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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여왕의 EX급 방랑기사-124화 (124/212)

제124화

#124.

허억, 허억.

거친 숨소리가 입김과 함께 루시푸르네의 입에서 나왔다.

덜덜덜덜덜.

루시는 온몸을 덜덜 떨었다. 추위, 추위에 의한 떨림이다.

추위를 느낀다는 것은 그녀의 몸과 영혼이 설원의 권능을 담아 내지 못할 정도로 망가졌다는 것을 의미했다.

스으으으으으.

설원의 권능은 빠른 속도로 그녀에게서 이탈하기 시작했다. 루시의 몸과 영혼이 더 이상 머물 가치가 없어졌다고 판단한 것이다.

권능은 없고 저주만 품은 최악의 상황.

이는, 죽음이 가까워졌음을 뜻했다.

‘말도 안 돼.’

루시푸르네는 최후의 순간이 다가왔음을 본능적으로 인지했다.

회귀 전의 마지막 순간과 판박이다.

설원의 폭풍은 약해졌지만 설원의 저주는 더욱 강해진 것 같았고, 냉기 또한 강해져 왕궁 전체를 꽁꽁 얼렸다.

‘이렇게 죽는다고? 내가? 회귀까지 했는데! 이렇게 끝난다고?’

한편으론 어이가 없었다. 이런 최후라니. 믿어지지 않았다.

‘솔라…… 솔라시우스!’

무엇보다 솔라시우스와 제대로 만나지도 못하고 죽는다는 사실이 두려웠다.

설원의 권능이 루시에게서 빠져나오려 하자, 둠은 폭풍이 불지 않음에도 매서운 추위를 느꼈다.

“엄청난 냉기군.”

추위에 벌벌 떠는 루시와 마찬가지로 둠 또한 견디기 힘든 추위를 느꼈다. 그는 서둘러 기다란 회색 장검을 단두대처럼 높이 들었다.

“어쩔 수 없지. 고통 없이…… 빠르게 보내 주지.”

도살자 대공이라는 이름답지 않은 예우였다. 그 정도로 버티기 힘들었다. 서둘러 여왕의 목을 따고 떠나고 싶을 정도로 사방이 추웠다.

‘…….’

루시는 추위로 의식이 먹먹해짐을 느꼈다. 멍하니 허공을 응시했다.

‘회귀 전에는 그나마 솔라와 같이 최후를 맞았는데…… 이번에는 이게 뭔지…….’

허탈한 미소를 짓고 눈을 감았다.

설원의 대마녀이자 루한의 여왕은 이제 없다. 그저 추위에 벌벌 떠는 저주받은 여인만이 여기 있을 뿐.

그녀는 추위와 외로움을 동무 삼고는 최후를 기다렸다. 묵묵히.

‘……?’

하지만 시간이 지나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더불어 그녀를 짓눌렀던 추위가 옅어지기 시작한다.

몸과 영혼을 찢을 것처럼 아려 왔던 가슴의 통증도 사라진다.

그리고 무엇보다.

‘설원의 권능이?!’

약해진 그녀를 버리고 떠나려던 설원의 권능이 다시 돌아오기 시작했다. 무언가에 겁을 잔뜩 집어먹고서.

“?!”

루시는 감았던 눈을 급히 떴다. 눈을 비벼 몽롱하고 뿌연 시야를 바로 잡았다.

눈앞에 한 남자의 등이 보였다. 그 남자는 금발의 방랑 기사였고, 등에는 불로 된 날개를 펄럭였으며, 몸 전체에는 광휘가 눈부시게 일었다.

카앙, 캉, 퍼어억!

그리고 태양을 담은 검으로 회색 도살자를 일방적으로 몰아붙였다.

“아아……!”

애써 선명해졌던 루시푸르네의 시야가 다시 뿌옇게 됐다.

* * *

미나스와 광휘의 군단은 직할령까지 빠르게 행군했다. 수천의 인파가 이동하는 것은 아무리 서두른다고 해도 매우 느리다.

그래서 미나스는 100의 선발대를 추렸고, 서둘러 솔라시우스를 돕기 위해 달렸다.

그들은 그렇게 달리다가 하늘에서 무언가를 발견했다.

바로 암흑대공과 제국의 드래곤나이츠였다.

“암흑대공과 용 기사단이다! 북쪽으로 가고 있어!”

“형님 폐하께 이 사실을 알려야 한다! 전령, 전령을 보내라!”

미나스는 솔라에게 급히 전령을 보냈고, 그가 보낸 전령은 운이 좋게도 막 저택을 정리하고 나온 솔라를 바로 만났다.

전령이 건넨 소식을 들은 솔라는 암흑대공의 의도를 바로 눈치챘다.

‘둠이 여왕을 노리고 있어! 그녀가 위험해!’

그는 급히 왕도로 갈 방법을 모색했다.

일단 말을 타고 가기엔 너무 늦다. 시즈가 날 수 있다면 좋으련만, 녀석이 하늘을 날 수 있을 정도로 크려면 몇 년 더 자라야 한다.

그렇다면 방법은 공간 이동뿐이다.

“루나, 로뮤! 공간 이동 마법 가능해?”

차원의 미아가 될 위험을 감수하기로 했다.

“힘들어. 설원의 가호가 사라지는 바람에 마나 배열이 엉망이야.”

“이 배열에 맞춰 수식을 새로 짜고 하려면 적어도 3일은 걸려.”

하지만 솔라의 각오가 무안하게 로뮤와 루나는 고개를 저었다.

“시몬……?”

이에 솔라는 시몬에게 시선을 옮겼다.

“안타깝게도 저는 마법을 쓰지 못합니다.”

하지만 시몬 또한 고개를 저었다.

“제가…….”

“안 됩니다, 유리아.”

시몬 옆에 있던 유리아가 나서려 했지만, 이내 시몬의 제지를 받아 멈췄다.

“알겠다. 다들 부담 갖지 마.”

솔라는 시몬과 유리아의 처지를 자세히 들었기 때문에 절대 강요하지 않았다.

시몬의 몸은 온갖 부정한 흑마법에 절어 있었다. 그가 솔라에게 자신의 힘이 아니라고 말한 것은 이런 이유에서였다.

부정하게 축적된 힘은 사용해선 안 됐다. 조금씩 자주 사용하든, 한 번에 많이 사용하든 결코 좋지 못했다. 둘 다 사용자의 몸과 영혼에 커다란 타락을 야기했다.

이는 시몬과 심장을 공유 중인 유리아도 마찬가지.

시몬은 유리아에게 심장을 옮겼다. 하지만 그냥 옮겼다간 시몬의 몸 또한 붕괴되기에, 둘은 심장을 공유하는 방식으로 서로의 생명을 유지 중이라고 했다.

만약 둘 중 한 명이 죽으면 나머지 한 명도 죽게 된다. 둘 중 한 명이 타락하면, 다른 한 명도 타락한다.

심장을 공유 중이기에 서로의 감정 또한 공유가 가능했다.

졸지에 원앙이 되어 버린 꼴이다.

“급박한 와중에 이런 말을 하게 돼서 죄송하지만, 이만 가 봐야 할 것 같습니다.”

시몬은 진심으로 미안한 표정으로 불쑥 솔라와 일행에게 말했다.

“…….”

시몬의 감정을 공유 중인 유리아도 미안한 표정으로 고개를 들지 못했다.

“벌써 진행된 건가?”

솔라가 그런 두 사람을 살피며 물었다.

“그렇습니다. 유리아 양에게 남아 있는 알파의 잔해가 꿈틀거리고 있습니다. 서둘러 심신을 수양해야 합니다.”

시몬과 유리아의 몸속에 내재된 사악한 기운을 가라앉히려면 정의와 선을 행해야 했다.

부정한 마나와 악마의 힘을 사용하지 않고 선을 행하려면 일단 전투는 피해야 한다. 병자와 다친 사람을 치료하고 배고픈 사람들을 구휼하는 일이 적격이다.

시몬은 본래에 가지고 있던 신성력만을 사용할 예정이었고, 유리아 또한 본래 지녔던 기본적인 검술만을 사용해 시몬을 도울 예정이었다.

“참고로 저희와 악황제의 관계는 걱정 안 하셔도 됩니다. 저희가 그를 피하는 것처럼, 지금은 그도 저와 유리아 양을 어떻게 할 수 없습니다.”

막 떠나기 직전, 시몬이 솔라에게 작게 말했다.

“다행이군. 마음 놓고 보낼 수 있겠어.”

원작 세계선에서의 일로 대강 추측하고 있던 솔라지만, 시몬에게 직접 얘기를 들으니 확실히 안도했다.

“어서 가도록 해. 나중에 상태가 진정되면 그때 다시 만나지.”

그는 담담히 고개를 끄덕이며 흔쾌히 둘을 배웅했다.

“잘 가, 유리아 언니. 저…… 시몬 사제님? 유리아 언니, 잘 부탁드려요.”

“속죄의 고행을 떠나는 두 사람에게 언제나 평화가 함께하길.”

루나와 로뮤도 손을 흔들어 시몬과 유리아를 배웅했다.

“그럼, 가 보도록 하겠습니다.”

“리나…… 아니, 황녀 전하, 감사했습니다.”

“그냥 루나라고 불러 줘. 리나도 상관없고. 나중에 꼭 다시 만나자, 언니! 꼭!”

“응, 루나.”

둘은 솔라와 일행에게 허리 숙여 인사를 한 뒤, 말을 타고 길을 떠났다. 목적지는 일단 전장에서 멀리 떨어진 곳이다. 전장의 살기와 죽음 또한 두 사람이 품고 있는 부정적인 에너지를 자극할 우려가 있기 때문이다.

말을 타고 떠나던 유리아가 문득 상체를 반쯤 돌려 뒤를 돌아본다.

“…….”

그녀의 분홍색 눈동자가 미련을 담아 솔라시우스에게 고정됐다.

솔라 또한 유리아의 시선을 느꼈다.

“…….”

그는 평소와 같은 무심한 금색 눈으로 유리아의 눈을 응시했고, 작게 고개를 끄덕인 후 얼마 안 가 몸을 돌렸다.

아무 말 없는, 그의 눈빛과 행동 속에는 많은 메시지가 담겼다.

“…….”

그 메시지를 읽은 유리아는 멍하니 고개를 떨궜다.

잠시 후, 그녀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고 단념의 미소를 짓고는 정면으로 향했다.

“…….”

유리아와 심장을 공유 중인 시몬이 옆에서 안타까움과 미안함이 가득한 표정을 지었다.

시몬과 유리아가 사라지고, 솔라는 다시 왕도로 갈 방법을 고민했다.

“아빠! 나, 이젠 이것도 할 수 있다?”

그리고 쥴리아가 해답을 주었다.

화르릇.

그녀는 불살검 때와 마찬가지로 온몸을 불로 만들었다. 그리고 이번에는 검이 아닌, 날개 형태의 모습을 했다.

“……벌써 이게 가능한 거니?”

솔라는 자신의 날개뼈에 자리 잡은 쥴리아를 보며 놀란 반응을 보였다.

[응! 나 잘했어?]

아빠가 놀라자, 쥴리아는 괜히 기분이 좋았는지 불의 날개로 변한 자신의 몸을 파닥였다. 날개가 파닥이자, 불꽃이 잘게 떨어지면서 솔라의 몸이 붕 떴다.

“그래, 아주 잘했어.”

솔라는 쥴리아를 사용하면서 별의 저주가 다시 찾아오는 것을 느꼈지만, 애써 아무렇지 않은 표정을 연기하며 쥴리아를 칭찬했다.

참고로 쥴리아의 전생을 알게 되었을 당시, 솔라는 지구에서 부르던 아스트라라는 이름을 다시 부를까 했는데, 쥴리아는 루나가 지어 준 지금의 이름이 마음에 든다고 하여 기각됐다.

“먼저 가 볼 테니, 왕도까지 천천히 오도록 해. 미나스에게는 왕도로 오지 말고 변경백과 함께 제국군을 상대하라고 전해 줘.”

그는 바로 높이 날아오르면서 루나와 로뮤 그리고 전령으로 온 미나스의 기사에게 지시를 내렸다.

그리고 빠르게 하늘의 점이 되었다.

“……가 버렸어.”

“성검도 모자라서 날개라니…….”

루나와 로뮤는 멍하니 솔라가 사라진 북쪽 하늘을 보며 뒤늦게 입을 열었다.

“…….”

미나스가 전령으로 보낸 기사도 멍하니 입을 벌려 하늘을 바라볼 뿐이다.

끼에에에엥!

뒤이어 아직 날지 못하는 자신을 버리고 간 솔라를 시즈가 애처롭게 울면서 찾았다.

시몬과 유리아가 가 버리고 솔라마저도 사라진 지 반나절이 흘렀다.

“시즈! 보채지 좀 마! 갈 거야, 갈 거라고!”

루나시르네는 자신의 마녀복을 물어 당기는 시즈를 나무랐다.

“야아! 옷 찢어져! 이게 얼마짜린데?!”

마녀복이 찢어질 것 같자, 루나는 시즈의 콧등을 손으로 착착 때렸다.

끼이잉, 기잉.

루나에게 맞고도 시즈는 똥 마려운 강아지처럼 연신 안절부절못한다. 그런 시즈의 안장에는 늘 있어야 할 두 사람이 없어 휑했다.

‘잘 갔으려나? 늦지 않아야 할 텐데.’

루나시르네는 텅 빈 안장을 보다가 걱정스러운 눈으로 북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걱정 안 해도 돼, 루나. 로안은 강하니까.”

옆에서 로뮤의 부드러운 목소리가 들렸다. 맨카를 타고 루나와 시즈 곁으로 온 흑발의 하이엘프의 얼굴은 담담해 보였다.

“솔라 오라버니를 걱정한 게 아니야. 루한의 여왕님이 편찮으시다고 하셨잖아? 오라버니가 도착할 때까지 무사할지가 걱정이지.”

“그건 좀 염려되네.”

아직 마검 루시가 여왕 루시푸르네라는 사실을 모르는 루나는 진심으로 얼굴 한 번 보지 못한 여왕님을 걱정했다.

“설원의 가호가 회복되지 않으면 솔라 오라버니의 상태도 계속 불안할 텐데……. 아까 쥴리아의 날개를 등에 달았을 때도 좋지 않아 보였어.”

물론 여왕 루시푸르네 자체를 걱정하는 건 아니었다. 설원의 대마녀가 펼치는 설원의 가호를 걱정한 것일 뿐.

그렇게 로뮤와 루나가 대화를 나누고 있는데, 뒤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유리아는…… 떠난 겁니까?”

“그 못난 아이에게 부디 축복이 있기를…….”

이제야 몸을 가눌 수 있게 된 지크문트와 그를 부축하는 프리드리히가 말을 타고 도착했다.

“1황녀 전하, 다시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선발대를 추려서 최대한 빨리 왔는데 이미 다 끝난 모양이군요. 그런데 형님 폐하는 어디 계십니까?”

미나스가 이끄는 저항군 무리의 선발대도 모습을 보였다.

로뮤와 루나, 미나스가 보낸 전령은 아까 있었던 일을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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