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회귀여왕의 EX급 방랑기사-120화 (120/212)

제120화

#120.

잠깐의 적막. 하지만 오래가진 않았다.

“폐하, 로안 샬루트를 처형해야 합니다.”

아리아 데스모는 루시의 외침에도 굴하지 않고 입을 열어 적막을 끊었다.

“일단은…….”

이에, 루시는 눈을 질끈 감고 입을 열었다.

“로안 샬루트를 불러서 직접 심문하겠다.”

과연 설원의 대마녀 아니랄까 봐, 옥타나의 정신 마법에도 끝내 고집을 꺾지 않는다.

‘이러면 곤란한데…….’

여왕의 고집에 아리아의 표정에 짜증이 서렸다.

“폐하, 위험합니다. 그가 폐하를 알현하러 왔다가 무슨 짓을 벌일지 모릅니다.”

“나는 설원의 대마녀다! 설원의 권능이 있는 한 누구도 날 위협하지 못해.”

“폐하, 소신을 믿지 못하는 것입니까? 저는 마나의 맹세까지 했습니다.”

“그대를…… 못 믿는 것은 아니다. 그저 혹시나 오해가 있었는지 확인하기 위함이다.”

“…….”

아리아 데스모는 최대한 설득했지만, 루시푸르네는 고집을 꺾지 않았다.

“재상, 어서 로안 샬루트를 불러…….”

콰아아앙.

하지만 여왕의 명령은 이어지지 못했다.

“무슨?!”

때마침 밖에서 거대한 폭음이 들렸기 때문이다. 왕궁 깊숙한 곳까지 들릴 정도로 크고 우렁찬 폭음이.

“폐하, 실례하겠습니다! 무례를 용서하소서.”

“폐하! 습격입니다! 왕도의 아케인 병원 쪽에서……!”

뒤이어 기사단장 하이마와 시녀장 베네사가 다급히 알현실로 달려왔다.

상황이 급박한지라 여왕의 허락도 받지 않고 알현실 문을 열었다.

“하이마! 베네사!”

루시푸르네는 참으로 오랜만에 보는 두 사람의 얼굴에 잠깐이지만 반가움을 느꼈다.

하지만 반가움은 찰나에 불과했다.

“죽음의 대마녀가 다스리는 죽음의 군단이 왕도에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

이어지는 기사단장의 보고에 루시의 심장이 쿵 하고 내려앉았다.

콰아아아앙!

다시 한번 거대한 폭발이 일어났다.

왕도에서 가장 큰 병원에서 일어난 갑작스러운 폭발. 그리고 음영술과 사령술이 섞인 죽음의 군단.

폭발의 진원지를 확인한 재상의 표정이 굳었다.

늘 여유롭게 묘한 미소를 짓던 그녀였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뭐지? 실험이 실패한 건가? 아니면…… 배신?’

이번만큼은 그녀의 예상을 벗어난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리나 리버스는 그림자 핵에 오염되어 있어서 배신을 할 정신이 못 돼. 지하드가 마음을 바꿨거나, 실험에 문제가 생긴 것인데…….’

사천왕이었던 파괴왕 가오이는 로안 샬루트에게 죽었다.

그래서 죽은 가오이를 대신할 새 사천왕이 필요했다.

옥타나는 자신이 후원하던 흑마법사들을 물색했다. 그리고 흥미로운 연구를 하던 마법사를 발견했다.

바로 흑마법사 지하드였다. 죽은 아들을 살리기 위해 셀 수도 없이 많은 생명을 갈아 넣은 미치광이 마법사.

지하드는 끝까지 봄의 축복을 받은 처녀, 그것도 문라이트 변경백의 막내딸을 원했지만, 옥타나가 보기엔 그림자 핵이 더 효율적으로 보였다. 그래서 지하드의 요청을 무시했다.

그녀는 그림자 핵에게 몸과 영혼이 완전히 먹힌 죽음의 대마녀를 지하드에게 보냈다.

지하드의 실험체와 그림자 핵이 합쳐지면 암흑대공을 아득히 초월하는 괴물이 탄생할 것이다.

그렇게만 되면, 악황제가 마왕으로 각성할 때까지 기다릴 필요도 없다.

바로 설원의 가호를 없애고 여왕 루시푸르네를 죽일 수 있다.

오랜 원한을 마침내 청산하는 것이다. 가증스러운 베아트리체의 흔적을 이 땅에서 영영 지워 버리는 거다.

그렇게 부푼 기대와 설레는 마음을 안고 새로운 사천왕의 탄생을 기다리고 있었는데…….

문제가 생긴 모양이다.

대충 상황을 정리해 보니 실험 과정에서 그림자 핵이 폭주를 한 것 같았다.

왕도가 위험하다.

알현실 저 멀리에는 간만에 사람들이 바글바글하다.

모두가 입김을 내면서 추위에 벌벌 떨었지만, 상황을 보고하는 입만큼은 쉬지 않았다.

“폐하! 수도 경비대가 괴멸됐습니다.”

“마탑의 마법사들이 출동했으나, 죽음의 대마녀에게 접근조차 못 하고 있습니다.”

“리나 리버스가 부리는 죽음의 군단이 마녀회가 펼친 결계를 방금 뚫었다고 합니다!”

간만에 얼굴을 다시 본 하이마와 대신들에게서 좋지 않은 보고가 이어진다.

“내가 직접 나서겠다.”

결국 듣다 못한 루시가 옥좌에서 일어났다.

저 멀리 15미터 정도 떨어져 있던 대신들이 급히 몇 걸음 뒤로 움직이는 것이 보였다.

“시녀장 베네사는 어디에 있느냐?”

루시는 씁쓸함을 느끼며 베네사를 불렀다. 저주받은 여왕의 이동을 보좌할 시녀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예! 폐하.”

여왕의 부름에 하이마 뒤에 있던 베네사가 몇 걸음 앞으로 나섰다. 하지만 시녀장의 활약은 시작조차 하지 못했다.

“폐하께서 직접 나서기 전에, 로안 샬루트에게 먼저 맡겨 보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동시에 재상이 불쑥 끼어들었기 때문이다.

“……?!”

재상의 입에서 로안이 언급되자, 루시는 자신도 모르게 흠칫하며 표정을 굳혔다. 그리고 베네사에게 향했던 시선을 재상에게 돌렸다.

“어지간한 심문보다 확실할 것 같아서 말입니다.”

아리아는 그런 루시의 심경을 알기라도 한다는 듯 말을 이었다.

당혹으로 일그러졌던 재상의 얼굴은 언제 그랬냐는 듯 평소의 묘한 미소를 되찾았다.

얼마 후 로안이 알현실로 달려왔다. 그 또한 수도에서 벌어지는 일을 알고 있기에 완전무장한 상태였다.

“…….”

그런 로안을 본 루시는 이상하게 가슴이 아려 옴을 느꼈다.

“로안 샬루트, 네 번째 시련을 내리겠다!”

마음이 너무나도 떨리고 아팠기에, 그를 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슬펐기에.

“당장 왕도를 침공한 죽음의 대마녀를 죽여라!”

여왕은 발작하듯이 네 번째 시련을 명했다.

“사천왕 리나 리버스를 죽인다면…… 그대의 충정을 조금은 믿어 보겠다.”

애써 숨기려 했지만, 루시의 목소리가 몹시 떨려 온다.

그녀는 숨을 죽이고 자신의 명을 받은 로안의 모습을 살폈다.

만약 명령을 거부하면 진짜로 죽일 것이다.

“……!”

그리고 그는 처음으로 망설이고 있었다. 앞선 세 번의 시련을 받았을 때와 상반된 모습이다.

‘역시나…… 배신자였나?’

이를 본 루시의 가슴이 철렁거렸다.

“하! 이건 갈등되느냐? 그렇다면 순순히 인정하고 루한을 떠나라! 아니, 설원의 권능으로 내가 친히 너를 벌하마!”

그녀는 설원의 권능을 일으켰다. 여차하면 바로 눈앞의 배신자를 죽이기 위해서, 루시푸르네는 애써 마음을 독하게 먹었다.

“……받들겠습니다.”

하지만 이내 로안의 입이 열렸다.

그는 무겁게 고개를 숙이며 예를 표한 뒤, 여왕의 허락도 없이 등을 돌려 알현실을 나섰다.

잠시 후.

키우우우우.

왕궁 밖으로 붉은색 드레이크의 울음소리가 들렸다.

시즈를 타고 하늘 높이 날아오르는 로안의 모습이 알현실의 창밖에 스치듯 보였다.

“……!”

루시푸르네는 왕궁에서 멀어지는 붉은 점을 멍하니 보았다.

찝찝한 기분이 그녀를 덮쳤다. 기원을 알 수 없는 배덕감을 느꼈다.

적막과 혼란이 뒤섞인 알현실에서.

‘지금뿐이야!’

‘지금 말해야 해!’

하이마와 베네사는 서로 시선을 교환했다.

지금이 아니면 언제 또 여왕을 알현할 수 있을지 장담할 수 없다.

둘은 동시에 루시를 향해 입을 열었다.

“폐……!”

“?!”

입을 열려고 했다.

하지만 입이 열리지 않았다. 정확히는 입을 열 수 없었다.

아까부터 자신들을 응시하는 한 마녀의 시선 때문이다.

회색 머리카락에 붉은 눈동자가 매혹적인 여인.

재의 마녀이자, 루한의 재상 아리아 데스모가 베네사와 하이마를 응시 중이다.

평소와 같은 묘한 미소, 묘한 시선. 하지만 지금 이 순간만큼은 이상할 정도로 소름이 돋았고 무서웠다. 만약 지금 입을 연다면 죽을지도 모른다는 본능이 둘을 덮쳤다.

“……!”

“…….”

하이마와 베네사는 결국 입을 열지 못했다. 꼬리를 내린 들개처럼 고개를 숙이거나 옆으로 돌렸다.

그렇게 조용히 두 사람을 제압한 재상은 너그러운 미소를 지으며 루시푸르네를 바라보았다.

루시는 여전히 혼란스러운 눈으로 알현실의 창밖을 보고 있었다.

재상은 어깨를 으쓱하며 조소했다.

* * *

고결하고 위대한 설원의 가호 아래, 광휘의 용사와 새롭게 탄생한 성인이 힘을 합쳤다.

그리하여 대륙을 두려움에 떨게 만들었던 죽음의 대마녀는 루한의 수도 윈테라에서 최후를 맞이했다.

사람들은 위대한 영웅의 활약과 새로운 영웅의 탄생을 찬양하며 노래했다.

반파된 왕도 윈테라의 구시가지.

“…….”

로안 샬루트는 멍하니 빛을 잃은 로사리오를 바라보았다.

마지막으로 보았던 죽음의 대마녀의 모습이 잊히지 않는다.

화상으로 흉측했던 리나 리버스의 얼굴, 목에는 주먹만 한 흑염 덩어리가 목걸이처럼 걸려 있었지. 혹시나 반쪽 난 로사리오인가 싶어 자세히 살펴봤지만 없는 듯했다.

하지만 광기로 번뜩였던 검은색 눈동자에는 얼핏 자신과 같은 금색이 보였던 것 같기도 하다.

무엇보다 리나 리버스가 죽자, 로안이 지니고 있던 로사리오의 빛이 꺼졌다.

“괜찮으십니까?”

뒤에서 부드러운 성직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주황색 머리카락에 실눈이 인상적인 학자풍의 청년이 서 있었다.

멸망한 교국에서 온 것으로 추정되는 성직자 시몬이었다.

“괜찮습니다.”

시몬의 물음에 로안은 힘없이 반쯤 멍한 목소리로 답했다.

“……죽음의 대마녀는 죽은 겁니까?”

로안은 조심스레 몇 번째인지 모를 질문을 시몬에게 다시 던졌다.

“예, 로안 형제님이 마녀의 군단을 붙잡아 주신 덕분에 해치울 수 있었습니다. 시신은 승천 의식으로 인해 안타깝게도 남기지 못했습니다.”

시몬은 귀찮은 기색 하나 없이, 오히려 왠지 모를 안타까움을 느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 고통은 없었을 겁니다.”

그리고 혹시나 위로가 될까 싶어 한마디를 덧붙였다.

“……그렇군요. 감사합니다.”

시몬의 말에 로안은 감사를 표했다. 그리고 더는 빛나지 않는 반쪽짜리 로사리오를 아공간 인벤토리 가장 깊은 곳에 넣었다.

“그럼, 형제님, 저는 이만 가 보겠습니다.”

그런 로안을 얼마간 응시하던 시몬이 불쑥 말했다.

“……어딜 말입니까? 교국은 이미 멸망했습니다.”

“그렇죠……. 교국은 멸망했지요, 깨어나 보니.”

“네?”

“아닙니다, 아무것도.”

시몬은 알 수 없는 혼잣말을 끊고는 왕도 윈테라의 전경을 훑었다.

“형제님도 아시지 않습니까? 이 왕국은 가망이 없다는 것을.”

“시몬 사제님만 계시면 역전 가능합니다! 사제님은 죽음의 대마녀를…… 죽였습니다. 함께 힘을 합치면 암흑대공도 악황제도 무찌를 수 있습니다!”

“안타깝게도 저는 할 수 없습니다. 죄송합니다.”

“어째서입니까?!”

“이 힘은 제 힘이 아닙니다. 사용할수록 제 영혼이 타락하는 것이 느껴집니다.”

“도대체 그게 무슨……?”

로안은 무력을 써서라도 시몬을 잡고 싶었다.

최근 들어 심리적으로 너무 외롭고 힘들었다. 그리고 오늘 그 정신적 고통이 극한에 달했다.

든든한 동료가 곁에 있었으면 했다. 지금의 자신은 너무나 약하고 외로웠다.

“함께 할 수 없음을 사죄드립니다. 대신…… 형제님의 성장에 대해 조언을 하나 해 드리겠습니다.”

로안은 결국 시몬을 막지 못했다. 그만큼 시몬의 의지는 단호했다. 애초에 죽음의 대마녀를 거의 혼자서 잡다시피 한 시몬이다. 로안이라고 해도 승리를 장담하기 어렵다. 제압은 더더욱 힘들 것이다.

“로안 형제님, 당신은 강해지고 싶을 겁니다. 강해져야 할 거고요.”

시몬은 멍하니 자신을 보고 있는 금발 금안의 방랑 기사를 향해 말을 이었다.

“죽음을 경험하고 부활하세요. 당신에겐 오직 그 단계만 남았습니다.”

그 말을 끝으로 시몬은 등을 돌렸다.

“어디로 가실 겁니까?!”

“저는 무수한 생명의 희생으로 탄생한 존재. 저로 인해 사라진 생명보다 많은 생명을 치료하고 살려야 합니다. 그게 저의 존재 이유고 속죄입니다.”

시몬은 계속해서 알 수 없는 소리를 해 댔다. 사제들이 뜬구름 잡는 소릴 하는 것이야 흔한 일이라, 그러려니 했다.

“이 왕국에서 해도 되지 않습니까?”

“눈과 귀를 닫아 버린 어리석은 여왕과 잔혹한 혀를 지닌 재상이 있는 곳에선 조금도 있고 싶지 않습니다. 무엇보다 이 설원의 가호가 저를 힘들게 만듭니다.”

시몬은 그 말을 끝으로 몸이 점점 투명해지더니 어느 순간 스윽 하고 사라졌다. 마치 신기루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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