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31화
#131.
왕도 윈테라의 마탑 입구.
화아아앗.
공간 이동을 알리는 마법진이 하나 생성되더니 눈부시게 섬광을 토해 냈다.
얼마 후, 그 안에서 붉은 머리카락이 인상적인 중년의 남성이 나타났다.
현재 루한의 재상직을 맡고 있는 루카스 공이다.
지방의 혼란을 다독이고 수습한 뒤, 왕도로 막 복귀한 참이었다.
“각하, 그간 있었던 일들을 요약해 왔습니다.”
루카스가 도착하기 무섭게 관리로 이뤄진 무리가 우르르 몰려와 이런저런 보고서를 제출한다. 입으로는 연신 부가적인 설명을 곁들인다.
재건된 마법 통신으로 익히 알고 있던 사안들이었지만, 이렇게 직접 대면으로 듣는 것이 양과 질 모두 좋았다.
“폐하에 관한 내용만 우선 보고하게.”
하지만 무수한 보고 중에서 지금 당장 루카스가 중시하는 것은 오직 하나, 여왕 루시푸르네에 관한 사안뿐.
“재상 각하, 그건 제가 직접 말씀드리겠습니다.”
루카스의 지시에 인파 속에서 시녀장 베네사가 모습을 드러냈다.
“시녀장이 직접 오셨소?”
베네사의 등장에 루카스가 놀란 눈치다. 왕실 시녀장이면 대신과 맞먹는 직위다. 그런 그녀가 직접 왔다는 것은 그만큼 중요한 일이라는 것.
“그게…… 폐하와 1황자 전하 사이에…….”
그녀는 루카스의 귀에 대고 그간 있었던 일들을 간략히 털어놨다. 루카스 또한 베네사의 목소리가 주위에 들리지 않게 마법으로 일시적인 막을 쳤다. 왕실의 일은 대놓고 떠들어선 아니 됐기 때문이다.
“호오! 그런 일이 있었군.”
“……안 놀라십니까?”
그리고 베네사의 말을 들은 루카스는 의외로 대수롭지 않은 반응을 보였다.
루카스의 인생은 주연과는 거리가 멀었다.
지금은 이 세상에 없는 아내 예나체리나의 남편이 되는 과정도 그랬다.
예나체리나에게는 마음을 주었던 다른 남자가 있었다. 자신은 그 대타였을 뿐.
그녀가 마음을 주었던 남자의 정체는 늘 불명이었다. 하지만 언제나 결정적인 순간에 나타나 그녀를 도와줬었다. 자신은 결코 하지 못했던 일들을 후드를 깊게 쓰고 검에 붕대를 칭칭 감았던 남자는 수월히 해냈다.
화염 마법의 대가인 그였지만, 그 남자에게서 나오는 빛과 열기에 비하면 태양 앞 반딧불에 불과했다.
그래서 결혼 직후, 루카스는 늘 열등감을 등에 달고 살았다.
그러다가 설원의 계승식이 처참하게 실패했던 그날! 그의 자격지심은 절정에 이르렀다.
훗날 루시푸르네가 직접 찾아와 그날의 일이 그의 과오가 아님을 말했어도, 그는 늘 마음속 중심부에 ‘그 남자’에 대한 열등감을 품었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다. 현재 재상 루카스는 그 어느 때보다 마음이 후련했고 편했다.
‘설마 사위였을 줄이야…….’
운명의 날(루시와 솔라가 왕궁에서 만난 날을 사람들은 어느새 그렇게 불렀다), 국서의 검을 허리춤에 차고 자신의 딸에게 반지를 건네는 솔라시우스를 본 루카스는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저 남자다! 저자가 바로 그때의 그 남자다!’
‘어떻게?’라는 의문은 들지 않았다.
말을 하지 못했던 것도, 몸을 칭칭 감아 숨겼던 것도, 불쑥 나타났다가 불쑥 사라졌던 것도, 이제 와 생각해 보니 전부 이해되기 시작했다.
확신이 들었고, 마음 중심부에 말뚝처럼 박혀 있던 무언가가 봄날의 눈처럼 녹아 없어지기 시작했다.
그래서 베네사로부터 들은 솔라와 루시의 연애 문제(?)를 루카스는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젊은 남녀 사이에 밀고 당기기도 있어야지.”
그는 확신했다. 악황제는 죽는다. 그 뒤, 솔라시우스는 루시푸르네와 맺어진다. 그리고 훗날 시간여행을 통해 과거의 장모와 아내를 도울 것이다. 어쩌면 이미 돕고 왔을지도 모르겠다.
그랬기에 루카스는 크게 개의치 않았다.
하지만.
“폐하……? 괜, 괜찮으십니까?!”
왕궁에서 루시푸르네의 얼굴을 본 루카스는 생각이 바뀌었다.
* * *
마계의 침공은 차원마다 달랐다.
지구는 처음부터 게이트를 무수히 많이, 그리고 아주 크게 열어젖혔다. 처음부터 전면적이고 기습적인 대침공이었다.
지구에는 오래전부터 신이 부재중이었기 때문이다.
반면 세계수가 지키고 있는 이 세계는 은밀하고 느리게 침략을 시도했다. 내분을 통한 타락부터 시작되는 침공이었다.
세계수는 천계의 거룩한 존재들과 가늘지만 분명한 끈이 있었기 때문이다. 아무리 마계라고 해도 세계수의 뒷배는 부담스러웠다.
하지만 그랬던 제약이 서서히 풀리기 시작한다.
세계수가 사그라진 세계선의 기억을 덮어쓴 것.
더불어 여왕 루시푸르네를 회귀시킨 것이 대표적인 이유였다.
태광휘가 솔라시우스로 빙의한 것은 어디까지나 별의 저주로 그를 없애려 한 마왕의 의도였지만, 마왕도 세계수도 예상하지 못했던 쥴리아의 존재는 더 큰 이변을 만들어 냈다.
판타지 세계를 상징하는 두 개의 달, 두 달 사이에 탯줄처럼 생겨난 가늘고 긴 오로라는 아름다웠다.
두 개의 달에서 일어난 괴현상을 이 세계에서 누구나 목격할 수 있었다.
절대다수의 사람은 이 아름다운 달의 변화를 길조로 여겼다.
그것이 게이트의 전조 혹은 마왕의 탄생을 뜻하는 전조 현상임을 전혀 모르고.
암흑제국의 황금 궁은 여전히 찬란하다.
늦은 밤, 대지를 비추는 오로라의 오묘한 빛은 땅 위의 무엇도 피해 갈 수 없었고, 그래서인지 오늘의 황금 궁전은 유독 황홀하다.
하지만 빛이 있으면 그림자가 있는 것처럼, 찬란함 뒤에는 추악함이 있는 법.
특히나 오늘 밤의 황궁은 그 찬란함에 비해 추악함이 유독 깊다.
사람은커녕 개미 한 마리조차 보이지 않는다. 창공을 나는 새들도 황궁만큼은 본능적으로 멀리 돌아서 비행한다.
“히이이익!”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는 거야?!”
“어서, 어서 황도를 벗어나세! 미친 황제가 우리까지 죽이기 전에!”
황궁 주위를 둘러싼 도심에서는 늦은 밤임에도 제국의 수도를 빠져나가려는 인파가 가득하다.
빛의 제국이 암흑제국으로 타락하고 흑마법사가 대놓고 활개를 쳐도 끝끝내 떠나지 않았던 제도 신민들이 고향을 떠나기 시작한 것이다.
“황제가, 악황제가 기어코 미친 거야!”
“빌어먹을! 나가게 해 줘!”
“이 도시를 떠나게 해 달라고!”
그런 인파의 행렬을 이제는 얼마 남지 않은 제국의 세뇌된 병사들과 기사들이 막고 있지만 위태위태하다.
“이 미친 황제의 개들아, 너희도 다 죽는다고!”
“틀렸어! 저 새끼들은 흑마법으로 저능아가 된 것들이야!”
“그냥 싸워! 싸우는 수밖에 없어!”
제국 최후의 보루라 불릴 정도로 충성심이 남달랐던 제도 신민들이지만, 이제는 아니었다.
근 천 년을 이어 온 자긍심을 버릴 정도로 황궁에서 일어나는 일련의 일들은 충격적이었다.
고오오오오.
찬란한 오로라 아래 황금 궁전들은 빛났지만, 그런 황궁 주위를 휘몰아치는 강력한 마력 폭풍이 사방의 모든 것을 흡수했다.
접근하는 모든 생명체는 인간이든 쥐새끼든 구분 없이 순식간에 미라가 되어 부스러진다.
죽음의 폭풍이 황궁을 넘어 도시 밖으로 서서히 뻗치고 있다. 그나마 다행인 건 어쩐 일인지 지금은 소강상태라는 것.
황궁 바깥이 이럴진대 내부는 말할 것도 없다. 시녀, 시종, 근위대, 궁정 마법사, 궁정 마녀, 심지어 흑마법사까지, 모두가 죽었다. 미라가 되어 누군가에게 흡수당했다. 그 누군가는 당연하겠지만 이 타락한 제국의 주인이다.
“…….”
악황후를 식인하고 암흑대공도 먹어 치운 악황제는 입가심으로 황궁의 모든 것을 먹어 치웠다.
포악한 식사를 끝낸 자가 숨을 고르며 가장 높은 첨탑에서 지상을 내려다본다.
도시를 빠져나가려는 거대한 인파를 말없이 본다.
“저것들도 흡수해야 하는데…….”
아직 살짝 부족한 감이 있다.
“그래야 최종적인 격이 오르는데…….”
머릿속과 입안에서 군침이 연이어 돈다.
꺼억.
하지만 머리와 달리 몸은 솔직하다. 단시간에 너무 많은 것들을 먹어 치웠다. 폭식한 셈이다.
‘소화를 시켜야 해.’
과식해서 영양분을 더 섭취하지 못한다면 소화시키면 된다.
악황제와 마왕 사이에 선 존재가 시선을 북쪽으로 돌렸다.
소화시킬 만한 장소와 대상이 있긴 하다.
그러다 다시 황도의 전경을 보았다.
‘하지만…… 이러다가 다 빠져나가겠군.’
황명으로 백성들이 황도를 빠져나가지 못하도록 명을 내렸다. 하지만 이미 세피로스는 민심을 전부 잃었다. 세뇌를 당한 정예 병사들로 막는 데에도 한계가 있다. 벌써 일부 성문이 인해로 뚫려 버렸다.
“흐음…….”
그의 시선이 이어서 북서쪽을 향한다. 교국이 있는 방향이다.
그곳에는 황도 외곽을 가득 채운 먹잇감들을 다 합친 것보다 훨씬 탐스러운 존재가 있다. 무려 둘씩이나.
바로 시몬과 유리아다. 두 존재를 떠올린 세피로스의 눈에 갈등이 잠시 스쳤다가 사라진다.
“아쉽단 말이야. 탐스럽지만 불순물이 너무 짙어. 탈이 날 거란 말이지.”
다른 세계선에서도 끝내 시몬이라는 존재를 흡수하지 못한 이유이기도 했다. 제3의 존재로 방치했다가 가장 마지막에 처리했었다.
‘그 옆에 있는 존재도 마찬가지.’
세피로스의 탁한 백금색 눈동자가 아쉬움으로 빛난다.
시몬 옆에는 최초의 흡혈귀의 계보를 이은 존재도 있었다.
오직 이 세계선에서만 등장한 존재.
그러나 그녀 또한 지금은 시몬에 의해 불순물이 섞인 상태.
‘불순물이 섞이기 전에 취했어야 했거늘…….’
당시엔 여건이 되지 못했다.
‘옥타나가 괜한 짓을 했어.’
이 육신을 낳은 옥타나는 세피로스에게 헌신적인 것처럼 행동했지만 실제론 그러지 않았다.
대표적으로 최초의 흡혈귀에 대해 끝끝내 협조하지 않았다.
또 그림자 핵을 내놓으라 했던 그의 요구도 무시했었지.
세피로스는 그런 옥타나의 비협조를 보고도 뭐라 하지 못했다. 좀 더 재밌는 유희를 즐기겠다고 인간의 육신에 빙의했던 것이 패착이었다. 인간, 그것도 어린아이의 몸은 약했고 성장하려면 시간이 걸렸다. 생물학적인 어미인 옥타나의 지원이 특히 필요했다.
‘뭐, 이제는 일부가 되어 버렸지만.’
그는 무심한 눈으로 자신의 배를 쓰다듬었다.
‘아쉬워. 세계수는 이걸 노린 건가?’
그러다가 다시 고개를 들어 먼 곳을 향했다. 이번엔 북동쪽을 응시했다. 세계수가 있는 곳이다.
마왕은 생각해야만 했다. 우선순위를 말이다.
교국에 있는 상해서 못 먹는 것들은 일단 내버려 두자. 그 둘은 강하지만 위협이 되지 않는다.
요정 숲도 마찬가지. 세계수가 거슬리지만 일단 내버려 둔다. 지금 세계수는 다른 세계선의 세계수와 다르다. 격이 매우 높았다. 괜히 섣불리 건드렸다가 천계에서 개입하면 곤란하다.
그렇다면 이제 남은 것은 단 하나.
세피로스의 입가에 진한 미소가 드리웠다.
[아주 잠깐만, 놀아 보실까?]
성대에서 나오는 육성이 아닌, 탁한 눈동자가 빛나면서 내는 정신음이 공간을 울린다.
파바바바바바밧.
이윽고 거대한 지진이 일어나 제국의 수도를 감싼다.
쿠우오오오오오.
황도 바깥 수 킬로미터부터 거대한 균열이 일었다.
구르르르르륵.
땅이 갈라지고 빠르지만 규칙적으로 서서히 내려앉기 시작했다.
“뭐, 뭐야?!”
“지진……! 맙소사 이런 지진은 듣도 보도…… 아아악!”
“황제다! 미친 황제가 지진을 일으켰어! 땅을…….”
“도망쳐! 비켜!”
“엄마아!”
황도 외곽에 있던 사람들, 세뇌된 병사들을 압사시키고 막 도시를 빠져나왔던 사람들, 단 한 명도 빠짐없이 그들이 딛고 있던 땅과 함께 깊은 지하로 내려갔다.
거대한 도시와 넓은 대지가 마치 엘리베이터라도 탄 것처럼 하강하고, 무너지는 건물, 우왕좌왕하는 인파 등에 압사당해 족히 수천의 사람이 죽거나 다쳤다.
꺄아아아악!
아아아아악!
멀리 떨어졌음에도 무수한 비명이 바람을 타고 들려온다.
[라아라아라~♬]
세피로스는 오케스트라의 지휘자가 된 것처럼 손을 허공에 지휘하듯 휘저었다. 비명 소리가 그의 손짓을 타고 더 깊은 절규로 변한다.
쿠우우우우우웅.
거대한 황도가 지상에서 지하로 꺼지기 시작한다, 초거대 싱크홀이라도 생긴 것처럼.
[갔다 올 동안 거기서 잘 연명하고 있어. 오래 안 걸려.]
순식간에 대륙에서 가장 거대한 도시가 땅 아래로 꺼졌다.
수십만의 사람들이 죽거나 다쳤고, 깊게 가라앉은 지하에서 지상으로 올라가려고 발버둥 친다.
자신이 만든 지옥을 뿌듯하게 훑어본 악황제는 흑염의 날개를 활짝 폈다. 그리고 북쪽으로 비상했다.
무너진 황도 위, 오로라가 짙게 물든 보랏빛 밤하늘.
과연 이 세계에도 지구처럼 대대적인 침공이 있을지는 불확실하지만, 마왕이 어느 때보다 큰 권능을 모았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