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36화
#136.
마이크로 빅뱅 같은 싸움.
고오오오오오.
고요한 혼돈 속, 거대한 충격파가 사방을 아수라장으로 만들지만.
“하아아앗!”
루시푸르네가 펼친 설원의 결계 덕분에 크게 번지지 않았다.
‘솔라……!’
자신이 펼친 푸른색 결계가 마치 콜로세움처럼 보였다.
용사와 마왕의 결전을 위해 조성한 콜로세움.
중심부에서 빛의 기사와 어둠의 전사가 싸우고 있다.
피만 튀기지 않을 뿐이지, 어지간한 싸움보다 격렬하고 처절하다.
‘으윽……!’
저 싸움에 루시도 가담하고 싶었다. 저 원수 세피로스에게 설원의 징벌을 원 없이 내리고 싶었다. 솔라를 돕고 싶었고, 그에게 인정받고 싶었다.
하지만 그러지 못한다.
‘무슨 힘이……?!’
왕도와 백성들에게 피해 가지 않게 결계를 유지하는 것, 그것만으로도 벅찼기 때문이다.
‘솔라시우스!’
둘의 싸움을 멍하니 지켜봐야만 하는 현실.
루시는 무력감을 느꼈다.
‘더! 더! 더…… 힘을 낼 수 있잖아!’
스스로를 향해 외치고 또 외쳤다.
‘제발…… 제발 좀 움직여 봐!’
무력감과 함께 답답함도 느꼈다. 전부터, 설원의 저주와 더불어 자신의 힘을 막는 무언가가 있었다. 회귀 전에도 끝내 극복하지 못했던 무언가가.
그것만 뚫어 낸다면! 각성에 성공한다면!
진정한 설원의 대마녀가 될 수 있다.
세상 만물을 얼려 버릴 미지의 차가움이 그녀의 것이 된다.
모두가 알고 있고 루시푸르네 또한 명확히 알고 있지만, 설원의 저주로 인해 끝끝내 뚫지 못했던 벽이기도 하다.
‘설원의 저주!’
루시는 가슴을 쿵쿵 치면서 발을 동동 굴렀다.
‘이것만 벗겨 내면! 이것만 극복하면!’
솔라에게 큰 도움이 될 것 같은데! 저 앞의 마왕 따위는 순식간에 얼려 버릴 수 있을 것 같은데!
루시푸르네의 푸른 눈동자가 서러움에 떨린다. 그녀의 눈동자 속에서 두 남자는 여전히 싸우고 있었다.
기 싸움, 자존심 싸움, 영역 싸움. 뭐라 불러야 할지 명확하진 않지만 한 가지는 확실하다.
‘강하군, 확실히.’
눈앞의 검은 마왕은 강하다. 지구에서보다 훨씬.
태광휘 그가 템빨로(태양샘 반지) 강해진 것처럼, 눈앞의 마왕도 나름의 방법으로 강해졌다.
파스스스슷.
서서히 마왕의 검은 기운이 거세진다. 팽팽하던 대결이 어느새 한쪽으로 기울어지고 있었다.
겨울이라도 된 것처럼 낮보다 밤의 지속 시간이 길어졌고, 솔라시우스, 태광휘는 밀리고 있었다.
‘아직 부족해!’
그러나 솔라는 눈앞의 마왕을 보면서 여전히 부족하다고 생각했다.
행동과 정반대되는 생각.
콰아아아아아.
그런 솔라의 생각을 듣기라도 한 듯 마왕이 뿌리는 어둠이 더욱 짙어졌다.
[크으윽!]
솔라는 처음으로 입 밖으로 신음을 흘리며 뒤로 밀렸다.
“솔라시우스!!”
그러자 루시푸르네가 솔라의 이름을 부른다, 애타게.
물론 솔라는 이대로 당할 생각이 전혀 없었다.
파아아아아앗.
도박판이 불리해지면 판을 엎어 버리듯. 솔라는 기 싸움을 포기하곤 광휘의 필드를 걷었다.
그리고 고정된 것처럼 가만히 있던 몸을 움직였다.
[크흐흐흐흐흐.]
힘 싸움에서 자신이 이겼음을 안 세피로스가 음침한 웃음소리를 냈다.
[원래는 소화만 시키고 갈 생각이었지만, 그냥 죽이고 가도 되겠어.]
파앗, 파앗, 파앗.
마왕의 검은 몸뚱이에서 아까보다 더 많은 뿔과 촉수, 날개가 솟아났다.
[이참에 저 여자도 죽이자.]
문득 마왕의 검은 시선이 결계를 펼치고 있는 루시푸르네를 노려본다.
[더 큰 위협이 깨어나기 전에.]
정확히는 그녀의 몸속에 있는 거대한 잠재력을.
[어딜 보는 거지?]
마왕이 갑자기 루시에게 시선을 두자, 솔라시우스는 바로 움직였다.
[네 상대는 나다, 세피로스!]
루시를 노려보는 세피로스를 향해 솔라의 공격이 쏘아졌다.
빛의 덩어리로 보이는 원거리 공격, ‘빛의 추적’이 마왕을 공격했다.
파앗.
마왕은 싱거울 정도로 쉽게 솔라의 공격을 방어했다.
콰아아아아앗.
공격을 받았으면 답례를 해 줘야 하는 법.
이제는 사람보다 몬스터의 형상에 가까운 11차원의 군주가 빛의 기사를 향해 품고 있던 모든 촉수를 채찍처럼 휘둘렀다.
파캉!
채찍처럼 날아온 촉수들이 솔라가 펼친 ‘빛의 실드’에 막혔다.
그러나 마왕의 공격은 이제 시작.
마왕은 날개를 펄럭였다. 그리하여 빠르고 민첩하게 솔라를 향해 접근했다.
날개가 없는 솔라는 그저 공중에 떠 있는 것이 최선인 상황.
피하기는커녕 이동도 쉽지 않았기에, 마왕의 돌진을 그저 받아 내야 했다.
마왕은 몸통 박치기라도 하듯 거대한 뿔로 빛의 실드를 때렸다.
퍼엉!!
강렬한 충격음이 터졌다.
쿠우웅!
솔라는 지상으로 추락했다.
“솔라시우스!”
그가 땅으로 추락하자, 이를 목도한 루시푸르네는 평정심을 잃었다.
“꺄아아아아아악!! 솔라, 솔라시우스!”
루시에게 마왕은 거대한 트라우마였다. 악황후 옥타나와 더불어, 그녀에게서 모든 것을 앗아 간 존재.
회귀를 했음에도 여전히 또렷했다.
마왕의 손에 목숨을 잃었던 솔라시우스가, 마왕의 검에 심장이 찔려야 했던 과거의 그녀가.
이런 이유로, 지금 눈앞에서 목도한 솔라의 추락은 회귀 전에 경험했던 최후와 장면과 겹쳐졌다.
“!!”
그녀의 트라우마를 세차게 깨웠다.
“안 돼에!”
그리고 트라우마의 발작과 함께.
“아아아아아악!!”
루시푸르네는 이성을 잃었다.
결계를 펼치느라 도울 수 없었던 답답함이, 끝까지 자신을 얽매는 설원의 저주가, 거기에 끝끝내 반응하지 않는 미지의 힘에 대한 원망이 함께 요동쳤다.
바스스스슷.
그리하여 제일 먼저 설원의 결계가 붕괴됐다.
쏴아아아아.
그녀가 품고 있던 설원의 저주가 통제를 잃고 날뛰기 시작한다.
쿠오오오오오.
솔라시우스의 개입으로 힘껏 날뛸 일이 없었던 설원의 권능도 저주를 방패 삼아 함께 날뛰었다.
거대한 설원의 권능마저 통제를 잃었다.
--!!
마침내!
루시의 몸과 영혼 속, 깊숙이 잠들었던 ‘무언가’가 스스로를 인지한다.
루시푸르네가 끝끝내 깨우지 못했던 ‘미지의 힘’이 부스스 일어나기 시작했다.
본래라면 이 차원에서 유일하게 각성한 마왕을 무찌를 수 있는 힘이!
만물을 얼릴 수 있는 차가움이 기지개를 핀다.
-아아아아아아!
아름다운 여인의 화음 같은 것이 공간을 채웠다.
파뜨드드드득.
땅과 거리, 집도 모자라, 대기를 비롯한 세상 만물이 얼기 시작한다. 땅속에 서식하던 개미를 비롯한 온갖 미생물이 순식간에 얼어 죽었다.
고공을 날던 몇몇 운 없는 새들이 꽁꽁 얼어 땅으로 추락해 산산조각 났다.
고오오오오오오!
어쩌면 설원의 저주보다 더 끔찍한 재앙이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다.
통제를 잃은 무한의 추위가 빠르게 세상을 집어삼키려 한다.
끝없는 허기를 느끼는 고삐 풀린 추위는 대상을 가리지 않았다.
[이건?!]
땅으로 추락한 솔라를 쫓아 막 지상으로 내려오던 세피로스가 첫 번째 대상이 되었다.
솨아아아아.
흑염으로 휘날리던 마왕의 몸이 굳기 시작한다.
[돌아 버리겠군.]
마왕 세피로스는 처음으로 낭패라는 반응을 보였다.
“루시……?!”
마찬가지로 땅에 처박혔다가 막 몸을 일으킨 솔라 또한 당황한 모습이다.
‘저게 설원의 진정한 힘?’
사그라진 세계선, 원작 게임의 설정이 떠오른다.
게임의 궁극적인 목적이 바로 여왕이 저주를 풀고 그녀가 진정한 각성을 하게 돕는 것이었다.
완전한 힘을 얻은 여왕으로 하여금 마왕을 없애게 하는 것이 게임의 메인 목적이었지.
그랬기에 솔라는 루시가 뿜어내는 거대한 힘에 대해 놀라지 않았다.
단지 딱 봐도 통제가 되고 있지 않은 것 같은 상황에 우려를 표할 뿐.
[크으으으윽!]
제일 먼저 마왕의 움직임이 느려지기 시작했다. 몸 전체를 아우르던 흑염과 뿔, 촉수가 고드름처럼 꽁꽁 굳는다.
[루한의 여왕을 제일 경계하라던 그녀의 말이 맞았어. 이렇게 강한 힘이라니……. 하위 차원의 피조물 따위가 도대체 어떻게?!]
눈에 띄게 당황하는 마왕의 반응.
[루한의 여왕이 각성하도록 둬선 절대 안 된다고 잔소리를 할 만했어.]
그동안 긴 싸움을 이어 온 것이 무척이나 허무할 정도로, 마왕은 무기력하게 얼어붙기 시작했다.
[힘이 부족해. 확실히 부족해. 황도에 있는 인간뿐만 아니라…… 그 녀석도 필요해!]
세피로스는 반쯤 미친놈처럼 중얼거리더니, 이윽고 도망치려 했다.
?!
[……말도 안 돼! 마나마저 얼렸다고?!]
하지만 그는 공간 이동 마법을 펼치지 못했다.
꽈드드득!
도망에 실패하는 사이에도 마왕의 몸과 영혼은 빠르게 얼어 간다.
[으…… 으…… 이렇게 소멸한다고?!]
마왕의 소멸이, 정확히는 화신의 소멸이 코앞으로 다가왔다.
세계를 위협하던 거대한 악의 최후가 조금만 있으면 이뤄진다.
하지만 결코 좋은 상황은 아니다.
세상 만물을 얼리는 힘은 적아를 구분하지 않았기 때문.
마왕을 거의 다 먹어 치웠다고 판단한 힘은 다른 쪽으로 방향을 튼다.
저기 더 많은 얼릴 것들이 있다. 빠르게 도시로 퍼지려 한다.
이대로 가다간 왕도 윈테라는 물론, 루한 전역이, 어쩌면 이 세계 전체가 얼어 버릴 것 같았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크핫, 크하하하하하! 그래, 차라리 이게 낫겠어! 지구식 용어로 리트라이를 해야겠군. 본신에 영향이 좀 오겠지만 어쩔 수 없지.]
지금 마왕을 소멸시키면 안 된다.
지금 놈이 소멸하면 지금까지 기다린 의미가 없게 된다.
“루시! 정신 차려!”
솔라는 급히 태양 이능을 펼쳤다.
루시의 폭주를 막기 위해 몸을 던졌다.
두 개의 태양샘 반지가 빛났고, 궁극기 태양의 후예를 펼쳤다.
파아아앗.
그의 전신이 다시 한번 빛나기 시작했다.
빛과 열, 태양의 힘을 가진 솔라는 루시를 진정시킬 수 있는 유일한 존재. 온 우주에 단 하나밖에 없는 남자.
파아아앗.
궁극기 태양의 후예에 이어 열사의 필드를 펼쳤다.
저 힘이 도시로 퍼지지 않게 열풍의 막을 펼쳤다.
‘크으윽……!’
하지만 이성을 잃은 루시의 힘은 아득할 정도다.
-아아아아아아!
찬송을 연상시키는 여인의 노랫소리 같은 게 강풍과 함께 불어온다.
그녀가 펼치는 냉기를 간신히 견디며, 솔라는 냉철한 눈으로 루시의 몸을 분석했다.
‘심장 쪽!’
루시푸르네의 가슴. 특히 심장에서 문제의 힘이 쏟아져 나오고 있다.
이성을 잃은 그녀와, 통제를 벗어난 저 힘을 막을 방법은 단 하나! 심장에 난 구멍을 막는 것일 뿐.
처억.
솔라는 양손에 검을 들었다. 한 손에는 회색 마검 제노사이드를, 다른 한 손에는 푸른 마검 윈테이라를.
“…….”
그녀의 가슴에 검을 꽂아야 한다. 하지만 망설인다. 이렇게 하면 루시는 큰 상처를 입는다. 어쩌면 설원의 저주보다 더 큰 장애를 평생 안을지도 모른다. 최악의 경우 죽을 수도 있다.
그렇게 망설이고 있었다.
“아빠!!”
뒤에서 너무나 반가운 한 아이의 목소리가 들렸다.
“쥴리아, 불살검!”
쥴리아가 다가오자, 솔라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외쳤다.
[응!]
쥴리아의 몸은 순식간에 검의 형상으로 변하더니 그의 손에 안착했다.
파앗, 타다다다닷.
솔라는 불살검 ‘세인트 아스트라’를 양손에 쥐고는, 폭주하는 루시를 향해 달렸다.
쿠고오오오오!
‘크으윽!’
거대한 냉기가 그를 압박한다. 모든 힘을 펼쳤음에도 솔라는 매서운 추위를 느꼈다.
그럼에도 그는 포기하지 않았다.
5미터, 3미터, 1미터, 30센티미터, 그녀를 향해 다가갔다.
그리하여 마침내.
푸욱!
루시의 심장에 불살검을 박았다.
어쩌면 이것으로 설원의 저주를 풀 수 있을까, 라는 생각이 찰나였지만 스쳤다.
[흐흐흐흐흐.]
문득 뒤에서 마왕 세피로스의 비릿한 웃음소리가 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