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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여왕의 EX급 방랑기사-133화 (133/212)

제133화

#133.

그토록 갈망했던 육신이건만 막상 가지게 되니 어색하다.

환생이라는 기적은 정령 아스트라에게 기억을 앗아갔고, 그랬기에 폭주하지 않고 인간의 몸에 적응할 수 있었겠지.

기억을 잃었던 아스트라가 유일하게 개입하는 순간은 이 소중한 육신이 위험에 처할 때뿐.

전생에 정령이었던 소녀는 자신의 작고 여린 몸이 위험에 처할 때마다 숨겨진 힘을 사용해 위험 요소를 제거했다.

그렇게 폭력과 학대로부터 몸을 지켰지만 배고픔에서는 어찌할 방도가 없었다.

그토록 바랐던 인간의 육신은 너무나 약했고 불편한 요소도 많았으니까.

솔라시우스, 아스트라에게는 태광휘라는 이름이 더 친숙한 남자를 만나게 된 것은 그녀의 육신이 슬슬 한계에 달했을 때였다.

기억은 잃었지만, 아스트라는 솔라의 품에 안겼을 때 본능적으로 친숙함을 느꼈다. 이유를 알 수 없는 반가움에 눈물이 날 것만 같았지.

그는 (정확히는 옆에 있던 루나가) 아스트라에게 이번 생에서 쓸 쥴리아라는 이름을 지어 줬다.

이후 잠깐의 헤어짐이 있었고 다시 한번 배고픔이라는 위험이 쥴리아를 위협했지만, 적절한 순간에 솔라는 다시 찾아왔고 그 인연은 지금까지 이어져 오고 있었다.

최근엔 요정 숲에서 전생의 기억과 능력을 일부 각성했고, 소녀는 이 능력으로 전생의 마스터이자 현생의 양부를 도울 수 있었다.

사랑하고 존경하는 사람에게 도움이 된다는 사실이, 능력을 인정받고 있다는 사실이 너무나 기뻤다.

그리고 그런 쥴리아의 기쁨은 지금도 진행 중에 있었다. 누구도, 심지어 솔라도 예상치 못한 방법으로.

“……응, 맞아. 그래, 나야. 당신 목소리…… 익숙해.”

저녁 하늘 아래 아담한 방 안에서, 쥴리아는 눈을 감고 바닥에 앉아 혼잣말을 중얼거리고 있었다.

키우우웅?

푸르르.

창가에서는 붉은색 드레이크 시즈와 검은 말 맨카가 그런 쥴리아를 호기심 어린 눈으로 관찰 중이다.

“기억은 아직 온전치 않아. 환생이라고들 하던데?”

창밖의 두 영물 외에는 아무도 없는 방. 하지만 쥴리아는 바로 옆에 누가 있기라도 한 듯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아스트라! 네가 다른 차원에서, 그것도 인간으로 환생하다니……. 정말 상상치도 못했어. 심지어 그 차원이 광휘 오빠가 떨어진 차원이라니!

“쥴리아라고 불러 줘.”

-쥴리아? 그 세계에서 쓰는 이름이야? 예쁜 이름이네? 지구에서도 제법 흔한 이름이고. 좀 올드하긴 하지만?

소녀의 머릿속에 어느 여인의 목소리가 들렸다.

굳게 감겼던 쥴리아의 눈이 떠졌다. 양아버지와 닮은 금색 눈동자에 두 개의 달이 비쳤다. 정확히는 달 사이에 흐르는 오로라가.

자세한 원리는 모르지만 아마도 저 오로라를 안테나 삼아 지금의 대화가 가능한 것 같았다.

-어쨌든! 지금은 이게 중요한 게 아니지.

오로라가 생기고서부터였다. 달빛을 보고 있으면 희미하게 어떤 목소리가 들렸고, 나름의 집중과 연습을 거쳤다. 그리하여 마침내 오늘 처음으로 제대로 된 대화를 나누게 되었다. 다른 차원의 존재, 전생의 또 다른 인연과.

-잘 들어, 쥴리아! 광휘 오빠는 무조건 지구로 와야 해!

“……응, 알고 있어.”

스스로를 지구의 성녀라고 칭한 여인의 목소리에 쥴리아는 느리게 답했다. 지구의 성녀가 쥴리아에게 한 말은 세계수의 정원에서 요정 여왕이 말했던 내용과 비슷했다.

-광휘 오빠는 어떻게 지내? 설마…… 그 차원에 눌러앉을 생각은 아니겠지?

“아빠는 잘 지내. 그리고 아빠도 알고 있어. 지구로 돌아가야 한다는 것을.”

-아, 아, 아, 아빠아?!

아빠라는 말에 기겁하는 성녀.

“입양이야.”

루나 언니가 꼭 이 말을 덧붙이라고 했었지? 쥴리아는 지구의 성녀가 더 큰 충격을 받기 전에 설명을 더했다.

-입…… 입양……. 그랬구나. 후우…… 난 또……. 하아…….

그러자 눈에 띄게 안도하는 성녀였다.

-아무튼! 그 세계에도 마왕이 있다고 하니까, 지구로 돌아갈 방법이 없는 것은 아니야. 하지만 지구로 돌아가는 데에는 쥴리아, 너의 역할이 매우 중요해!

“……응, 그런데 기억이 완전하지 않아. 방법을 알려 줘. 아빠도 거기까진 잘 모르는 거 같아.”

-광휘 오빠는 이론에 좀 약했지. 안 그래도 지금 협회의 초상 과학자들이 전력으로 지구로 이어지는 게이트를 만들 방법을 계산 중에 있어. 쥴리아, 너는 차원의 통로, 림보 안에서 광휘 오빠의 나침판이 되어야 해!

“그렇구나…….”

느리게 답하는 쥴리아의 머릿속에 청은발의 여인이 걸렸다. 얼굴조차 모르는 생모보다 더 어머니 같은 여자가.

지금도 창밖에서 걱정스레 자신을 보고 있는 붉은색 드레이크와 검은색 말도 눈에 걸렸다.

자신의 이름을 지어 준 검은 마녀 언니와 친절한 엘프 아저씨도 떠올랐다.

“…….”

그런 인연들과 영원히 헤어질 생각을 하자, 쥴리아의 표정이 우울해졌다.

-슬슬 통신을 끊어야 할 거 같아. 마도구가 5분도 안 돼서 망가지네? 고층 빌딩 한 대 값인데. 방법이 나오면 다시 연락할 테니까…… 광휘 오…… 에게 ……부 ……해 줘…….

치직- 치이이이이.

잡음이 심해지고 여인의 목소리가 알아듣기 힘든 수준으로 접어들었다.

‘뭔가 방법이 없을까?’

머릿속을 울리는 잡음 속에서 꼬마 쥴리아이자 정령 아스트라는 방법을 찾아 헤맸다. 모두가 행복할 수 있을 방법을.

“쥴리아~ 쥴리아~!”

그렇게 생각에 잠겨 있는데, 문밖에서 나이 든 남성의 목소리가 들렸다.

“이 할아비가 뭘 가져왔는지 아니?”

이윽고 친숙한 불의 기운과 함께 방문이 열렸고, 재상 루카스가 살짝 신난 얼굴로 쥴리아를 반긴다.

그의 손에는 본인이 직접 만든 듯한 마도구 장난감이 가득했다.

“우와아!”

쥴리아는 연기 반, 본심 반으로 벌떡 일어나 루카스에게 달려갔다.

루카스는 손녀를 보는 기분으로 껄껄 웃으며 그런 쥴리아를 들어 안았다.

루카스에게 안긴 쥴리아는 어린아이처럼 기뻐하는 한편, 속으로는 모두의 기쁨을 위해 고민하고 기도했다.

* * *

과정은 어찌 되었건, 루시는 솔라의 손을 잡고서 거리는 거니는 데 성공했다.

더불어 얼떨결에 루나와 로뮤도 손을 잡게 되었다.

그렇게 일행은 함께 데이트 아닌 데이트를 하게 되었다.

‘와아!’

마검 루시를 통해 바깥세상을 둘러보았다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간접 체험이다. 직접 몸으로 체험하는 것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법.

루시푸르네는 언제 토라졌냐는 듯 잔뜩 상기된 볼로 왕도 거리를 정신없이 관광했다.

왕궁의 높은 첨탑에서 훔쳐보았던 설원의 도시, 늘 멀리서만 보아 왔던 도시는 가까이서도 아름다웠다.

루시는 자신의 왼손을 힐끔 보았다. 태양샘 반지를 낀 그녀의 왼손은 굳은살이 느껴지는 커다란 손에 안기듯 잡혀 있었다.

무엇보다 연모하는 남자와 이렇게 손을 잡고 거리를 걸으니 그녀의 기분은 더할 나위 없었다.

암행을 가장한 데이트.

불꽃놀이를 보고 광대들의 공연도 보고 길거리 연극도 보았다.

연극은 광휘의 기사가 암흑대공을 무찌르고 여왕을 구하는 연극이 제일 인기였고, 연극의 마지막에는 솔라를 연기한 배우와 루시를 연기한 배우가 입을 맞추는 것으로 끝이 났다.

그 연극을 보는 솔라와 루시의 얼굴은 서로 다른 의미에서 새빨개졌다.

그렇게 축제를 즐기면서도 딱 하나 하지 않은 게 있었으니, 바로 먹는 것이었다.

그 이유는 당연하게도 아직 설원의 저주로 음식을 섭취하지 못하는 여왕을 배려한 것이다.

하지만 아무리 배려한다고 해도 지금 왕도 윈테라는 축제 중인 도시다.

최대한 피한다고 했지만 어쩔 수 없이 마주할 수밖에 없었다.

길거리에서 파는 먹음직스러운 음식들이 냄새를 펼치며 일행의 코를 유혹한다.

꼬르륵.

제일 먼저 루나의 배에서 배고픔을 알리는 소리가 크게 울렸다.

“저…… 여왕님? 괜찮으세요?”

솔라의 손을 결코 놓지 않는 루시처럼, 로뮤의 손을 한 번도 놓지 않은 루나가 조심스레 여왕에게 물었다.

“루나, 언니라고 부르라고 했지? 그리고 난 신경 쓰지 말고 먹어. 축제……잖니?”

이에 루시는 어느 때보다 자상한 미소로 루나에게 말했다.

“먹도록 해라. 이건 명령이다. 솔라, 그대도!”

강권하는 루시의 행동에 로뮤와 루나는 노점에서 파는 꼬치 요리를 들었다.

솔라 또한 루시가 꼬치를 직접 들어 건네자, 마지 못해 손에 들었다.

“값을 치르지. 이거면 되나?”

세 사람에게 꼬치를 들게 한 루시는 이어서 자신의 아공간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그리고 은화와 금화를 꺼냈다.

“!!”

이를 본 일행, 특히 루나시르네의 눈이 경악으로 변한다.

그들이 들고 있는 꼬치는 크기가 매우 컸다. 그랬기에 본능적으로 걸음을 멈추고 꼬르륵 소리를 낸 것이기도 하다.

하지만 그래 봤자 동화 몇 닢 값이다. 그런데 은화와 금화를 꺼내다니!

설령 은화를 받는다고 해도 저 남루해 보이는 노점상에게 이를 거슬러 줄 동화가 있을 리는 없다. 애초에 거슬러 줄 양심은 있을까?

“루시 언니! 내가 계산할게!”

차마 여왕이 바가지 쓰는 꼴을 보기 싫었던 루나가 끼어들었다.

“아니다! 이건 내가 낼 것이다!”

하지만 루시푸르네의 고집도 장난 아니다.

“받거라. 잔돈은 필요 없다.”

그녀는 던지듯 금화와 은화를 노점상에게 건넸다.

“돈은 받지 않겠습니다. 그냥 가져가십시오.”

이에 노점상은 고개를 저으며 돈을 받지 않겠다고 한다. 그나저나 남루한 행색인 상인의 말투가 이상하다.

“그대 말투가……?”

보잘것없는 행색과 달리, 상인은 높은 제국어 억양이 다소 묻어나는 귀족의 말솜씨를 가지고 있었다. 노점 상인의 말투에 루시와 루나가 눈을 크게 뜬다.

“……왕실 기사인가? 변장이 아주 감쪽같군?”

상인의 정체를 눈치챈 루시가 피식 웃는다.

“이거, 변장은 자신 있었는데 말투는 방법이 없군요. 아무쪼록 즐거운 시간 되십시오, 폐하. 그리고 돈은 받지 않겠습니다. 열심히 만든 요리라지만 너무 값이 과합니다.”

“아니다. 그 돈은 하사금으로 줄 테니 기사단 회식비로 쓰든가 하거라.”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루시가 하사금 명목으로 다시 건네자 기사는 사양하지 않고 여왕의 하사금을 받았다. 군주가 대놓고 하사금이라고 하는데 이걸 거절하면 엄청난 무례다.

“우리 기사가 만든 음식이 맛이 있었으면 좋겠군.”

계산을 끝낸 루시가 솔라와 루나 그리고 로뮤가 든 꼬치를 보며 말했다.

꿀꺽.

그녀의 말에 노점상으로 변장한 기사가 침을 꿀꺽 삼키며 처음으로 긴장한 눈을 한다.

“그나저나 로뮤 공은 고기를 먹어도 되나?”

문득 꼬치에 고기가 껴 있는 것을 본 루시가 로뮤에게 물었다.

“저는 별종이라서 괜찮습니다.”

로뮤는 개의치 않는다는 듯 꼬치를 뜯었다.

이어서 루나가 여왕의 눈치를 보며 음식을 먹는다.

이제 남은 것은 솔라시우스뿐.

솔라 또한 루시의 초롱초롱한 시선을 받으며 꼬치를 한입 했다.

“어떤가? 맛이?”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 루시가 물었고. 루시 뒤에 있던 노점상으로 변장한 기사도 긴장한 표정으로 솔라의 입을 주목한다.

“맛있어.”

대체로 아무거나 잘 먹는 솔라였기에, 무엇보다 뒤에 있는 왕실 기사의 앞날을 위해서 호평을 했다.

“다행이다!”

“후우…….”

그의 말에 여왕과 기사가 동시에 반응했다.

솔라는 루시의 시선을 받으면서 큼지막한 꼬치를 마저 먹었다.

지구에서 파는 조그마한 꼬치가 아니다. 성인 주먹만 한 고깃덩어리와 구운 야채, 과일이 꽂혀 있는 참으로 기사들이나 만들 법한 요리였다.

음식을 먹음직스럽게 씹는 솔라를 루시가 몽롱한 눈으로 바라본다.

열 살 이후론 음식이라는 것을 먹어 보지 못했던 루시는 이제 식욕이라는 것을 거의 느끼지 못했다. 단맛이 무엇인지 아삭거리는 식감이 무엇인지도 이젠 흐릿하기만 하다.

하지만 이렇게 대놓고 나는 음식 냄새에는 본능적으로 멈칫하게 된다.

그래서 루시는 이러한 대리 만족으로 이 공허함을 이겨 내고자 했다.

그런 여왕의 시선을 받으며 솔라는 묵묵히 고기를 뜯었다. 마침 배가 고팠기에 쑥쑥 들어갔다.

‘이건…….’

솔라는 자신을 부담스레 바라보는 루시의 모습이 어째 낯이 익었다.

‘마치 먹방 같군.’

비슷한 모습을 오래전 지구에서 본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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