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25화
#125.
설명을 모두 끝낸 뒤, 루나와 로뮤는 서둘러 떠날 채비를 마쳤다.
“정말 저희가 같이 안 가도 되겠습니까?”
그런 두 사람을 보며 프리드리히가 걱정스레 물었다.
“솔라 오라버니의 명령을 따르세요. 지금 변경백의 국경이 심상치 않다고 하니까요.”
프리츠의 물음에 루나시르네는 평소보단 위엄 있는 어조로 말했다.
“하지만……!”
프리츠는 괜히 불안하다는 듯 안절부절못한다. 솔라와 루나에게 너무나 큰 빚을 졌기 때문에 무슨 수를 써서라도 돕고 싶은 심정이다.
“황녀 전하의 말씀이 옳다. 왕도의 일은 솔라시우스 전하께 맡기자꾸나. 우린 늘 하던 대로 국경을 수호하면 된다.”
후작 지크문트가 불안해 하는 프리츠의 어깨에 손을 올리면서 말했다.
“잘 부탁드립니다, 미나스 전하.”
후작은 이어서 솔라시우스를 닮은 청년에게 고개를 숙였다.
“물론이오. 형님 폐하의 지시는 나에게 신의 계시와 같소.”
후작의 공손한 부탁에 미나스트림도 정중히 예를 표했다.
이어서 미나스는 몸을 뒤로 돌려 뒤에 기립해 있는 수하들에게 외쳤다.
“우리 광휘의 군단은 지금부터 루한의 국경을 수호한다! 솔라시우스 폐하, 만세! 빛이여, 영원하라!”
“솔라시우스 폐하, 만세!”
“빛이여, 영원하라!”
그의 외침에, 어느 순간부터 ‘광휘의 군단’으로 불리게 된 제국의 유민과 저항군이 무기를 하늘 높이 치켜들며 외쳤다.
‘제왕의 자질이 있군.’
이를 본 지크문트는 속으로 감탄했다. 비록 솔라시우스의 압도적인 무력과 카리스마에 가려졌지만, 미나스트림 또한 천재였다.
요정 숲에서 변경백 내곽까지 수천의 인파를 큰 무리 없이 이끈 것부터가 그 증거다.
솔라시우스로부터 전권을 위임받았다고는 하나, 수천의 유민과 군대를 이끄는 것은 보통 일이 아니다.
보급부터 규율, 전염병, 낙오까지 챙길 것이 아주 많았다.
그래서 왕이나 대영주는 후계자의 능력을 시험할 때 군대의 행군을 어떻게 지휘하는지 주의 깊게 보는 편이었다.
지크문트 또한 마찬가지였고 말이다.
즉, 미나스트림의 리더십과 능력은 뛰어났다. 지금이라도 따로 노선을 취한다면 능히 나라를 건국하고도 남을 인물이다.
“흐음…….”
지크문트 옆에서 미나스트림을 바라보는 루나의 눈빛이 마냥 곱진 않다.
그녀도 후작과 비슷하게 미나스트림을 평가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단순히 감탄에 그친 후작과 달리, 루나는 껄끄러움을 느꼈다.
미나스가 잠재적인 정적으로 인식되었기 때문이다.
저 이복 오라버니를 나중에 어떻게 해야 할지 벌써 고민이다.
“황녀 전하, 여긴 저희에게 맡기고 어서 왕도로 가십시오.”
루나시르네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미나스가 해맑은 미소로 배웅한다.
“알겠어요. 미나스…… 오라버니와 광휘의 군단을 믿지요.”
루나는 차마 입 밖으로 내기 어색한 ‘오라버니’라는 단어를 미나스에게 붙이면서 억지 미소를 지었다. (미나스의 나이는 솔라보다 아래, 루나보다 위다.) 어찌 되었든 지금 당장은 이복 오라버니의 도움이 필요한 것은 사실이니까.
‘나중에 딴 생각하는 게 보이면 내 음영술로 처리하면 돼. 굳이 솔라 오라버니의 손을 더럽힐 필욘 없어.’
루나는 속으로 다짐했다.
‘내가! 나, 1황녀 루나시르네가! 태양의 그림자가 되는 거야.’
그녀 딴에는 나름 결연한 각오다.
“……?”
옆에 있던 로뮤가 주먹을 불끈 쥐고 있는 루나를 보며 고개를 갸웃했다.
* * *
짙은 회색 안개 속을 헤집듯이, 광휘의 빛줄기가 암흑대공의 회색 영역을 범한다.
퍼엉, 퍼억, 퍽.
구타에 가까운 무자비한 공격이 일방적으로 가해졌다.
두 개의 태양샘 반지를 끼고, 온몸이 빛으로 변하고, 불타오르는 한 쌍의 날개를 펄럭이는 태양의 화신.
이에 대적하는 암흑의 회색 종자의 모습은 애처롭기 그지없다.
“크으으윽! 커억!”
고통도 감정도 거의 느끼지 못하는 둠의 목소리에, 눈동자에, 매우 드물게 두려움과 당혹감이 보인다.
기다랗고 파괴적이었던 회색 장검은 솔라시우스가 발현하는 광휘에 묶여 제대로 휘두를 수 없었다.
고오오오오.
태양의 후예가 짙게 풍기는 압도적인 무력, 압사할 것 같은 기세에 새하얀 궁을 더럽히고 청은발의 여왕을 짓눌렀던 분위기는 순식간에 반전됐다.
퍼어엉, 퍼억, 콰아앙.
볕으로 이뤄진 검격과 잿빛을 흘리는 검격이 쉬지 않고 맞붙는다. 한쪽은 끝장을 내기 위해, 다른 한쪽은 어떻게든 버티기 위해, 묵직하게 여러 번 상대와 상대의 주변을 초토화시킨다.
--! --!
소음을 초월한 충격파가 가뜩이나 반파된 왕궁을 더욱 폐허로 만들고 있었다.
하지만 이 궁의 주인은 아름다웠던 하얀 궁이 어떻게 되든 말든 신경 쓰지 않았다.
루한의 여왕 루시푸르네는 눈물로 뿌옇게 변한 시야를 서둘러 손으로 훔쳤다.
눈물이 차올라 흐르기 시작하면 설원의 저주에 꽁꽁 얼어 고드름처럼 되기 때문이다.
훌쩍.
콧물이 나오려는 것도, 침이 나오려는 것도 간신히 참았다.
얼굴에 얼음 결정과 고드름이 끼면 불편한 것도 있지만, 지금 당장은 추해 보일 것 같아서 애써 참았다.
저 앞에, 자신을 지키기 위해 싸우는 남자에게 가능한 한 예쁘고 도도하게 보이고 싶었다.
솔라시우스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여왕의 표정이 몽롱해졌다.
부상으로 찢어질 듯 아팠던 가슴이 쿵쿵쿵쿵 뛰었고 요동치는 심장으로 분명 아플 법하지만, 이상하게도 그렇게까지 아프지 않았다. 통증은 여전한데 통증을 이겨 낼 수 있는 의지와 체력이 어디선가 차오르는 것 같다.
아마도 그 힘의 원천은 저기 계신 왕자님이겠지.
파스스슷.
태양검으로 암흑대공을 압도하던 솔라에게서 변화가 생겼다. 그의 등에서 활활 타오르던 불의 날개가 어느 순간 불꽃과 함께 흩어졌다.
저 날개는 도대체 어디서 난 것일까? 불의 정령 냄새가 강하게 나는 것을 보아선 요정 숲에서 배운 것 같았다.
그렇게 루시가 신기해 하고 있을 때.
“엄마……?”
갑자기 그녀 옆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익숙한 목소리였고 익숙한 기운이었다.
루시는 놀라 목소리가 들리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고, 붉은 머리카락에 금색 눈동자가 인상적인 어린 소녀를 보았다.
“쥴리아……?”
루시푸르네의 푸른 눈동자가 믿을 수 없다는 듯 크게 떨렸다.
“응!”
쥴리아는 자신을 멍하니 바라보는 루시에게 환하게 웃으며 인사했다.
“!!”
쥴리아의 인사를 받은 루시는 답례할 겨를도 없이 몸을 흠칫 떨었다.
‘위험해!’
문득 머릿속에 든 생각 때문이었다.
지금 루시와 쥴리아의 거리는 5미터.
그녀는 덜덜 떨면서 조심스레 쥴리아에게서 멀어지려 했다. 괜히 가까이 갔다가 무슨 일이라도 나면 안 되니까.
“괜찮아, 엄마.”
“어…… 응?!”
“이 정도까지는 견딜 만해.”
루시푸르네의 심정을 눈치챘는지 쥴리아가 그녀가 물러난 만큼 가까이 다가왔다.
“쥴리아…… 아, 안녕?! 실제로 보는 건 처음이지? 그러니까…… 내가 바로 마검 루시의…… 그러니까…… 이게 어떻게 된 거냐면…….”
그런 쥴리아를 보면서 루시는 머릿속이 하얗게 변해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
너를 위해 구해 놓은 장난감과 옷, 동화책이 있었는데, 이번 싸움으로 전부 어디로 갔는지 모르겠네.
루시는 아쉬운 마음으로 쥴리아를 힐끔 보면서 손가락을 꼼지락거렸다.
파아아아앗.
쥴리아와 루시푸르네, 두 모녀(?)가 만남을 이루는 와중에도 옆에서 싸움은 계속되고 있었다.
암흑대공 둠은 입에서 피를 뿜었다.
저 솔라시우스의 태양검을 상대하면서 내상을 제법 입었다.
요정 숲에서 대련했을 때, 그의 강함은 익히 잘 알았다. 자신이 마계에서 강해진 만큼 솔라시우스도 태양샘 반지라는 것으로 더 강해졌으니까.
그랬기에 문라이트 직할령에서 급히 여기 왕도로 기수를 돌린 것이다.
“날아온 건가? 그 불로 된 날개를 가지고?”
둠은 부상과는 별개로 호기심이 들끓었다.
“…….”
하지만 눈앞의 남자는 친절하게 그의 물음에 답해 주지 않았다. 그럴 의무도 없었다.
“그런 능력이 있다는 것은 몰랐는데…… 제대로 한 방 먹었어. 요정 숲에서 배운 건가?”
솔라에게서 대답이 없는데도 둠은 말을 이었다.
“……?”
그런 둠의 물음에 솔라는 고개를 갸웃했다.
‘마왕이 나에 대한 정보를 전부 공개 안 했군.’
지금 이 세계의 마왕은 지구에서의 기억을 가진 상태다. 그리고 지구에서 솔라는 방금처럼 쥴리아(아스트라)를 성검뿐만 아니라 날개와 같은 것으로도 종종 사용했었다.
그런데 눈앞의 적은 그걸 모르고 있었다.
‘견제?!’
대강 추측이 갔다. 지구에서도 마왕과 사천왕, 사천왕과 사천왕은 서로 협력하면서도 완전히 신뢰하지 않았으니까.
‘그렇다면…….’
이에, 그의 머릿속에 한 가지 잔꾀가 떠올랐다.
“마왕에게 못 들었나? 세피로스라면 이 능력을 알고 있었을 텐데?”
솔라는 여기 와서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
그의 대답에 둠의 미간이 좁아졌다.
‘설마? 옥타나가 조용한 것도?!’
뒤이어 둠의 머릿속에 불길한 상상이 떠올랐다. 감정이 거의 존재하지 않으며 살육과 전투 외에는 어떤 감흥도 없었던 그의 회색 세계에 적색경보가 떠올랐다.
“……가 봐야겠군.”
둠은 솔라의 손가락에 있는 두 개의 태양샘 반지를 슬쩍 보더니, 빠르게 뒤로 물러나기 시작했다.
“……!?”
의외인 것은 솔라가 둠의 뒤를 쫓지 않았다는 것이다.
아마도 뒤에 있는 루한의 여왕이 신경 쓰이는 것이겠지. 어쩌면 방금 사용한 능력 때문에 별의 저주가 심해졌는지도 모른다. 그래 봤자 설원 중심부라 생명엔 지장이 없겠지만.
“날 이대로 보낸 것을 후회하게 될 거다.”
둠은 떠나기 전 뒤를 돌아보며 차갑게 말했다.
“과연 그럴까?”
솔라는 오히려 여유롭게 어깨를 으쓱일 뿐이다.
“……!”
둠은 찝찝함을 뒤로하고 서둘러 거리를 벌렸다.
그리고 반파된 왕궁의 창밖으로 뛰어내렸다.
키오오오오오.
밖에서 서성이던 그의 와이번이 날아와 주인을 태웠다.
이어서 황궁이 있는 남동쪽으로 빠르게 사라져졌다.
그렇게 불청객이 사라졌다.
그가 서 있는 장소는 이제 고요하다.
몸과 영혼을 태울 것 같았던 별의 저주도 어느 순간 잠잠하다.
시원함을 느꼈고 평화가 하천처럼 고고하게 흐른다. 이 흐름의 줄기를 따라가다 보면, 저기 청은발의 여왕이 있겠지.
“…….”
“…….”
솔라와 루시는 마침내 얼굴을 마주하게 되었다. 세계수 정원 때와는 많이 다른 서먹함이 둘 사이를 채웠다.
“폐하! 여왕 폐하!”
“무사하십니까? 폐하……!”
때마침, 폐허가 된 왕궁 주위로 루카스와 하이마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 외에 피신했던 대신들과 마법사, 마녀 등이 왕궁 안으로 들어온다.
그들은 왕궁 주위에서 안절부절못하고 서 있다가 궁 안에서 살기가 사라지고, 파괴가 끝나고, 마지막엔 암흑대공으로 추정되는 자가 멀리 떠나는 것을 보자, 급히 왕궁 안으로 들어왔다.
“이럴 수가!”
“맙소사, 순백궁이…….”
“비열한 제국 놈들! 용서하지 않겠다!”
그리고 그렇게 용기 내서 들어온 왕궁 내부는 완전히 폐허가 되어 있었다. 밀고 새로 다시 지어야 할 정도로.
“그나저나 너무나 춥군. 폐하의 저주가 더 심해진 건가?!”
하지만 이보다 더 경악할 만한 광경이 아직 남았으니.
“어…… 어?! 저기, 저기 좀 봐!”
“여왕님 옆에 누군가가 있어!”
“말도 안 돼! 여왕 폐하 곁에 저렇게 가까이 있을 수는…….”
바로 여왕과 방랑 기사의 만남이었다.
솔라시우스는 입을 작게 벌리고서 입술을 옴짝달싹 못 하는 루시를 보다가 먼저 입을 열었다.
“루시푸르네.”
“솔…… 솔라시우스.”
그가 먼저 그녀의 이름을 부르자, 그제야 루시의 작게 벌어진 입에서 듣기 좋은 고운 목소리가 들렸다.
‘아직 회복이 덜 된 건가?’
솔라는 루시의 상태를 살폈다.
루시푸르네의 몸은 아직 잘게 떨고 있었다. 설원의 권능 중 상당수가 다시 그녀의 몸속으로 들어갔지만, 여전히 불안정했다. 특히 설원의 저주가 매서웠다.
별의 저주로 고통받던 솔라가 이제는 뜨거움이 아닌 추위를 느낄 정도였으니 말이다.
저벅, 저벅, 저벅.
그는 어깨를 잘게 떠는 루시를 향해 성큼성큼 걸어갔다.
손에는 아직 태양샘 반지 두 개가 끼워져 있었다.
허리춤에는 마검 윈테이라가 열심히 설원의 냉기를 충전 중이었다.
“헤에.”
쥴리아는 점점 가까워지는 두 사람 사이에서 아기 천사처럼 환하게 웃고 있었다.
솔라와 루시의 거리가 10미터, 7미터, 5미터 그리고 3미터까지 좁혀졌고, 더 나아가 1미터까지 가까워졌다.
“……!”
루시푸르네는 터질 것처럼 뛰는 심장 위에 손을 얹고는 점점 가까워지는 솔라를 멍하니 응시했다.
“!!”
“폐하와 저렇게 가까이 다가갈 수 있는 사람이라니?!”
“가만, 저 금발 금안의 방랑 기사는……?”
그리고 멀찍이서 이를 바라보는 모두가 경악한 얼굴을 했다.
믿을 수 없는 기적 같은 장면.
“아아…….”
특히 루카스는 자신도 모르게 흐느끼기 시작했다.
‘그 남자, 그 남자가 바로!’
그는 루시와 가까이 서 있는 금발 금안의 방랑 기사에게서 기억 속의 누군가를 엿봤다.
‘윈테이라……!’
특히 솔라의 허리춤에 있는 국서의 검에서 시선을 뗄 줄 몰랐다.
“폐하…….”
“드디어 광명이 비추는구나.”
루카스 옆에 있던 베네사와 하이마 또한 성호를 그으며 굵고 긴 눈물을 흘렸다.
코앞의 거리, 고개만 조금 앞으로 내밀면 입맞춤도 가능한 거리에 도달하자, 솔라는 걷던 걸음을 멈췄다.
그는 루시 바로 앞에서 무릎을 꿇었다. 주저앉아 있던 그녀와 눈을 맞추기 위해서였다.
‘춥군, 위험할 정도야.’
여왕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설원의 저주는 막강했다. 솔라는 극심한 추위를 느꼈고 5분 이상은 못 버틸 거라 여겼다. 태양샘 반지와 태양 이능을 사용 중임에도 말이다.
‘그래도 할 건 해야지.’
그는 이어서 여왕의 왼손을 잡아 들었다.
약지에 있던 태양샘 반지를 하나 빼서 루시푸르네의 왼쪽 검지에 끼웠다.
--!!
그러자 설원의 저주가 비명을 질렀고, 추위가 빠르게 옅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