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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여왕의 EX급 방랑기사-129화 (129/212)

제129화

#129.

루시를 향한 루나시르네의 추궁 아닌 추궁은 은근하게 이어졌다.

“나중에~ 마검 루시, 아니지, 국서의 검 윈테이라가 깨어나게 되면 참으로 즐거울 것 같아요!”

정정한다. 은근함과는 거리가 지구와 루한 만큼이나 멀었다.

“윈테이라의 에고와 여왕님의 말투가 은근 비슷하거든요.”

“그…… 그런가? 아하하하…….”

그리고 루시는 이상할 정도로 루나에게 쩔쩔맸다.

“말투나 성격뿐만 아니라 마나도 비슷한 거 같던데. 혹시 아까부터 쥴리아가 폐하께 엄마라 부른 것도 이런 이유인가요? 쥴리아가 윈테이라에도 그렇게 불렀거든요.”

“그럴…… 것이다. 윈테이라에는 설원의 냉기가 담겨 있으니까.”

“아! 그나저나 어떻게 알고 국서의 검을 솔라 오라버니에게로 보내신 건가요?”

“!!”

이어지는 루나의 질문에 루시의 안색이 굳어졌다.

“그…… 그게! 당시 루카스 공이 솔라시우스의 소식을 듣고서 딱하게 여겨 보낸 것이다.”

루시는 급히 머릿속에서 이야기를 만들어 내야만 했다.

“과연! 덕분에 저희 오라버니가 무사할 수 있었어요. 나중에 루카스 공에게도 감사 인사를 전해야겠네요.”

“……!”

어설픈 여왕의 변명. 하지만 루나시르네는 마치 유흥이라도 즐기듯 넘어가 준다.

‘얄, 얄미워!’

그런 솔라의 동생을 보며, 여왕은 참으로 오랜만에 마검 루시였을 때 가졌던 감정을 다시 느꼈다.

‘편하게 말하라 했더니 너무 편하게 말하고 있어, 이게!’

그나마 다행인 것은 재상 루카스가 지금 왕도에 없다는 점이다. 설원의 가호가 사라졌다가 다시 채워졌지만, 루한은 여전히 설원의 가호가 사라졌을 당시의 혼란이 남아 있었다.

재상이자 대마도사인 그가 직접 나서야 하는 일이 적지 않았다.

‘그냥 인정해야 할까? 하지만 이제 와서? 그게 더 이상해!’

루시는 속으로 갈등했다. 눈앞의 영악한 마녀는 이미 9할 정도 눈치챈 것 같았다. 하지만 인정을 하기에는 자존심이 너무나 걸렸다.

‘아무리 솔라의 동생이라고 해도 너무 무례해!’

루시푸르네는 양 주먹을 꽉 쥐고는 부들부들 떨었다. 당장이라도 무엄하다며 소리치며 설원의 힘으로 혼쭐내 주고 싶었다.

‘에휴…….’

하지만 루시는 그러지 못했다. 혼쭐내 주고 싶다가도 어느 순간 그런 감정이 쑥 가라앉는다.

‘내 업보야, 업보.’

회귀 전의 기억 때문이다. 회귀 전에 그녀가 솔라와 루나에게 저지른 짓 때문이다.

‘왜 이리 저자세지? 나야 좋긴 한데.’

주먹을 꽉 쥐고 부들부들 떠는 루시를 보며 루나는 의아함을 느꼈다.

이상할 정도로 눈앞의 여왕은 자신과 솔라에게 꼼짝하지 못했다.

‘역시, 우리 오라버니에게 관심이 있구나! 그래서 마검 루시로 있을 때부터 그렇게 견제를 했던 거였어.’

루나시르네는 그 이유를 멋대로 추정했다.

‘사랑을 이용해서 정치적으로 써먹는 짓은 참으로 못된 짓이긴 하지만…… 어쩔 수 없지.’

모든 것은 향후 재건될 제국과 황실을 위해서다.

‘지금부터라도 외척의 기를 죽여 놔야 해! 솔라 오라버니를 위해서라도!’

만약 솔라가 들었다면 꿀밤을 내렸을 각오. 다짐을 마친 루나는 다시 한번 검은 눈동자를 빛낸다.

‘히익!’

그런 루나의 눈빛을 본 루시가 자신도 모르게 팔뚝에 난 닭살을 쓰다듬는다.

하지만 루나의 두 번째 공격은 이뤄지지 못했다.

바로 옆에서 솔라와 로뮤가 심상치 않은 대화를 나누고 있었기 때문이다.

“……어쩌면 그게 방법이 될지도 몰라.”

“방법?”

“둘이 지닌 가장 깊은 기운을 나누는 것이지.”

“어떻게?”

“당연히 깊은 입맞춤이지. 만약 그것도 안 통하면 잠자리를 가지거나.”

“기각.”

농담과 진담을 반반 섞은 로뮤의 말에 솔라가 바로 거절을 표했다.

문제는 방금 두 사람의 대화를 만찬장의 대부분이 들었다는 것이다.

“입…… 뭐?!”

“잠, 잠잠잠……!”

입맞춤과 잠자리. 로뮤의 입에서 나온 두 거대한 단어에 신경전을 치르던 루시와 루나의 사고가 정지했다.

사건의 시작은 별거 없었다.

“저주의 해주 말인가?”

“그래. 혹시 리리아에게서 들은 내용이 있나 해서.”

루나와 루시가 서로 떠드는 동안, 솔라와 로뮤 또한 따로 대화를 나눴다.

대화의 주제는 솔라와 루시가 품고 있는 저주의 해주.

로뮤 엘펜리트는 하이엘프 전사지만 박학다식했다. 마법이나 정령술, 각종 고대 지식도 두루두루 익혔다.

“분명 리리아는 내가 루시푸르네와 만나게 되면 방법을 알 거라 얘기했어. 하지만 전혀 모르겠더군.”

“내 누이가 그렇게 말했단 말이지?”

솔라의 말에 로뮤는 턱을 쓰다듬으며 생각에 잠겼다.

요정 여왕 리리아는 솔라와 단둘이 나눴던 이야기를 다른 이에게 일절 얘기하지 않았다.

그래서 로뮤는 로안의 질문이 흥미로웠다.

흐음~.

그는 턱을 쓰다듬으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만찬장에는 여전히 기 싸움 중인 루나와 여왕이 있었고, 커다란 스테이크와 씨름하는 쥴리아도 있었으며, 만찬에 참석한 일부 대신들도 보였다.

그렇게 만찬장을 보던 로뮤의 시선이 루시와 솔라의 사이를 몇 번 오갔다.

“정말 모르나?”

그러다가 응큼한 표정으로 피식 웃으며 솔라에게 되물었다.

“뭔가 알 것 같은가?”

로뮤의 반응에 솔라가 눈을 살짝 크게 뜨면서 반색한다.

“물론이지. 오히려 나야말로 경악스럽군. 안 그래도 왕도까지 오면서 로안 너와 여왕에 대한 그렇고 그런 소문을 들었어.”

“뜸 들이지 말고 말해 봐.”

솔라는 다시 한번 그녀와 거리를 두겠다는 결심을 하면서 대답을 재촉했다.

“어쩌면! 그게 방법이 될지도 몰라.”

로뮤는 목소리를 좀 더 높이며 입을 열었다. 그가 목소리를 높이자 각자 대화를 나누던 사람들의 이목이 이쪽을 향한다.

“방법?”

“둘이 지닌 가장 깊은 기운을 나누는 것이지.”

“어떻게?”

“당연히 깊은 입맞춤이지. 만약 그것도 안 통하면 잠자리를 가지거나.”

“……기각.”

이것이 둘의 대화가 여기까지 오게 된 이유였다.

로뮤의 말에 만찬장은 어수선해졌다.

“확실히…… 폐하의 저주는 완전히 해주된 게 아니지. 당장 식사를 못 하시는 것부터가 그 증거니까.”

“하이엘프가 저렇게 자신 있게 말한다는 것부터가 충분히 신빙성이 있다고 봅니다. 예법에 어긋나지만 폐하를 위해서라면 속도위반 정도야, 크흠!”

“동의하오. 두 분의 관계야 이미 만백성이 아는 사실이니, 전혀 문제 될 것은 없다고 보오.”

“결혼식은 좀 이르지만 약소하게 약혼식이라도…….”

만찬장에 참석한 대신들이 너도나도 한마디씩 했다.

“어머, 어머, 어머! 이 오라버니가 못 하는 말이 없어!”

루나는 괜히 붉어진 얼굴로 이 사태의 주범인 로뮤의 어깨를 연신 손바닥으로 때리는 중이다.

“루나, 왜 때리는데? 좀 아픈데? 아악!”

로뮤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루나의 스매싱을 받아 내야만 했다.

“나도…… 그…… 솔라만 괜찮다면 상관없다.”

옆에선 아까부터 루시가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들릴 듯 말 듯 뭐라 중얼거린다.

“…….”

이에, 솔라는 굳은 안색으로 침묵을 지켰다.

“?!”

문득 루나가 그런 솔라의 안색을 보았다.

‘솔라 오라버니……?’

오라비를 보는 누이의 얼굴에 걱정이 스쳤다.

* * *

질병과 폭력은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는다. 국경이나 전장이 아닌 곳에서도 민초들의 신음은 언제나 이어졌다.

교국, 루한과 국경을 맞댄 또 하나의 국가.

성자들의 고향이며 성직자들의 성지이기도 한 교국에서도 신성의 사각지대란 존재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제 아내를 치료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성자님!”

“요즘 세상에 이런 방랑 기사님이 계시다니, 정말이지 꿈만 같습니다요!”

마을 촌장을 비롯한 수백의 사람들이 후드를 깊게 쓴 두 사람을 향해 경배에 가까운 감사를 표한다.

마을 사람들의 몰골은 교국의 신민답지 않게 누추하고 야위었다. 전쟁과 수탈을 피해 오지로 숨어든 사람들이 집단을 이룬 마을이었기 때문이다.

“다들 일어나세요. 아직 해야 할 일이 많습니다.”

시몬은 자신과 유리아를 둘러싼 사람들을 일으켜 세우며 다독였다.

“유리, 다시 한번 주위를 살펴 주세요.”

시몬은 유리아를 ‘유리’라고 불렀다. 지크문트 후작이 애써 소문의 진화에 나섰지만, 이미 영지 하나를 타락시켰다는 유리아의 악명은 걷잡을 수 없이 퍼져 있었다.

그래서 유리아는 마법 처리된 로브와 후드로 얼굴을 가리고 목소리도 가급적 내지 않았다.

“피 냄새를 맡고 몇몇 짐승과 몬스터가 접근해 오고 있습니다. 동남쪽이군요. 부탁드립니다, 유리.”

시몬의 부탁을 받은 유리아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곤 주위를 살폈다.

어느새 다시 뽑은 검신에 진분홍빛 마나가 은은히 피어났다.

솔라와 헤어지고, 시몬과 유리아 두 사람은 정처 없이 길을 떠났다. 가는 길마다 어려움에 처한 사람을 도왔다. 길에서 마주친 도적과 산적을 징벌하고, 아픈 사람을 치료하고 걷고 또 걸었다.

설원의 가호가 재생되자, 둘은 더는 루한에 있기 힘듦을 깨달았다. 설원의 가호가 두 사람 몸속에 잠재된 거대한 살육의 원죄를 옥죄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둘은 바로 루한의 국경을 넘었다.

교국에서도 두 사람의 속죄에는 변함이 없었다. 시몬은 오직 신성력만을 사용해 사람들을 치유했고, 유리아는 오직 검술만을 사용해 정의를 행했다.

“참으로 멋진 기사님이야! 마치 소문의 그 광휘의 기사님 같아.”

“어쩜! 너무 멋지다……. 이따 밤에 가서 유혹해 볼까?”

“유혹? 네가? 갔다가 몬스터로 오해받아 죽는 건 아니고?”

검을 휘둘러 인근의 몬스터를 무찌른 유리아의 귀에 마을 아낙들의 흠모 어린 말소리가 들렸다. 지금 유리아는 후드와 로브로 전신을 가렸기에 성별을 구분하기 힘들었다.

“……!”

아낙들의 입에서 ‘광휘의 기사’가 언급되자 유리아의 몸이 잠깐이지만 멈칫했다.

“로안 키트! 로안 키트를 꺼내게!”

“촌장님? 로안 키트는 비상용으로…….”

“지금 성자님께서 치유할 때 써야 효과가 더 잘 먹힌다고! 언제까지 절뚝거리며 고생할래? 이참에 완전히 나아야지!”

“촌장님……!”

마을 촌장과 화전민들의 대화에서도 솔라시우스의 흔적이 들렸다.

광휘의 기사, 로안 키트. 이 두 단어는 그녀와 시몬이 여정을 떠나는 중에도 심심찮게 들었던 단어였다.

그래서 유리아는 이제 반쯤 무감각해진 감정으로 검에 묻은 몬스터의 피를 닦았다. 그리고 이어서 피 냄새를 맡고 접근해 오는 짐승 무리를 향해 검을 들었다.

정의를 집행하는 것도, 시몬을 돕는 것도, 어쩌면 잊기 위함이었다.

하지만 애써 잊으려 검을 휘둘렀던 유리아의 행동도 바람을 타고 마침내 교국까지 도달한 어떤 소식에 돌처럼 굳을 수밖에 없었다.

“그나저나 소식 들었어? 광휘의 기사님이 루한의 여왕님에게 청혼했다는 소식 말이야.”

“글쎄~ 광휘의 기사님이 여왕님에게 청혼하면서 반지를 건넸고. 그 반지로 여왕의 저주가 다 나았다고…….”

“꺄악! 너무 멋지다!”

“잠시 없어졌다던 설원의 가호도 다시 생겼다지?”

“광휘의 기사 로안 샬루트의 진짜 정체가 제국의 1황자 솔라시우스라는 소문도 있다던데 진짜인가?”

이번의 소식은 마을 아낙들뿐만 아니라 화전민 마을 전체가 술렁거릴 정도로 컸다.

“진짜라고 들었어! 요정 숲에서 세계수의 인정도 받았다고 했어!”

“그럼 요정 여왕과 결혼해야 하는 거 아닌감? 왜 루한의 여왕님과 결혼하는 거지?”

“아무렴 어때! 누구든 좋으니까 전쟁이나 끝내 주셨으면 좋겠어! 이놈의 전쟁 너무 지긋지긋해! 너무 많은 걸 잃었어…….”

“드디어 세상에 어둠이 걷히는 걸까?”

와전되었지만 대체로 비슷한 소문이 국경을 넘어 교국의 화전민 마을에까지 불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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