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22화
#122.
사천왕을 미끼로 쓸 정도로 제국에서 아끼는 존재. 하지만 결코 양지에서 활약할 수 없는 신분. 약한 입지를 올리기 위해 눈에 띄는 공을 세워야 하는 처지.
“로안은 죽음의 대마녀를 죽였다. 그렇게까지 해서 루한에 붙어 있을 이유가…….”
“리나 리버스가 과연 죽었을까요? 시체조차 없는 죽음이었습니다, 폐하. 애초에 그 시몬이라는 성직자부터가 수상하고요.”
아리아의 모습을 한 옥타나는 애써 웃음을 참으면서 말을 이었다.
“무엇보다 폐하가 품고 있는 설원의 권능을 얕보지 마소서. 폐하의 설원의 힘은 대륙에서 가장 강한 힘입니다. 악황제가 왜 아직 루한을 정복하지 못하는지를 생각하셔야 합니다.”
“……!”
“적들은 폐하의 잠재력을 두려워합니다. 우리 여왕께서 설원의 저주를 극복하고 진정한 설원의 대마녀가 되는 것을 두려워합니다.”
재상의 대답이 이어질수록 루시는 자신을 혼란스럽게 만들었던 퍼즐이 맞춰지는 것을 느꼈다. 억지로.
“허……!”
루시는 허탈한 웃음을 지었다.
“…….”
그리고 한동안 말이 없었다.
“로안 샬루트를 잡아 올까요? 직접 심문하시겠습니까?”
재상이 적막을 깨고 여왕에게 물었다. 이번에는 반대로 그녀가 루시에게 로안을 만날 것을 권유한다.
“아니, 괜찮다.”
추측일 뿐이지만, 이미 루시는 로안과 옥타나의 사이를 기정사실처럼 여겼다.
“그를…… 로안 샬루트를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구나.”
역겨웠다. 짜증났다. 죽고 싶었다. 그리고 죽이고 싶었다.
“지금은 로안 샬루트를 추방하거나 처형할 수 없습니다. 우리 백성들은 물론, 대륙의 여러 왕국에서 로안을 용사라 부르며 칭송하고 있으니까요.”
“……그렇지.”
루시는 힘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로안 샬루트가 죽음의 대마녀를 무찔렀다는 소식은 대륙 전역으로 퍼졌다.
교국을 멸망시킨 대마녀와 그 대마녀를 무찌른 용사, 현재 로안 샬루트는 반쯤 마하대제의 재림으로 추앙받는 중이었다.
그런 그를 박해하는 것은 루한의 성녀로 불리는 루시라도 부담이 크다.
“그럼, 이렇게 하는 게 어떻겠습니까?”
반쯤 정신이 나간 여왕을 재상은 추위도 잊고 사랑스럽다는 듯 바라보았다.
“그를 조용히 불러 다섯 번째 시련을 내리는 겁니다. 제국으로 가서 암흑대공을 죽이고 오라는 시련을 말이지요. 그렇게 한다면 죽이진 못해도 추방은 가능할 겁니다.”
아리아 데스모는 혀로 입술을 축였다.
“말도 안 된다! 애초에 그가 그런 시련을 받아들일 리가 없다!”
재상의 제안에 루시가 말도 안 된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폐하, 로안 샬루트는 폐하의 명을 수락할 수밖에 없을 겁니다.”
“어떻게 그리 확신하지?”
“최근 입수한 정보에 따르면 악황후와 암흑대공 간의 사이가 좋지 않다고 합니다. 거의 원수에 가깝다고 하던데, 이를 잘 이용하면 가능하지 않겠습니까?”
“……?!”
아리아의 확신 어린 미소에 루시의 눈동자가 요동쳤다.
옥타나는 아리아 데스모다. 거짓의 대마녀는 재의 마녀다. 악황후는 루한의 재상이다. 즉, 제국과 루한의 내정은 사실상 그녀의 것이었다.
둠과 옥타나의 사이가 안 좋다는 소문 정도야 그녀에겐 휘파람 부는 것보다 퍼뜨리기 쉬웠다.
아리아는 이렇게 조성한 소문을 근거로 여왕을 꼬드겼다.
이젠 솔라시우스를 움직이게 할 차례.
“이 목걸이, 버리지 않길 잘했어.”
제국의 황궁에서 옥타나는 과거 리나 리버스에게서 빼앗은 반쪽짜리 로사리오를 만지작거렸다.
그녀가 이 로사리오를 되찾았을 당시엔, 그림자 핵이 루나시르네의 몸에 완전히 깃들었을 때였다.
악황후는 이 로사리오를 솔라시우스에게 보낼 생각이었다. 암흑대공의 이름으로 편지까지 써서 말이다.
편지의 내용은 이미 죽어서 이 세상에 없는 루나시르네를 암흑대공이 데리고 있다는 정도로 쓰면 될 것 같았다.
“자아! 어서 와라!”
옥타나는 목걸이와 편지를 동봉하여 루한으로 보냈다.
회귀 전, 루시가 로안에게 내린 다섯 번째 시련이자 마지막 임무.
바로 암흑제국의 최강자, 암흑대공 둠을 죽이라는 명령.
“암흑제국의 도살자 대공, 둠을 죽이고 와라! 이게 바로 내가 경에게 내리는 다섯 번째 시련이다.”
결국 루시는 자살이나 다름없는 임무를 로안에게 내렸다.
“받들겠습니다.”
그리고 로안은 그녀가 내린 다섯 번째 시련을 기다렸다는 듯이 수락했다.
여왕은 가슴이 미어지는 것을 느꼈다.
* * *
여왕의 명을 받은 로안은 시즈를 타고 제국으로 향했다.
그리고 제국 한복판에서 암흑대공과 박빙의 결투를 치렀다.
하지만 결국, 로안 샬루트는 둠을 암살하는 데 실패했다.
도살자 대공에게 큰 부상을 입혔지만, 그게 끝이었다.
로안 또한 마찬가지로 죽음에 가까운 부상을 입었고, 가까스로 제국에서 탈출해 루한의 왕궁으로 복귀했다.
날개가 반쯤 잘리고 피투성이가 된 시즈를 타고서.
쿠오오옹, 크에에엑.
피를 철철 흘리며 왕궁 앞까지 날아온 시즈는 30초 정도 숨을 헐떡이며 피를 쏟다가 죽었다.
로안은 피투성이 산송장이 되어 안장에 반쯤 매달리다시피 늘어져 있었다.
시즈는 그런 주인을 등에 업은 채로 죽었다.
“키우우우…….”
녀석은 죽기 직전까지 자신의 주인을 살폈다.
등에 매달린 주인이 무사한지 살피려고 발버둥 쳤고, 마지막으로 주인의 얼굴을 보려고 발악했다.
걸레처럼 너덜너덜해진 긴 목을 애써 움직이다 숨이 멎은 드레이크.
그런 영물의 모습은 보는 이의 눈시울을 뜨겁게 만들었다.
그리고.
‘왜……? 도대체 왜 온 거야?! 설마 저것도 연기인 거야?’
멀리서 이를 지켜보던 여왕 루시푸르네는 혼란과 어지러움을 느꼈다.
시녀장 베네사와 기사단장 하이마가 급히 로안을 치료하러 데려가는 게 보였다.
그렇게 멍한 눈으로 로안이 실려 간 방향을 보고 있는데…….
“간신히 목숨을 건졌지만. 목숨이 위태로운 상태라 합니다.”
뒤에서 재상의 목소리가 그녀의 귀를 두들겼다.
“사제와 치료사가 달라붙어 각종 포션과 약초를 들이부으며 치료를 하고 있다지만, 힘들 것 같습니다.”
10미터 거리에서 재상이 로안의 상태를 루시에게 보고했다.
“아무리 봐도 저건…… 연기가 아닌 것 같군요.”
말을 하는 아리아의 모습은 태연함 그 자체였다.
“그대는 분명 내게……!”
“예, 로안 샬루트가 악황후와 긴밀한 관계가 아닐까 하는 ‘추측’을 했었지요.”
“그대가 보기엔 저게…….”
“황공하오나 저는 추측을 했을 뿐입니다. 그 추측을 토대로 의견을 냈을 뿐이고요. 결정은 폐하께서 하셨습니다.”
“?!”
“어찌 되었든, 이것으로 로안 샬루트의 충성은 입증한 셈입니다. 하지만 설령 목숨을 건진다 해도 평생을 침대 위에서 살아야 할 듯싶습니다.”
혼란스러워하는 여왕 앞에서 아리아는 발뺌한다.
“저도 참 곤란합니다. 마녀회의 일부 마녀들이 제국의 첩자로 밝혀졌습니다. 그들이 저에게 잘못된 정보를 주었더군요. 마나의 맹세까지 한 정보들이었는데…….”
그녀는 진심으로 난처하다는 듯한 투로 말을 이었다.
“즉, 지금까지 저와 마녀회가 조사한 자료에 문제가 있었던 셈입니다. 현재 급히 전면 재검토에 들어갔습니다. 이걸로 로안 경의 명예라도 지켜야 하지 않겠습니까?”
여왕은 망연자실한 얼굴로 왕궁 앞에 죽어 있는 붉은색 드레이크를 보았다. 방금까지 로안이 매달려 있었던 시즈의 안장은 피범벅이다.
“어쨌든…… 유감입니다, 폐하.”
재상은 마지막으로 유감을 표하고는 사라졌다.
“……!”
루시는 혼란스러웠다. 너무 혼란스러워 미쳐 버릴 것만 같았다.
* * *
악몽보다 더 끔찍했던 회상이 끝났다.
‘?!’
트라우마의 늪에서 루시푸르네를 꺼내 준 것은 ‘살기’였다.
쿠웅, 쿠웅, 콰아앙.
습격! 습격이다!
꺄아아아악!
으아아아악! 살려 줘…….
막아라! 막아!
살기와 함께, 파괴와 살육의 바람이 여왕의 침실까지 불었다.
루시는 멍하고 무거운 머리를 세차게 흔들며 구석에서 일어났다.
“……?”
설원의 저주가 심해지고 누구도 가까이 올 수 없다 보니, 그녀의 귀와 시야도 많이 제한된 상태다.
하지만 대강 짐작은 갔다. 설원의 가호가 사라졌다. 왕국 전역에 몬스터가 날뛰고 있다. 흉악한 이들이 살육과 폭력을 휘두른다고 했다. 국경 또한 혼란스럽다고 들었다.
만약 제국군이 볼카와 요정 숲에서 큰 피해를 입지 않았다면?
진즉에 국경을 넘어 변경백을 삼켰을 것이다.
즉, 지금 왕궁에서 나는 소란의 원인은 둘 중 하나다.
‘반란이거나, 제국이거나.’
루시푸르네는 자신의 몸 상태를 살폈다. 몸살이라도 난 것처럼 몸이 무겁고 두통도 심하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오한을 느끼기도 했다.
“폐하! 베네사입니다. 들어가겠습니다.”
때마침 침실 문밖에서 시녀장의 외침이 들렸다.
“들어와라!”
루시는 최대한 몸을 침실 구석에 붙이면서 외쳤다.
여왕의 허락이 떨어지자마자 문이 벌컥 열리더니 시녀장이 들어온다. 그녀는 들어오자마자 고개를 숙이고서 보고한다.
“폐하, 제국입니다! 암흑대공이 직접 용 기사단을 이끌고 쳐들어왔습니다!”
베네사의 보고에 루시는 예상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설원의 가호가 사라졌다. 하지만 제국군은 볼카와 요정 숲에서 큰 피해를 입었다.
대군을 동원할 순 없을 터, 대신 기동력이 좋은 최정예 병력을 몰고 올 가능성을 점쳤다.
“암흑대공…….”
루시는 천천히 중얼거렸다.
“폐하, 어서 피하시옵소서!”
여왕의 몸 상태가 좋지 않음을 잘 아는 베네사가 진심 어린 걱정을 담아 말했다.
“섭정과 기사단장은?”
“둘은 현재 왕도에 없습니다.”
“불행 중 다행이군.”
설원의 가호가 사라진 루한은 혼란스러웠다. 그래서 하이마와 루카스는 왕도에 머물지 못했다. 루한 전역을 돌면서 여왕 대신 내정을 살펴야 했다.
“급히 마법 통신을 루카스 공에게 보냈습니다. 잠시 대피하셨다가…….”
“아니.”
루시푸르네는 베네사의 말을 끊으며 고개를 저었다.
회귀 전의 과오가 떠오른다.
솔라시우스를 죽음 직전까지 내몰았고, 그가 아끼는 친구(시즈)를 죽게 만들었던 죄악이 선명하다.
‘그래, 아직 속죄는 끝나지 않았어.’
루시는 그렇게 중얼거리곤 몸속의 마나를 일으켰다.
설원의 저주가 루시의 심장을, 영혼을 옥죈다. 이를 악물고 신음을 삼킨다.
“폐하…….”
루시의 생각을 눈치챈 베네사가 발을 동동 구른다.
“시녀장은 사람들을 이끌고 최대한 멀리 대피하라.”
“하지만!”
“명령이다! 여왕은 여왕의 일을, 시녀장은 시녀장의 일을 하라!”
“폐하를 보필하는 것이 제 일입니다!”
“내가 방해받지 않고 힘을 쓸 수 있게 돕는 것이 나를 보필하는 것이다!”
“……알겠습니다.”
여왕의 각오를 읽은 베네사는 결국 루시를 설득하는 것을 포기했다. 폐하의 지시대로 하는 게 맞다. 자신은 여왕 곁에 있어 봤자 도움은커녕 방해만 될 것이다.
“……부디, 부디! 승리하소서.”
베네사는 씁쓸함을 입에 물고는 허리를 깊숙이 숙여 예를 표했다. 그리고 급히 침실 밖으로 사라졌다.
시녀장이 사라지고 얼마나 지났을까?
다시 홀로 남은 여왕의 침실은 얼마 안 가 또 다른 방문자를 맞이하게 되었다.
챙그랑!
타앗, 타앗, 타앗.
침실의 창문이 깨지고, 하얗고 푸른 바닥에 피 묻은 군화 자국이 찍혔다. 매우 무례한 방문자였다.
키우우우우우.
찬 바람이 그대로 들어오는 깨진 창밖으로 와이번의 괴성이 들려왔고.
처억, 처억, 처억.
검은 중갑으로 단단히 무장한 기사들이 기다란 창을 겨누며 여왕을 포위했다.
거리는 하나같이 10미터를 유지 중이다.
그리고 그렇게 루시를 포위한 적들 중심에 유독 키가 크고 존재감이 강한 기사가 서 있었다.
바로 암흑대공 둠이다.
저벅, 저벅.
둠을 본 루시는 차가운 표정으로 발을 움직였다.
그녀가 대공과 기사들을 향해 걸어가자, 제국 기사들이 우르르 뒷걸음질 친다.
하지만 오직 한 사람, 암흑대공만큼은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둠과 루시의 거리가 10미터, 7미터까지 가까워진다.
둠은 아무렇지 않아 보였다.
“……?”
이쯤 되니 루시푸르네의 표정이 굳었다. 하지만 그녀는 발을 멈추지 않았다.
어느덧 5미터까지 둘의 거리가 좁혀졌다.
도살자 대공은 여전히 멀쩡하다.
그리고 마침내 3미터에 이르자.
“……!”
여왕의 얼굴은 경악으로 물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