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회귀여왕의 EX급 방랑기사-107화 (107/212)

제107화

#107.

세계수의 정원은 아낙시아에게 많은 의미가 있는 장소였다.

요람, 고향 그리고 어머니.

애증 그 자체였지만 어쩌면 증오보단 서러움이 앞섰던 곳.

“아아아아악!!”

하지만 지금 이 순간만큼은 증오와 두려움, 고통뿐인 공간이 되었다.

“꺄아아아악!”

황금빛이 강렬한 세계수 앞에서 아낙시아는 고통에 몸부림쳤다.

영혼의 비명을 지르는 아낙시아의 외모는 변신 마법이 해제된 에이션트 엘프의 모습이었다.

“어머니께서는 네가 조용히 만족하고 살면 간섭하지 않으려 하셨다. 오히려 축복까지 내리려 하셨지.”

엘프 여왕이 차가운 표정으로 그런 아낙시아를 바라본다.

“설령 네가 세상을 파멸로 물들일 힘을 지녔다고 해도 어머니는 널 사랑하셨다.”

여왕은 말을 이었다. 경멸과 한심함을 가득 담아서.

“하지만 아낙시아, ‘아쉬운’이라는 뜻을 품은 아이야, 너는 그 사랑을 감히 배신했구나.”

지금 여왕이 하는 말은 그녀 스스로의 생각일까? 아니면 세계수의 생각일까? 어쩌면 둘 다인지도 모른다.

파아아앗.

마하의 마나와 비슷하면서도 전혀 다른 황금빛이 강렬히 휘몰아쳤다.

“꺄아아아악!”

그럴수록 아낙시아를 압박하는 고통도 더 심해졌다.

아낙시아는 이제 모든 희망을 버렸다. 너무 많은 것을 잃었기 때문이다. 폐인이 된 자신과 달리 상대는 이 세계의 신이다. 엄청난 격차에 증오도, 원망도, 복수도 생각나지 않는다.

그저 고통과 절망에 깊이 잠길 뿐이다.

옥타나는 그렇게 서서히 소멸을 맞이하고 있었다.

‘제발…… 그냥 죽여……. 죽이라고!’

그녀는 속으로 셀 수도 없이 소멸을 애원했다. 세계수 어머니에게, 여왕인 언니에게.

하지만 둘은 옥타나를 바로 죽이지 않았다. 마치 징벌이라도 내리듯, 어쩌면 그녀를 실험체 취급하듯, 천천히, 천천히 고문했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절망과 고통에 신음하던 어느 날이었다.

[얘, 그거 아니? 대륙 북쪽에 루한이라는 나라가 세워졌더라?]

이성이 거의 날아간 그녀의 귀로 엘프 여왕인지 세계수인지 모를 이의 목소리가 들렸다.

[설원의 마녀가 실력이 좋은 모양이야. 세계수 가호와 비슷한 결계를 왕국 전체에 펼치다니. 설원의 가호라고 부르더라고? 어쩌면 네가 품었던 냉기가 뛰어났는지도 몰라. 병X같이 빼앗긴 그 힘 말이야.]

엘프 여왕의 혼잣말인지 세계수의 사념인지 모르겠다. 어쩌면 제3의 누군가가 보낸 목소리일지도 모르겠다.

[마하는…… 결국 죽었더라? 죄책감에 미쳐 자살하다니. 세계를 구한 용사의 최후치곤 비참하지 않니?]

지금까지 고통 속에서 헤엄치면서 여러 혼잣말과 사념을 들었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에 들리는 단어와 문장만큼 아낙시아를 자극한 적은 없었다.

[너는 여기서 고통받고 있는데, 세상은 네 덕을 보는 거 같지 않니? 제국은 지금도 여전히 아낙시아의 서약으로 번영 중이야. 파견 엘프들이 종종 가뭄이나 홍수를 해결해 주나 보더라고.]

‘서약……?’

서약…… 제국…… 루한…… 설원…… 마녀…… 마하…….

정신이 거의 날아갔음에도 그 단어들만큼은 그녀의 귀에 바로 들렸다. 순간적으로 희미해진 의식이 번뜩 떠졌다.

[그나저나…… 넌 왜 계속 이러고 있는 건데?]

아낙시아의 머릿속에 들리는 메시지는 더욱 선명해졌고 집요해졌다.

흐릿했던 감정들이 되살아나기 시작했다.

‘그러게……. 나, 왜 이러고 있지?’

텅 빈 영혼 속에 의문이 들어섰다.

[기억해 내! 너에겐 마지막 남은 힘이 있잖아?]

머릿속에 들리는 목소리에는 이유 모를 슬픔이 담겨 있었다.

‘마지막 남은 하나……?’

그녀는 사랑도, 마법도, 영혼도, 모두 잃었다. 하지만 아직 남아 있는 단 하나가 있었다.

바로 흑마법!

과거 흑마도사들과 싸우면서 차곡차곡 머릿속에 쌓아 놓은 금기들.

까맣게 잊었던 온갖 어둠의 지식들이 수면 위로 떠오른다.

‘죽기 싫어.’

불현듯 옥타나에게 ‘욕망’이 생겼다.

‘복수하고 싶어!’

그 욕망은 이변을 만들어 냈다.

사아아아아.

빛의 감정들이 어둠의 감정으로 변했고, 가장 헌신적이고 빛났던 여인을 악으로 각성시켰다.

‘마하…… 마하! 마하아!!’

사랑은 증오로, 믿음은 배신으로, 헌신은 경멸로.

찬란했던 만큼 추악했고, 밝았던 만큼 그림자는 어두웠다.

‘죽여 버리겠어! 전부 없애 버리겠어! 내 영혼을, 내 모든 것을 바쳐서라도 반드시!’

마하도, 루한도, 그리고 세계수도! 전부 없애 버리겠다, 전부 복수하겠다.

번쩍!

옥타나의 영혼에서 깊고 조용한 폭발이 일어났다.

세상에서 가장 어두운 감정이 탄생했다.

고오오오오오!

그 감정의 폭발은 끝없이 분출되더니, 어느 순간 아낙시아의 영혼에 거대한 균열을 만들어 냈다.

[잘했어, 옥타나.]

머릿속을 울리던 메시지는 그 말을 끝으로 더 이상 들리지 않았다.

갑작스러운 이변에 엘프 여왕과 세계수는 깜짝 놀랐다.

“이럴 수가! 갑자기 이게 무슨……?”

-……!

아낙시아의 영혼에서 흘러나오는 심연의 기운이 세계수 정원을 흐리게 만들었다.

“저 깊고 어두운 심연은 뭐란 말인가!”

단순히 경악으로 끝날 문제가 아니다.

우우웅.

세계수의 황금빛이 위태롭게 울었다.

아낙시아의 폭주하는 영혼에서 기분 나쁜 검은 균열이 생성됐다.

“큰일이야! 이대로 있다간 마계의 문이……!”

당장은 주먹 정도 크기지만 빠르게 커질 것이다.

세계수도, 엘프 여왕도 전혀 예상치 못했던 상황.

세계수 속의 무수한 시간선에서도 보지 못했던 이변.

어쩌면 새로운 분기점이 될지도 모를 세계선이 지금 발생했다.

-필히 다른 시간선의 존재가 개입한 것이다.

세계수의 의지가 그늘에 잠긴 세계수 정원을 울렸다.

-직접 나서야겠구나.

파아아아앗!

상황이 심상치 않음을 감지했는지. 세계수가 직접 움직이기 시작했다.

파아아아, 파앗!

금빛 물결이 아낙시아의 영혼을 꽁꽁 덮었다.

하지만 금빛 물결 사이사이로 검은 기운이 새어 나왔다. 그렇게 새어 나온 검은 연기 같은 게 세계수를 위협한다.

-이대로 뒀다간 저 아이와 연결된 나 또한 오염된다!

세계수는 생각했다. 아낙시아는 실패작이다. 에이션트다. 그리나 세계수 열매서 빚어낸 하이엘프다. 즉, 어떻게든 자신과 연결돼 있다.

지금의 아낙시아가 계속 엘프로 남게 되면?

11차원의 온갖 부정한 기운이 세계수에게 전이된다.

-아이야, 너는…… 이제부터 엘프가 아니다.

그래서 세계수는 그녀에게서 엘프의 정체성을 완전히 박탈하기로 했다.

스스스스슷.

세계수의 의지가 아낙시아의 영혼을 때렸다.

동시에 그녀가 가지고 있던 모든 엘프의 상징이 사라지기 시작했다.

뾰족한 귀가 평범한 인간의 귀처럼 변했고, 검었던 머리카락이 회색으로 변했다.

엘프라면 누구나 품고 있어야 할 자연의 기운도 사라졌다.

장수를 상징하던 젊고 탱탱했던 피부에 노화가 서리기 시작한다.

아름다움에서 순수함과 성스러움이 사라진다.

파스스스슷.

대신, 잃어버린 것만큼의 정반대되는 무언가가 아낙시아의 영혼을 채웠다.

사라진 자연의 기운 대신에 타락의 기운이 가득 찼다.

사라진 순수함과 성스러움 대신에 요부의 요염함이 아름다움을 채웠다.

주름으로 가득 찼던 피부가 다시 펴지고 탱탱해졌다. 피부에는 고혹스러운 윤기가 흘렀다.

-계시를 내리겠다.

그런 아낙시아를 보며, 세계수가 엘프 여왕에게 계시를 내렸다.

-우리가 아는 아낙시아와 눈앞의 여인은 이제 별개의 존재가 되었도다.

“……!”

여왕은 혼란스러운 상황임에도 눈을 빛내 세계수의 계시에 집중했다.

-어떤 엘프도 저 여인에 대한 얘기를 꺼내지 마라! 상대도 하지 마라! 그래야만 저 오염된 아이와 나의 연결이 단절될 수 있도다.

세계수의 계시가 저주가 되어 아낙시아의 영혼에 낙인을 찍었고, 단호한 추방령이 내려졌다.

세계수의 저주와 함께 아낙시아의 몸과 영혼이 요정 숲 밖으로 멀리 튕겨 나갔다.

* * *

대륙의 어느 변두리, 삭막한 황무지 위에 한 여인이 쓰러져 있었다.

그 여인은 비틀비틀 자리에서 일어났다. 회색 머리카락에 붉은 눈동자가 멍하다. 머릿속도 멍하다.

아주 오랫동안 잠을 자다가 깨어난 기분.

“……!?”

옥타나는 멍한 눈으로 자신의 양손을 살폈다.

몸에 힘이 없었다.

늘 영혼과 심장을 충만케 했던 자연의 마나가 공허하다. 온몸에 힘이 없었다. 이 정도의 나약함을 느낀 것은 아주 어릴 적 이후 처음이다. 당장 곰이라도 만나면 찢겨 나갈 것만 같았다.

그렇다고 폐인이 된 것은 아니었다. 새롭게 채우기 위해 비운 것처럼 그녀의 머릿속과 영혼은 다시 태어났고 새롭게 구축됐다.

옥타나는 멍하니 자신의 상태를 점검했다. 머릿속에는 무수한 흑마법 지식이 순환되어 또렷해지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문득 양손을 가슴 위에 올렸다.

“……?!”

버림받았고 배신당했음에도 이상하게 감정이 희미했다. 마치 다 타 버린 재가 된 것 같다.

하지만 재로 변한 감정 안에는 존재의 이유와도 같은 ‘무언가’가 영혼처럼 자리 잡았다.

“……복수.”

복수, 복수, 복수, 복수…….

옥타나는 복수를 수없이 중얼거렸다.

구르르르르.

그렇게 멍하니 복수를 입안에서 굴리고 있는데, 멀리서 먼지구름이 보였다. 자연이 만든 먼지구름이 아닌 인마가 만들어 낸 먼지들.

복장과 무장을 보아하니 어느 왕국의 기사단 같았다.

‘일단 힘부터 길러야겠네?’

그들을 본 옥타나는 흐릿하게 생각했다.

어느덧 먼지구름이 가까워졌다.

“단장님! 웬 여인이……! 허업!”

제일 선두에 있던 기사가 옥타나를 발견하고는 외치다가 혀를 씹었다. 가까이서 목도한 여인의 외모가 너무나 아름다웠기 때문이다.

“이럴 수가……!”

“어디서 저런 아름다운 레이디가?”

기사들은 옥타나의 외모에 잠시 넋이 나갔다.

“레이디는 누구시오? 이름과 신분을 밝히시오.”

그러나 이내 기사들답게 정신을 차리곤 그녀를 향해 검을 겨눴다.

“우리는 팔슈 왕국의 팔콘 기사단이오. 만약 도움이 필요하다면 기꺼이 레이디를 돕겠소.”

“하지만 조금이라도 수상하다면…….”

이런 황무지에 이토록 아름다운 여인이 홀로 있다니, 외모를 떠나서 확실히 수상하다.

처억! 스릉!

기사들은 당장이라도 옥타나의 목을 벨 준비를 했다.

그런 기사들을 본 옥타나는 묘한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안녕하세요? 제 이름은…… 옥타나라고 합니다. 꽤 흔한 이름이죠?”

“반갑소, 레이디 옥타나. 여긴 어쩐 일이시오?”

“저는 마법을 수련 중인 한미한 남작 가문의 차녀랍니다. 실험에 필요한 재료가 있는데 너무 비싸더라고요. 그래서 부득이하게 이렇게 홀로 나왔다가 길을 잃고 말았답니다.”

“…….”

“……?”

당연하지만, 그녀의 설명을 기사들은 신뢰하는 것 같지 않아 보였다.

점점 기사들의 검이 옥타나의 목을 정확히 겨누기 시작한다.

“기사님들은 지금의 제가 수상하다고 여기실지 모르겠지만…….”

기사들의 표정을 본 옥타나는 눈을 빛내면서 말을 이었다.

“마나에 맹세코, 틀림없는 사실이랍니다.”

그녀는 묘한 미소를 지으며 마나의 맹세를 했다. 옥타나의 심장에서 진실을 상징하는 은은한 빛이 발했다가 사라졌다.

‘되는구나.’

이상하게 될 것 같은 느낌이 들었는데, 정말로 되었다.

맹세를 하면서도 거짓을 말할 수 있는 기적 같은 권능이 생겼다.

많은 것을 잃은 대가치곤 박한 보상 같았지만.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