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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여왕의 EX급 방랑기사-132화 (132/212)

제132화

#132.

제국의 황도와 달리 루한의 왕도는 분위기가 정반대다.

온 백성들이 마침내 북부에 광명이 찾아왔다고 진심으로 기뻐했으니 축제가 벌어지는 것은 당연하다. 들끓는 백성들의 기쁨을 위정자들은 억누를 수 없었다. 솔라시우스가 아직 끝난 것이 아니라고 누누이 말했지만 소용없었다.

그만큼 루한의 백성들은 힘겨웠던 것이다.

변경백으로 징병된 남편과 아들, 아버지의 생사가 걱정되었고, 각종 징발과 가혹한 세금이 이해가 되면서도 고달팠다.

이토록 허리띠를 졸라매는데도 들려오는 소식은 희망보단 먹구름뿐이었다.

당장의 고난은 버틸 수 있었지만 절망뿐인 미래는 버틸 수 없는 법.

그랬던 상황이 어느 순간 바뀌기 시작했다.

로안 샬루트, 망명 황족 출신의 방랑 기사, 변경백에서 한 영웅이 탄생했을 때만 해도 그러려니 했다.

그가 변경백에서 세 자릿수의 도적을 토벌하고, 설원의 가호 아래서 대학살을 저지른 마녀를 척살할 때도 사람들은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여왕이 유독 그 망명 황족 출신 방랑 기사에게 관심을 보인다는 소문이 오히려 이목을 끌었지.

몰락한 황족 로안 샬루트가 행한 본격적인 이변은 변경백의 한 마을에서부터였다. 아무 대가 없이 마을을 침략한 도적을 토벌하고, 재난에 허덕이던 마을 주민들에게 사재를 털어 구휼한 일은 이 세상 사람들에게 충격 그 자체였다.

하지만 진정한 충격은 그때부터 시작이었다.

볼카 요새에서 로안 샬루트는 암흑대공과 대등한 싸움을 했고 결국엔 그를 무찔렀다. 사람들은 처음으로 자신의 애검을 버리고 도망치는 도살자 대공을 보았다. 광명은 그때부터 찾아왔다.

그때부터 로안 샬루트는 광휘의 기사가 되었다. 광명이자 희망이 되었다.

그리고 그 희망은 꺼지지 않았고 오히려 더 밝아져만 간다.

그가 여왕의 목숨을 구해 줌으로써 절정을 맞았다.

밤이 대지와 창공 사이로 어둠의 장막을 쳐도, 왕도 윈테라 밤은 오늘따라 유독 밝았다.

퍼엉, 퍼엉, 퍼엉.

마법으로 만든 예쁘고 화려한 불꽃놀이가 별자리를 새로 수놓고, 갑자기 나타난 두 달 사이의 오로라가 이 불꽃놀이를 더욱 몽환적으로 만든다.

꺄하하하하하.

와아아아아아.

사방에서 고통과 시름이 사라진 희망의 웃음소리가 간만에 들린다. 어린아이들이 늦은 밤인데도 겁 없이 골목길을 뛰어다닌다.

솔라시우스의 눈치를 보는 루한에선 공식적으로 축제를 인정하지 않았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공식적으로만 인정하지 않았을 뿐 비공식적으로는 얼마든지 가능했고, 왕도 윈테라를 시작으로 루한 전역은 절로 축제 분위기를 맞이했다.

“……물론! 솔라시우스, 그대의 말대로 너무 일찍 파티를 연 느낌은 있다. 아직 적은 건재함에도 말이다. 이건…… 매우 경망스러운 일이 분명하다.”

이 모든 일의 배후인 루한의 여왕은 열심히 솔라의 눈치를 보며 변명을 이었다.

“하지만 사, 사람들에겐 희망이 필요해! 그러니 표정 좀 펴면 안 될까……?”

여왕은 땀을 삐질삐질 흘렸다.

“내 표정은 평소와 같아.”

“아! 미안…….”

“미안할 거까지야.”

그런 루시를 보는 솔라의 모습은 평소와 같은 무표정과 무심함이다.

“…….”

“…….”

어색함과 적막이 두 사람 사이를 파고든다.

지금 솔라와 루시의 복장은 평소와 다르다. 부유한 평민이나 하급 귀족들이 입을 법한 단정한 외출복을 입었다.

얼굴은 그대로지만 인지 저하 마도구를 사용했다.

장소는 축제가 이어지는 수도 윈테라의 도심지다.

“저거 도와 드려야 하는 거 아닌지요?”

“도움? 무슨 수로?”

그리고 그런 솔라와 루시를 멀찍이서 바라보는 이들이 있었다.

“그 책에서 봤어요! 원래 이럴 때는 건달들이 와서 위험한 분위기를 조성해 주면…….”

“그, 시녀장? 본인과 왕실 기사들이 건달 행세라도 하라는 말이오? 설원의 대마녀와 광휘의 기사를 상대로? 그러다 진짜 죽으면 어쩌려고?”

바로 하이마와 베네사였다.

“그렇다고 저대로 놔두었다간 축제 내내 손 한 번 못 잡겠어요!”

베네사의 말에 하이마는 입을 꾹 다물었다. 그는 말없이 물가에 내놓은 아이처럼 어쩔 줄 몰라 하는 커플(?)을 보았다.

“…….”

처음엔 시녀장처럼 걱정 어렸던 그의 얼굴이 시간이 지나더니 점차 풀어졌다.

“일단 지켜봅시다.”

잠시 말이 없던 하이마는 절로 지어지는 부드러운 미소와 함께 입을 열었다.

“예에?”

옆에서 베네사의 책망하는 듯한 물음이 들렸지만 하이마는 한 귀로 흘렸다.

‘언제 저렇게 크셨을꼬.’

발을 동동 구르는 시녀장과 대조되게 왕실 기사단장의 눈동자에 흐뭇함이 가득하다.

루카스 공이 폐인이 돼서 스스로를 마탑에 가뒀을 때, 아버지이자 충신의 역할을 했던 자가 왕실 기사단장 하이마였다.

루카스가 다시 일어서고 솔라시우스가 나타나면서 하이마의 존재감은 많이 줄었지만, 주군을 향한 기사의 충심은 변함없었다.

그런 기사의 마음가짐과 별개로 잘 자란 조카, 바르게 자란 이웃집 아이를 바라보는 마음도 있었다.

좋아하는 남자 옆에서 뻣뻣하게 걷는 여왕이라니.

불과 얼마 전만 해도 눈앞의 상황은 상상도 하지 못했던 것이었다.

그랬기에 눈앞의 주군의 어쩔 줄 몰라 하는 모습도 사랑스럽게 느껴졌다.

‘부디, 쭉 행복하시길.’

중년의 기사는 진심으로 바라고 기도했다.

‘손, 손부터 잡으라고 했어!’

루시푸르네는 주문을 외우듯 속으로 되새겼다.

그녀의 시선이 연신 솔라시우스의 손으로 향했다.

‘처음부터 덮치려는 폐하의 발상은…… 그으…… 매우 과감하고 멋지시지만……. 크흠! 우아하지 못합니다.’

머릿속으로 아버지이자 루한의 재상 루카스의 당부가 떠오른다.

‘설령 성공한다 해도 두고두고 문제가 될 거예요. 일단 손부터 잡고 이어서 입맞춤까지 가는 겁니다. 이를 위해선 계기가 필요합니다.’

지나치게 안절부절못하는 딸에게 루카스는 축제와 데이트를 제안했었다. 그 제안의 결과물이 바로 지금 이 순간이다.

‘폐하, 무운을 빕니다. 쥴리아는 제가 돌보고 있겠습니다. 그러니 일단 손부터 잡으소서.’

충심 가득한 재상의 목소리가 여전히 생생하다.

‘손부터…… 손부터…….’

루시는 주입식 교육을 받은 아이처럼 그저 멍하니 솔라의 손을 바라보았고, 천천히, 슬그머니 자신의 손을 움직였다.

하지만 그런 그녀의 시도는 끝내 성공하지 못했다.

“가지.”

“어? 응?”

“암행하러 나온 게 아닌가?”

“그렇지……?”

“밤은 짧아, 왕도는 넓고. 제일 먼저 살피기로 한 곳이 4지구였나?”

솔라가 앞장서듯 걸었기 때문이다.

퉁명스레 앞서 나가는 솔라의 뒤를 루시는 졸졸 따랐다.

‘이게, 이게 아닌데!’

속으로는 자신의 계획과 많이 다른, 이 암행을 가장한 데이트를 곱씹었다.

원래는 지금쯤 서로 손을 꼭 잡고 하하호호 웃으며 축제 한복판을 거닐어야 했다. 그래야 했는데…….

‘왜, 왜 이렇게 빨라아…….’

저 앞의 남자는 자신을 무시하고 쌩하니 앞서 걷고 있었다. 그녀가 빠른 걸음으로 간신히 거리를 좁히면 기다렸다는 듯 속도를 올려 거리를 벌렸다.

두 사람의 거리는 계속해서 멀지도 가깝지도 않음을 유지 중이다.

점점 루시의 숨이 차오르고 말이 줄어든다.

“…….”

비 맞은 길고양이처럼 양어깨가 축 처졌다. 얼굴은 울상이고, 기분 탓인지 주위의 기온이 일시적으로 내려앉았다. 몸속의 설원의 권능이 비웃는 것 같았다.

툭.

말없이 걷던 루시의 발걸음이 멈췄다.

“……?”

그녀가 말없이 멈추자 퉁명스레 걷던 솔라가 얼마 안 가 멈춰 서더니 뒤를 돌아본다.

꺄르르르륵.

꺄아!

퍼엉, 퍼엉, 퍼엉.

주위는 축제로 신난 사람들과 불꽃놀이로 가득하다. 그러나 유일하게 저기압으로 보이는 여인이 눈앞에 있다.

“루시푸르네?”

솔라가 조심스레 그녀의 이름을 부른다.

“……시라고 불러. 루시라고…… 부르라고.”

이에, 루시가 시선을 아래로 향한 상태로 입을 열었다.

“단둘이 있을 땐 루시라고 부르라고!!”

파아아앗.

그녀의 입에서 강한 어조가 나왔다. 설원의 마나를 머금고.

“뭐야? 갑자기 엄청 추워졌어.”

“바람도 거세진 거 같지 않아?”

영향은 바로 나타났다. 주위에 있던 사람들이 극심한 추위를 느끼기 시작한 것이다.

인지 저하 마도구가 없었다면 진즉에 난리가 났을 상황.

‘이런!’

화앗!

루시의 갑작스러운 변화에 솔라가 급히 태양 이능을 펼친다. 그리고 급히 발을 옮겨 그녀에게 가까이 간다.

“…….”

“…….”

둘 사이가 가까워졌다. 하지만 둘은 아무 말이 없었다. 처음보다 더 큰 어색함이 추위와 함께 대기를 채운다.

‘어쩌지?’

외부로 발현되려던 설원의 저주는 급히 저지했지만 임시방편일 뿐이다.

그는 지금 이 상황이 왜 일어났는지 짐작했다.

‘…….’

루시푸르네는 눈물을 글썽이면서 고개를 숙인 채 솔라의 시선을 피하는 중이다.

미칠 것만 같은 긴장감이 절정에 이르렀을 때, 이를 지켜보던 하이마와 베네사의 얼굴이 사색으로 변했을 때, 이 모든 것을 해결한 이는 뜻밖의 인물이었다.

“뭐야? 두 사람도 놀러 나온 거야?”

인지 저하를 쓴 솔라와 루시를 도시 한복판에서 바로 알아본 이가 다가왔다.

“어쩐지 이상하게 춥다 싶었지.”

“딱 봐도 좋은 상황은 아니군?”

흑발의 엘프와 흑발의 마녀가 여왕과 기사를 향해 다가왔다.

“루나? 로뮤?”

“……!”

루나와 로뮤 또한 인지 저하 마도구를 사용한 모양. 엘프가 도시 한복판을 지나가는데도 누구도 놀라지 않는다.

솔라와 루시처럼 일정 경지에 오른 사람들만이 인지 저하의 제한을 뚫고 서로를 알아볼 뿐이다.

거리 한복판에 네 사람이 모였다.

‘호오?’

마도구까지 사용해서 몰래 거리로 나온 솔라와 루시를 루나시르네가 눈을 반짝이며 본다. 마치 사냥감을 발견한 고양이 같다.

“둘은 어쩐 일이지?”

반대편의 솔라는 그런 여동생과 의형제를 번갈아 보았다.

“모처럼 축제인데 집 안에만 있을 순 없지.”

“데이트라도 나온 건가?”

“데이트라……. 뭐, 그렇게 되나?”

로뮤가 솔라의 물음에 어깨를 으쓱이며 답했다.

“이 엘프가 지금 무, 무슨 소릴 하는 거야!”

그러자 로뮤 옆에 바싹 붙어 있던 루나가 급붉어진 얼굴로 어쩔 줄 몰라 한다.

하지만 끝내 부인하지 않았다.

‘저 둘…… 사귀는 건가?’

한편 루시는 못 본 사이에 유독 가까워진 것 같은 루나와 로뮤를 보며 의아해했다.

‘엘프와 마녀도 저런데…… 정작 나는…….’

장수종이 어떻고 단명종이 어떻고 같은 생각은 이상하게 들지 않았다. 지금은 오히려 부러움을 느꼈다.

처음의 어색했던 긴장감이 루나와 로뮤의 합류로 급진정된다.

“암행이라고?”

“그래.”

“그래~ 암행이라는 거지?”

어느샌가 솔라는 둘에게 자신과 여왕이 여기에 나온 이유를 설명 중이었고, 루시는 아직 고개를 숙이곤 말이 없었다.

톡톡.

그런 루시의 옷깃을 루나가 다가와 약하게 잡아당긴다.

“여왕님, 아니, 루시 언니?”

“……응?”

“내가 도와줄게요!”

키가 작은 검은 마녀가 루시를 올려다보며 속삭였다.

속삭임을 마친 루나의 행동은 전광석화 같았다.

“솔라 오라버니!! 방금 이 거리에서 느껴진 추위! 설원의 저주 때문이지?”

그녀는 다짜고짜 솔라를 향해 추궁이라도 하듯 쏘아붙이기 시작했다.

“안 되겠다! 둘이 손잡아요, 당장! 그래야 안전할 거 아니야?!”

루나는 루시의 손목과 솔라의 손목을 동시에 잡더니 강제로 끌었다.

‘지금이에요!’

멍한 얼굴을 하고 있던 루시를 향해 눈빛으로 전했다.

‘응!’

루시는 루나가 준 기회를 놓치지 않았고, 억척스럽게 솔라의 손을 꼭 잡았다.

“됐다!”

둘의 손을 이어 준 루나가 어려운 계산식을 푼 것처럼 보람찬 함성을 외친다.

‘으으…… 그나저나 한쪽은 뜨겁고 한쪽은 차갑고…….’

한편으론 두 사람의 손목을 잡았던 양손을 뒷짐 쥐듯 숨기곤 어루만졌다.

한쪽 손에는 화상을, 다른 한 손에는 동상을 입은 것 같다.

당장 치료를 해야 할 듯싶다. 루나는 손을 맞잡은 두 사람을 두고는 빠르게 자리를 이탈하려 했다.

“……루나.”

그런데 그때, 뒤에 있던 로뮤가 루나에게 다가온다.

“응? 로뮤 오라버니?”

“우리도 손잡을래?”

그녀에게 단도직입으로 물었다.

덥석.

루나가 대답하기도 전에 로뮤가 먼저 뒷짐 쥔 그녀의 양손을 꼭 잡아 앞으로 끌었다.

“!!”

느닷없는 로뮤의 행동에, 검은 마녀의 얼굴이 붉은 마녀가 아닌가 싶을 정도로 빨개졌고, 심장은 알 수 없게 콩콩 뛰었으며, 무엇보다 화상과 동상을 입었던 루나의 손이 로뮤의 손을 잡자마자 빠르게 회복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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