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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여왕의 EX급 방랑기사-126화 (126/212)

제126화

#126.

암흑제국의 중심이자 심장인 황도. 수도 곳곳에 펼쳐진 찬란한 황금빛 건물들이 한때나마 이 나라가 빛의 제국이었음을 증명한다.

제국의 수도는 중심부로 갈수록 높았고 거대했고 빛났다.

드높은 첨탑, 위엄 있는 성벽, 보석으로 가득 치장한 황금 궁전.

키우우우우, 키이이이이.

루한에서 퇴각한 암흑대공 둠은 검은색 와이번을 타고 홀로 황궁으로 하강하고 있었다.

그가 타고 다니는 검은색 와이번은 비룡 중에서도 유독 컸지만, 거대한 황궁 상공에서는 평범한 새와 다를 바 없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아무도 둠의 도착을 모르는 것은 아니었다. 황궁에서 당직을 서던 황실 마법사들은 그가 황도 상공에 진입한 순간부터 마법으로 주시 중이었다.

우우우우웅.

비룡이 괴성을 지르며 착지한다. 황궁 동쪽에 지정된 공터였다.

며칠 전에는 이곳에서 둠을 비롯한 수백의 드래곤나이츠가 이륙했었다.

하지만 돌아온 원정대는 단 한 명, 암흑대공뿐이다.

“설마…… 전부 죽은 것인가?!”

“말도 안 돼……. 아무리 설원의 대마녀가 강하다고 해도 이건…….”

“루한의 여왕은 지금 큰 부상을 입었을 텐데?”

“설원의 가호가 다시 생성됐다는 급보가 사실이란 말인가! 도대체 어떻게?”

암흑대공을 마중 나온 황궁의 시종과 기사들이 믿을 수 없다는 눈으로 최악의 상황을 가정했다.

“대, 대공 각하! 오셨습니까? 귀환을 환영합니다. 그런데 다른 기사들은……?”

마중 나온 기사들 중 가장 직위가 높은 기사가 대공에게 용기를 내서 물었다.

“폐하는 어디 계시지?”

둠은 기사의 말에 대답하는 대신 황제의 거처를 물었다.

“폐하께서는 수련실에…….”

기사의 대답이 끝나기도 전에 둠은 냉큼 황제가 있는 곳으로 향했다.

* * *

황제의 수련실이라고 해서 특별한 것은 없다. 황금으로 치장되어 있지도 않았고, 귀한 마석이 바닥에 깔려 있지도 않았으며, 각종 귀한 음료와 진수성찬을 든 반라의 시녀들이 입구에서 대기하고 있지도 않았다.

아무것도 없었고, 밀실로 되어 있었고, 지나치게 어두웠으며, 지나치게 넓었다. 이 수련실은 과거 마계의 문이 몇 차례 열리고 닫혔던 장소이기도 했다.

오히려 어떤 의미에선 특별하다 볼 수도 있겠다.

쿠웅.

굳게 닫혀 있던 수련실의 철문이 거칠게 열렸다. 무례하게.

열린 문 사이로 장신에 온몸을 회색으로 칠한 기사가 들어왔다.

“어서 와~.”

막 소화를 마친 세피로스가 나른한 고양이 같은 표정으로 둠의 등장을 반긴다.

입맛을 다시고 있는 소년과 청년 사이의 어린 황제에게서 피와 죽음의 냄새가 강하게 났다.

“……!”

그런 황제를 본 둠은 알 수 없는 소름이 돋는 것을 느꼈다.

누구보다도 도살을 즐겼던 둠이었기에, 본능적으로 최근 황제가 식인을 했음을 눈치챌 수 있었다.

“대공~ 새로운 사천왕을 포섭하는 대신에 루한에 가서 여왕의 목을 따 온다면서요? 그런데 왜 홀로 그것도 빈손으로 오셨소?”

세피로스는 차가운 미소로 알 수 없는 입맛을 다시면서 둠에게 물었다.

“폐하, 거짓의 대마녀 옥타나가 근래 보이지 않습니다. 큰 부상을 입어 요양 중이라는 얘기만 들었지요. 어디에 있는지 폐하는 아실 것 같아서 이렇게 찾아왔습니다.”

둠은 무례하게도 황제의 질문에 대답하지 않고 본인의 질문을 먼저 물었다.

“옥타나에게? 볼일이 있어?”

이에 악황제는 딱히 개의치 않는다는 듯 호기심 어린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했다.

“그냥…… 병문안을 가야 할 거 같아서 말입니다.”

스윽.

둠은 그렇게 말하면서 전투 준비를 했다.

본능에 가까운 행동이었다.

도살자의 본능이 눈앞의 황제를 지목했다, 도망치라고.

“그리고 폐하, 저에게 솔라시우스에 대한 얘기를 전부 안 해 주신 것 같더군요? 제가 듣지 못한 능력이 몇 개 있었습니다.”

하지만 둠은 자신의 본능을 반 정도만 행동에 반영했다. 전투 준비와 긴장은 하되, 도망은 치지 않았다.

“그래에? 내가 뭘 깜빡했을까?”

“정녕 모르십니까?”

눈앞의 황제에게서 확인해야 할 것이 있었기 때문이다.

“대공이 얘기를 해 주면 기억이 날 것 같기도 하고?”

악황제이자 곧 마왕으로 각성할 세피로스가 백금색의 탁한 눈동자를 빛낸다.

세피로스의 반짝이는 눈동자, 그 눈동자에는 욕심이 서렸다. 정확히는 ‘식탐’이.

‘옥타나는 그럼……?’

이를 본 둠은 대강 상황을 파악했다.

“……그렇군요.”

“뭐가?”

“아닙니다, 폐하.”

“…….”

둘 사이에 숨 막히는 적막이 몇 초 정도 흘렀다.

“제가 폐하께 실례를 범했습니다.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그제야 둠은 자신의 본능이 시키는 대로 온전히 따르기로 했다.

“대공, 옥타나의 병문안을 가고 싶다고 했지?”

하지만 세피로스는 둠의 생각을 꿰뚫어 보고 있었다.

“……나중에 그녀가 쾌차하면, 그때 보도록 하겠습니다.”

“아니지. 부하들이 우애를 다진다고 하는데 주군이 되어서 도와줘야지.”

쿠우웅!

둠이 거칠게 열었던 수련실의 검은 철문이 무참히 닫혔다.

“……!”

둠은 깊게 닫힌 문을 보며 늦었다고 확신했다.

씨이익.

이윽고 세피로스의 입가에서 비릿한 미소가 그려졌고, 비릿한 입술 사이로 군침이 뚝뚝 흐르기 시작했다.

파앗.

동시에,

-! --!! --!!

굳게 닫힌 수련실 안에서 몇 차례 격렬한 소음이 나는가 싶더니 이내 조용해졌다.

쯔억, 콰악, 우그적우그적.

무언가를 게걸스럽게 먹어 치우는 소리만이 작게나마 들릴 뿐이다.

* * *

새하얗던 궁은 처참히 파괴되었고, 파괴와 절망의 중심에서 남녀가 운명처럼 만났다.

빛과 설원. 열과 추위. 서로 다른 두 속성은 놀라울 정도로 서로의 부족함을 채웠다.

마침내 이뤄진 솔라시우스와 루시푸르네의 만남은 폐허 속에 핀 데이지와 같았다.

그날 이후로, 그러니까 솔라시우스가 둠을 무찌르고 루시를 구해 준 이후로, 더 정확히는 대신들이 보는 앞에서 그녀의 손에 태양샘 반지 하나를 검지에 끼워 준 이후로.

두 사람은 떨어지지 않았다. 누가 시키지도 않았음에도 그랬다.

또한 어느 누구도 두 사람이 함께 있음을 뭐라 하지 않았다.

모두가 솔라의 허리춤에 있는 푸른색 마검을 똑똑히 보았고, 모두가 당연하다는 듯 눈앞의 여왕과 기사를 보았다.

왕궁이 무너졌기에, 여왕은 왕궁이 다시 지어질 때까지 거주할 곳이 필요했다.

그리고 임시로 거주할 건물은 많았다. 그중에서도 옛 재상 아리아 데스모가 사용하던 왕도의 저택을 택했다. 루한에서 여왕 다음가는 권세를 누렸던 그녀였기에 왕도의 저택 또한 루시가 거주하기엔 부족함이 없었다.

그 주인 잃은 저택에서 여왕은 무수한 대신들과 함께 집무를 보고 있었다.

역도의 수장이자 세상을 망친 원흉 옥타나의 분신이 쓰던 저택이었기에 찝찝했다. 또 데스모의 저택뿐만 아니라 그녀를 따르던 귀족과 마녀의 저택도 왕도에는 많았다. 하지만 루시푸르네는 고집을 부려 데스모의 저택에 머물렀다.

그곳에 무너진 왕궁과 비슷한 마법진을 그렸고, 솔라의 도움으로 안정된 설원의 권능으로 설원의 가호를 다시 펼쳤다.

솔라시우스와 태양샘 반지 덕분인지 설원의 권능은 어느 때보다 순종적이었고, 여왕은 계승식 이후 처음으로 일상을 누릴 수 있게 되었다.

“어전회의를 시작하겠습니다, 폐하.”

“윤허한다.”

회의의 시작을 윤허한 루시푸르네의 얼굴은 밝았다.

“왕궁 재건은…….”

“왕궁이 무너졌지만 설원의 가호가 멀쩡한 것은…….”

“드워프와 마탑 마녀회의 마법사가 전부 동원될 예정입니다. 예산은…….”

“제국의 동향은 다행히도 잠잠합니다. 문라이트 변경백이 제국 저항군과 함께 국경으로 이동했으며…….”

어느 때보다 가까운 위치에서 수십의 대신들이 힘겨운 기색 하나 없이 너도나도 국정을 의논하고 있었다.

신하들보다 좀 더 높은 옥좌에 앉아 있던 루시는 지금 이 순간이 꿈만 같았다.

푸른 드레스를 입은 설원의 여왕은 백설 같은 볼에 홍조가 은은히 빛났고 심박수 또한 높았다.

그녀는 귀를 어전회의에 집중하면서도 시선은 계속해서 힐끔힐끔 옆을 향했다.

시선이 향한 바로 옆에는 당연하다는 듯 금발 금안의 기사가 멋들어진 기사 제복을 입고 서 있었다.

‘이거, 이거, 확실하겠지? 솔라가 계속 내 옆에 있어 준 것도 그렇고, 무엇보다 이 반지도 그렇고.’

루시푸르네는 그날 이후 줄곧 자신의 곁에 있어 주는 솔라를 의식했다.

‘솔라는 지구라는 차원으로 안 돌아가고 여기에 남을 건가 봐!’

그가 자신의 손에 끼워 준 태양샘 반지를 의식했다. 이건 누가 보아도 청혼 그 자체였다.

‘결혼식은 마왕을 처치하고서 해야겠지?’

동시에 여전히 쿵쿵거리는 심장의 두근거림을 즐겼다.

‘그런데 굳이 마왕을 처치하고서 결혼식을 올려야 할까? 그나저나 솔라가 황제가 되면 나는 어떻게 해야 할까?’

어전회의를 지켜보는 루시의 머릿속은 바빴다.

귀로는 신하들의 회의를 듣고, 눈으로는 솔라시우스를 좇고, 머리로는 결혼식과 신혼 생활에 대해 상상하기 바빴다. 하지만 대마녀답게 한 번에 세 가지 딴짓을 티 안 나게 하고 있었다.

‘이거…… 난감하군. 심각한 오해를 받고 있어.’

루시 옆에 선 솔라시우스 또한 상념에 빠져 있었다. 그는 평소와 같은 무심한 얼굴을 하고 있었지만, 머릿속으로는 지금의 상황을 곤란해했다.

처음 루시의 상태를 살폈을 때 그녀의 상태는 많이 좋지 않았다. 상처 입은 심장과 약해진 영혼 속에서 설원의 권능이 폭주 중이었다.

그래서 급히 태양샘 반지 하나를 그녀에게 건네 손가락에 끼웠다. 남은 하나는 솔라가 간직했다.

설원의 권능이 너무 강해서 태양샘 반지 하나 정도는 그가 끼고 있어야 본 실력을 유지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태양샘 반지를 나눠 꼈음에도 애매했다.

저 오만한 설원의 권능은 태양샘 반지라는 족쇄와 솔라시우스라는 존재가 함께 포위해야 말을 들었다. 잠시라도 그가 멀리 떨어지면 탈옥을 준비 중인 죄수처럼 굴었다.

그래서 솔라는 설원의 저주 약화와 설원의 가호 재생을 위해서 줄곧 루시 곁에 가까이 머물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지금에 와서 생각해 보니, 자신이 이곳에 와서 지금까지 했던 모든 행동이 오해를 야기하고 있었다.

어느덧 사람들은 자신을 여왕의 반려로 당연히 여기고 있었다.

옆에서 대놓고 들리는 루시푸르네의 심장 소리를 보아하니 그녀 또한 단단히 오해한 모양이다.

‘심지어 허리춤에 국서의 검을 차고서 그런 일을 벌였으니…….’

무심한 무표정 아래서 솔라는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연신 홍조 어린 얼굴로 자신을 힐끔 쳐다보는 루시를 보며 미안한 감정을 가졌다.

‘루시는 회귀했어.’

마검 루시가 바로 여왕 루시푸르네라는 사실을 알게 된 순간부터, 혹은 이보다 더 전부터 솔라는 확신했다. 회귀자는 루카스가 아닌 루시푸르네였다는 것을.

‘그녀는 나에게 호감이 있어. 사랑에 가깝지.’

원작의 마지막을 생각해 보면 그럴 만했다.

심지어 회귀 이후에도 마검 루시에 빙의해 함께 모험했었다.

정이 들지 않으면 오히려 그게 이상하다.

‘솔라시우스의 정체성이 지구인 태광휘에 가깝다는 것을 알고 있음에도, 그녀가 나를 향해 품은 감정은 변하지 않았어.’

요정 숲에서 솔라시우스이자 태광휘는 리리아와 거의 모든 진실을 이야기했다. 루시푸르네는 윈테이라와 동기화된 상태서 그 대화를 들었다. 하지만 그녀는 잠깐 놀랐을 뿐 변하지 않았다.

‘아마 루시는 내가 이곳에 남기로 결심했다고 여기고 있을 거야. 하지만 차원의 균형을 위해서 나는 무조건 지구로 가야만 해.’

단 한 가지. 루시푸르네가 듣지 못한 이야기가 있다면, 그것은 태광휘가 ‘무조건’ 지구로 떠나야 한다는 점이다.

요정 여왕과 나눴던 ‘두 차원의 안정을 위해 그가 지구로 반드시 떠나야 한다’는 후반부의 대화는 보주가 파손되는 바람에 루시는 듣지 못했다.

‘말해야 할까?’

솔라는 입술을 달싹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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