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34화
#134.
꼬치를 거의 다 먹은 솔라의 입 주위에 소스와 기름기가 묻었다.
그는 품속에서 손수건을 꺼내 입 주위를 닦으려 했다.
찌릿.
하지만 누군가가 그를 노려본다.
노려보는 루나의 살기 어린 시선. 솔라는 손수건을 집으려던 손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왜 루나가 자신을 노려봤는지 바로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어느새 루시푸르네가 한 손에 곱게 접힌 새하얀 손수건을 들고 자신을 쳐다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닦으시는 겁니다, 폐하!’
‘뭐 하는 거야, 솔라 오라버니! 어서 허리를 숙여!’
사방에서 이 상황을 응원하는 시선이 느껴졌다.
“…….”
결국 솔라는 무릎을 살짝 굽히고 허리를 숙였다. 그녀가 자신의 얼굴을 잘 닦아 줄 수 있도록.
루시는 흥분과 긴장으로 잘게 떨리는 손으로 그의 입가와 볼을 천천히 닦았다.
이를 지켜보는 사방이 고요하다. 마치 역사적인 장면이라도 되는 것처럼.
“…….”
말없이 솔라의 입가와 볼을 닦는 루시푸르네.
“…….”
무심한 눈으로 그런 루시를 바라보는 솔라시우스.
두 사람 사이에 묘한 기류가 흐른다.
이 상태서 조금만 고개를 내밀면 입을 맞출 수 있기에.
‘해…… 해 버려?’
루시의 가슴은 더더욱 콩닥콩닥 뛰었다.
주위의 모두도 한마음 한뜻인지.
‘뽀.뽀.해. 뽀.뽀.해.’
목소리는 내지 않았지만 입술로 같은 단어를 중얼거리는 것 같았다.
이에, 루시푸르네는 눈을 슬쩍 감았다. 입술을 살짝 내밀었다. 각도를 잘 조준하곤 솔라를 향해, 그의 입술을 향해 얼굴을 들이대려 했다.
하지만 그때.
콰아아아앙.
거대한 폭음이 도시 전체를 강타했다.
쿠르르르르.
폭음과 동시에 땅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사악한 어둠의 기운이 창공을 채웠다.
건물이 무너지고. 사람들의 비명과 고함이 거리를 메웠다.
감았던 눈을 뜬 루시는 멍하니 하늘을 보았다. 흘리듯 생각했다.
‘거의 다 됐었는데…….’
아쉬운 사념은 그걸로 끝. 움직여야 한다.
제일 먼저 무슨 일인지 상황을 파악해야 한다.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밤하늘이었지만 유독 더 어둡다.
하늘을 비추던 별과 달이 어느새 사라졌다. 감색에 가까웠던 루한의 밤하늘이 검은 암막처럼 잠기고 있다.
번쩍.
갑자기 루시의 왼손에서 따듯함보다 더 온기 있는 뜨듯함이 느껴졌다.
옆을 보니 솔라시우스가 어느새 회색 마검을 뽑아 태양 이능을 펼치고 있었다.
‘새벽의 등불’
그녀는 지금 솔라가 펼친 이능을 알았다.
“솔라, 이 반지도!”
루시는 꼭 잡고 있던 솔라의 손을 놓았다. 그리고 왼손에 끼고 있던 태양샘 반지를 손가락에서 뺐다.
휘우우우웅.
기다렸다는 듯, 루시의 몸속에 있던 설원의 저주가 밖으로 튀어나온다. 하지만 예전처럼 포악하게 사방을 얼리진 못했다.
그녀의 몸에서 나온 설원의 저주들은 나오자마자 바로 옆에 있는 남자의 눈치를 보아야 했다.
“잠시 빌릴게.”
솔라는 루시가 건넨 반지를 자신의 손에 꼈다.
파아아아앗.
그러자 그가 펼치고 있던 태양 이능 ‘새벽의 등불’이 훨씬 크게 빛나기 시작했다.
캄캄했던 도시가 새벽녘처럼 밝아졌다.
[그 능력! 오랜만이구나. 오랜만이야!]
솔라가 등불을 펼치자, 하늘 위 장막 속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반가움과 흥분이 버무려진 소년의 목소리가.
소년, 마왕 세피로스의 것으로 추정되는 목소리는 그것으로 끝났다.
투욱, 투욱, 툭, 투, 투, 투, 투.
이어서 검은 장막으로 가든 찬 도시 하늘에서 구정물 같은 것들이 한두 방울씩 떨어지더니 어느덧 가랑비처럼 내리기 시작한다.
그렇게 땅으로 내린 액체들은 각각 모이더니 커다란 형체를 만들어 내기 시작했다.
쿠아아아아아.
키오오오오오.
그리하여 세상에 모습을 드러낸 괴물들. 생명체도, 그렇다고 영체도 아닌 애매한 질감의 괴물들. 그림자 덩어리 같기도 했고. 어떻게 보면 석유를 뒤집어쓴 덩어리 같기도 하다.
생김새는 다양하다. 3할 정도는 사람의 형태를 했고 2할 정도는 거대한 뱀의 형태를 했으며, 나머지 5할은 네발로 기는 짐승의 형태를 했다. 크기는 대체로 작은 건 1미터, 중간 크기는 2~3미터, 좀 커다란 건 4~6미터 정도.
지구에서도 보았고, 세계수 묘목 속에서도 익히 보았던 11차원의 진짜 괴수들이다.
마계의 괴수들을 본 솔라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혹시 마계와 이어진 차원의 균열이 있나 싶어서.
올려다본 하늘은 그저 어두울 뿐이다. 괴물들은 균형이나 구멍 같은 곳에서 나온 게 아닌 하늘에서 우박처럼 떨어진 것일 뿐.
‘게이트는 아니군.’
눈앞의 괴물들은 그저 마왕이 행차할 때마다 자동으로 따라오는 부산물 같은 거다.
“저게 악황제 세피로스?! 사람이 맞긴 한 거야?”
“결국…… 진정한 마왕이 된 건가? 암흑대공과 악황후는 안 보이는군.”
옆에 있던 로뮤와 루나가 습격한 적의 정체를 정확히 추측한다.
“하이마! 베네사!”
루시푸르네는 멀리서 자신을 보좌하고 있을 시녀장과 기사단장을 불렀다.
“폐하!”
“하명하소서!”
기다렸다는 듯 베네사와 하이마가 루시에게 다가왔다. 두 사람을 선두로 왕궁 시녀들과 기사들이 변장을 풀고 집결한다.
이렇게 보니, 거리에 있던 사람 중 태반이 시녀와 기사였다.
“시녀들은 급히 별궁으로 대피하라. 기사단은 두 무리로 나눠서 병사들과 함께 백성들을 대피시키고 마왕의 졸개들을 무찔러라!”
루시는 인지 저하 마도구를 해제하며 명했다.
키에에에에에.
쿠오오오오오.
그녀의 명이 떨어짐과 동시에 사방에서 괴수들의 괴성이 울려 퍼졌다.
형체를 막 완성한 괴수 중 일부가 여기로 달려든다.
“폐하, 여기는 저희에게 맡기시고 어서 별궁으로…….”
이를 본 하이마가 여왕에게 간곡히 말했다.
“아니, 가지 않겠다.”
루시푸르네는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내가 그대들과 함께하겠다!”
그녀는 자신의 결심을 외치며 달려드는 괴물들을 향해 손을 뻗었다.
쏴아아아아.
설원의 힘을 집중해 달려드는 괴수들을 순식간에 얼려 버렸다.
루시의 공격을 시작으로 본격적인 전투가 시작되었다.
“공격하라! 여왕께서 함께하신다!”
“겁먹지 마라! 폐하와 광휘의 기사가 지금 여기 함께 계신다!”
도시를 비추는 작은 태양 아래서 루한의 기사, 마법사, 마녀가 모두 뛰쳐나와 마왕의 부산물과 싸웠다.
“내 음영술이 저것들에게도 통하려나 몰라.”
그림자 마녀 루나시르네 또한 간만에 금발 금안을 하고서 음영술을 펼쳤다. 도시에는 마왕이 펼친 암막과 솔라가 쏘아 올린 새벽의 등불로 질 좋은 그림자가 풍부했다.
“휴우~ 통한다!”
그녀가 움직이는 그림자의 파도와 마계의 괴수가 서로 비슷하게 생긴 주제에 동족 혐오라도 온 것처럼 격렬히 싸운다.
피슝, 서걱.
그런 루나 옆에는 로뮤가 정령의 기운이 가득 담긴 활과 검을 번갈아 사용해 가며 경호에 임했다.
단둘뿐이었지만, 어지간한 기사와 마법사 100명을 모아 놓은 것보다 위력적이었다.
‘나도! 나도 솔라와 합을 맞춰야 해!’
이를 옆에서 본 루시는 괜한 경쟁심을 느꼈다.
마검 루시 때 이후 처음으로 그와 합을 맞추는 순간이다.
괜히 긴장이 되었고 한편으론 흥분도 되었다. 실수하면 어쩌지 하는 약간의 불안도 서렸다.
“루나, 로뮤! 여기를 부탁해!”
그렇게 각오를 다지는데, 옆에서 불쑥 솔라의 목소리가 들렸다.
“루시. 쥴리아가 있는 별궁까지 같이 가 줄 수 있겠어?”
“응! 물론이야! 내가 솔라시우스, 그대를 지키겠어!”
지금 솔라는 새벽의 등불로 도시 전체를 비추느라 전투에 집중할 수 없었다. 손에 든 회색 마검 제노사이드를 하늘을 향해 치켜세운 상태다.
새벽의 등불을 거두려면 마왕이 펼친 창공의 장막을 찢어야만 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쥴리아의 존재가 필수다.
“잘 다녀와, 오라버니!”
“로안, 여긴 우리에게 맡겨!”
루나와 로뮤의 배웅을 받으며, 루시와 솔라 두 사람은 발걸음을 옮겼다.
두 사람의 이동이지만 수행원은 있었다.
베네사를 중심으로 한 왕궁 시녀들과 왕실 기사 중 일부가 함께 이동 중이었다.
이 결정이 과연 옳은 것인지는 모르겠다.
솔라시우스가 펼친 새벽의 등불은 아군과 적군 가릴 것 없이 어마어마한 어그로를 끌었으니까.
한 걸음 한 걸음 옮길 때마다 거대한 괴수들이 몰려든다.
하지만 누구도 비명을 지르거나 겁먹지 않았다.
‘이상하게 무섭지 않아!’
‘힘이 나! 용기가 나! 더 강해진 것 같아!’
‘내가…… 이렇게 강했나?’
솔라시우스가 펼친 초광역 버프, 새벽의 등불 덕분이다.
크아아아아아.
키에이이이익.
반대로 마계의 몬스터들에겐 엄청난 제약을 가져다주었다.
등불에 닿은 괴물들은 하나같이 색이 회색으로 연해지면서 약해졌다. 방어력, 공격력, 움직임이 눈에 띄게 퇴화된다.
하지만 여기서 끝난 게 아니다.
쏴아아아아아.
루시푸르네의 손끝이 향한 곳은 열외 없이 설원의 냉기가 몰아쳤고.
간만에 날뛸 수 있게 된 설원의 권능은 무자비하게 다른 차원에서 온 불청객을 얼리고 날리고 부쉈다.
단 두 사람, 광휘의 기사와 설원의 대마녀의 호흡은 위대한 전공을 만들어 냈다. 보는 이로 하여금 절로 경외와 충성심이 샘솟는 위용.
‘이 정도면!’
루시는 스스로 생각해도 꽤 완벽한 합이라고 생각했다. 루나와 로뮤 커플에게 결코 뒤지지 않을 것 같았다.
여름과 겨울, 뜨거움과 차가움, 빛과 심연.
두 사람의 속성은 서로 완전히 반대. 하지만 반대였기에 완벽에 가까운 호흡을 만들어 냈다.
‘마치 마하 대제와 아낙시아 같아!’
신화 속의 장면이 재현된다.
“오오……! 이건!”
“다시 한번 전설이……!”
그리고 이는 루시푸르네만의 생각이 아닌 모양.
시녀들, 기사들, 급히 증원 온 병사와 마법사, 마녀, 더불어 집 안에 숨어 있는 백성들까지, 모두가 성호를 그으며 광휘의 기사와 설원의 여왕을 우러러본다.
전투는 사실상 루시푸르네의 독무대였다. 여왕이 펼치는 냉기는 신기하게도 아군에게 해를 입히지 않고 오직 적에게만 설원의 징벌을 선사했다.
솔라는 도시 전체를 비추는 태양을 유지하느라 몸이 자유롭지 못하다.
하늘에서 떨어진 괴물들은 등불을 쏘아 올린 솔라를 향해 몰렸다. 불로 뛰어드는 불나방처럼 약해지고 죽을 것을 알면서도 달려든다. 덕분에 일반 백성들의 피해가 크지 않았다.
설령 뒤에 남아서 살육을 저지르려는 괴물이 있다고 해도 루나시르네와 로뮤가 처리했다.
그 외 기사와 병사들, 마탑과 마녀회에서 달려온 마법사들이 가세하자 검은 장막에 포위된 도시는 놀라울 정도로 평온했다.
파아아악.
파스스스슷.
검은 얼음 결정 같은 것들이 먼지처럼 흩날린다.
설원의 대마녀가 펼친 설원의 징벌로 얼어 부서진 괴물들의 잔해다.
아주 검지 않은 구정물 같은 것들이 살얼음 결정처럼 잘게 떠다닌다.
도시가 안전할수록, 백성들이 무사할수록, 별궁으로 이동 중이던 루시와 솔라는 바쁘다.
하지만 그 바쁜 것도 어느 순간부터 썰렁해졌다.
끝없이 쏟아질 것 같았던 괴물들의 비가 점차 뜸해진다. 도시를 채웠던 상위 차원의 덩어리들이 눈에 띄게 줄어들었다.
한숨 돌릴 시간이 생겼다.
솔라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전투를 치르면서도 틈틈이 발을 움직였기에, 어느덧 별궁이 시야에 보였다.
과거 데스모의 저택이기도 했던 곳.
찝찝했지만 여왕 루시는 끝내 고집을 부려 저 저택을 별궁으로 삼았다.
괜히 겁을 먹어 피한다는 인상을 주지 않기 위함이었다.
여왕은 건재하며 과거의 악령 따위에 주춤하지 않겠다는 메시지이기도 하다.
“솔라, 괜찮아?”
자신을 부르는 루시의 목소리가 들렸다.
시선을 돌려 그녀를 바라보았다. 모처럼 원 없이 사용한 설원의 권능 때문인지 다소 헝클어진 청은발이 제일 먼저 시야에 잡혔다.
전투의 흥분 때문인지 연한 홍조가 볼에 보였고. 가뿐 숨결도 느껴졌다.
“……?”
문득 솔라는 그런 루시푸르네의 모습이 매력적으로 와닿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