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37화
#137.
마왕의 웃음소리. 녀석은 아직 죽지 않고 살아 있었다.
바라던 바였지만, 문제는 지금 상황이 좋지 않다.
‘이 상태에서는……!’
때늦은 긴장을 했다.
그러나 얼마 후, 파앗 하는 소리와 함께 놈이 공간 이동 마법으로 사라지는 것을 느꼈다.
‘……후우.’
천만다행히도 세피로스는 솔라와 루시를 공격하지 않았다. 녀석도 부상이 심했던 모양.
마왕이 사라지고도 솔라는 루시의 심장에서 불살검을 뽑지 않았다.
구멍은 막았지만 이미 빠져나온 힘을 잠재워야 했다.
솔라는 태양샘 반지 중 하나를 빼서 루시의 손에 끼웠다.
워낙 경황이 없어 손에 잡히는 아무 손가락에 끼웠다.
꼬옥!
루시의 손가락에 반지를 끼운 솔라는 있는 힘껏 그녀를 껴안았다.
고오오오오.
그제야 상황이 눈에 띄게 진정되는 것이 피부로 느껴졌다.
시간이 좀 더 흘렀고 무한할 것 같았던 추위가 유한해졌고 약해졌으며, 땅과 대기에 짙은 상흔을 남기고 사라졌다.
긴장이 풀린 솔라는 강한 피로를 느끼며 의식을 잃었다.
* * *
솔라시우스는 눈을 떴다.
낯설지만 익숙한 천장이다.
지구가 아닌 낯선 이세계, 하지만 어느새 익숙해진 것 같은 제2의 고향 같은 곳.
눈을 뜬 그는 잠시 생각을 정리했다.
마지막에 루시를 껴안은 것까지만 기억에 남았다.
“오라버니, 괜찮아?!”
“로안.”
“아빠……!”
그가 의식을 차리자마자, 주위에서 목소리가 울렸다.
‘…….’
강한 몸살이라도 온 것처럼 삭신이 쑤시고 머리가 아프다. 한 가지 신기한 게 있다면. 몸살 느낌이 나면서도 오한이 아닌, 더위를 심하게 느끼고 있다는 것이다.
“……루시푸르네는?”
솔라는 눈을 뜨자마자 제일 먼저 루시의 상태를 물었다.
!!
그러자 저기 문 쪽에서 눈에 띄게 당황하는 인기척이 느껴졌다.
그가 누운 침대 주위에는 쥴리아, 로뮤, 루나만 있었고 루시는 보이지 않았다. 아마 문 쪽에 서 있는 모양.
“여왕님은 괜찮으신 거 같아.”
일어나자마자 루시를 찾은 솔라를 루나가 응큼한 눈으로 내려다보며 답했다.
“맞아! 나도 확인했어.”
루나 옆에 있던 쥴리아가 추가로 거들었다.
“역시 위기가 찾아와야 사랑이 싹트나 보군?”
옆에 있던 로뮤도 재밌다는 듯 웃으며 의미 모를 말을 한다.
“내가 의식을 잃은 지……?”
“반나절 정도 됐어.”
창가를 보니 정오를 훨씬 지난 오후다.
“아주 사이가 돈독해졌더군?”
로뮤는 창가를 보는 의형제에게 의미 모를 멘트를 이었다.
“맞아! 진짜 부부 같았지?”
계속되는 로뮤와 루나의 말에 솔라가 고개를 갸웃한다.
“무슨 뜻이지?”
“기억 안 나? 우리가 도착했을 때. 여왕님이랑 오라버니 말이야. 서로를 아주 꼭 껴안고 있던데? 쥴리아를 가운데에 두고서.”
루나가 대표로 솔라가 의식을 잃은 직후의 상황을 말했다.
“히히히! 한쪽은 차갑고 한쪽은 따듯했어!”
쥴리아가 해맑게 루나의 증언에 무게를 더했다.
“……!”
그 말에 솔라는 눈을 꾹 하고 감았다.
“우리는 이만 가 보지. 몸살 기운은 다음 날이면 사라질 거야. 그럼 푹 쉬도록 해, 로안.”
로뮤는 오랜 세월을 살아 온 하이엘프답게 의학 지식이 있었고, 솔라의 몸에 큰 이상이 없음을 확인하자 자리에서 일어났다.
“맞아, 할 일이 많아!”
로뮤를 시작으로 루나와 쥴리아가 마저 일어나자, 솔라가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할 일?”
“아직 도시에 괴물들이 남아 있어. 마저 소탕해야 해.”
“쥴리아! 언니랑 같이 가자!”
“응!”
로뮤와 루나, 쥴리아는 그 말을 끝으로 빠르게 침실을 나섰다.
“둘이 좋은 시간 보내고~.”
“이참에 후계 문제 해결을 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어?”
나가면서 로뮤와 루나가 솔라를 향해 응큼한 미소를 보냈다.
세 사람이 썰물처럼 빠져나간 침실은 적막했다.
“루시.”
솔라는 여전히 침실 문 앞에 숨어 서성거리는 여인을 불렀다.
“들어와도 돼.”
“…….”
그의 말에도 루시는 망설일 뿐,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네 잘못이 아니야.”
솔라는 루시가 왜 저런 반응을 보이는지 짐작했다. 그는 타이르듯 그녀를 달랬다.
얼마 후.
“……하지만 나는 그대를…….”
눅눅히 젖은 여왕의 목소리가 떨림과 함께 들렸다.
솔라는 그렇게 주눅 든 루시를 향해 한마디를 던졌다.
“루시, 나 지금 별의 저주가 심한 상태야.”
“……갈, 갈게!”
덥다는 솔라의 말에 루시는 홀리듯 그가 누워 있는 침대 곁으로 다가갔다.
침대에 누운 솔라를 향해 걸으면서도 루시의 머릿속은 혼란과 죄책감으로 가득 찼다.
나중에 도착한 사람들은 그녀와 솔라가 사이좋게 껴안은 것만 보아서 자세한 내막을 모른다. 쥴리아도 어린아이답지 않게 입이 무거웠고, 선의의 거짓말도 곧잘 했으니까.
그러나 루시는 너무나 잘 알았다. 솔라가 저렇게 된 것이 순전히 자신 때문이라는 것을.
슬펐고 두려웠다.
그가 부상을 입고 쓰러진 모습을 보아서 슬펐다.
그가 자신을 싫어하고 두려워할 것 같아서 두려웠다.
하지만.
“……루시푸르네는?”
솔라가 눈을 뜨자마자 꺼낸 첫마디가 그녀의 심장을 녹였다.
자존감과 용기를 샘솟게 했다.
죄책감으로 문 쪽에 숨어 서 있던 그녀의 몸이 발작이라도 난 듯 크게 떨렸고, 두 눈에서는 차가운 눈물이 흘렀다.
폭주했을 때 그가 자신의 왼쪽 약지에 끼워 준 태양샘 반지를 하염없이 매만졌다.
‘솔라시우스……! 내 사랑, 나의 기사, 나의 모든 것!’
숨을 크게 들이쉬고 침실로 걸어가면서도, 왼손 약지에 낀 태양샘 반지를 계속해서 만지작거렸다.
“……!”
누워 있던 솔라가 그런 루시의 왼손을 보더니 눈을 크게 떴다.
그런 솔라를 보면서, 루시푸르네는 회귀 전의 마지막 기억이 떠올랐다.
* * *
회귀 전, 사그라진 세계.
암흑대공과 결투를 벌인 로안 샬루트는 큰 부상을 입은 채 왕궁으로 돌아왔다.
붉은색 드레이크 시즈의 희생으로 그는 가까스로 목숨을 건졌으나, 곧 죽을 것처럼 사경을 헤맸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암흑제국으로부터 루한을 수호하는 설원의 가호가 점점 약해졌다.
반대로 여왕을 괴롭히는 설원의 저주는 점점 강해진다.
그리하여 그때쯤부터, 여왕은 자신을 향한 제국의 노골적인 암살 시도를 피부로 느꼈다.
너무나 뒤늦게, 그제야 알게 되었다.
지금까지 여왕을 향한 제국의 암살 시도를 로안 샬루트가 뒤에서 몰래 막아 주고 있었다는 사실을.
로안으로 인해 그간 간신히 유지되었던 것들이 로안이 사라지자 무너져 내린 것이다.
알현실, 그 알현실의 제일 끄트머리.
참으로 오랜만에 기사단장 하이마는 여왕과 독대할 수 있었다.
비록 설원의 저주가 심해져 알현실 끄트머리에 간신히 서 있어야 했지만, 극심한 추위에 이마저도 오래 있을 수 없지만, 적어도 재상 아리아 데스모는 보이지 않았다.
마침내 고대하고 고대하던 여왕과의 독대였다.
하지만 하이마의 표정은 좋지 않았다. 희망을 잃어버린, 모든 것을 탕진한 폐인에 가까운 몰골이었다.
“지금까지 폐하를 향해 셀 수 없이 많은 암살이 있어 왔습니다. 그리고 그걸 로안 경이 대부분 막아 왔습니다.”
“……그걸 왜 보고하지 않았지?”
“그동안 매번!!”
여왕의 물음에 하이마는 처음으로 주군을 향해 원망 가득한 외침을 터트렸다.
“한 번도 빠짐없이…… 재상을 통해 폐하께 보고를 올렸습니다. 하지만 폐하께서는 응답이 없으셨습니다. 폐하…… 재상을 조심하십시오. 그리고 기사 로안 샬루트를 가까이하십시오. 이제 이 세상에 유일하게 남은 폐하의 편은…… 폐하의 충신은…… 오직 로안 경뿐일 겁니다.”
“……!”
“그럼, 소신은 이만 물러나겠습니다.”
여왕의 허락이 떨어지지 않았음에도 하이마는 그 말을 끝으로 알현실을 나갔다.
“…….”
매우 무례한 행동이었지만, 루시푸르네는 그런 기사단장의 행동에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다음 날, 기사단장 하이마가 제국에서 보낸 암살자에게 살해당했다는 비보가 전해졌다.
기사단장 하이마의 장례를 치르고, 뭔가를 해야 했지만 이제 이 왕국에서 그녀의 손발이 되어 줄 이는 남지 않았다.
재상이 있었지만, 지금 그녀는 누구보다도 재상이 두려웠다.
아리아 데스모는 여왕이 자신을 의심하는 것을 눈치라도 챘는지, 매일같이 알현하던 발걸음을 뚝 끊었다.
“…….”
그렇게 루시는 방치되다시피 침실과 알현실을 멍하니 배회할 뿐이었다.
이제는 누구의 알현도 거부하지 않았지만, 누구도 그녀를 보러 오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한 여인이 목숨을 걸고 알현실을 방문했다.
“베네사!”
저주가 심해진 이후로 한 번도 만나지 않았던 시녀장 베네사가 불쑥 여왕을 알현했다.
“그동안 어떻게 지냈지? 할 얘기가…… 할 얘기가 많구나. 바깥소식을 요즘 통 듣지 못하였다.”
외로움에 파묻혔던 루시는 베네사의 방문에 모처럼 환하게 웃었다.
“……괜찮으냐?”
그러다가 이내 베네사의 꼴을 보곤 웃음을 거뒀다.
하이마 때처럼 알현실 끄트머리에 선 베네사는 옷을 두툼하게 입고 따듯한 마도구를 가득 챙겨 왔음에도 추위에 벌벌 떨었다.
시녀장 이전에 하급 마녀이기도 한 그녀이었기에 이렇게라도 버틸 수 있었던 것이기도 하다.
베네사는 여왕을 알현하자마자, 기사단장 하이마가 그랬던 것처럼 행동했다.
“폐하! 감히 목숨을 걸고 전합니다. 로안 경은 믿을 수 있는 기사입니다! 그를 가까이 두소서! 그리고 재상, 데스모 공작을 처형하소서, 그녀의 정체는…… 악황후 옥타나의 수하입니다!”
설원의 저주 때문에 알현실에 오래 있을 수 없었기에, 인사치레나 예법은 과감히 생략하고 꼭 해야 할 말만 고했다.
“지금까지 재상이 폐하의 저주를 해제하기 위해 행한 모든 시도는 거짓이었습니다. 대마법진 이노센티아는 또 하나의 저주이옵니다! 가호는 약화시키고 저주는 악화시키는 흑마법이었습니다! 로안 경이 시련을 통해 구해 온 태양샘 반지와 세계수 묘목 또한 재상이 파괴하고 빼돌린 겁니다!”
마치 무언가에 쫓기다 온 듯한 기색, 조마조마하며 알현실로 몰래 온 것 같은 모습.
알현실에서 보고를 올리는 베네사의 모습은 단순히 추위에 벌벌 떠는 것 이상으로 불안해 보였다.
“악황후 옥타나는 거짓의 대마녀! 그녀의 힘을 빌리면 마나의 맹세를 하더라도 거짓을 말할 수 있습니다. 지금까지 루한의 모두가! 악황후 옥타나와 재상 데스모의 혀에 농락당해 왔던 것입니다!”
그러나 추위로 인한 떨림도, 재상을 향한 두려움도, 시녀장의 진심을 막지 못했다.
“이 모든 사실은 마나의 맹세코 진실입니다. 저를 비롯한 루한에 마지막 남은 마녀와 마법사, 기사들이 목숨을 걸고 밝혀낸 진실입니다.”
시녀장 베네사의 이어지는 충언.
“……!”
여왕은 눈을 질끈 감았다.
“신이시여! 세계수여! 여왕을 보살피소서.”
그 말을 끝으로. 베네사는 황급히 도망치듯 알현실을 나갔다.
다음 날, 순백궁 정문에서 시녀장 베네사가 주검으로 발견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