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23화
#123.
암흑대공 ‘둠 록 기가스’는 제국 기가스 대공가의 가주다.
그는 태어나면서부터 세상을 회색으로 느꼈다. 무료했고 모든 것에 감흥이 없었다. 기쁨도, 슬픔도, 고통도 느끼지 못했다. 그가 살아 있음을 느끼는 순간은 오직 살육을 행할 때였다.
피가 튀고 비명이 나오고 두려움에 벌벌 떠는 대상을 바라보고 있으면 말로 형용할 수 없는 희열과 쾌락을 느꼈다.
지구에서 흔히 사이코패스라 불리는 유형이었던 것이다.
둠은 어릴 적에는 동물들을 잔인하게 살해했고, 소년기에 접어들자 하인과 하녀를 잔혹하게 죽였다. 하지만 대공가의 누구도 둠이 살인을 했다는 사실을 눈치채지 못했다.
설령 둠의 짓으로 의심하는 사람이 있다고 해도 소용없었다.
그는 사이코패스면서도 머리가 좋았다. 감정을 느끼지 못했지만 타인의 감정을 흉내 내는 건 잘했다. 도살자인 동시에 천재였고, 혈통 또한 대공가에서 가장 적통이었다.
그의 성정을 눈치채거나 견제하려 했던 형제와 친척, 가신은 전부 의문의 사고로 숨졌다.
모든 배후에 둠이 있다는 사실은 뒤늦게야 밝혀졌다. 그의 부모인 대공과 대공 부인은 뭔가 대처해 보기도 전에 원인을 알 수 없는 병으로 급사했다.
둠은 17세의 나이로 기가스의 대공이 되었다. 이제 누구도 둠을 막을 수 없었다. 적어도 기가스 대공령 내에서는 말이다.
악소문이 무성함에도 대공령에서 반란이 일어나지 않은 데는 다 이유가 있었다.
둠은 머리가 좋았기에 영지 경영을 잘했다. 검술이 뛰어났기에 영지의 기사들이 충성했다. 기사와 병사들에게 주군의 잔혹한 성품은 오히려 카리스마로 다가왔다.
번영하는 대공령과 대조되게 대공가의 대저택에서는 늘 비명 소리와 피가 멈추지 않았다.
대공령은 천국이자 지옥이 되었다.
둠과 결혼한 부인은 몇 년 주기로 죽었고, 재혼만 다섯 번을 했다.
다섯 번째 부인마저 그의 학대를 견디지 못하고 자결하자, 더 이상 대공 가문으로 딸을 시집보내려는 귀족이 없었다.
둠은 상관없었다. 그에겐 푸른 피의 귀족이나, 천한 노예나 똑같았기 때문이다.
오히려 연약하고 쉽게 망가지는 귀족 여식보다 평민이나 노예가 가지고 놀기 더 좋았다.
기가스 대공가는 제국에서 노예를 가장 많이 사들이는 영지가 되었고, 그의 손에 죽은 노예는 수백 명에 달했을 정도다.
제국 내에서 가장 악명 높았던 존재. 사람들은 그를 암흑대공 또는 도살자 대공이라 불렀다.
악명은 하늘 높은 줄 모르고 날아올랐고, 둠이 주인으로 있는 기가스 대공가는 대귀족이었기에, 누구도 그를 막을 수 없었다.
오직 제국의 황제만이 둠을 처벌할 수 있었다.
제정신이었을 적의 황제는 대공의 악명을 좌시하지 않았고, 그가 참석하지 않은 재판을 열어 벌을 내렸다.
그러나 아무리 황제라도 반란도 일으키지 않은 대공위의 대귀족을 죽일 수 없는 노릇. 황제는 기가스 대공령을 고립시키고 둠을 대공령 안에서 나오지 못하도록 평생 연금시키기로 결정했다.
외부에서 더 이상 노예를 수급할 수 없게 되자, 둠의 도살은 영지의 백성들에게까지 뻗었다.
대공령의 백성들은 살기 위해 너도나도 자신의 고향을 떠났고, 충성스러운 기사들과 병사들도 주군을 버렸다.
넓은 둠의 영지에는 이제 아무도 살지 않게 되었다.
그렇게 암흑대공 둠은 평생 넓은 대공령 안에 홀로 있게 되었다.
하지만 영원할 것 같았던 그의 고독은 생각보다 일찍 끝났다.
여덟 번째 겨울이 찾아왔을 때였다.
천 년 가까이 이어 오던 마하 제국이 급격히 무너지기 시작했다.
2황후 옥타나에 의해 황실과 황제가 타락했기 때문이었다. 제국은 혼란에 빠졌다.
제국의 실권을 잡은 옥타나는 암흑대공 둠을 좋게 보았다. 정확히는 그의 재능을 높게 평가했다.
“몸과 정신이 참으로 특이하네? 이 정도면 내가 구상한 실험들을 견딜 수 있겠어.”
거짓의 대마녀는 긴 세월 동안 설원의 가호를 연구했다.
“대공, 당신에게 다시 한번 마음껏 살육을 즐길 수 있는 자유를 주지. 대신! 내 실험에서 살아남아야 해.”
“기꺼이.”
둠은 옥타나의 실험에 기꺼이 응했다.
둠이 흔쾌히 수락하자, 옥타나는 아이처럼 기뻐했다. 그녀는 수백 년 연구의 결과물과 각종 이론들을 둠의 몸에 쑤셔 넣었다.
그리고 둠은 옥타나의 온갖 실험을 견뎌 냈다.
“성공이야! 처음으로 설원의 징벌에서 견딜 수 있는 존재가 완성됐어!”
둠은 옥타나의 실험으로 몸과 영혼에 강력한 냉기 저항을 품게 되었다. 보통의 인간이라면 진즉에 몸과 마음이 망가져야 정상이지만, 둠의 정신은 날 때부터 맛이 가 있었고 몸 또한 애초에 고통을 거의 느끼지 못하는 데다 타고난 무골이었기에 견딜 수 있었다.
그녀는 실험 과정에서 얻은 둠의 피를 가공하여 제국 병사들에게 주입했다.
둠의 피를 수혈받고 살아남은 병사들은 둠과 비슷한 감정 없는 살인 기계가 되었다. 비록 오리지널과 비교하면 발끝에도 못 미치는 열화판이었지만, 그럼에도 병사 하나하나가 어지간한 기사와 맞먹는 전투력을 보여 줬다.
암흑대공과 더불어 대륙에서 가장 악명 높은 암흑군단이 탄생했다.
“좋아, 어서 진군하도록 해! 목적지는 루한이야. 그 땅에 비명과 울음소리가 끊이지 않게 해!”
모든 준비가 끝나자, 옥타나는 약속했던 살육의 자유를 둠에게 주었다. 루한을 침략하여 그가 지닌 순수한 악을 마음껏 펼치게 했다.
* * *
짧은 순간이지만, 루시푸르네는 둠에 대한 대략적인 정보를 떠올리고 정리했다.
현재 둠과 루시의 거리는 3미터로 아주 가깝다. 이렇게 가까이 온 사람은 솔라 이후로 눈앞의 도살자가 처음이다.
심지어 설원의 저주가 매우 악화된 상태에서의 거리다. 회귀 전보다 더 심각한 상태다.
그러나 둠은 멀쩡했다.
“?!”
루시의 얼굴에 경악이 스쳤다가 사라졌다.
그가 설원의 징벌에서 비교적 자유롭다는 사실은 익히 알고 있었다. 변경백과 루한 전역에서 암흑대공에 대해 모르는 사람은 없었으니까.
‘이 정도였을 줄이야. 마왕의 권능으로 더 강해진 건가?!’
루시는 질렸다는 표정을 지었다. 왜 그가 설원의 저주 가까이서 멀쩡한지는 대강 이해했다. 그랬기에 더더욱 긴장했다.
그녀는 온 힘을 다해 설원의 권능을 펼쳤다.
고오오오오.
사나운 설원의 폭풍이 그녀와 둠을 휘감았다.
‘으윽!’
마나를 사용하자, 전에 옥타나와 싸우다가 입은 부상이 욱신거렸다. 설원의 매서움도 이전 같지 않았다.
하지만 썩어도 준치라고, 악화된 설원의 저주와 그녀가 펼친 설원의 폭풍이 합쳐지자 가공할 냉기가 사방으로 뻗었다.
“……!”
그제야 처음으로 둠이 반응한다. 맹렬한 냉기 폭풍에 그의 다리가 절로 뒤로 밀려난다. 3미터의 거리가 5미터, 10미터까지 벌어진다.
“쏴라!”
“설원의 마녀를 잡아라! 죽여도 좋다!”
피슈욱!
동시에, 창밖에서 와이번을 타고 있던 몇몇 기사가 그녀를 향해 석궁을 쏘았다.
그냥 석궁이 아니다. 석궁과 볼트에 온갖 마법이 인챈트된 공격이었다.
“공격하라! 대공 각하를 도와라!”
둠과 함께 쳐들어온 기사들도 마법으로 인챈트된 단창과 손도끼를 여왕에게 던졌다.
여왕은 자신을 향한 기사들의 공격을 가소롭다는 듯 비웃었다.
휘이이이잉.
그녀 주위에서 휘몰아치던 새하얀 폭풍이 응축되었고, 날아오는 모든 공격을 막았다. 강풍으로 경로를 바꾸기도 했고 압도적인 냉기로 얼려 버린 뒤 멈추게 만들기도 했다.
선공을 양보했으니 이번엔 그녀 차례다.
파바바바밧.
루시푸르네 주위로 냉기가 압축되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족히 수백은 넘어 보이는 얼음으로 된 화살이 생성되었다.
휘잇.
그렇게 생성된 얼음 결정들이 설원의 폭풍을 타고 사방으로 쏘아졌다.
“!!”
푸부부부북!
폭풍처럼 쏘아진 얼음 화살들은 제국 기사들을 그대로 꿰뚫었다. 그들이 입은 검은 갑옷이 허무할 정도로 쉽게 뚫렸다. 갑옷에 인챈트된 무수한 마법이 무안할 정도다.
마찬가지로. 창밖에서 마법과 석궁을 조준하던 기사들 또한 절명한 와이번과 함께 지상으로 추락했다.
순식간에 루시를 포위하던 수십의 기사가 전멸했다.
오직 단 한 명, 회색으로 된 전신 갑주를 입은 장신의 기사만이 멀쩡히 서 있을 뿐이다.
그는 부하들이 전멸했음에도 어깨를 으쓱할 뿐이었다.
스르르릉.
그리고 거대한 회색 장검을 소환하여 여왕에게 겨눴다.
여왕은 기다란 장검을 겨눈 둠을 향해 걸었다. 설원의 저주와 폭풍을 가득 어깨에 얹고서.
이제 이 왕궁에는 여왕인 자신과 눈앞의 회색 멀대밖에 없다.
몸에서 느껴지는 고통과 별개로 그녀는 모처럼의 자유를 느꼈다.
“과연 대단하오, 루한의 여왕.”
전신을 회색 갑옷으로 무장한 암흑대공이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높낮이 없는 어조다.
“손님 주제에 무례하더군, 암흑 대공.”
루시가 눈에 독기를 품고서 둠을 노려봤다. 여전히 설원의 폭풍이 몰아쳤고, 얼음 결정 또한 계속해서 생성되어 불청객을 쫓아낼 준비를 마쳤다.
“손님이 아니라 강도라서.”
이에 둠은 뻔뻔하게 답했다.
부우우우웅.
곧이어, 눈으로 좇기 힘든 속도로 검을 휘둘렀다.
콰아아아앙.
단 일격에 여왕의 침실이 반으로 쪼개졌다.
‘크으윽!’
루시는 이를 악물며 암흑대공의 회색 검기를 피했다.
뒤로 피한 그녀의 볼에 붉은 실선이 그어졌다가 핏줄기를 한 줄 흘리고 사라졌다.
그러나 아직 둠의 공격은 끝나지 않았다.
부와아아악!!
다시 한번 거대한 회색 단두대가 그녀를 덮쳤다.
이번엔 너무 가까워 피하지 못한다.
콰아아악.
루시는 아까부터 모아 뒀던 얼음 결정들로 몸통만 한 얼음 방패를 만들어 회색 검기를 막았다.
그러면서도 설원의 폭풍을 운용해 둠을 공격했다.
아무리 냉기 저항을 극한으로 올린 암흑대공이라지만, 이렇게까지 공격하니 효과가 전혀 없지 않았다. 그의 몸이 첫 공격 때보다 눈에 띄게 느려졌다.
하지만 단지 그뿐이다.
눈앞의 도살자는 느리지만 여전히 위협적이었고, 오히려 그녀가 내뿜는 냉기를 즐기는 것처럼 보였다.
‘도대체!’
이를 본 루시는 기가 찼다.
전에 싸웠던 옥타나도 그렇고, 지금 눈앞의 둠도 그렇고!
냉기 저항이라니, 설원의 권능 앞에서 멀쩡하다니!
하나같이 자신의 천적 같았다.
마치 수백 년 동안 오직 설원의 대마녀를 상대하기 위한 연구만을 해 온 것 같았다.
퍼어어엉.
무언가가 터지는 소리와 함께 그녀의 상념이 끊어졌다. 대공의 회색 검기가 루시의 얼음 방패를 부쉈다.
피시시시시싯.
뾰족한 얼음 방패의 얼음 파편이 설원의 강풍에 휩쓸려 둠을 공격한다. 파편이 그의 갑옷을 뚫고 피부마저 상처 냈지만, 그는 멈추지 않았다.
부우우웅.
루시푸르네의 얼음 방패를 부순 둠의 회색 검격이 힘을 거의 잃지 않고 그대로 루시를 쫓았고, 그녀는 몸을 바닥에 구르면서 간신히 피했다.
콰아아앙.
다시 한번 왕궁에 거대한 지진이 일었다.
쿠르르르르, 쿠우우웅.
순백의 왕궁이 반쯤 무너지기 시작했다.
이제는 그녀가 있는 장소가 침실인지 알현실인지 구분조차 가지 않을 정도로 내부가 엉망이 되었다.
쿨럭!
엉망이 된 바닥을 구른 루시의 입에서 피가 뿜어져 나왔다.
둠을 공격하던 설원의 폭풍이 눈에 띄게 약해지기 시작했다. 쉬지 않고 생성되었던 얼음 결정들도 힘을 잃고 떨어졌다.
“쯧, 옥타나와 싸우면서 부상을 입었다고 듣긴 했지만 이리도 약하다니.”
그런 여왕을 둠이 아쉽다는 듯 혀를 차면서 내려다본다.
“……흐으으, 끄읅!”
루시는 몸을 떨면서 간신히 일어섰다. 두 눈엔 저 앞의 회색 도살자를 죽일 듯이 담았다.
털썩.
하지만 이내 다리에 힘이 풀렸는지 그 자리에 주저앉는다.
한계다. 마나를 운용할수록 몸과 영혼이 찢어질 것 같았다.
몸이 너무나 아팠다. 특히 옥타나에게 찔렸던 가슴이.
그녀는 문득 손목에 차고 있는 팔찌를 보았다. 완전히 시들어 버린 세계수 팔찌가 자신의 처지와 비슷해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