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19화
#119.
루한의 수도. 순백궁, 왕궁의 가장 깊숙한 곳 여왕의 침실.
“콜록, 콜록…… 쿨럭!”
마른기침 소리가 요란하다.
“흐으으.”
기침 소리에 이어 떨리는 신음 소리가 침실의 적막을 적셨다.
여왕 루시푸르네는 오한이라도 온 것처럼 몸을 오들오들 떨었다. 방금의 기침으로 입 주위와 옷에 피가 묻었다.
뚜욱, 부스슷.
루시는 손등으로 입가에 얼어붙은 피를 훔쳤다.
사방은 고요했다.
설원의 저주가 심해졌고 설원의 가호가 무너졌기 때문이다.
이젠 베네사를 비롯한 어떤 시녀들도 20미터 이내로 접근하지 못한다. 화로를 켠 루카스도 15미터 거리에서 30분 정도가 한계다.
왕실 기사단장 하이마와 섭정 루카스는 설원의 가호가 사라진 왕국을 관리하느라 정신없다.
날이 갈수록 심해지는 몸 상태, 보지 않아도 짐작되는 왕국의 혼란, 걱정거리는 태산이었지만 이 중 루시가 가장 신경 쓰는 것은 따로 있었다.
“윈테이라의 냉기가……!”
그녀는 병색이 완연한 얼굴로 침대 옆에 방치된 보주를 보았다.
보주에서 윈테이라의 냉기가 바닥났음을 알려 왔다.
가뜩이나 창백한 여왕의 얼굴에 근심이 그늘처럼 드리웠다.
“솔라…… 솔라시우스……!”
루시는 침실 끝 구석에 쪼그려 앉은 상태로 눈을 질끈 감았다.
“부디 무사하기를…….”
기도하듯 솔라의 무탈을 빌고 빌었다.
솔라시우스의 상태가 좋지 못한 것 같자, 설원의 저주가 이토록 심해지자, 괜히 회귀 전의 과오가 주마등처럼 밀려왔다.
* * *
회귀 전, 사그라진 세계.
솔라시우스, 당시에는 망명 황족 로안 샬루트로 알려진 방랑 기사.
여왕 루시푸르네는 그런 로안 샬루트를 의심하고 오해했었다.
재상 아리아 데스모의 이간질로 시작된 이 불화는 이제 걷잡을 수 없는 지경이 되었다.
“로안 샬루트가 하는 모든 행동을 방해하라! 여차하면…… 죽여도 좋다.”
루시푸르네는 로안의 행동을 감시하고 방해했다.
마음만 먹으면 바로 처형도 가능했지만 일부러 그러지 않았다.
복수의 의미도 있었지만, 반쯤 망가지고 피폐해진 그녀의 정신이 가학적인 유흥을 원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어쩌면…… 로안을 향한 실낱같은 믿음이 남아 있었는지도 모른다.
로안 또한 이를 알았다. 여동생을 찾는 자신의 행동을 루한이라는 왕국 전체가 대놓고 방해 중이라는 것을. 그리고 그 중심에는 재상 아리아 데스모와 여왕 루시푸르네가 있다는 것을.
“기사단장 하이마, 이번에는 당신까지 방해하러 오신 겁니까?”
심지어 이번엔 기사단장 하이마까지 와서 로안의 일을 막아 세웠다.
“방해하는 척만 할 걸세.”
이에, 하이마는 머쓱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실제로 하이마는 로안이 머무는 방안에서 멀뚱히 서 있을 뿐 별다른 행동을 하지 않았다.
“자, 받게나. 전에 부탁한 죽음의 대마녀과 관련된 자료야.”
그는 방해하는 대신, 손에 든 서류 뭉치를 로안에게 건넸다.
“그리고 이건 내가 개인적으로 몰래 조사한 자료네. 그대의 여동생을 찾는 데 도움이 되길 바라네.”
이어서 하이마는 품속에서도 무언가를 꺼냈다. 파피루스로 된 문서였다. 그는 이것을 은밀히 로안에게 건넸다.
“……감사합니다.”
하이마와 로안은 최전방에서 함께 싸웠던 전우였다. 그래서인지 그는 왕궁에서 로안을 호의적으로 대하는 몇 안 되는 인물이었다.
기사단장 하이마의 선물에 솔라는 간만에 얼굴에 옅은 미소를 띠었다.
“차라도 마시고 가시지요? 요정 숲에서 가져온 차가 아직 좀 남았습니다. 바로 나가면 오히려 의심을 살 테니까요.”
그는 답례로 왕실 기사단장에게 차를 대접했다.
“그럴까?”
하이마는 거절하지 않고 테이블에 앉아 다과를 음미했다.
둘은 잠시 차를 마시며 향과 맛을 즐겼다.
“교국이 멸망했다고 하지?”
그렇게 반 정도 마시고서 하이마가 먼저 입을 열었다.
부드럽지만 삭막한 주제였다.
“사천왕 중 하나인 죽음의 대마녀가 그랬다고 하더군요.”
“다음은 우리겠군.”
“우리야 설원의 가호가 있잖습니까?”
“그 가호가 점점 약해지고 있지 않나. 반대로 설원의 저주는…….”
하이마는 말을 하다 멈췄다. 그리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혹시나 듣는 귀가 있을까 싶었나 보다.
“그거 아나? 벌써 스무 명이 죽었네, 왕실 기사들이 말이야. 요 근래 제국의 첩자가 엄청 늘었어. 왕도는 지금 소리 없는 전쟁 중이네. 설원의 가호가 튼튼할 때는 상상도 못 했던 침략이 벌써 시작되고 있어.”
그는 대화의 주제를 살짝 돌리며 말을 이었다.
“죽음의 대마녀가 루한에 침입하지 말라는 법은 없어. 과거 변경백에서도 그녀의 짓으로 추정되는 학살이 있었으니까.”
그러다가 더욱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나는…… 재상이 수상해.”
은밀하지만 확신에 찬 어조로, 복잡함이 담긴 눈으로.
“여왕 폐하께서는 뭐라고 하십니까?”
하이마의 말에 로안은 크게 공감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폐하를 알현할 수 있는 사람은 재상밖에 없네. 나를 포함한 왕국의 대신들은 전부 재상을 통해 폐하께 보고를 올려야 하지.”
중년에서 노년 사이를 걷고 있는 기사는 말을 이었다.
“그리고 알다시피, 폐하께서는 어떤 답도 내주지 않으셨네. 재상은 마나에 맹세코 우리의 보고를 여왕께 전했다고 했지만…… 나는…… 모르겠네.”
마나의 맹세까지 해 버렸다. 마녀와 마법사에게 마나의 맹세는 매우 숭고한 것이다. 심지어 상대는 이 나라의 재상이다. 마녀회의 실질적인 수장이다. 그러니 의심할 수 없다. 설령 수상하더라도 의심하는 티를 내선 안 된다.
“제가 도울 일이 있겠습니까?”
“자네는 가만히 있는 게 도와주는 거야. 그냥 지금처럼 동생의 행방이나 찾게. 나중에 동생을 찾으면 첩자 사냥이나 거들든가.”
“하지만…….”
“로안 경, 그대도 알다시피 지금 폐하와 재상은 자네를 제국의 첩자로 확신 중이네. 억울한 것은 알겠지만, 현실이 그래.”
“…….”
하이마의 말에 로안은 답답하고 안타까운 표정을 지었다.
“괜히 돕는다고 나서게 되면 그들의 시선만 끌게 될 걸세. 자칫 잘못하면 나와 시녀장의 목숨도 위험해.”
“시녀장이라고 하면……?”
“그래, 시녀장 베네사 또한 나를 도와주기로 했어. 이제는 시녀장과 시녀들의 접근도 허락하지 않는 폐하지만, 적어도 왕궁에서 가장 자유롭게 다닐 수 있는 신분인 것은 변함없으니까.”
하이마는 차를 벌컥 한입에 다 마시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잘 마셨네. 그럼, 행운을 빌지.”
그는 로안의 어깨를 툭툭 두들기곤 방문을 나섰다.
하이마가 사라지고, 로안 홀로 남은 적막한 방.
“하아…….”
지친 한숨이 그의 입에서 길게 흘렀다.
서럽고 억울하고 답답하다.
여왕을 만나기 위해 몇 번이나 알현실을 찾아갔는지 모른다.
하지만 여왕은 그와의 만남에 응하지 않았다.
‘지금이라도 떠날까?’
문득 머릿속에 ‘포기’라는 단어가 떠올랐다. 하지만.
-루시, 루시를 부탁해요.
동시에 머릿속을 관통하는 목소리가 로안의 결심을 붙잡았다.
그는 테이블에 놓인 다과를 치우고는 방 안에 가득한 서류를 다시 한번 훑었다.
서류가 놓인 책상 위에는 방금 하이마가 건네고 간 서류와 반쪽 난 로사리오가 놓여 있었다.
로사리오에서는 은은하게 빛이 나고 있었다. 이 은은한 빛이야말로 그의 동생 루나시르네가 세상 어딘가에 살아 있다는 증거다.
‘루나시르네…….’
로안이 동생의 행방을 찾는 데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었다.
하나는 당연히 혈육의 정이었다. 어릴 적, 자신의 소홀함으로 동생을 잃어버렸다. 이로 인한 깊은 죄책감을 늘 마음에 지고 있었다. 잃어버린 동생을 찾아야 했다. 끝내 동생의 이름을 부르다가 돌아가신 어머니의 마지막 모습이 뇌리에 잊히지 않는다. 강박에 가까운 집착이 그를 채웠다.
다른 하나는 루나시르네에게 있을 반쪽짜리 로사리오다.
‘어쩌면 설원의 저주를 합쳐진 로사리오 안에 담을 수 있을지도 몰라.’
요정 숲에서 그의 반쪽짜리 로사리오를 본 리리아가 알려 준 정보였다. 세상의 온갖 사악한 것을 봉인할 수 있는 로사리오라고 했으니, 혹시 설원의 저주도 봉인할 수 있지 않을까 싶었다.
이런 이유로 로안은 여왕이 내린 임무가 없을 때마다, 이렇게 정보 수집에 열을 올렸다. 덕분에 여왕의 의심을 더욱 사게 되었고 재상에게 좋은 공격 건수를 주게 된 셈이지만 말이다.
로안은 한참을 책상에 앉아 서류를 읽었다.
서류 중에는 그가 개인적으로 구한 문서도 있었고 방금 하이마가 건넨 문서도 있었다.
힘들게 구한 고서와 책도 펼쳤다.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정오를 가리키던 창밖은 창백한 두 개의 달로 대체되었다.
그럼에도 로안은 단 한 번도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았다.
“…….”
평소와 비슷한 모습이지만, 오늘은 유독 그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
덜덜덜.
특히, 아까 하이마가 주고 간 서류.
“설마…….”
그 서류를 쥔 로안의 손이 눈에 보일 정도로 떨린다.
‘죽음의 대마녀 리나 리버스가?’
손뿐만 아니라 그의 금색 눈동자도 떨렸다.
“아니겠지. 말이 안 되지. 아니야, 이건.”
그는 자신의 추측을 애써 부정했다.
* * *
루한은 최초의 설원의 대마녀 베아트리체가 세운 나라였다.
왕국 전역에는 설원의 가호가 펼쳐져 있었고, 이 위대한 결계는 대대로 여왕이 유지했다. 즉, 루한은 여왕의 나라와 다를 바 없었다.
그리고 오늘날 루한을 다스리는 여왕 루시푸르네는 오직 이 나라의 재상 아리아 데스모만을 의지한다.
즉, 루한은 재상의 나라와 다를 바 없었고, 왕국의 수도 윈테라에는 재상의 눈이 무수히 많았다.
“이제야 눈치챈 모양이네?”
로안이 슬슬 진실에 다가온 것을 인지한 아리아는 기다렸다는 듯이 바로 행동에 나섰다.
그녀는 날이 밝는 대로 여왕을 알현했고 전부터 준비했던 보고를 여왕에게 했다.
“폐하, 저희 마녀회에서 조사한 바에 따르면, 최근 로안 샬루트의 행적이 제국의 사천왕 중 하나인 죽음의 대마녀와 이어져 있었습니다. 로안은 죽음의 대마녀를 이곳 루한으로 데려오려 했습니다.”
죽음의 대마녀 리나 리버스는 현재 대륙 전역에서 가장 악명 높은 사천왕이었다. 특히 이번에 교국을 멸망시키면서 암흑대공보다 더 유명해졌다. 당연히 루한에서도 강력한 위험인물로 규정했고 말이다.
“…….”
여왕 루시푸르네는 재상이 염력으로 건넨 보고서를 읽으면서 말이 없었다. 사파이어를 연상시키는 푸른 눈동자는 멍했고 불안해 보였다.
그녀의 손에는 재상이 위조한 서류가 쥐어져 있었다. 문서의 내용은 하나같이 로안 샬루트의 반역 행위가 가득 나열되어 있었다.
본래라면 재상이 행했던 일들이지만, 그녀는 자신의 짓을 로안에게 누명 씌웠다.
최근 로안이 죽음의 대마녀와 관련된 정보를 구하고 있었기에, 누명 씌우는 것은 식은 죽 먹기였다.
“……!”
루시는 어지러움을 느꼈다.
배신감을 느꼈고 실망했고 절망했다.
‘로안 샬루트…….’
지금이라도 로안을 부를까? 그의 입에서 직접 해명을 들을까?
하지만 이상하게도 그럴 엄두가 안 났다. 두려웠다. 그의 입에서 자백이 나오면 미칠지도 모른다.
“로안…… 로안 샬루트를…….”
그러나 용기를 내야 한다. 루시푸르네의 입이 작게나마 열리기 시작했다.
‘로안을 부르겠다고? 어림도 없지.’
여왕의 생각을 눈치챈 재상이 붉은 눈을 은은히 빛내며 수작을 부렸다.
피이익.
저 멀리 황궁에 있는 옥타나가 권능을 보냈다. 사람의 정신을 뒤흔드는 정신계 마법이었지만 루시는 눈치채지 못했다.
“로안은 이노센티아를 오염시켜서 설원의 가호를 완전히 무력화할 생각입니다. 이를 위해 죽음의 대마녀를 루한으로…….”
재상은 더 큰 목소리로 보고를 이었다.
“그만!!”
이에, 더 이상 견딜 수 없던 루시는 소리를 질렀다.
“…….”
“…….”
알현실에 순간적으로 적막이 감돌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