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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여왕의 EX급 방랑기사-108화 (108/212)

제108화

#108.

옥타나가 망설임도 없이 마나의 맹세를 하자, 이제는 오히려 기사들이 당황한다.

“진실의 맹세를 하다니…… 그럴 필요까진 없는데…….”

“다들 바쁘실 텐데, 제 결백을 증명하려면 이보다 빠르고 확실한 건 없겠지요?”

“물론입니다. 의심해서 죄송합니다, 레이디 옥타나.”

“기사단의 사과를 받아 주십시오.”

마나의 맹세라니! 이 맹세 하나로 기사들의 모든 경계심이 풀렸다.

“도와 드리겠습니다, 레이디. 저는 기사단장 에드워드 쇼입니다.”

멋들어진 콧수염을 한 기사단장이 말에서 직접 내려 옥타나를 에스코트하려 한다.

기사단 전체가 오직 옥타나를 지키기 위해 경호 대형으로 진형을 바꿨다.

“고마워요. 혹시 지금 날짜를 알 수 있을까요? 제국력까지 합쳐서요.”

“……제국력 551년 9월 1일입니다.”

옥타나의 질문에 기사단장은 잠시 의아해 했지만 큰 의심 없이 순순히 답했다.

“!!”

기사단장의 말에 옥타나의 표정이 잠깐이지만 굳었다. 세계수에게 끌려가고서 100년이나 흐른 것이다.

“…….”

괜히 불안하고 초초했다. 복수해야 하는데! 복수해야 하는데!

마하는 죽었을 것이다. 그가 자살했다는 얘기를 얼핏 들었던 것 같았다.

하지만 적어도 베아트리체! 그 마녀만큼은 죽이고 싶었다.

‘베아트리체…… 그 여자가 만약 죽었다면?’

으드득! 상상만 해도 이가 갈린다.

‘그렇다면 그년의 혈통에라도 저주를 내릴 것이다! 대대로 괴로움과 고통에 몸부림치게 만들다가, 결국엔 이 땅에 흔적조차 남지 못하게 만들 것이다!’

옥타나의 붉은 눈동자에 집념이 서렸다.

‘제국도! 요정 숲과 세계수도! 기필코!’

세계수와 요정 숲도 불태우고 싶었다. 마하에게 복수할 수 없다면 그와 함께 세운 제국을 몰락시킬 것이다.

“저…… 레이디 옥타나? 괜찮으십니까?”

갑자기 옥타나의 표정이 굳자, 기사단장이 걱정스럽다는 듯 물었다.

“괜찮아요. 잠시 머리가 아파서……. 실례지만, 도시까지 안내를 받을 수 있을까요?”

옥타나는 바로 표정을 바꾸고선 요염한 미소로 도움을 청했다.

“물론입니다. 제 명예를 걸고 당신을 돕겠습니다. 미하일, 예비용 말을 옥타나 양에게 드리도록!”

“알겠습니다, 단장님! 크흠, 레이디 옥타나, 저를 따라오십시오.”

기사들은 단장부터 말단까지 잔뜩 붉어진 얼굴로 옥타나를 챙겼다.

“…….”

호들갑 떠는 기사들을 보며 옥타나는 어딘가를 바라보았다. 북쪽 멀리, 세계수가 있는 요정 숲 방향이다.

‘본의 아니게 선물을 주셨군요, 어머니.’

그녀는 방금 자신이 했던 거짓의 맹세를 되새기며 세계수를 생각했다.

엘프의 정체성을 강제로 거세당하면서 생긴 부작용 같았다.

‘잘 쓸게요. 그리고 언젠간…… 반드시 다시 찾아뵐게요. 반드시!’

옥타나는 세계수가 있는 방향에서 시선을 거두곤 말에 올라탔다. 그리고 기사들의 호위를 받으며 팔슈 왕국으로 사라졌다.

몇 년 후, 팔슈 왕국에서 한 여인을 중심으로 내전이 일어났다.

팔슈 왕국은 10년도 지나지 않아 멸망했다.

대륙 곳곳에서 사라진 줄 알았던 흑마법들이 하나둘씩 모습을 드러냈다.

어느새, 거짓의 대마녀의 설화가 퍼지기 시작했다.

* * *

옥타나의 초점이 과거에서 현실로 돌아왔다.

현실에서는 찰나의 순간이지만, 대마녀의 의식에선 제법 길었던 회상이 끝났다.

“이 질긴 여정도 슬슬 끝이겠어.”

오직 복수를 위한 여정, 목적을 상실한 악연.

‘복수를 마치게 되면 나는 어떻게 될까?’

그러다가 문득 궁금해졌다.

오직 복수를 위해 살아왔다. 복수의 대상은 세상이었다. 제국과 루한 그리고 세계수는 세상 그 자체였으니까.

불가능할 것 같았던 복수가 서서히 손에 잡힐 것만 같았다.

복수 이후를 생각해 본 적 없던 옥타나는 그저 얼떨떨할 뿐이다.

하지만 그녀의 생각은 회상을 할 때처럼 길게 이어지지 못했다.

휘이이이잉.

본격적인 전투가 시작됐는지, 데스모 성 아래서 거대한 냉풍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래, 지금은 베아트리체, 그년의 혈통을 끊어 버려야지. 그게 우선이지.”

퍼어어엉!

옥타나 주위로 마력 폭풍이 터졌고 서 있던 첨탑이 부서졌다.

“베아트리체…… 아니지.”

저 아래에 청은발의 가증스러운 혈통이 보인다.

“루시푸르네!!”

수백 년을 참아 왔던 응축된 한이 옥타나의 성대를 타고 터져 나왔다.

파앗!

거짓의 대마녀가 설원의 대마녀를 향해 달려들었다.

* * *

설원의 저주가 빗발친다.

어느 때보다 맹렬히.

지금까지 조신하게 있어 온 울분을 토해 내기라도 하듯이.

휘이이이이잉.

이때만큼은 루시 또한 설원의 폭주를 방관했다. 아니, 장려했다.

사방이 설원이 되었고. 얼어 죽은 적들의 시체가 수풀 속 잡초처럼 무성하다.

놈들이 무슨 수로 설원의 가호 아래서 징벌을 피했는지 모르겠다.

놈들이 무슨 자신감으로 반역을 일으켰는지 모르겠다.

분명한 것은 단 하나, 용케 피해 갔다고 생각한 설원의 징벌은 여왕과 함께 더 큰 냉기로 돌아왔다는 거다.

“오…… 폐하!”

“루한이여, 영원하라!”

“설원의 대마녀 만세!”

오직 설원의 폭풍에서 무사한 것은 포로로 잡혔던 루한의 토벌군이었다.

그들은 루시가 공간 이동으로 이곳에 강림하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철창을 탈출했다.

루시가 직접 풍기는 설원의 권능에 그들을 가두던 각종 마도구들이 파괴되었기 때문이다.

일부 운 없는 병사들이 설원의 저주에 가까이 휘말려 죽었지만 이는 극히 드문 경우이고, 대부분은 설원을 피해서 급히 저 멀리 물러났다.

그리고 관중석에서 응원이라도 하듯이 자신들의 여왕을 찬양했다.

파바바바밧, 퍼엉.

그 응원과 찬양에 힘입어 루시는 마음껏 설원을 휘둘렀다. 상대는 데스모와 그 패거리들, 용서할 가치가 없는 존재들, 죽음이 오히려 자비인 역도들.

“데스모!!”

회귀 전부터 지금까지 쌓인 응어리를 루시는 전부 쏟아 내려 했다. 거침없는 기세로 사방을 설원으로 휩쓴다.

“아리아 데스모! 나와라!”

빙결의 폭풍 속에서 루시푸르네의 울분 섞인 외침이 메아리처럼 울렸다.

“루시푸르네!!”

마찬가지로 그녀와 비슷한 응어리가 담긴 목소리가 설원을 뚫고 루시의 귀에 들렸다.

“데스모! 드디어 나왔구나!”

어찌 잊으리, 저 가증스러운 목소리를. 루시푸르네는 목소리가 들린 방향으로 시선을 돌렸다.

“……!?”

하지만 이내 시야에 잡힌 마녀를 보자 고개를 갸웃했다.

흑발에 붉은 눈동자, 엘프가 분명한 귀.

루시가 아는 재상의 모습이 아니다. 하지만 상대의 적의를 명확히 느꼈기에 방어 마법을 준비했다.

--!!

이어서 푸른색 기운과 어둠의 기운이 설원 위에서 충돌했다. 소리 없는 거대한 충격파가 터졌다.

“……너는 재상이 맞나?”

루시는 자신을 압박해 오는 엘프 마녀의 공격을 막으며 물었다.

“아직도 모르니? 거짓의 대마녀는 여러 마법에 재주가 있단다? 그중에는 인형술도 있지.”

옥타나는 비릿한 조소를 지었다.

“아리아 데스모가 곧 옥타나라는 뜻이란다, 아가야.”

“?!”

“그리고 이게 바로 거짓의 대마녀의 본래 모습이고.”

“!!”

연이은 사실이 루시를 강타한다.

‘악황제에게서 무슨 힘을 받은 건지 모르겠지만, 상관없어!’

또한 루시는 눈앞의 마녀가 설원의 폭풍 속에서 멀쩡한 것이 놀라웠다. 하지만 어느 정도 예상했던 바다. 이 정도 자신이 없었다면 대놓고 반역을 일으키지 않았겠지.

이미 회귀 전과 너무나도 달라진 지금에서 이런 건 궁금해 봤자다.

“오히려 잘됐군.”

하지만 루시는 오히려 미소를 지었다. 이 싸움으로 재상과 악황후를 동시에 잡을 수 있으니 얼마나 좋은가?

“그래, 잘됐지?”

미소 짓는 루시를 향해 옥타나도 웃음으로 받아쳤다.

퍼어어엉!

두 마녀의 마법이 충돌하고 사방을 무너뜨린다. 데스모 공작령의 역사 깊은 성 또한 무참히 무너졌다.

어둠과 냉기. 어찌 보면 서로 잘 어울릴 것 같은 두 기운이 지금만큼은 물과 기름처럼 거칠게 맞붙었다.

“거짓의 대마녀여! 너는 도대체 무슨 이유로 나와 우리 왕국을 괴롭힌 것이냐! 왜 어머니를 죽인 것이냐!”

루시는 설원의 저주 가까이서도 전혀 얼지 않는 옥타나를 노려보며 물었다.

루한의 역대 여왕들은 늘 거짓의 대마녀와 전쟁을 해 왔었다.

여왕을 비롯한 누구도 그 이유를 명확히 알지 못했다. 진실을 알고 있던 베아트리체와 마하는 오래전에 죽고 없었으니까.

그저 끝 모를 증오를 품은 한 대마녀가 자신들을 귀찮게 한다고 여길 뿐이었다.

“이유? 있었지……. 하지만 이제 와서 그게 무슨 소용이 있을까?”

루시의 질문에 옥타나가 광기에 찬 붉은 눈을 반짝인다.

파아아아악!!

거대한 심연의 마나가 먹물처럼 사방으로 튄다. 설원의 백설을 더럽힌다.

“그래! 그런 대답이라서 다행이야!”

옥타나의 대답에 루시는 안도했다. 만약 합당한 이유를 알았다면? 괜히 마음이 흔들렸을지도 모른다.

흐읍!

파앗, 파앗.

루시푸르네는 양손에 하늘색 마나를 응축시키곤 옥타나를 향해 던졌다.

하앗!

옥타나 또한 양손에 검은 마나를 응축시켜 루시가 던진 마법구를 막았다.

“그거 그렇게 쓰는 거 아닌데~.”

조롱도 함께 뱉으면서.

“……!”

옥타나의 조롱에 루시의 표정이 일그러진다.

“지금의 내가 왜 설원의 저주에서 자유로운지 아니?”

루시의 표정이 일그러질수록 옥타나의 얼굴에는 희열이 번졌다.

“세계수의 저주에서 풀려났기 때문이야.”

“……?”

“너의 그 힘, 원래 주인이 나였거든.”

“……!”

루시의 일그러진 표정은 이어지는 옥타나의 말에 더욱 구겨졌다.

“그러니까 얌전히 심장을 바치렴.”

옥타나의 몸 주위로 심연의 검은 기운이 깊게 회오리친다.

지금까지 본 것 중에 가장 위협적인 심연의 기운이다.

“……개소리!”

루시는 자신도 모르게 주춤하면서 방어 주문을 외웠다.

“그 설원의 힘을 내놔!”

“닥쳐!”

퍼어어엉!

청과 흑이 또다시 충돌했다.

분명 마력의 총량은 루시푸르네가 위다.

하지만 지식과 노하우에선 긴 시간을 살아온 옥타나를 따라잡지 못했다.

심지어 지금의 옥타나는 수백 년 동안 자신을 구속하던 족쇄까지 푼 상황.

게다가 지금 이곳은 세계수의 앞마당도 아니다. 오히려 친숙하기만 한 옥타나의 옛 힘이 가득한 장소다.

고오오오오.

처음에는 막상막하였던 대치가 점차 한쪽으로 기울기 시작한다.

‘어떻게…… 이런?!’

루시푸르네는 경악과 동시에 위기를 느꼈다.

“……!”

마주 본 옥타나의 얼굴에서 회귀 전 재상의 모습이 떠오른다.

이렇게 전투력이 강한 재상이라니! 악황후라니!

전투보단 온갖 저주와 꾀로 혼란을 파종하던 것이 지금까지 거짓의 대마녀가 보인 이미지였다. 재상 아리아 데스모도 마찬가지였다.

그랬던 세상의 상식이 이 싸움에서 완전히 박살났다.

파아앗.

옥타나가 내뿜는 어둠의 기운이 루시의 기운을 크게 때린다.

그러자 설원의 가호와 저주가 요동치며 루시의 몸속을 뒤흔든다.

“크헉……!”

처음으로 루시의 입에서 신음이 터졌다. 입가에 피가 흐르다가 붉게 얼었다.

“…….”

분했다. 너무 분해서 미칠 것만 같았다. 눈앞의 원수를 노려보았다. 눈앞의 아름다운 하이엘프는 솔라의 절친, 로뮤를 닮았다.

그나저나 검은 머리에 붉은 눈을 한 여자 엘프라……. 급박한 상황에 뜬금없는 생각이지만, 제국의 첫 번째 황후 아낙시아가 떠올랐다.

그러고 보니 아낙시아도 냉기 마법을 잘 다뤘다고 했지.

루한의 시조 베아트리체도 아낙시아를 동경하다가 설원의 대마녀가 되었다고 했다.

“……?!”

옥타나와 힙겹게 대치하던 루시는 순간 눈을 크게 떴다.

‘말도 안 되지.’

그러나 이내 고개를 저었다.

‘아직 끝나지 않았어! 절대 질 수 없어!’

잠깐의 잡생각을 떨친 루시푸르네는 다시 한번 냉기를 일으켰다.

고오오오오옷!

설원의 폭풍이 몰아친다. 평범한 이는 물론, 소드 마스터나 대마도사 같은 초인들까지 멀리서 얼어 죽일 만한 추위다.

“그게 다니? 이게 최선이야? 이거~ 실망이 큰데?”

그럼에도 옥타나는 시원하다는 듯 여유롭다.

“루시푸르네, 너는~ 사그라진 세계에서나 지금에서나 성장한 게 없구나?”

“……!”

그런 원수의 반응에 루시는 짜증과 경악이 샘솟았다.

“어디…… 이것도 한번 버티는지 보자!”

루시푸르네는 이를 악물고 무한에 가까운 냉기를 펼쳤다.

파샤샤샤샷.

그녀의 명령을 받은, 얼음으로 빚어진 창들이 옥타나를 포위했다.

무한한 냉기 속에서 소나기처럼 끝없이 빗발치는 얼음 창은 피할 수도 막을 수도 없을 만큼 촘촘하고 날카로웠다.

“넌 리리아보다 못하구나? 한참 모자라. 그 거대한 마력을, 설원을, 고작 이렇게밖에 못 쓰다니. 회귀를 했는데도 이따위라니.”

앞뒤, 옆, 위아래로 쏘아지는 얼음 창을 보고도 옥타나의 반응은 심드렁했다. 그녀의 붉은 눈동자가 얼음 창을 다스리는 루시를 한심하다는 듯 훑는다.

“하! 내가 이런 애가 무서워서 지금까지 비굴하게 굽신거렸다니.”

설원의 권능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닌 애송이에게!

파앗.

옥타나는 허탈하다는 듯한 얼굴로 검은 균열을 펼쳤다.

그녀의 몸이 검은 균열 속으로 빨려 들어가더니, 루시의 바로 코앞에 나타났다.

“?!”

마법진을 사용하지 않은 공간 이동이라니?!

코앞에서 다시 나타난 옥타나를 본 루시는 너무 놀라 몸이 굳었다.

“이만 끝내자. 너도, 나도, 너무 길었지?”

그런 루시를 보는 옥타나의 붉은 눈동자가 번들거렸다.

푸욱!

옥타나는 루시푸르네의 심장에 검은 마력으로 빚은 단검을 박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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