 마하는 언제나 금슬이 좋았고, 둘 사이에 자식도 열 명이나 낳았다.
자식들은 하프엘프로 태어났다. 엘프처럼 1,000살까지 장수하진 못하지만 하나같이 봄의 축복을 받고 태어난 아이처럼 건강했다.
또 인간치곤 장수했다. 대부분 150살까지 살다 죽었다. 제국 황족이 뛰어난 능력과 더불어 그 수가 많은 데에는 이런 이유가 있었다.
마하는 자식들 중 첫째 아들에게 황위를 물려주었다. 아낙시아 또한 며느리에게 신성의 로사리오를 물려줬다.
그때는 요정들도 아낙시아의 서약의 잘못됨을 알고 노발대발했지만, 이미 늦은 후였다.
속세에서의 신변을 정리한 둘은 새로운 신분을 만들고 대륙을 여행했다.
아낙시아는 옥타나라는 귀족 여성들이 흔히 쓰는 이름을 사용했었고.
마하는 ‘윈테이라 루한’이라는 이름을 사용했다.
시간은 빠르게 흘렀다.
세간에는 마하대제가 죽고 그의 아내 아낙시아가 슬퍼하며 은둔의 삶을 살고 있다는 소문이 퍼졌다.
물론 둘은 여전히 살아 있었다. 하지만 예전처럼 활발히 대륙을 여행하지는 않았다.
지금은 대륙 북부, 요정 숲에서 멀리 떨어지지 않은 산골에 작은 오두막을 짓고 오붓하게 하루하루를 흘려보내는 중이었다.
“당신은 여전히 변함없이 아름답구려.”
아낙시아는 여전히 아름다운 외모를 지녔다. 변신 마법으로 엘프의 귀를 숨기고 머리색도 회색으로 물들었지만, 여전히 20대의 젊은 외모다.
반면 마하는 백발이 성성한 노인의 모습이다.
인간으로 치면 벌써 관에 누워 뼈만 남았을 나이다. 그가 본래 인간을 초월한 초인이었고 세계수의 열매까지 먹었기에 지금까지 살아 있는 것이다.
“미안해요…… 미안해요…….”
“무슨 소리. 당신이 왜 미안하오?”
아낙시아는 죽음을 눈앞에 둔(장수종인 그녀의 눈에는 그래 보였다) 마하의 모습이 너무나 안타까웠다. 날이 갈수록 주름이 늘어나는 그를 볼 때면 슬퍼서 눈물이 다 났다.
“난 오히려 섭리를 찾아가는 지금이 좋소. 그저 홀로 남겨질 그대에게 미안할 뿐.”
마하는 진심으로 자신의 반려를 향해 평화로운 표정을 지었다.
“아니! 방법이 있을 거예요.”
하지만 아낙시아는 사랑하는 이를 보내기 싫었다.
“말했잖아요? 달빛 아래서 약속했잖아요? 당신이 저를 지켜 주듯이 저도 당신을 지켜 주겠다고.”
버림받기 싫다. 혼자 있기 싫다.
“이제는 제가 당신을 지켜 줄게요! 죽음으로부터도.”
마하의 죽음이 가까워질수록 그녀의 마음속 깊숙한 곳에 있던 트라우마가 서서히 깨어나기 시작했다.
‘세계수의 열매, 그것만 있으면 마하는 나와 함께 장수종의 삶을 살 수 있을 거야.’
아낙시아의 눈이 요정 숲이 있는 방향으로 향했다. 숲을 바라보는 아낙시아의 붉은 눈동자에 집착이 서렸다.
“…….”
옆에서 이를 말없이 바라보는 마하의 금색 눈동자에 걱정이 드리웠다.
하이엘프는 세계수의 열매에서 태어난다.
그리고 마하는 그 세계수 열매를 먹었다. 어떻게 보면 금기에 가까운 선물, 죄악에 가까운 행위.
세계수와 요정 여왕은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마하에게 세계수 열매를 준 것일까?
명확한 이유는 모른다. 얘기를 해 주지 않았으니까.
단명종과 사랑을 나누게 된 아낙시아를 안타깝게 여겨 준 것일 수도 있고, 단명종의 시간선에 오염된 그녀를 관찰하기 위함일지도 모른다.
이유가 어찌 되었든, 아낙시아는 요정 숲으로 향했다.
서약의 일로 엘프들이 자신을 적대한다는 것을 잘 알았다.
애초에 원래에도 자신을 에이션트란 이유로 좋게 보지 않았던 이들이다. 그래서 아낙시아는 개의치 않았다. 오히려 숲 밖을 나오기 전이었다면 상상도 못 했을 소소한 복수를 하게 되어 기분이 좋았다.
요정 숲은 각종 결계가 장벽처럼 드리운 숲이다. 하지만 그녀는 에이션트 이전에 하이엘프였다. 거기다 숲 밖에서의 경험과 시간은 그녀에게 유례없는 마법 실력을 선물했다.
특히나 어둠과 냉기 마법에 대해선 신의 경지에 도달했다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다.
그녀는 그 능력으로 몰래 세계수 정원에 침입했고, 엘프 여왕 몰래 세계수의 열매를 서리했다.
그녀는 그렇게 서리한 열매를 마하에게 먹였다.
“드세요, 내 사랑. 세계수의 열매예요. 이거면 다시 젊어질 수 있어요. 쭉 저와 함께 있을 수 있어요.”
“이 세계수 열매는 세계수와 요정들의 소중한 보물로 알고 있소. 아무리 당신이라도 이렇게 자주 가져오는 건…….”
“걱정 마요. 다~ 허락받고서 받아 온 거니 당신은 걱정 말고 나만 바라봐 줘요.”
“……!?”
“자아~ 아! 하세요?”
으읍! 읍!
마하는 세계수의 열매를 먹는 것을 곤욕스러워했다. 게다가 먹으면 먹을수록 면역이라도 생기는지 효과도 처음 같지 않았다. 먹고서 몇 년 젊어졌다 싶으면 금세 다시 노화가 진행되었다.
“저런! 또 얼굴에 주름이 늘었어요. 걱정 마세요. 제가 당신을 지켜 줄게요!”
아낙시아는 그의 얼굴에 주름이 다시 생기는 것 같으면 다시 요정 숲으로 가서 세계수 열매를 훔쳤다.
“여보…… 나는 그만 살고 싶소. 제발…….”
참다못한 마하는 애원하듯 아내에게 말했다.
“우리는 쭉 함께 사는 거예요. 오랫동안 젊음을 유지하며 살다가 같은 날, 같이 죽는 거예요.”
그런 남편의 애원을 그녀는 귀담아듣지 않았다.
사랑하는 이의 불로불사에 눈이 먼 아낙시아는 마하의 심경 변화를 눈치채지 못했다. 그저 자신의 진심에 부담스러워하는 정도로만 여겼을 뿐이다.
어느덧 다섯 번째 세계수 열매를 서리하러 갔을 때였다.
요정 여왕을 비롯해 어떤 엘프들도 아낙시아의 마법을 감당하지 못했기에, 수목 도시는 그녀에게 이웃집의 낮은 담장보다도 못했다.
그렇게 세계수 정원에 도착했을 때.
“?!”
아낙시아는 평소와 다른 분위기를 느꼈다.
처억, 처억, 척!
마치 기다렸다는 듯. 엘프 근위대가 그녀를 포위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