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35화
#135.
루시푸르네는 미인이다. 그것도 엄청난 미인이다. 요정 여왕 리리아와 맞먹는 아름다움과 기품을 가졌다. 이 사실은 그녀와 거리를 둬야 하는 태광휘, 솔라시우스도 인정하는 바다.
그랬던 그녀의 모습이 지금 이 순간 유독 더 매력적으로 다가왔다.
이 세계에 떨어지고서 지금까지, 루시푸르네는 언제나 솔라를 위해 도움을 주었다.
제일 큰 도움은 역시나 국서의 검 윈테이라, 그 검에 담긴 냉기로 솔라는 별의 저주를 이겨 낼 수 있었다. 본래라면 마왕의 계획대로 몸이 불타거나 녹아 죽어야만 했다.
그래서 솔라는 알게 모르게 지금의 루시푸르네에게 마음의 빚이 있었다.
그랬던 부채감이 방금의 전투에서 더더욱 커졌다.
도시 하나를 밝히는 것. 그것도 마왕이 펼친 결계에서 도시 하나를 지키는 것은 보통 일이 아니다.
게다가 창공에서 목도한 마왕의 힘은 강대했다.
‘지구에서 상대했을 때보다 훨씬 강해졌어.’
오리지널 태양 이능도 모자라 두 개의 태양샘 반지까지 껴서 간신히 막아야만 했다.
새벽의 등불을 전력으로 펼치는 그는 무방비 상태.
그런 솔라를 지켜 준 것이 바로 루시푸르네였다.
그녀의 몸에서 나오는 설원의 저주는 그가 품은 별의 저주를 중화시켜 줬고, 그녀가 휘두른 설원의 징벌은 그를 위협하는 모든 적들을 얼렸다.
“솔라, 괜찮아?”
힘을 제법 사용했는지 살짝 피로해 보이는 루시가 다가왔다. 그녀는 자신의 몸은 챙기지도 않고 오직 솔라만을 바라보며 그의 몸 상태를 살핀다.
마찬가지로 솔라 또한 자연스레 루시푸르네의 상태를 살폈다.
‘묻었군.’
흐트러진 청은발, 상기된 볼, 가뿐 숨결에 이어 그녀의 볼과 이마에 묻은 얼룩들이 눈에 밟혔다. 저 얼룩들은 몬스터들의 잔해다.
루시가 꽁꽁 얼리고 부수면서 일으킨 진눈깨비 같은 파편들이 알게 모르게 그녀의 얼굴에 튄 모양.
마치 아무도 밟지 않은 순백의 눈밭에 구정물이 튄 것 같다.
“…….”
솔라는 이유 모를 불쾌감을 느꼈다.
그는 이 불쾌감을 청결을 중시하는 자신의 성격 때문으로 치부했다.
자신은 평소에도 결벽증에 가까울 정도로 청결함을 중시했으니까.
느닷없이 떨어진 세계가 중세 판타지다 보니 어느 정도 타협을 해야 했지만 말이다.
그래서 루시의 얼굴에 묻은 얼룩은 솔라가 본능적으로 손수건을 꺼내게 만들었다.
“!!”
솔라가 손수건을 꺼내자, 루시의 눈이 크게 떠졌다.
‘설, 설마! 나를 위해?!’
그녀의 심장이 쿵 하고 전력으로 뛸 준비를 했다.
‘아, 이렇게 되면…….’
손수건을 꺼내 든 솔라는 몇 초 후 자신의 행동을 후회했다.
자신을 바라보는 루시푸르네의 눈빛이 심상치 않다.
그녀의 볼이 불과 몇 초 사이에 더 붉어졌다. 심장 소리가 더 크게, 빠르게 뛰는 것이 대놓고 전해질 정도다.
주위의 시선도 마찬가지. 모두가 괴물과 싸울 때보다 지금 더 집중하는 것 같다.
“…….”
“…….”
곤란함을 품은 무심한 시선과 기대와 흥분을 품은 시선이 교차한다.
닦.아.줘.닦.아.줘.닦.아.줘.
기사, 시녀, 병사, 마법사, 마녀 그리고 창틈으로 이를 보는 백성들까지.
모두가 한마음이 되어 눈빛으로 외쳤다.
‘건네만 줄까?’
그녀로 하여금 직접 얼굴을 닦으라고 손수건만 건네줄까 생각했지만.
스윽.
그의 생각을 읽기라도 한 듯, 루시는 눈을 감고 두 손을 뒷짐 지듯 뒤로 빼고는 고개를 살짝 위로 올렸다.
이젠 빼도 박도 못하는 상황.
‘그래…… 닦아 주는 정도야.’
입맞춤을 하는 것도, 세게 껴안는 것도 아니니 괜찮겠지.
솔라는 결국 손을 움직여야 했다.
스윽.
모두의 시선을 받으며 그녀의 얼굴을 조심스레 닦는다. 특히 입 주위를.
그럴수록 루시의 심장 소리가 더 잘 들린다. 홍조는 이제 볼을 넘어서 귀까지 번졌다.
‘왜 입술을 내미는 것 같지?’
문득 눈을 감은 그녀의 입술이 살짝 앞으로 나온 것 같았다.
기분 탓이겠지.
그렇게 루시가 살짝 내민 입술을 애써 무시하면서 손수건을 움직이고 있을 때였다.
--!
“?!”
찌릿 하는 느낌과 함께 루시의 얼굴을 닦던 솔라의 팔등에 소름이 돋았다.
그의 시선이 하늘로 향했다.
어느새 검은 장막이 걷히고 있었다.
도시는 다시 달과 별의 빛을 받을 수 있게 되었다.
“……!”
하지만 이를 보는 솔라의 표정은 안도와 거리가 멀었다.
“하이마 경!”
솔라는 손수건을 주머니에 넣고는 급히 왕실 기사단장을 불렀다.
“전하? 무슨 일이십니까?”
솔라의 어조가 심상치 않음을 파악한 하이마가 다시 긴장을 세우며 물었다.
“당장 별궁으로 가서 쥴리아를 데려오시오, 당장!”
“예?”
뜬금없는 1황자의 말에 하이마는 여왕을 보았고, 어느새 눈을 뜨고 입술을 집어넣은 루시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하이마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파아아앗.
하이마를 비롯한 일부 기사들이 급히 별궁으로 떠남과 동시에, 솔라는 왕도 전체를 비추던 새벽의 등불을 거뒀다.
스스스슷.
그리고 회색 마검에 태양검을 발현했다.
“솔라시우스, 나도 도울게!”
루시푸르네 또한 솔라와 비슷한 느낌을 받은 모양.
그녀는 몸에서 설원의 푸른 기운을 넘실넘실 세우며 솔라 바로 옆에 섰다.
어수선한 분위기, 어리둥절한 채 대피하는 사람들.
그 틈에서 솔라와 루시는 곧 다가올 만악의 근원을 대비한다.
주위를 은근히 채웠던 사람들도 전부 멀리 보냈다. 시녀부터 기사, 마법사까지 전부. 처음에는 가지 않으려 하던 충성심 강한 이들도 솔라와 루시가 동시에 강력히 명하자 결국엔 피신했다.
이제 두 사람 주위에는 아무도 없다.
황량한 거리. 전투로 파손된 길과 지붕, 담장.
저벅, 저벅, 저벅.
루시와 솔라 외에는 개미 새끼 하나 없어야 할 공간에 한 인영이 불쑥 모습을 드러낸다.
사람의 형상, 청년보단 소년에 가까운 앳된 외모.
복색은 특이했다. 추운 북쪽 땅에 서 있음에도 하늘하늘한 얇은 옷에 맨발을 고수하고 있었고, 습격의 잔해로 어지러운 도시의 길에 작은 발자국을 길게 남기는 중이다.
“성장은 끝났나?”
그런 소년을 향해 마중이라도 나온 것처럼, 저 앞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세피로스.”
세피로스는 자신을 부르는 존재를 보았다. 금발 금안의 남자가 서 있었다.
“태광휘.”
숙적, 목표, 유희, 12차원의 안배.
태광휘에 대한 무수한 정의가 세피로스의 사념을 채운다.
“지구에서는 가능한 한 빨리 널 없애려 했지. 더 힘을 키우기 전에. 실제로 성공했고.”
태광휘, 솔라시우스는 차가우면서도 무심한 금색 눈동자로 마왕을 향해 말했다.
“…….”
솔라시우스 옆에는 청은발의 여인이 서 있었다. 그 여인 또한 솔라와 똑같은 싸늘한 눈으로 세피로스를 노려보았다.
루시푸르네의 차가운 시선을 안주 삼아 세피로스는 묵묵히 걸었고, 솔라시우스는 말을 이었다.
“하지만 이 세계에 떨어지고 깨달았다. 그 방법은 해답이 아니라는 것을.”
세피로스는 솔라시우스의 말을 들으면서도 걸음을 이었다. 하지만 처음과 달리 속도는 다소 줄었다.
“여기에 와서 확신했지. 마계에 있는 본신에 큰 타격을 주지 않는 한, 이 악순환은 끝나지 않는다는 것을.”
저벅, 저벅, 척.
세피로스의 발이 멈췄다. 서로의 거리는 대강 5미터.
발이 멈추자, 마왕의 입이 열렸다.
“그래서 일부러 제국으로 오지 않은 거였나? 내가 옥타나와 둠을 흡수하길 기다렸나? 그것도 모자라 내가 직접 여기로 방문하길 기다렸나? 엄청난 인내심이군, 지구의 수호자여.”
마왕의 입에서 옥타나와 둠의 근황이 밝혀졌다.
“?!”
이를 들은 루시의 눈이 크게 떠졌다.
“맞아, 네놈이 마계의 권능을 잔뜩 흡수한 지금을 기다렸지.”
옆의 루시가 놀라든 말든, 세피로스를 바라보는 솔라의 금색 눈은 여전히 차갑다.
그의 금색 눈동자가 철저히 눈앞의 마왕을 분석한다.
‘세계수의 존재 때문에 게이트는 열지 못하는 건가? 아니면 그 권능을 포기하고 화신의 능력에 전부 투자한 건가?’
다 성장했다고 치부하기엔 애매한 부분이 다소 있었다.
‘아직 완전히 성장하지 않은 것일지도 모른다. 왕도의 장막을 오래 유지하지 못한 것도 이 때문이었나?’
과연 지금 상태서 마왕을 없앤다면 11차원의 본체에 얼마나 큰 피해를 줄 수 있을지, 그게 관건이다.
‘완전하지도 않은데 왜 온 거지? 자신 있다는 건가?’
솔라시우스는 마치 고기 등급을 매기듯 세피로스를 훑었다.
“다 성장한 게 맞나? 그 상태로 날 이길 수 있겠어?”
비릿한 시선과 더불어 무시를 노골적으로 담은 말이 솔라의 입에서 나왔다.
“도발인가? 오만하군, 감히 필멸자 따위가.”
솔라의 모욕적인 시선을 받은 마왕의 얼굴에 분노가 끓기 시작했다.
스으으으읏
동시에, 세피로스의 호리호리한 몸이 검은 흑염에 잠기기 시작했다.
퓨슈욱, 푸슈욱.
등과 머리에서 흑염의 뿔과 날개가 생성된다.
키와 덩치가 꾸역꾸역 급속히 자란다.
사람 형태를 한 검은 덩어리. 지구에서 솔라가 상대했던 마왕의 마지막 형상과 유사하다.
흑염 인간으로 변한 세피로스의 양손에는 송곳처럼 기다란 검은 손톱들이 이도류처럼 예리하게 각을 세웠다.
[그 유치한 도발, 기꺼이 어울려 주지!]
확 달라진 세피로스의 목소리가 거리를 울린다.
파아아아앗.
이에, 솔라 또한 빛의 갑옷을 소환한다. 그의 전신이 광휘를 입었고, 궁극기를 펼친 솔라는 빛의 화신이 되었다.
검부터 몸 전체가 태양이 되었다. 두 개의 태양샘 반지 덕분에 그 위력은 배가 되었다.
[루시, 설원의 권능으로 결계를 펼쳐 줘.]
솔라의 목소리도 변했다. 성대를 통한 육성이 아닌 정신파와 유사한 형태로.
“응, 솔라!”
솨아아아아.
루시푸르네는 옆에서 설원의 권능을 힘껏 펼쳤다. 우주의 차가움이 태양의 뜨거움을 품는다. 그리하여 솔라를 괴롭힐 별의 저주를 예방한다.
이어서 설원의 푸른 에너지가 넓게 돔 형태를 이뤘다.
설원의 결계가 차원을 뒤틀어 도시와 이곳을 분리시켰다.
그렇게 판이 깔리자.
타앗.
파앗.
빛의 화신과 혼돈의 화신이 동시에 발을 뗐다.
--!!
그리고 맞붙었다.
빛과 어둠이 도시 한복판에서 충돌한다.
고오오오오.
온갖 무술이 동원된다. 검술뿐만 아니라 격투술도 보였고, 어떨 때는 마법 공격으로 빛과 어둠의 구가 오갔다.
퍼엉, 펑, 파아아아.
둘의 무기, 둘의 팔과 다리, 둘의 기운이 부딪칠 때면 날카로운 충격파가 쉬지 않고 터졌다.
처음에는 무기와 사지, 마법 등으로 싸우던 것이, 중반부로 흐를수록 속성 싸움으로 고정되기 시작한다.
말 그대로 빛과 어둠의 다툼. 두 존재는 말없이 서로를 노려보며 공중에 떠 있을 뿐.
솔라시우스는 자신의 태양 이능 중 하나인 ‘열사의 필드’를 펼쳤다. 두 개의 태양샘 반지 때문인지, 기존 열사의 필드는 광휘의 필드로 눈부시게 뻗어 나가 마왕을 보쌈하려 한다.
그리고 이를 보고 있을 마왕이 아니다.
고오오오오오.
마왕은 이와 반대되는 어둠의 필드를 펼쳤다.
두 사람에게서 나오는 광휘의 줄기와 흑염의 촉수가 서로를 물고, 찢고, 조이고, 침투한다.
막상막하. 어떨 때는 솔라가 이기는 것 같았고, 또 어떨 때는 세피로스가 우세한 것 같았다.
하얀빛과 심연의 어둠이 서로의 영역을 차지하기 위해 치열하게 비벼댔다.
파치직, 파밧, 파밧.
빛과 어둠의 영역 싸움이 격렬한 곳에는 스파크가 요동치고, 플라스마가 터졌으며, 색마저 타 버린 듯 회색 그림자가 잔상처럼 남았다.
-! --!! --!!
빛이 우세할 때는 잠시 낮이 온 것처럼 밝았고, 어둠이 우세할 때는 잠시 밤이 온 것처럼 어두웠다.
마치 하나의 작은 세계, 작은 우주의 창조와 소멸이 이 안에서 벌어지는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