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09화
#109.
시간이 멈춘 것 같았다.
“……!”
루시는 신음조차 뱉지 못했다.
가슴속 심장을 찌른 무언가가 기분 나쁘고 역겨웠다.
“난 너 말고도 혼내 줘야 할 존재가 많아. 그러니 이만 끝내자.”
충격에 몸이 굳은 루시의 귓가로 옥타나의 나른한 목소리가 들렸다.
“베아트리체를 가장 닮은 아이야, 그래서 가장 역겨웠던 아이야.”
푸욱!
“네 선조가 지은 죗값을 치르렴.”
“어흑……!”
비수가 더 깊게 박힌다.
“나의 설원을 돌려주렴.”
옥타나의 목소리도 더 깊게 루시의 귀로 파고든다.
심장에 닿은 검은 비수는 단순한 검이 아니다. 마나로 만든 마력의 검이다. 그 마력의 비수가 루시의 영혼 중 일부를 스테이크 썰 듯 부드럽게 자르는 것 같았다.
스스스슷.
루시의 영혼이 썰리자 설원의 권능도 함께 이탈하기 시작했다.
휘우우웅.
거세게 몰아치던 설원의 폭풍이 점차 약해졌다.
루한 전역에 펼쳐졌던 설원의 가호도 옅어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루시의 몸과 마음을 좀먹던 설원의 저주는 사라지지 않았다. 약해지긴커녕 오히려 아득바득 붙어서 더욱 강해졌다.
“흐으으으으윽.”
루시푸르네의 입에서 흐느낌에 가까운 신음이 겨울바람처럼 불었다.
“꺄하하하하하핫!”
옥타나는 그런 루시를 보면서 광소를 내질렀다.
빼앗긴 힘을 되찾게 되었다. 얼마나 고대하던 순간이던가!
원수와 가장 닮은 직계 후손의 심장에 비수를 꽂았다. 얼마나 꿈꿔 왔던 순간이던가!
“죽어! 죽어!!”
옥타나는 비수를 잡은 손에 힘을 주고는 좌우로 비틀고 흔들었다.
“!!”
이제 루시푸르네는 비명은 물론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한다.
목덜미를 세게 잡힌 고양이처럼 몸이 잔뜩 굳어 반항조차 하지 못한다.
“깔깔깔깔깔깔!”
마침내 손에 넣은 달콤한 복수. 거짓의 대마녀는 눈물까지 흘리며 깔깔거리며 광인처럼 웃었다.
이때만큼은 충분히 경박해져도 되리. 추잡해져도 괜찮으리.
“깔깔깔…… 응?”
하지만 옥타나의 웃음은 어느 순간 서서히 멎기 시작했다.
루시푸르네가 미동도 하지 않아서?
사방을 휘감던 얼음 폭풍이 사라져서?
아니다.
“……?”
옥타나의 시선이 루시의 심장으로 향했다. 심장에 박힌 검은 비수를 보았다.
“……뭐지?”
이상하다. 왜 설원의 권능이, 왜 루시푸르네의 찢어진 영혼이 자신에게로 이동하지 않는 거지?
“?!”
고개를 갸웃하던 옥타나의 붉은 초점이 이동한다.
그녀의 초점이 이동한 곳은 루시푸르네의 한쪽 팔.
우우우웅.
그 팔의 손목에는 세계수의 팔찌가 있었고, 언제부터였는지 빛을 발하고 있었다.
평소의 푸른빛이 아닌, 세계수를 연상케 하는 황금빛으로.
파아아아앗.
옥타나가 반응하기도 전에, 세계수의 팔찌가 섬광을 터트린다.
“빌어먹을……!”
거짓의 대마녀는 표정이 싹 바뀌었다.
쌰아아아아.
루시의 손목에서 터진 황금빛은 볕을 내리쬐듯이 루시푸르네를 덮쳤고, 옥타나는 볕에 휩싸인 루시푸르네에게서 낯익은 누군가를 보았다.
“예나체리나……?”
바로 루시의 어머니.
파아아앗.
예나체리나의 환영은 무표정한 눈으로 옥타나를 노려보았다.
환영은 시선을 원수에게 고정하고는 다른 손에 빛의 검을 소환했다.
그리고 그대로 옥타나의 심장을 찔렀다.
푸욱!
“!!”
검은 비수와 빛의 검이 서로의 심장에 박혔다.
“꺼으으윽!”
이번엔 옥타나가 숨이 넘어갈 것 같은 신음을 흘렸다.
저벅, 저벅, 털썩.
그녀는 뒤로 몇 발자국 물러나더니 주저앉아 버렸다. 가슴에 빛의 검을 박은 상태로.
털썩.
마찬가지로 루시푸르네 또한 가슴에 검은 비수를 박고서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흐으으윽! 히이이익!”
옥타나는 원통하다는 표정으로 소리 없이 울부짖었다.
파아아앗!
이내 빛과 함께 사라졌다.
바닥에 마법진이 남은 것을 보니 공간 이동을 한 모양이다.
그렇게 옥타나를 물리친 예나체리나의 환영은 말없이 루시푸르네를 보았다.
[…….]
환영의 얼굴에 딸을 향한 걱정과 자상함이 빛의 묻어났다.
파아아아앗.
예나체리나의 환영은 마지막 섬광을 루시의 몸에 터트렸다.
루시푸르네가 주저앉은 땅 위로 공간 이동 마법진이 생겨났고, 얼마 후 루시는 빛과 함께 순백궁으로 사라졌다.
그걸 끝으로 예나체리나의 환영은 은은한 미소와 함께 소멸했다.
* * *
루한의 수도 윈테라, 순백궁의 여왕의 침실.
여왕의 출정으로 고요했던 침실 바닥에 마법진이 생성됐다.
마법진이 생기고서 얼마 후.
파아아앗.
섬광과 함께 인영이 모습을 드러냈다.
의식을 잃은 루시푸르네였다.
“……아악!”
의식이 없었던 루시는 공간 이동을 마치자마자 강렬한 통증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정신을 차린 그녀는 오한이라도 온 듯 몸을 덜덜 떨었다.
“어마마마……?”
의식을 잃었던 꿈속에서 얼핏 어머니를 본 것 같았다.
루시는 습관적으로 손목의 팔찌를 만지작거리려 했다.
“……?”
하지만 이내 느껴지는 감촉에 놀라 팔찌를 낀 손목으로 고개를 돌렸다.
“아아……!”
어머니의 유품이, 세계수의 팔찌가 시들어 있었다. 회귀 전과 마찬가지로.
동시에 자신을 구해 준 이가 누구인지도 깨달았다.
루시는 소리 없이 울었다.
흐느낄 때마다 심장에 박힌 검은 비수가 아팠다.
그녀는 훌쩍이면서 자신의 상태를 살폈다. 방금 옥타나의 일격으로 상태는 좋지 못하다.
흐읍!
손으로 조심히 심장에 박힌 비수를 뽑으려 했다. 그러나 뽑히지 않는다.
“폐하?! 괜찮으십니까?”
그때, 침실 문밖으로 베네사의 목소리가 들렸다.
“데스모에 있던 하이마 경에게서 들었습니다! 몸은 괜찮으십니까? 문을 열겠습니다!”
다급한 시녀장의 목소리에 루시는 정신이 번뜩 들었다
“아니다! 절대 가까이 오지 마라!”
루시는 필사적으로 외쳤다.
외침과 동시에 몸을 침실 문에서 최대한 멀리 떨어트렸다.
끼익.
여왕의 외침에도 불구하고 베네사는 침실 문을 열었다.
“허억!”
문을 열자마자 베네사는 루시에게서 부는 엄청난 냉기에 절로 뒤로 밀려났다.
“?!”
냉기 바람을 맞은 베네사가 믿을 수 없다는 눈으로 루시를 보았다. 지금 그녀와 루시의 거리는 10미터보다 훨씬 먼 20미터 거리였다.
“폐하…… 설원의 저주가?!”
베네사의 울 것 같은 물음에 루시는 씁쓸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재상과 싸우다가 저주가 더 심해졌다. 그러니 절대 가까이 오지 말아라.”
설원의 저주는 회귀 전보다 더 심해졌다.
끄으으윽.
루시푸르네는 자신의 가슴에 박힌 고통의 근원을 노려봤다.
검은 비수가 보내는 고통이 심장을 시작으로 루시의 전체를 채운다.
고통이 종소리처럼 퍼질 때마다 오한이 든 것처럼 그녀의 머리부터 전신이 쑤신다.
“폐하……!”
그런 루시를 본 시녀장 베네사는 큰 충격이라도 받았는지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여왕은 애써 괜찮다면서, 멀리 물러나라면서 베네사에게 손짓했다.
물러나라며 손짓하는 몸과 달리, 그녀의 마음속은 심장에서 퍼지는 고통으로 비명 지르고 있었다.
고통이 심해질 때마다 루시는 자연스레 한 남자를 떠올렸다.
‘솔라, 솔라시우스!’
그녀는 심장에 박힌 비수를 잡고서 애타게 솔라시우스를 불렀다.
* * *
제국의 황궁, 황금 옥좌 바로 앞 바닥.
파아앗.
최고급 대리석으로 지은 황궁의 바닥에서 빛이 일었다.
장거리 공간 이동을 상징하는 마법진이 빛과 함께 바닥에 새겨졌고 그 위로 섬광이 터진다.
“꺄아아아악!”
섬광 속에서 한 여인의 애절한 비명이 새어 나왔다.
빛이 사그라들고 마법진 위로 엉망이 된 옥타나가 모습을 드러냈다.
머리는 산발이 되었고, 붉은 눈동자는 광인처럼 떨렸고, 고운 미간과 입가는 진하게 일그러졌다.
무엇보다 그녀의 심장에는 아직 빛의 검이 박혀 있었다.
“……?!”
악황제 세피로스가 황금 옥좌에 앉아 그런 옥타나를 물끄러미 내려다보고 있었다.
“……!?”
세피로스는 말이 없었다. 그는 옥좌의 팔걸이에 팔을 올려 두고 한 손으로 턱을 괴고 있었다. 옥타나가 고통스러워하든 말든, 크게 신경 쓰지 않는 듯 보였다. 그저 흥미롭다는 눈으로 빛의 검을 관찰할 뿐이다.
“끄으으윽……!”
옥타나는 애절한 눈으로 옥좌에서 자신을 내려다보는 황제를 올려다본다.
“꺼윽……! 꺽!”
그녀는 너무 고통스러운지 숨조차 제대로 쉬지 못했다. 꺼윽, 하는 소리 외에는 단 한 마디도 내뱉지 못했다.
“…….”
고통에 몸부림치는 옥타나를 말없이 관찰하던 악황제 세피로스는 몇 초 후 옥좌에서 일어섰다.
그리고 천천히, 느린 걸음으로 옥타나를 향해 걸어갔다.
세피로스는 맨발이었기에 알현실의 대리석을 밟아도 별다른 소리가 나지 않았다. 그저 사뿐사뿐, 저벅저벅, 발걸음을 옮길 뿐이다.
“이걸 빼 달라고?”
옥타나의 코앞에 도달한 악황제는 부드러운 옥음으로 물었다.
“으으으으.”
거짓의 대마녀는 눈물과 침을 질질 흘리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런 옥타나를 보는 세피로스의 눈빛이 묘했다.
덥석.
세피로스는 옥타나의 부탁대로 빛의 검을 손에 쥐었고 힘을 꽉 쥐고서 뽑을 준비를 했다.
“아아아아악!”
심장에 박힌 검이 움직이려 하자, 옥타나가 어느 때보다 더 커다란 비명을 지르며 온몸을 경련했다.
꾸욱, 꾸욱.
하지만 세피로스는 빛의 검을 뽑지 않았다. 그저 그녀의 심장에 박힌 검을 꾸욱 누르고 빙빙 돌리며 가지고 놀 뿐이다.
뽑아 줄 생각이 전혀 없는 것 같았다.
“……!!”
옥타나는 이제 극심한 고통에 반쯤 정신이 나가 버렸다.
세피로스의 행동은 아까 그녀가 루시에게 했던 짓과 똑같았다.
하지만 느끼는 고통은 빛과 어둠의 상극처럼 옥타나가 더 심하게 느꼈다.
고통이 너무 심하면 느끼지도 못한다고 했던가?
어느새 붉은 눈동자의 초점이 사라지고 잔뜩 일그러진 표정도 무표정하게 펴졌다. 신음을 흘리며 숙였던 고개도 힘을 잃었는지 축 뒤로 처졌다.
“그때 세계수 안에서 태광휘와 싸울 때 한 가지 확실하게 느낀 게 있었어, 옥타나.”
세피로스는 축 처진 옥타나를 인형처럼 흔들면서 말을 걸었다.
“생각보다 태광휘가 강한 것을 말이지. 완성된 묘목을 흡수할 세계수도 꽤 상대하기 힘들 것 같고 말이야.”
악황제는 말을 이었다.
“문제는…… 내가 힘과 권능을 제대로 쓰려면 아직 시간이 더 필요하다는 거야. 하지만 이대로 있다간, 그 시간이 되기도 전에 내가 질 것 같아. 어쩌면 지구에서처럼 소멸될지도 모르지?”
그는 상상만 해도 끔찍하다는 듯 몸서리쳤다.
“그러다 문득 좋은 방법이 하나 떠올랐어. 생각해 보니까 굳이 힘을 모을 때까지 긴 시간을 기다릴 필요가 없더라고?”
세피로스는 축 늘어진 옥타나를 반쯤 안고서 입맛을 다셨다.
“그러니.”
황제는 3초 정도 말을 쉬고는 옥타나를 훑었다. 마치 잘 차려진 정찬을 보는 눈빛이다.
“이런 고통 속에서, 절망 속에서 헤엄치지 말자, 옥타나. 아니, 아낙시아.”
타이르는 듯한 마왕의 속삭임.
“너의 고통, 염원, 내가 전부 끝내 줄 테니, 나와 하나가 되자.”
쩌억! 악황제는 입을 크게 벌렸다. 크게 벌린 입 사이로 짐승처럼 유독 날카롭게 긴 송곳니가 눈에 띄었다.
덥석.
그는 크게 벌린 입을 그대로 옥타나의 목으로 향했다.
꽈드득, 콰악.
이윽고 고기를 크게 베어 문 것 같은 소리가 알현실을 울렸다.
바닥과 벽에 붉은 피가 거칠게 튀었다.
“…….”
옥타나는 이제 더 이상 고통도, 슬픔도, 분노도 느끼지 못했다.
초점을 잃은 눈으로 자신의 목덜미를 뜯고 씹고 삼키는 황제를 보았다. 생물학적으론 자신의 아들이 되는 존재가 어미를 잡아먹고 있었다.
‘결국, 이렇게 되는구나.’
얼마 안 가, 옥타나가 보고 있는 세상이 뿌옇게 변했다.
머릿속은 뿌연 걸 넘어 하얗게 변했고, 희게 변해 버린 머릿속으로 지금까지 살아온 삶의 기억이 주마등처럼 스쳤다.
‘나는…… 시작부터 끝까지 쭉 실패하고 이용당하고 버림받는구나.’
초점을 잃은 붉은 눈동자에서 메마른 눈물이 흘렀고, 그렇게 그녀의 의식은 깊은 심연에 잠겼다.
와그적, 와그적.
알현실에선 그 후로도 한참 동안 식인의 소리가 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