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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여왕의 EX급 방랑기사-121화 (121/212)

제121화

#121.

멍하니 시몬이 사라진 자리를 보던 로안은 긴 한숨을 내쉬었다.

꿈을 꾸다 깬 기분이다.

‘나도 그냥…….’

문득 다 포기하고 떠나고 싶다는 충동이 그를 자극했다.

하지만.

-루시, 루시를 부탁해요.

머릿속에 예나체리나가 남긴 유언이 떠나고 싶은 로안의 발을 무겁게 만들었다.

그는 무거운 발걸음으로 왕궁을 향해 걸었다.

하늘 위에 붉은색 드레이크 시즈가 날고 있었다.

훗날 회귀 후, 죽음의 대마녀가 솔라의 동생 루나시르네였음을 알게 된 루시는 유독 충격이 클 수밖에 없었다.

그녀는 그 사실을 알고서 한동안 밤마다 소리 없이 흐느끼면서 잠을 못 이뤘다.

네 번째 시련을 명했을 때 머뭇거렸던 솔라를 떠올리며, 네 번째 시련을 완수했음에도 유독 슬퍼 보였던 솔라를 생각하며, 루시푸르네는 자신의 머리를 쥐어뜯었고, 가슴을 쿵쿵 치며 후회했고 괴로워했다.

* * *

방랑 기사 로안 샬루트가 죽음의 대마녀를 죽였다.

망명 황족 로안 샬루트가 여왕이 내린 네 번째 시련을 해냈다.

비록 교국에서 온 성직자와 함께 싸운 것이지만, 어쨌든 죽음의 대마녀 리나 리버스를 무찌른 것은 맞았다.

당연하지만 로안을 추방하거나 죽이겠다는 여왕의 생각은 쏙 들어간 지 오래다.

루시푸르네는 혼란스러웠다.

저 망명 황족 로안 샬루트의 정체가 뭘까? 사천왕인 죽음의 대마녀를 제물로 삼을 정도로 대단한 인물인가?

그런 대단한 존재가 이 추운 루한까지 와서 무슨 고생인가?

어쩌면…… 그녀가 로안에게 품고 있는 의혹과 불신이 잘못된 것이 아닐까? 커다란 오해일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재상이 틀렸다는 뜻이 된다. 하지만 재상은 마나의 맹세를 했다.

훗날 그 당시를 돌이켜 보면, 그냥 로안을 불러서 이야기를 나눴으면 됐다. 단둘이서, 각자의 맹세 아래서.

하지만 당시의 루시는 그럴 용기가 없었다. 차마 그를 마주하기 미안했고, 어떤 진실이든 간에 아는 게 두려웠다.

그리고 그것이 거짓의 대마녀가 오래전부터 조성해 온 루시의 심리 상태였다.

그렇게 루시푸르네가 혼란 속에서 침묵하는 동안, 왕도 윈테라와 왕궁 순백궁에서는 소리 없는 암투가 매일 벌어졌다.

바로 루한에 잠입한 제국의 첩자와 왕실 기사단 사이의 전쟁이었다.

설원의 가호 아래서 첩자를 사냥하는 것은 쉬웠다. 추격하고 포위하다 보면 놈들은 자결하거나 역으로 공격해 왔다. 그때를 노려 처리하면 됐다.

애초에 설원의 가호는 여왕에게 충성하는 사람 편을 주로 들어 주기 때문에 그렇게까지 조심하지 않아도 되지만, 늘 ‘만약’이라는 재수 없는 경우가 있다.

여왕을 위해 싸우다가 얼어 죽으면 그것만큼 억울한 것도 없기에, 왕도에서는 대부분 최대한 조심하는 편이다. 수도 윈테라는 변경백 외곽처럼 설원의 가호가 옅지 않으니까.

어찌 되었든, 로안은 하이마와 함께 미친 듯이 제국의 첩자와 암살자들을 사냥했다.

사냥에 임하는 로안은 말 그대로 미친 사람 같았다. 처절할 정도로 제압과 체포, 척살에 임했다. 어떻게 된 게 망명 황족인 제국인이 루한인보다 더 제국을 증오하는 것 같았다.

그런 로안의 모습은 함께 싸우는 왕실 기사들과 기사단장 하이마마저 질리게 만들었다.

“자네…… 괜찮나?”

“괜찮습니다.”

“그, 너무 무리하진 말게…….”

하이마는 네 번째 시련을 해결한 후 눈에 띄게 초췌해진 로안의 어깨를 토닥였다.

눈앞의 금발 금안의 방랑 기사는 무언가를 잊기 위해 싸우는 것 같았다.

‘이 왕국, 아니, 이 세상의 미래가 어둡군.’

어두운 안색의 로안을 보면서 하이마는 생각했다.

과거 변경백에서 함께 어깨를 맞대고 싸웠던 때가 떠올랐다.

파괴왕 가오이와 그의 야만 군단과 맞서 함께 싸웠을 당시, 눈앞의 젊은 기사는 광휘 그 자체였다. 희망이었고 빛이었다.

하지만 지금 그의 눈에 비친 젊은 기사는 초췌했다. 샛별 같은 금색 눈동자는 공허했다. 마치 이 나라, 이 대륙의 앞날 같았다.

“오늘은 일찍 들어가 보게, 로안 경.”

“하지만 아직 잔당이…….”

“명령이네.”

“……알겠습니다.”

하이마는 눈앞의 젊은 기사에게 휴식을 권했다.

뭐, 그래 봤자 연무장에서 밤새 검을 휘두르겠지만.

기사단장 하이마의 예상대로 로안은 숙소에서 쉬지 않았다.

가만히 있을수록 죽음의 대마녀의 최후가 떠올랐고, 리나 리버스의 흉측한 얼굴이 어린 루나시르네의 얼굴과 겹쳐 보였기 때문이다.

검을 휘두르면서 로안은 최대한 다른 생각을 했다.

‘모든 배후에는 재상이 있어.’

특히 자신과 여왕의 관계를 이렇게까지 최악으로 만든 인물을 떠올렸다. 분노를 곱씹으면서.

그는 이 모든 배후에 재상이 있음을 알았다.

‘하지만 지금의 내 실력으론 설원의 가호 아래서 선공할 수 없어.’

설원의 가호가 여왕에게 충성하는 사람 편을 주로 들어 준다고 하지만, 단순히 그것만을 믿고 움직일 수는 없었다.

재상은 몰라도 마녀회의 마녀들 중에선 여왕에게 충성하는 마녀가 있을지도 모른다. 괜히 그런 마녀를 여럿 베었다간, 역으로 자신이 골로 갈 수 있다. 여기는 변경백 외곽이 아니니까.

‘뭔가 깨달음을 얻는다면 설원의 가호 아래서 살육을 저질러도 버틸 수 있을 텐데.’

그래서 로안은 검을 휘두르면서 설원의 징벌을 이겨 낼 방법을 고민했다.

암흑대공 둠처럼, 그리고 죽음의 대마녀 리나 리버스처럼, 설원의 가호 아래서 살육을 하고도 버틸 수 있는 방법을.

-죽음을 경험하고 부활하세요. 당신에겐 오직 그 단계만 남았습니다.

멍하니 검을 휘두르던 로안의 머릿속에 시몬이 마지막으로 했던 말이 떠올랐다.

‘죽음…… 죽음이라…….’

죽음에 가까운 경험. 무슨 뜻인지는 안다. 비슷한 사례는 역사서뿐만 아니라 지금 이 시대에도 심심치 않게 있으니까.

하지만 죽음에 가까운 경험을 하기 위해서는 이에 알맞은 강자가 있어야 한다.

약해도 안 되고 그렇다고 너무 강해도 안 된다. 무엇보다 설원의 가호 밖에서 찾아야겠지.

얼마 후.

‘한 명 있군.’

생각에 잠겼던 로안은 이에 적합한 인물을 하나 떠올렸다.

한편, 재상은 계속해서 로안을 죽이려 들었다.

‘아무리 도움을 받았다고 해도 죽음의 대마녀를 죽일 줄이야. 컨트롤하기 벅찬 아이기는 했지만…….’

죽음의 대마녀까지 죽은 것은 커다란 손실이다.

‘로안 샬루트는 너무 위험해. 지금까지 여왕이 내린 시련이 그를 강하게 만들었어. 아이러니하게도.’

무엇보다 죽음의 대마녀를 죽인 로안 샬루트는 위험했다.

‘그 시몬이라는 성직자의 행방을 모르겠군. 그자 또한 거슬리는데…….’

졸지에 사천왕이 이천왕이 되어 버렸다. 암흑대공과 옥타나, 이렇게 둘만 남은 것이다.

‘어떻게 해야 수월하게 그를 죽일 수 있을까?’

근래, 그녀는 하루의 대부분을 로안을 죽이는 방법을 고민하며 보냈다.

‘여왕도 슬슬 내 말을 잘 안 믿는 것 같고.’

로안이 네 번째 시련을 완수하자 루시푸르네는 전보다 더 혼란스러워 보였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지금까지 여왕에게 몰래 걸었던 정신 마법이 효과가 있다는 것이다. 현재 루시푸르네는 사람 만나는 것을 극도로 꺼리는 대인기피증 중증이었다.

여왕이 자신의 말을 전처럼 맹신하지 않아도 그녀는 신경 쓰지 않았다.

루시푸르네와 솔라시우스는 결코 친해질 수 없다. 아리아, 아니, 옥타나는 자신 있었다.

‘나는 아주 대단한 사실을 알고 있지. 로안이 바로 1황자 솔라시우스라는 사실을. 어떻게 보면 리나 그 아이는 친오빠 손에 죽은 거군. 간접 살인이지만.’

아리아는 섬뜩한 조소를 지었다. 그리고 아리아를 조종하고 있는 옥타나의 손에는 반쪽 난 로사리오가 들려 있었다.

‘이걸 이용해서 솔라시우스를 죽이면 되겠군. 설령 죽이지 못하더라도 최소한 추방되거나 병X이 될 거야!’

그리고 조소와 함께 썩 재밌는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생각을 마친 아리아는 여왕을 알현했다.

“폐하를 뵙습니다.”

‘으음…… 더 추워졌군.’

나날이 강해지는 설원의 저주는 이제 아리아마저 알현실 안으로 입장하는 것을 꺼리게 만들었다. 하지만 그녀는 초인적인 인내력으로 미소를 지으며 여왕을 바라보았다.

“무슨 일이지, 재상?”

여왕 루시푸르네는 많이 지친 목소리와 초췌한 얼굴로 재상을 맞이했다.

“로안 샬루트와 관련된 추가 정보가 있어서 왔습니다.”

“……말해 봐라.”

“이건 아직까지 추측에 불과하니 참고만 하소서.”

재상은 그런 여왕의 몰골을 속으로 비웃으며 말을 이었다.

“그자의 소지품 중에 로사리오가 있었습니다. 평범한 로사리오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최고위 황족을 뜻하는 증표였습니다.”

“최고위 황족?”

수척해진 여왕은 멍한 눈으로 재상을 보았다.

“예, 폐하께서도 들어 보셨을 겁니다. 대대로 제국의 정실 황후들만이 목에 걸던 목걸이요. 최초의 황후 아낙시아가 요정 숲에서 예물로 받아 온 목걸이를요.”

아낙시아를 언급하는 아리아의 발음에 묘하게 힘이 실렸다.

“들어 본 거 같다. 그 목걸이가 로안 샬루트에게 있다는 건가?”

“그렇습니다. 비록 반으로 조각난 로사리오지만 확실합니다.”

“어떻게 확신하지?”

“역대 제국 황후들의 초상화 수십 점을 힘들게 입수했고, 확인까지 마쳤습니다. 비록 반으로 조각나긴 했지만 모양이 일치했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악황후 옥타나가 나머지 반쪽을 소유하고 있었습니다.”

“옥타나……?”

재상의 입에서 악황후가 언급되자, 루시의 미간이 좁혀졌다.

“이걸 보시지요. 제국에 잠입한 우리 세작이 구한 자료입니다.”

아리아는 그런 여왕의 반응에 기다렸다는 듯 어떤 그림을 붕 띄워서 루시에게 건넸다.

“이건?!”

재상이 건넨 그림을 본 루시는 눈을 크게 떴다. 실제 사람이 이 안에 들어간 것처럼 똑같이 그려져 있었다. 지구에서는 사진이라고 불리는 것이었다.

“마녀회와 마탑에서 만든 마도구입니다. 순식간에 해당 장면을 그림처럼 종이에 보관할 수 있습니다. 굉장히 비싸고 만드는 데 시간이 오래 걸려 아직 세상에 풀지 못했습니다.”

재상은 설명을 이었다.

“그리고 그 그림에 있는 인물이 바로 악황후 옥타나입니다.”

“!!”

루시는 자신이 쥐고 있는 그림을 벌벌 떨면서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이 여자가 자신과 어머니의 원수!

회색 머리카락에 붉은 눈동자에 같은 여성도 반할 정도의 매혹적인 외모.

“……?”

루시는 사진을 보다가 문득 저 앞에 있는 재상을 보았다.

똑같은 회색 머리에 붉은 눈동자다.

하지만 이목구비나 체형은 전혀 다르다. 애초에 회색 머리는 대륙에서 꽤 흔한 편이고 붉은색 눈동자도 아주 없지는 않다.

“폐하, 악황후가 목에 건 목걸이를 봐 주십시오.”

재상은 루시의 반응을 즐기는 것 같았다.

루시푸르네는 재상의 말대로 옥타나의 흉부를 보았고, 눈을 크게 뜰 수밖에 없었다.

“1황자 솔라시우스와 1황후 텔미노아는 죽었으니까…… 그 로사리오는 자연스레 악황후 옥타나의 손에 들어갔을 겁니다.”

옥타나의 목에는 로안이 가지고 있는 것과 똑같은 반쪽짜리 로사리오가 있었기 때문이다. 저 둘을 합치면 온전한 하나의 로사리오가 될 것이 분명하다.

“로안 샬루트와 악황후가 무슨 관계란 말인가? 사, 사생아라도 된다는 건가? 그러기에는 로안의 나이가…… 애초에 악황제가…….”

루시푸르네는 어지러움을 느끼며 횡설수설 중얼거렸고, 그런 루시의 횡설수설을 아리아가 뚝 끊었다.

“감히 추측건대 옥타나는 전대 황제와 결혼하기 전에 다른 황족의 아이를 이미 낳았을 수도 있습니다.”

“그런 말도 안 되는……!”

“폐하, 다른 사람도 아닌 거짓의 대마녀입니다. 그녀의 교활함과 문란함이라면 충분히 가능하지요.”

“……!!”

루시의 눈동자에 경악과 충격이 충돌했다.

“옥타나는 자신의 숨겨 둔 자식에게 로사리오를 반으로 쪼개 주었을 겁니다. 원래 멀리 떨어져 지내는 연인이나 가족끼리 자주 하지 않습니까?”

만약 솔라가 이 상황을 봤다면 기가 차서 욕부터 박았을 것이다. 아주 소설을 쓰라면서.

제정신이었던 루시푸르네였다면 고개를 갸우뚱하면서 의심이라도 해 봤을 것이다.

“……!”

하지만 반쯤 정신이 피폐해진 지금의 루시에게는 재상의 추측이 그럴듯하게 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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