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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여왕의 EX급 방랑기사-116화 (116/212)

제116화

#116.

멍하다. 슬프다. 의욕이 없다. 허무하다.

언제부터 이런 상태였을까?

아마 볼카 요새를 막 떠났을 때부터였을 것이다.

그렇게 필사적으로 버텼지만 결국 무너져 내렸고, 애타게 도움을 요청했지만 그 누구도 알아주지 않았다.

‘알파’라는 악마에게 한 번 장악당한 몸은 더 이상 자신의 몸이 아니었다.

그때부터 유리아에게 진정한 지옥이 시작되었다.

직할령에 도착하자, 그녀를 반긴 것은 둘째 오라버니와 어머니였다.

늘 자신만 보면 시집가라고 잔소리를 늘어놓던 어머니는 유리아의 상사병을 들은 모양인지 별소리를 하지 않았다.

차라리 이전처럼 잔소리라도 해 주시지, 그래서 몸을 빼앗긴 자신의 상태를 알아봐 주시길 바라고 또 바랐다.

진분홍으로 변한 눈동자로 애타게 어머니를 바라봤지만, 후작 부인은 알아채지 못했다.

“금발 금안에 착하고 능력 있고 잘생긴 남자라. 우리 딸이 이렇게 눈이 높았구나? 걱정 말렴. 이 어미가 대륙 전체를 뒤져서라도 찾아보마!”

유리아의 어머니는 딸이 마음에 두었다는 로안 샬루트와 비슷한 신랑감을 찾는 데 정신없어 보였다.

그래도 둘째 오라버니는 좀 달랐다.

“유리아…… 괜찮니?”

아버지를 대신해 영지를 관리하던 둘째 알버트는 어머니와 달리, 유리아에게 집중했다.

“너, 눈동자와 머리 색이?”

그는 좀 더 진해진 유리아의 색을 바로 알아챘다.

“너무 걱정 말렴. 왕도에서 실력 있는 치료사를 불렀단다. 지하드라는 마법사다. 너도 이름은 들어 봤을 거야.”

왕도에서 왔다는 한 치료계 마법사를 소개했다.

“클클클, 처음 뵙겠습니다. 지하드 아케인이라고 합니다.”

!!

그 마법사를 본 유리아는 심장이 거세게 뛰는 것을 느꼈다.

정확히는 자신의 몸을 거의 장악한 ‘알파’라는 악마의 반응이었다.

-이거~ 아주 쉬워지겠어?

그녀의 머릿속으로 알파의 웃음소리가 메아리처럼 울렸다.

그날 이후부터 유리아는 진정한 지옥을 목도하게 되었다.

첫 번째 타락의 대상은 둘째 오라비인 알버트였다.

지하드와 유리아 사이에서 흐르는 이상한 분위기를 눈치챈 그가 제일 먼저 유리아에게 가까이 다가왔다.

“유리아, 저 지하드라는 마법사가 무슨 짓을 했니? 여긴 너와 나 둘밖에 없으니까 걱정 말고 말하렴.”

마침 단둘뿐이었기에,

“오라버니, 잠시 가까이 귀 좀…….”

콰드득!

“아악!! 유, 유리아?!”

손쉽게 감염시킬 수 있었다.

그녀의 송곳니가 알버트의 목을 물었고, 유리아의 몸속에 있던 알파의 일부가 주입되었다.

처음이 힘들었지, 그다음부터는 순식간이었다.

“공, 공자님?! 꺄아악!”

뒤이어 알버트의 수발을 들던 하녀가 감염되었다.

“마리? 너 괜찮아? 잠깐, 어딜 만지는…… 꺄아악!”

“안나? 왜 단둘이 보자…… 끄아악!”

저택에서 일하는 하녀와 하인 대부분이 하룻밤 사이에 흡혈귀가 되었다.

“놔, 놔라! 네 이년! 이게 무슨…… 아아악!”

전염의 파도는 3일도 안 돼 후작 부인까지 덮쳤다.

저택에서 시작된 피의 전염은 마치 악덕 사채업자의 복리처럼 빠르게, 기하급수적으로 퍼졌다.

그렇게 유리아는 온전한 정신으로, 그러나 마음대로 움직여지지 않는 몸으로, 사랑하는 가족, 백성, 영지가 몰락하는 과정을 그대로 봐야만 했다.

‘안 돼! 제발! 이러지 마!’

속으로 필사적으로 애원했고 외쳤다. 하지만 그녀의 몸은 더 이상 그녀의 것이 아니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알파의 영역이 직할령을 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그 이상 가면 감염자들은 힘을 잃고 픽픽 쓰러졌다.

“아쉽군. 지금 내 힘으론 이게 한계야. 숙주도 더 만들었다간 순수성을 잃을 것 같아.”

감염자도 더 늘릴 수 없었다.

“곧 도착한다는 이 땅의 영주와 기사들을 흡수하는 것으로 머릿수 늘리는 것도 멈춰야겠어.”

알파는 빠르게 자신의 한계를 인정했고, 유리아의 몸으로 지하드와 태연히 대화를 나눴다.

“그런가? 어쩔 수 없지. 그래도 충분히 제물이 모였어. 무엇보다 봄의 축복을 받은 심장이 아주 탐스럽게 잘 크고 있군.”

흑마법사 지하드는 사실상 문라이트 직할령의 영주가 되었다.

“이제 기다리기만 하면 되겠어. 마법사, 그대의 아이가 깨어난다면 계약은 성립되는 것이고, 나는 잃어버린 모든 권능을 되찾게 되겠지.”

둘 사이에 체결된 계약. 그리고 그 계약의 보상 때문인지 알파는 지하드를 적극 도왔다.

“그래, 내 아들은 아주 건강하고 막강한 존재로 부활할 것이야. 하지만 명심해라, 알파! 내 아들은 결코 네놈의 숙주가 되어선 안 돼!”

“걱정 마. 들어가라 애원해도 안 갈 테니까. 지금 내가 머물고 있는 유리아라는 여자의 몸은 정말이지 좋아. 봄의 축복을 가득 받은 처녀라 그런지 잠재력이 아주 무궁무진해.”

알파는 유리아의 몸을 멋대로 움직이고 만지며 칭찬을 나열했다.

“권능을 되찾는다면 일족을 일굴 여왕으로 아주 적합할 정도야. 이 몸을 버리고 다른 몸으로 갈 생각은 없어, 키키키키키.”

“그렇다면 다행이고. 크흐흐흐흐.”

둘은 피로 범벅된 만찬장 중심에서 음침하게 웃었다.

‘……!’

유리아는 절망 속에서 힘없이 지켜볼 뿐이었다.

지하드가 왕도에서 가져온 순백의 관 앞에서, 유리아는 매일 끔찍한 마법 실험을 받아야만 했다. 하루에도 몇 번씩 가슴을 드러내곤 산 채로 해부당해야 했으며, 셀 수 없이 채혈을 당해야만 했다.

물론, 알파에 의해 강력해진 몸은 그녀에게 엄청난 재생력과 생명력을 주었기에, 유리아는 몇 번이나 흉부가 갈라짐에도 죽지 않았다.

‘아아아아악!!’

하지만 그것이 고통을 줄여 준다거나 심리적 공포를 없애 준다는 뜻은 결코 아니었다.

그녀는 매일, 매 순간 비명과 눈물을 흘려야만 했다.

‘제발…… 누구라도 좋으니까 제발…….’

나를 죽여 줘.

유리아는 하염없이 기도했다. 얼굴 한 번 본 적 없는 루한의 여왕도 찾았고, 상상 속의 천신이나 세계수도 찾았다.

그리고 언제나 기도의 종착점은 한 남자를 애타게 부르는 것으로 끝이 났다.

‘로안! 로안! 로안!’

광휘를 휘날리는 금발 금안의 방랑 기사를 유리아는 간절히 불렀다.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온갖 충격과 고통에 유리아의 정신이 마모되고 폐허가 되었을 즈음.

“유리아!”

그녀의 기도는 마침내 이뤄졌다.

하지만 늦었다. 그것도 많이.

* * *

“유리아! 정신 차려.”

다소 강한 어조의 목소리가 솔라의 입에서 나왔다.

“…….”

하지만 붉은 드레스를 입고 심장에 탯줄처럼 붉은 실을 매단 유리아는 벙어리라도 되었는지 말이 없었다.

그저 광인처럼 소리 없이 웃을 뿐이고, 망령에게 몸을 빼앗긴 처녀처럼 눈동자를 덜덜 떨고 있었다.

“아! 왜 이리 소극적인가 싶더니, 이 몸의 원래 주인 때문에 그런가?”

소리 없이 광소 짓던 유리아의 입에서 처음으로 목소리가 나왔다.

“그 유리아라는 여자는 이제 없어.”

분명 그녀의 목소리지만 전혀 그녀 같지 않았다.

“그리고 이렇게 시간을 끌어 봤자 좋을 게 없을 텐데?”

촤아앗.

그 말과 함께 유리아의 양팔이 빠르고 크게 솔라에게 휘둘러졌다.

눈으로 좇기 힘든 습격이지만 솔라는 능숙하게 그녀의 공격을 피했다.

지금 솔라와 유리아는 싸우고 있었다.

유리아는 양손에 검처럼 생긴 것을 들고 있었다. 검의 생김새는 역겨웠다. 저택 앞 키메라 정원에서 본 것과 비슷한, 피와 핏줄이 징그럽게 얽히고설킨 길고 뾰족한 촉수 같은 검이다.

촤라라락.

솔라가 공격을 피하고 뒤로 거리를 벌리자, 유리아의 양손에 펼쳐진 검이 더 길어졌다. 이제는 검이 아닌 채찍이라고 봐야 할 것 같다.

“넌 누구지? 뱀피르 계열 같은데.”

솔라는 유리아의 몸을 빼앗은 알파라는 악마를 관찰하며 물었다. 지구에서도 비슷한 타입의 괴수를 여럿 상대한 적이 있었다.

“글쎄? 누굴까?”

솔라의 물음에 악마는 대답을 흘렸다.

“지금은 ‘알파’라고 불리지. 난 그 이름이 마음에 들어.”

쏴아아아악!

알파는 솔라를 향해 길게 늘어난 채찍을 휘둘렀다.

쏴아악! 쏴앗!

거침없이 날아오는 공격. 하지만 솔라에겐 시시할 뿐.

그의 금색 눈동자는 오직 유리아를 어떻게 제압할지를 계산 중이다.

‘저 탯줄처럼 생긴 줄.’

제일 먼저 유리아의 심장과 하얀 관을 연결한 붉은 핏줄에 시선이 갔다. 어떻게 보면 탯줄에 가깝다.

“이걸 끊으려고? 아무리 너라도 그건 힘들걸?”

그런 솔라의 의도를 눈치챈 알파가 비릿한 어조로 말했다.

타앗, 서거걱!

알파의 조소에 응답이라도 하듯. 솔라는 태양검을 휘둘러 유리아와 관을 잇는 줄을 끊으려 했다.

그리고 알파는 그런 솔라의 행동을 어디 한번 해보라는 듯 대놓고 구경했다.

파아앗!

솔라의 태양검은 저 핏줄을 자르지 못했다.

아까 불살검으로 지크문트의 옆구리를 찔렀다가 튕겨 나왔을 때처럼, 빛의 검이 허무하게 튕겨졌다.

‘결국 끼게 되는군.’

솔라는 미간을 구기곤 급히 태양샘 반지 하나를 검지에 꼈다.

파아아앗!!

그리고 다시 한번 태양검을 펼쳐 그 핏줄을 내리쳤다.

“……!”

하지만 핏줄은 여전히 그의 검격을 튕겨 냈다.

“로안 샬루트라고 했나? 가증스러운 빛의 대리자야, 네가 할 수 있는 방법은 둘뿐이야. 이 아이를 지금이라도 깔끔히 죽여 완전한 부활을 막거나…….”

알파의 비릿한 말에 솔라는 눈살을 찌푸렸다.

“이대로 저 괴물이 탄생하길 기다린 후에, 권능을 되찾은 내가 일굴 일족의 가신이 되거나.”

고대의 악마조차도 괴물이라고 칭하는 존재가 저 앞에서 꿈틀거리고 있다. 아마 자신의 힘이 통하지 않은 이유에는 저 관 속의 존재의 영향일 터.

“클클클클, 봄의 축복을 받은 여인과 고대의 흡혈 악마, 거기다 이 영지의 무수한 생명들까지.”

솔라의 검격이 두 번씩이나 실패하자, 이를 보던 흑마법사 지하드가 대화에 끼어든다.

“부활을 앞둔 내 아들은 단순한 역작이 아니야. 인류의 역작이지. 인간이 만들어 낸 신과 같은 존재가 될 것이야.”

어서, 어서 깨어나거라, 어서!

지하드는 사랑스럽다는 눈으로 덜컹거리는 하얀 관을 쓰다듬었다.

쏴아아앗.

솔라는 그런 지하드를 향해 태양검을 휘둘러 검기를 날렸다.

파앗!

하지만 하얀 관에서 뿜어져 나오는 배리어가 그의 검기를 막았다. 태양샘 반지를 낀 오리지널의 힘이었음에도 말이다.

이를 본 솔라는 생각이 복잡해졌다.

‘도대체 어디서 저딴 게…….’

얼핏 봐도 지구에서 척살한 마왕보다 에너지가 강했다. 세계수 속에서 싸웠던 마왕 세피로스보다도 강해 보였다.

고대 악마의 힘을 이용했다고 해도 마왕을 능가하는 괴물을 창조하다니.

인간의 집념이 이렇게나 위험하고 대단하다는 사실을 솔라는 새삼 느꼈다.

‘시간이 없어.’

저 악마의 말처럼 선택해야 한다. 이대로 저 정체를 알 수 없는 인공신의 탄생을 방치할지, 아니면 유리아를 죽여 최악을 막을지.

‘……결국 이렇게 되나?’

솔라의 금색 눈동자에 체념이 서렸다.

그는 유리아의 분홍 눈동자를 응시했다.

둘의 눈이 마주쳤다.

두려움에 눈물 흘리던 유리아의 진분홍 눈동자에 체념의 감정이 서렸다.

미안함과 감사함 그리고 안도가 담긴 눈빛이었다.

‘어서요, 로안. 어서 절 죽여 주세요.’

절 더 큰 죄악에서부터 구해 주세요. 안식을 주세요.

유리아는 눈빛으로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그녀는 간신히 눈을 깜빡이는 것으로 끄덕임을 대신했다.

“…….”

그런 유리아의 감정을 읽은 솔라는 기분이 착잡해졌다.

‘대가인가?’

루나시르네를 구하고 세계수 묘목을 완성했다. 로뮤를 죽음의 운명에서 건져 냈다. 루시푸르네의 설원의 저주 또한 해주하기 직전이다.

하지만 모두를 구원할 수는 없는 법.

그리고 세상에 공짜는 없는 법.

지금 이 순간, 눈앞의 유리아가 그 대가인 것처럼 느껴졌다.

“…….”

그랬기에 솔라시우스, 태광휘는 불쾌했다. 지구에서 지겹도록 겪었던 차악의 선택이 재현됐기 때문이다.

“호오? 드디어 결심이 서셨나? 이 유리아라는 몸을 죽이려고?”

솔라의 기세가 바뀐 것을 느낀 알파가 묘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그게 쉬울까?”

이윽고 유리아의 몸에도 지하드에게 펼쳐졌던 배리어가 똑같이 생성됐다. 둘은 잘 알고 있다. 버티기만 해도 이긴다는 것을.

솔라는 무심히 지하드와 하얀색 관, 알파를 훑어보고는 입을 열었다.

“아니.”

꾸욱, 꾹.

짧게 한마디를 뱉은 그는 한 손에 꼭 쥐고 있던 두 번째 태양샘 반지를 꺼냈다. 그리곤 약지에 꼈다.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고오오오오!!

두 개의 태양샘 반지를 낀 그의 몸에서 거대한 빛과 열기가 치솟는다.

윈테이라의 냉기가 급속도로 녹아 없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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