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27화
#127.
고민은 곧 결심으로 이어졌다.
“…….”
솔라시우스는 달싹였던 입술을 멈췄다.
‘아니.’
그는 이내 말하기를 관뒀다. 말하지 않기로 결심했다.
루시를 비롯한 여기 있는 사람들에게 자신이 이 세계에서 사라져야 할 운명이라는 것을 숨기기로 했다.
‘변수를 만들어선 안 돼. ……잔인하고 쓰레기 같은 짓이지만.’
원작에서 히스테리를 부렸던 루시푸르네가 떠올랐기 때문이다.
지금이야 사랑에 가까운 호감도로 그를 대하는 루시지만, 만약 그 감정이 반대가 될 경우엔 무시 못 할 변수가 될 것이다.
차라리 지금처럼 높은 호감을 유지한 상태에서 마왕과 싸우는 것이 나았다.
괜히 진실을 얘기했다가, 멘털이 터진 그녀가 무슨 짓을 벌이는 것보단 나았다.
루시푸르네에겐 잔인한 짓이지만 두 차원을 위해서는 이게 최선이라고 솔라는 생각했다.
‘내 생각이 맞는다면 마왕은 약해진 사천왕을 전부 흡수할 거야. 그리고 완전체가 되겠지, 지구에서처럼.’
솔라는 자신의 손에 있는 태양샘 반지를 보았다. 루시 곁에 서 있는 덕분에 태양샘 반지를 끼고 있음에도 별의 저주에서 자유롭다.
이어서 루시의 손가락에 낀 태양샘 반지도 보았다.
‘이 차원의 마왕 세피로스는 지구에서보다 훨씬 강할 거야. 그 말인즉, 11차원에 숨어 있는 본체도 영향을 많이 받는다는 거지.’
세계수가 일으킨 차원 덮어쓰기 덕분에 이 세계에서 마왕은 훨씬 많은 권능을 가진 상태다.
이는 이 세계의 세피로스를 소멸시키면 11차원에 있는 본체에 큰 타격을 입힐 수 있다는 뜻이다. 성공만 한다면 한동안 놈이 하위 차원에 몹쓸 짓을 하지 못하게 된다.
그가 둠에게 힌트를 주고 일부러 살려 보낸 이유가 바로 여기 있었다. 어떻게 보면 제물이다.
‘지구에서보다 훨씬 강해진 마왕은 나 혼자 못 잡아. 루시푸르네의 도움이 필요해.’
그녀에겐 ‘미지의 힘’이 있었다. 무한에 가까운, 우주 만물을 얼려 버릴 수 있는 힘이. 원작 플레이에서 마지막까지 루시를 도운 이유가 바로 그 힘 때문이기도 했다. 아무리 상황이 불리해지더라도 모든 것을 엎을 수 있는 최후의 한 방이 있었기 때문에.
‘설령 이번에도 못 깨운다 하더라도, 그녀의 협조는 필수야.’
솔라는 생각을 이었다. 비겁한 변명에 가까운 생각을.
‘이렇게 서로 가까이 붙어 있음에도 저주가 풀리지 않았어. 설원의 저주도 별의 저주도, 둘 다.’
요정 숲에 있는 요정 여왕 리리아를 생각하며 이를 갈았다. 분명 둘이 만나게 되면 저주를 해주할 수 있는 방법을 알게 된다더니, 순 거짓말이었다. 나중에 쥴리아를 날개에 달고서 요정 숲에 쳐들어가든가 해야겠다.
‘일단, 루시를 비롯한 이곳 사람들과 거리를 유지한다. 선을 지킨다. 그리고 때가 되면…… 마왕을 처치하고 저주를 해주하게 되면! 편지를 남기고 지구로 떠나자.’
솔라는 속으로 앞으로의 계획을 다짐했다.
하지만 설원의 저주를 억누르기 위해 그녀와 계속 붙어 있는 주제에, 거리 두기가 쉬울까 싶었다.
루시푸르네가 그를 따라 지구로 갈 수도 있다는 가정은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그녀가 사라지면 루한에 펼쳐진 설원의 가호는 사라지기 때문이다.
그렇게 상념에 깊게 빠져 있었다
“……있어? ……솔라시우스?”
“음?”
문득 그를 부르는 루시의 목소리가 들렸다.
“무슨 생각을 그리 깊게 하고 있어?”
솔라는 급히 상념에서 벗어나 청은발의 여인을 보았다.
“아아…… 여러 가지. 별거 아니오.”
금색 눈동자는 여전히 무심하다. 말투는 더욱 거리감 있다.
“여러 가지? 어떤 것들?”
“그보다, 회의가 끝난 것이오?”
솔라는 루시의 질문에 답하지 않고 주제를 슬며시 돌렸다.
“피이……. 그래! 방금 끝났어. 그런데 말투 좀 바꾸면 안 돼? 어색하다고! 거리감도 있는 것 같구. 그…… 예전 루시 때처럼 말하면 안 되는 건……가?”
루시는 솔라의 거리감 있는 말투가 마음에 들지 않는지 입술을 삐쭉 내밀었다. 마검일 때처럼 지내고 싶다는 말이었다.
“여기는 공적인 자리, 예법을 지켜야 하오.”
하지만 솔라는 요지부동이다.
“솔라시우스 1황자 전하의 말씀이 옳습니다. 사석에서는 몰라도 적어도 공석에서는 지켜야 할 법도가 있는 법입니다.”
이를 가까이에서 지켜보던 루카스가 불쑥 끼어들어 솔라를 거들었다.
“솔라시우스 전하와 여왕 폐하, 두 분 사이의 관계는 단순한 남녀의 관계라 볼 수 없습니다. 정치적으로, 종교적으로, 마법적으로, 많은 부분이 얽혀 있지요.”
재상은 솔라를 ‘폐하’가 아닌 ‘전하’라고 칭했다.
공식적으로 솔라는 아직 황제가 아니다. 즉위식을 거치지 않았기 때문에 전하로 호칭했다. 물론, 제국 저항군과 미나스트림은 그를 쭉 폐하라고 부르지만.
“재상! 도와주지는 못할망정…….”
이에, 루시가 배신감이라도 느낀 듯 루카스를 노려본다.
참고로 루카스는 섭정의 자리에서 물러나 현재는 재상의 직을 수행 중이었다.
“물론, 어디까지나 공식 석상에서만 그렇다는 겁니다. 사석에서는 좀 더 달갑게 대화를 나누셔도 됩니다. 예를 들어 ‘여보’라든가, ‘부인’이라든가.”
이어서 루카스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루시의 귀에 속삭이듯 말을 이었다.
“그, 그런!!”
그런 아버지의 말에 여왕은 어깨를 크게 떨면서 솔라를 쳐다본다.
“…….”
솔라는 급히 루시와 눈을 마주치지 않기 위해 시선을 돌렸고.
“……!”
루시 또한 붉어진 얼굴로 솔라의 반대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런 두 청춘의 풋풋함에 회의장에 있던 대신들과 시녀, 시종, 기사들이 조용히 밝게 웃었다.
데스모 저택에 임시로 마련된 여왕의 별궁.
그 별궁의 회의실에는 여왕을 중심으로 무수한 사람들이 밀접해 있었다.
불과 얼마 전만 해도 상상도 못 했던 일이다.
이 모든 게 루시의 손가락에 있는 붉은 반지와 든든히 곁에 서 있는 금발 금안의 기사 덕분이다.
루카스의 화로가 없어도 사람들은 여왕 바로 앞에 편안히 서 있었다. 마나를 수련한 기사는 물론, 마나를 모르는 문관도 무리 없이 오랜 시간 있을 수 있었다. 그저 약간의 쌀쌀함만 느낄 뿐이다.
덕분에 회의장의 분위기는 훈훈했다. 모두의 얼굴에 미소가 진하게 묻어 있었다.
홍당무처럼 변한 루시푸르네의 얼굴에도 잔잔한 미소는 지워지지 않았다.
그 미소의 또 다른 이름은 희망이었다.
새빨간 얼굴로 자신을 힐끔 바라보는 루시를 보면서, 이를 포근하게 바라보는 루한의 충신들을 보면서.
“…….”
솔라는 무심한 표정을 애써 유지해야 했다.
도저히 저 희망을 깰 엄두가 나지 않았다.
* * *
그토록 바라고 바라던 재회지만, 막상 만나니 어색했다.
‘솔라가 나를 어려워하나? 윈테이라를 통해서 많이 가까워졌다고 생각했는데.’
적어도 루시푸르네는 그렇게 느꼈다.
‘뭔가…… 지금의 상황을 마음에 들어 하지 않는 거 같아.’
솔라시우스는 사실상 국서의 대우를 받았다.
공식적으로 국서라 불리지 않을 뿐이고, 침실을 함께 사용하지 않을 뿐이지, 그 외의 대부분은 사실상 국서의 대우를 받았다.
누구도 이에 의문을 품지 않는다. 그의 허리춤에 있는 푸른색 마검이 모든 것을 증명했다.
하지만 솔라의 언행을 보자면 뭔가 확실하지 않았다. 그런 거 같으면서도 아닌 거 같았다.
‘아버지께서 말한 정치적인 문제 때문일까? 하긴, 마냥 쉽지는 않겠지.’
낮에 어전회의에서 들었던 루카스의 말이 떠올랐다.
애써 루카스가 했던 말을 위로 삼아 걱정을 놓았다. 애초에 지금 당장 그녀와 루한이 해결해야 할 일은 산더미다.
분명 광명을 되찾은 것 같았지만 한편으론 폭풍 전야기도 했으니까. 긴장을 완전히 놓을 수도 없었고, 모든 일이 끝난 것도 아니다.
‘그나저나 설원의 저주와 별의 저주는 어떻게 완전히 해주할 수 있을까?’
처음 솔라시우스에 대한 생각은 점점 이런저런 걱정으로 변하고 흘렀다.
‘이렇게 솔라와 함께 있으니 굳이 해주할 필요를 못 느끼지만…….’
자잘한 생각들이 그녀의 머릿속을 채웠다.
세상 평화롭고 어떤 걱정도 없을 것 같은 순간이지만, 그녀를 비롯한 모두의 머릿속은 아직 개운하지 않았다.
현재 루시푸르네는 대저택의 정원에서 피크닉을 즐기고 있었다.
만약 솔라가 곁에 없었다면, 만약 손에 낀 태양샘 반지가 없었다면 이 또한 불가능했을 일이었다.
솔직히. 아직도 이러한 순간순간이 꿈만 같고 믿어지지 않았다.
‘옥타나와 둠은 어떻게 되었을까? 변경백의 국경은 조용하다고 들었지만 오히려 불안하단 말이지. 요정 숲이랑도 본격적인 동맹을 맺어야 하는데…….’
환상과도 같은 평화를 누리면서도 여왕의 생각은 걱정과 고민에 잠겨 있었다.
수도 윈테라의 서늘하면서도 청명한 하늘이 루시의 사파이어 같은 눈동자에 담겼다.
“루시푸르네.”
그리고 그때, 솔라가 불현듯 상념에 잠겨 있던 그녀를 불렀다.
“응! 솔라, 그리고 루시라고 불러 줘. 지금은 우리끼리만 있잖아?”
루시는 상념에서 빠르게 벗어난 후, 솔라를 보며 웃으며 말했다.
사적인 자리라서 그런지 아까 어전회의 때처럼 하오체는 쓰지 않는 게 다행이지만, 그럼에도 왠지 거리를 유지하려는 그의 태도가 괜히 답답하고 불안했다.
“잘 썼어.”
그런 그녀를 향해 솔라가 무언가를 건넸다. 푸른색 마검 윈테이라였다.
솔라는 루시에게 허리춤에 있는 국서의 검을 돌려주려고 했다.
“……?!”
“…….”
휘이이잉.
차가운 바람이 두 사람을 쓸고 지나갔다.
“아니! 괜찮아! 그 검은 솔라가 가지고 있어.”
이에, 루시가 가슴 속에 치밀어 오르는 불안함을 애써 억누르며 외치듯 말했다.
“그럴 수 없어. 이건 루한의 보물이다.”
그러나 솔라는 단호히 루시에게 윈테이라를 건네려 했다.
그나마 사적인 자리에서는 하오체를 쓰지 않았다. 하지만 그의 말투는 여전히 딱딱하고 차가웠다.
“솔라, 그대는 나의 국…….”
루시는 솔라에게 루한의 국서가 돼야 하지 않냐고 말하려다가 급히 입을 다물었다.
‘그래 아직 악황제를 죽이지도 못했어. 둠과 옥타나도 어떻게 되었는지 모르고. 그래, 아직은 아니야. 너무 들떴어. 솔라는 이를 경계하는 것이고!’
여왕은 잠시 심호흡을 하곤 다시 입을 열었다.
“……별의 저주가 어떻게 될지 모르니 저주가 해주될 때까지는 가지고 있어 줘.”
“……알았다.”
그녀는 혹시나 별의 저주가 어떻게 될지 모른다는 이유를 들어서 간신히 그의 허리춤에 푸른색 마검을 채울 수 있었다.
“…….”
“…….”
그렇게 윈테이라에 대한 얘기가 끝나자, 둘 사이에 다시 한번 침묵이 흘렀다.
“엄마! 이건 어떻게 하는 건가요?”
그리고 이런 침묵을 깨트린 것은 루시와 솔라 사이에 있던 쥴리아였다.
솔라시우스는 무심한 눈으로 루시푸르네와 쥴리아를 보았다.
결국 넘기지 못한 푸른색 마검 윈테이라가 우웅 하며 공명하는 것 같았다.
“…….”
쥴리아와 루시의 관계를 보는 솔라의 심경은 복잡했다.
어떻게 보면 이 모든 오해에 쐐기를 박은 것이 바로 쥴리아의 존재였다. 친딸은 아니지만 솔라와 루시를 양부모로 만들어 버렸으니까.
이 정오의 나들이는 솔라와 루시 그리고 쥴리아를 위한 것이었다.
피크닉을 겸하여 준비한 이동식 테이블은 컸고, 그 커다란 테이블에는 그동안 루시가 모은 것으로 보이는 각종 장난감과 인형, 동화책이 수북하다. 모두 쥴리아 또래의 아이가 환장할 것들이었다.
“이건, 이렇게 하는 거란다.”
“우와!”
“한번 해 보렴.”
“응!”
루시는 생전 처음 해 보는 육아였지만 제법 능숙하게 쥴리아와 놀아 주고 있었다. 장난감이지만 마석과 마법진이 새겨진, 도저히 장난감이라 하기 힘든 마도구가 쥴리아의 작은 손 위에서 빛났다.
“헤에……!”
지구인의 기준에서도 제법 놀라운 마도구 장난감에 어린 쥴리아는 정신이 반쯤 빠져 있었다.
전생에 고위 정령이었고 현생에도 육신을 불과 빛으로 자유롭게 바꿀 수 있다고 해도, 쥴리아가 어린아이라는 사실엔 변함이 없다. 무엇보다 지구에서의 기억을 되찾은 것도 아니니.
솔라는 눈동자를 슬쩍 돌려 주변을 둘러보았다.
지근거리에서 시녀들이 평화로운 미소를 지으며 루시와 쥴리아를 보고 있다. 시녀들 뒤쪽에는 시녀장 베네사가 눈시울을 붉히며 지금의 순간을 감상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