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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여왕의 EX급 방랑기사-110화 (110/212)

제110화

#110.

루한의 변경백, 문라이트 후작가의 장남 프리드리히(프리츠)는 달리고 또 달렸다. 마나를 다루는 수준 높은 기사인 그의 입에서 단내가 날 정도로 뛰고 또 뛰었다.

허억, 허억, 헉, 헉, 끄윽!

당장이라도 숨이 넘어갈 것 같았다. 폐가 찢어질 것 같았다.

그럼에도 그는 발을 멈추지 못했다.

파앗, 파바바밧.

여전히 자신의 뒤를 쫓는 무리가 있었기 때문이다.

참혹하게도 모두 그가 아는 얼굴이다. 바로 영지의 사용인들이었다. 병사, 하인, 하녀, 관리 등등.

얼마 전까지 함께 웃으면서 이야기를 나누던 이들이 자신을 쫓고 있다.

두 눈에는 붉은 안광이 서렸고, 송곳니가 길쭉한 입가에선 광견병 걸린 들개처럼 침을 질질 흘리며, 당장이라도 그를 죽일 기세로 추격 중이다.

‘아버지는…….’

마지막까지 시간을 벌어 주던 아버지 지크문트가 걱정됐다. 소드 마스터답게 끝끝내 정신을 유지하던 분이지만, 저렇게 추격이 따라붙은 것을 보니 아마도 제압당하셨을 거다.

‘제발……!’

아버지를 향한 프리츠의 걱정은 오래가지 못했다. 당장 자기 앞가림도 막막한 상황.

프리츠는 뒤도 돌아보지 못하고 이 악물고 질주했다. 혹여나 저 추격자 무리 중에 그의 아버지가 껴 있다면 너무 절망적이라 다리에 힘이 풀릴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추격자들이 말을 타지 않았다는 점이다. 정확히는 타지 못한 것이지만.

이 영지에서의 모든 가축은 진즉에 피가 뽑혀 죽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프리츠는 지금까지 무사히 도주할 수 있었다. 아슬아슬 잡힐 듯 말 듯.

‘후작령 밖으로만 나가면!’

저 앞에 문라이트 직할령과 변경백 내곽을 구분 짓는 길이 보였다. 그가 알기로 문라이트의 타락한 이들은 후작령 밖으로 나가지 못했다. 이유는 모르지만 지금 당장은 그 사실이 프리츠의 유일한 희망이다. 그래서 프리츠는 간절한 눈으로 달리기를 멈추지 않았다.

파아아앗.

하지만 그런 프리드리히의 도주는 후작령 경계선을 막 밟자마자 멈춰 버렸다.

“?!”

경계를 나누는 길목에 한 여인이 분홍빛 기운을 넘실거리며 서 있었기 때문이다.

“어딜 가십니까, 오라버니?”

말투는 여기사의 딱딱한 말투. 하지만 화자는 말투와 어울리지 않게 생겼다.

분홍 머리에 분홍 눈동자는 예전보다 좀 더 짙고 붉은 느낌이다. 요염함과 퇴폐미가 여기까지 느껴진다.

“……!”

프리츠는 자신의 앞을 막은 여인을 보곤 절망 어린 표정을 지었다.

“말해 보십시오. 어딜 그렇게 가십니까, 오라버니? 이 동생이 묻잖아요?”

그런 프리츠를 향해 유리아가 다시 한번 물었다.

“……넌 유리아가 아니야.”

한때나마 세상에서 가장 사랑스러웠던 여동생을 향해, 프리츠는 탄식을 담아 고개를 저을 뿐이다. 저 타락한 눈이 너무나 보기 싫어 애써 눈도 마주치지 않았다.

저벅, 저벅, 저벅, 척.

어느새 멈춰 선 프리츠의 주위로 수십의 인영이 에워쌌다.

“클클클, 어차피 잡힐 거, 왜 이리 사람들을 귀찮게 하는 겁니까? 프리츠 공.”

에워싼 사람들 중에는 마법사 차림의 남성도 보였다. 유일하게 멀쩡한 안색을 하고 있는 남자다.

‘지하드!’

프리드리히는 유독 저 마법사를 죽일 듯이 노려보았다.

지하드 아케인, 세간에는 실력 높은 치료사로 알려진 마법사. 하지만 실상은 온갖 더러운 주술을 거리낌 없이 다루는 흑마법사.

어쩌면 이 모든 일의 원흉이기도 한 존재!

‘저주받을 흑마법사! 네놈은 반드시 내가 죽이고 만다!’

프리츠는 목숨을 버릴 각오를 하고는 검을 뽑았다. 설령 죽더라도 저 흑마법사만큼은 죽여 버릴 것이다.

“쯧! 끝까지 반항하는군. 이들처럼 얌전히 내 아들을 위한 재료나 될 것이지.”

그런 프리츠의 살기를 느낀 지하드가 작게 혀를 찬다.

“제압하라.”

지하드 옆에 있던 유리아가 어떤 감정도 담기지 않은 차가운 어조로 수하들에게 명을 내린다.

스르릉, 처억.

그러자 붉은 안광을 흘리는 이들이 무기를 꺼내 들고는 프리츠에게 겨눴다.

무기를 겨눈 이들 중에는 유리아도 있었다.

그들은 살기를 프리츠에게 뿌렸다.

“날 죽일 거냐?”

프리츠는 짙은 씁쓸함을 느끼며 유리아를 향해 물었다.

“죽이다니요? 여긴 변경백 내곽입니다. 죽이진 않고 팔다리만 잘라 놓겠습니다. 그러다가 얌전해지면, 지하드 님이 더 멋진 팔다리로 붙여 줄 겁니다.”

유리아는 요염한 미소를 지으며 어깨를 으쓱했다.

“흥! 과연 그게 쉬울까? 날 죽일 각오로 덤벼야 할 거다. 안 그러면 너희가 죽을 테니!”

이에 프리츠는 검에 마나를 집중하며 외쳤다. 아버지도 끝내 막지 못한 저들을 과연 자신이 이기는 건 불가능하다. 애초에 포기했다.

‘다행히 해가 중천에 떴어. 놈들은 햇빛 아래에선 힘을 잘 쓰지 못해. 저 흑마법사 놈은 죽일 수 있을지 몰라.’

대신 오직 한 가지만 목표로 하기로 했다. 저 포위를 뚫고 흑마법사를 죽일 수 있기를. 하지만 과연 할 수 있을까? 아무리 해가 하늘 위에 떴어도 말이다. 온갖 우려가 뇌리를 스친다.

“죽일 각오라……. 애초에 프리츠 오라버니는 그렇게 강하지도 않아서요.”

발악하는 오라비를 보는 유리아의 얼굴에 매혹적인 조소가 흐른다. 순수하고 순결했던 처녀의 흔적은 이제 온데간데없다.

“무엇보다 괜히 살육을 벌였다가 냉동 인간이 되고 싶진 않습니다. 여기는 변경백 내곽, 설원의 가호가 짙…… 음?!”

그녀는 말을 하다가 갑자기 멈췄다. 그리고 고개를 갸웃한다.

“…….”

마찬가지로 흑마법사 지하드 또한 눈을 크게 뜨고는 멍하니 하늘을 올려다본다.

“어쨌든, 그래서 어딜 가시는 거죠? 사지를 자르기 전에 하는 마지막 질문입니다. 어떤 대답을 하느냐에 따라 오라버니의 운명이 결정될 거예요.”

유리아는 지하드와 달리 고개를 한번 갸웃한 것으로 이변을 넘겼다. 그녀의 관심사는 여전히 프리츠에게 있는 듯하다.

“…….”

갑작스러운 분위기 변화에 프리츠는 애써 침착함을 유지하며 입을 열었다. 어차피 잡히거나 죽을 거, 자신의 대답으로 저들이 어떤 반응을 보일지 궁금했기 때문이다.

“로안…… 로안 샬루트를 만나러 간다.”

“?!”

프리츠의 입에서 로안이 언급되자 처음으로 유리아의 얼굴이 굳었다.

“그가 널 막을 것이다! 저 사악한 흑마법사에게 광휘의 검을 내릴 것이다!”

“…….”

프리드리히는 이어서 외쳤고, 유리아는 침묵으로 반응했다.

“호오, 로안 샬루트라……. 그자가 있었지.”

옆에 있던 흑마법사 지하드가 고개를 하늘에서 프리츠에게로 돌리곤 중얼거렸다.

적막이 에워싼 이들 사이에서 흘렀다.

“내가 여기서 죽는다고 해도! 여왕께서! 광휘의 기사가! 언젠간 반드시 너희들을 징벌할 것이다!”

유독 말이 줄어든 유리아를 보면서, 사뭇 진지해진 지하드를 보면서, 프리츠는 선언했다. 유언을 남기듯이.

‘하지만 그 전에 네놈만큼은 저승길 동무로 삼겠다!’

그는 그렇게 외치면서 흑마법사 지하드를 죽일 준비를 했다.

잡혔을 때를 대비해 입안의 독약을 혀로 조심히 굴렸다.

‘제일 먼저 단검을 던진다!’

검을 들지 않은 왼손으로 단검을 던지려 했다. 대상은 눈앞의 흑마법사. 단번에 목을 맞출 것이다.

처걱.

손목에 숨긴 단검을 슬그머니 반쯤 꺼냈다.

꿀꺽.

긴장감에 자기도 모르게 침을 삼키며 식은땀이 흐른다.

“…….”

그렇게 막 적막이 깨지기 직전.

스스스스스.

갑자기 안개가 갑자기 몰아쳤다. 불그스름한 안개가.

“?!”

연한 붉은 안개 속에서 프리츠는 어리둥절해서 주위를 둘러보았다.

‘어디냐! 빌어먹을 이런 식으로 나오다니!’

처음에는 이것을 공격인 것으로 해석하고는 온몸에 마나를 펼쳤다. 여차하면 단검을 던지기 위해서.

“……?”

그러나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짙은 안개 안에서는 어떤 것도 보이지 않았고, 어떤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안개가 깔린 지 5분이 되었고, 서서히 안개가 걷혔다.

깨끗해진 길과 들판이 펼쳐졌고 프리츠의 주위엔 아무도 없었다.

털썩.

긴장이 풀린 그는 자신도 모르게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후으으…….”

안도와 의문의 한숨이 나왔다.

왜 떠난 것일까? 왜 자신을 내버려 둔 것일까? 유리아에게 남은 마지막 인격이 로안이라는 이름을 듣자 반응한 것일까? 그렇다면 흑마법사 지하드는 왜?!

온갖 의문이 남았지만, 자리에 앉아 추리를 하기에는 상황이 촉박했다.

프리츠는 침을 꿀꺽 삼키고는 후들거리는 다리에 힘을 줬다.

그리곤 터덜터덜 요정 숲 방향으로 뛰었다.

삐이이이이.

달리는 프리츠의 머리 위로 그리핀의 울음소리가 들렸다.

그리핀의 울음소리와 그림자가 프리츠를 향해 점점 가까이 다가왔다.

* * *

보기만 해도 풀 내음이 가득할 것 같은 녹색 들판. 하늘은 어찌나 푸르고 화창한지 절로 미소가 지어진다.

하지만 정작 이 들판에 서 있는 솔라의 얼굴에는 미소보다는 의아함이 보였다.

“루나……?”

솔라는 눈앞에 서 있는 루나를 보면서 고개를 갸웃했다.

“왜 그런 복장을?”

루나시르네는 검은 머리에 검은 눈동자를 하고 있었지만, 입고 있는 옷은 전혀 달랐다.

평소의 검은 마녀 옷이 아닌 순백의 드레스를 입었다.

그것도 지구에서 볼법한 순백의 웨딩드레스다. 머리에는 면사포 대신 세계수 잎으로 만든 월계관을 썼다.

어이없는 눈을 하는 솔라를 향해, 루나가 수줍게 고개를 들었다.

“오라버니! 나 좋아하는 남자가 생겼어!”

고개를 든 루나가 수줍게 홍조 서린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남자?!”

그런 동생의 말에 솔라는 더더욱 기가 찼다.

“응! 그런데 그 남자, 나이가 좀 많아.”

“……몇 살인데?”

“자세히는 몰라. 근데 최소 200살은 넘었을 거야.”

“살아는 있는 거냐?”

점점 심연으로 흐르는 루나의 말에 솔라는 두통을 느끼며 물었다.

“응, 아주 젊고 싱싱해! 엘프거든.”

그의 물음에 루나는 눈을 빛내며 답했고, 동시에 루나 뒤에서 엘프가 등장한다.

흑발에 붉은 눈동자를 한, 솔라가 잘 아는 엘프였다.

“형제여, 그렇게 되었다. 아니지, 처남이라고 불러야 하나?”

로뮤의 복장 또한 기가 막혔다. 지구의 턱시도를 입고 있었다.

“우리 둘의 사랑, 허락해 줘, 오라버니!”

“앞으로 나를 로 서방이라고 불러 줘, 처남.”

로뮤와 루나는 서로 찰싹 달라붙어서는 솔라를 향해 웃어 보일 뿐이다.

“……로 서방? 처남?!”

솔라는 점점 세상이 회전하는 것을 느끼며 어지러움을 느꼈다.

그러다가 어느새 시야가 암전됨을 느꼈다.

시야가 검게 물들고 얼마나 지났을까?

“……나세요! 일어나세요!”

솔라시우스는 누군가가 자신을 잡고 흔드는 것을 느꼈다.

“?!”

자신을 깨우는 소리에 그는 여전히 놀란 심장을 진정시키며 상체를 일으켰다.

‘꿈이었군.’

부스스한 황금빛 머리카락을 손으로 다듬으며 멍하니 주위를 둘러보았다. 솔라의 바로 옆에는 자신을 깨웠던 어린 소녀가 있었다.

“일어나셨다!”

날이 갈수록 건강해지는 붉은 머리칼의 소녀 쥴리아가 솔라를 보며 밝게 웃고 있다.

“잘 갔다 왔니?”

잠에서 깬 솔라는 쥴리아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물었다.

“네!”

쥴리아는 기다렸다는 듯 눈을 빛내며 밝게 대답했다.

‘깜빡 잠들었나 보군.’

리리아의 부름에 세계수 정원에 가서 루시푸르네와 만났었다.

그리고 다시 집으로 와서 쉬다가 자신도 모르게 낮잠을 잔 모양이다.

그나저나 정말 무방비하게 잤나 싶었다. 쥴리아가 아무리 자신과 비슷한 성질을 지녔다고 해도 말이다.

이렇게 가까이 올 때까지 몰랐다니. 간만에 이토록 깊게 잤다.

“어? 일어났다고?!”

쥴리아의 머리를 쓰다듬고 있는데 방문 쪽에서 소리가 들렸다.

“로안, 이렇게 무방비하게 자다니, 너답지 않아.”

루나와 로뮤의 목소리다. 둘은 반갑게 웃으며 솔라를 맞이했다.

“쇼핑은 다 끝났나?”

솔라는 아까의 생생했던 꿈을 애써 무시하며 미소로 두 사람을 반겼다.

“쇼핑? 장보기를 말하는 건가? 제법 괜찮은 비유군.”

“응! 아주 제대로 털고 왔지롱~!”

솔라의 물음에 로뮤와 루나가 목과 손, 머리에 잔뜩 걸친 장신구를 자랑하며 말했다.

분명 아공간 인벤토리가 있음에도 저렇게 몸에 낀 것은 둘 중 하나다.

인벤토리에 들어가지 못하는 특수 제작된 마도구거나, 아니면 인벤토리가 이미 꽉 차서 더 이상 넣지 못한 것이거나. 어쩌면 둘 다일지도.

“적어도 300년은 인간 세계에서 돈 걱정할 필요 없을 거야.”

온몸에 장신구를 주렁주렁 건 꼴은 루나 옆에 있는 로뮤도 마찬가지였다.

“……?”

묘하게 닮은 두 사람의 행색에 솔라는 알 수 없는 데자뷔를 느꼈다.

‘설마?’

애써 의식의 저편으로 넘겼던 꿈속의 내용이 다시 떠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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