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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여왕의 EX급 방랑기사-138화 (138/212)

제138화

#138.

기사단장 하이마가 죽고 시녀장 베네사 또한 죽었다. 로안 샬루트는 아직 사경을 헤매고 있다.

그제야 재상이 여왕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순순하고 착하신 우리 여왕님, 그간 잘 지내셨는지요?”

분노와 배신감조차 들지 않는지, 그저 허탈한 표정을 하고 있는 여왕을 보며, 여공작 아리아 데스모는 미소 지었다.

“가장 거슬렸던 로안 샬루트는 아직 사경을 헤매고 있다지요? 곧 죽을 줄 알았더니 명줄은 긴 것 같군요.”

재상의 차가운 미소가 지금은 유독 비릿하게 느껴졌다.

“폐하가 잘 속아 주신 덕분에 모든 것이 수월했습니다. 이래도 되나, 싶을 정도였지요.”

알현실의 끝에서 재상은 과장된 인사와 함께 고개를 숙였다.

“로안 샬루트가 구해 온 태양샘 반지와 세계수 묘목은 설원의 가호를 약화시키는 데 아주 큰 도움이 됐습니다. ……파괴왕 가오이와 죽음의 마녀의 죽음은 달갑지 않았지만.”

“…….”

루시는 공허한 눈으로 한때 누구보다 믿었던 마녀를 말없이 바라보았다.

“뭐, 결과만 좋으면 된 것이겠지요?”

파앗, 파앗, 팟.

비릿한 미소를 짓는 아리아 주위로 검은 로브를 눌러쓴 마녀와 마법사들이 나타났다.

“참! 로안 경의 진짜 정체, 아직 모르시죠? 알려 드릴까요?”

“닥쳐라!”

재상의 조롱에 루시는 결국 참지 못하고 소리 질렀다.

솨아아아아.

설원의 강풍이 매섭게 불기 시작했다.

“예예, 닥치고 있겠습니다. 누구의 명령인데 어기겠나이까?”

재상은 제국 마법사와 마녀들에게 손짓으로 공격 준비를 알렸다.

“이만 닥치고 폐하를 편히 보내 드리지요.”

아리아와 함께 나타난 수십의 마법사와 마녀는 각자의 지팡이와 빗자루, 오브 등을 루시에게 겨눴다. 그들 중에는 익숙한 얼굴들도 껴 있었는데, 루한의 마탑과 마녀회 출신으로 추정됐다.

“와라!”

루시는 허무한 배신감을 삼키며 외쳤다.

화아아악!

그녀 주위로 간만에 설원의 권능이 날뛰기 시작했고, 설원의 저주와 가호를 동시에 지닌 그녀에게 접근할 수 있는 사람은 이 자리에 존재하지 않았다.

“쏴라!”

대신 그녀를 향해 무수한 저격 마법이 쏘아졌다.

“그따위 공격으로 날 죽이겠다고!”

하지만 루시푸르네는 반쪽짜리지만 설원의 대마녀, 그녀는 설원의 마법을 발현하여 이에 대응했다.

쏴아아아악.

거대한 한파와 냉기마법이 아리아와 마법사, 마녀를 휩쓸었다.

저들이 쏜 마법은 꽁꽁 얼어 중간에 떨어지거나, 여왕이 펼친 설원의 결계에 소멸되었다.

아리아를 비롯한 적지 않은 수의 습격자들이 설원의 힘에 휘말려 죽거나 다쳤다.

하지만. 습격자 무리를 이끄는 재상은 루시의 힘을 목도했음에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는다.

“폐하, 제가 이 추운 촌 동네에서 그동안 뭘 하고 있었을까요?”

마치 그녀의 힘에 대해 아주 잘 안다는 듯 여유만만이었다.

“닥쳐! 내가 설령 죽더라도, 네년만큼은 기필코 죽여 버리겠다!”

쏴아아아!

그런 재상의 여유에 루시는 흥분했고, 더 거세게 마나를 움직였다.

재상은 흥분한 맹수를 유인하듯 습격자들과 함께 이리저리 피하며 술식을 준비했고, 여왕을 위한 덫이 완성되었다.

--!!

곧바로 마법진을 발동했다.

“아아아악!”

그 덫에 걸린 루시는 갑자기 온몸에서 힘이 빠져나감을 느꼈다.

“당신이 있는 바로 이 궁전! 이 궁전의 지하에 거대한 마법진을 그려 놨습니다. 예! 폐하께서 잘 아시는 바로 그겁니다. 당신의 저주를 풀기 위해 모든 지원을 아끼지 않았던 대마법진 이노센티아!”

“……!”

대마법진 이노센티아에 힘이 묶인 루시는 숨을 헐떡이며 그 자리에 주저앉았고, 주저앉은 그녀를 향해 잔혹한 마법들이 조준되기 시작했다.

“!!”

루시푸르네는 이를 악물며 눈을 질끈 감았다.

몸이 무겁고 힘이 하나도 나지 않았다.

‘다…… 내 잘못이야. 내가, 내가……!’

후회와 절망, 죄책감, 자기혐오가 밀려왔고, 두 눈에서 눈물이 흐르다가 살얼음이 되어 부서졌다.

그녀는 눈을 질끈 감고서 곧 다가올 고통에 대비했다.

“……?”

하지만 고통은 오지 않았다.

서거거걱, 서걱.

오히려 사람을 베는 소리.

“크아아악!”

“꺄아아악!”

마법사, 마녀의 비명 소리가 들렸다.

“하, 그래! 이렇게 쉽게 끝나면 재미가 없지.”

이어서 아리아의 감탄 어린 목소리도 들렸다.

“…….”

루시푸르네는 눈을 떴고. 그녀의 푸른 사파이어 눈동자에 한 남자의 등이 비쳤다.

“……로안?”

절망과 체념으로 가득 찼던 루시의 가슴속에 한줄기 광휘가 내려왔고.

“아아…… 아아아!!”

나는 도대체…… 그동안…… 무슨 짓을……!

동시에 감동과 후회, 죄책감이 거대한 파도가 되어 그녀를 덮쳤다.

큰 부상을 입고 누워 있던 방랑 기사는, 여왕이 위기에 처하자 침대를 박차고 달려 나왔다.

실제로 그는 제대로 된 갑옷도 입지 않은 상태, 환자복에 가까운 솜으로 된 셔츠와 바지만을 입은 상태였다.

바람에 휘날리는 옷 사이사이로 보이는 팔과 복부에는 여전히 붕대가 감겨 있었고, 그의 손에는 오다가 주운 것 같은 검 한 자루만이 쥐어져 있을 뿐이다.

금발의 방랑 기사는 그 검 한 자루로 압도적인 학살을 시작했다.

“뭐 해?! 저주를 걸어!”

“기사도 같이 데리고 왔어야 했어……!”

“빨라, 너무 빨라! 못 맞추겠어!”

검의 궤적과 함께 붉은 혈향이 피었다.

“…….”

루시는 멍하니 자신을 구하러 와 준 기사의 검무를 보았다.

빠르고 깨끗하다. 소름 끼치도록.

부상에서 깨어난 로안 샬루트는 전보다 훨씬 강해진 것 같다.

지금의 그라면 암흑대공 정도는 쉽게 이길 수 있지 않을까?

그는 눈부신 용력으로 여왕을 공격하던 습격자들을 척살했다.

“그래, 이 암살까지 성공하면 너무 쉬워서 재미가 없었을 거야!”

암살이 실패했지만 재상은 개의치 않아 보였다. 확신했기 때문이다. 이미 모든 것이 압도적으로 기울었다. 아무리 설원의 대마녀라도, 설령 뒤늦은 각성을 한다고 해도 이건 역전할 수 없다.

“그러나 이미 늦었다! 루한을 수호하던 설원의 가호는 이제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약해졌으니까! 깔깔깔깔깔깔!”

아리아 데스모는 깔깔 웃으며 도망쳤다.

그렇게 로안이 개입하고 5분도 지나지 않아 모든 것이 끝났다.

왕궁은 조용해졌고, 바닥에는 얼어붙은 피와 살 조각만이 고요히 뒹굴었다.

왕궁 지하에서 그녀를 옥죄던 대마법진 이노센티아 또한 얼마 안 가 사그라들었다.

“폐하, 괜찮으십니까?”

루시를 향한 암살 시도를 막은, 몸 곳곳에 붕대를 감은 금발 금안의 기사가 그녀에게 다가왔다.

놀랍게도 그는 여왕과 불과 5미터 떨어진 거리까지 다가와 말을 건넸다.

“……어떻게?”

그녀는 로안의 눈을 차마 마주하지 못했다. 죄책감과 혼란에 고개를 숙이곤 흔들리는 동공을 애써 감출 뿐이다.

“죽을 고비를 넘기다가 깨달음을 얻은 것 같습니다. 그래서 좀 더 강해졌고요. 덕분에…… 이렇게 당신을 가까이에서 뵐 수 있게 되었군요.”

“로안, 나는…… 나는 그대를…….”

여왕은 말을 잇지 못했다. 감정이 터질 것 같았고, 혼란스러워서 제대로 된 언어조차 구사하기 힘들었다.

‘도대체 왜?’

나는 그대에게 너무나 몹쓸 짓을 많이 했는데…….

도대체 왜!

혼란스러울 뿐이다.

뒤이어 불어오는 복잡한 감정들,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죄책감과 후회, 심장 깊숙한 곳에서부터 밀려오는 울컥하는 감정.

눈물이 나온다. 그 눈물은 몇 방울 떨어지지 못하고 고결한 눈꽃이 되어 날아갔다.

베네사와 하이마의 죽음을 끝으로 이제 순백궁에 남아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모두가 이 나라에 희망이 없음을 깨닫고 순백궁을 떠났다. 왕도 윈테라를 떠났다.

“…….”

“…….”

공허한 왕궁. 두 사람 사이에 적막이 잠시 흘렀다.

“……폐하.”

무거운 적막 속에서 로안이 입을 열었다.

그의 목소리가 들리자, 루시는 잘못을 저지르다 걸린 아이처럼 화들짝 놀라 어깨를 떤다.

죄인이라도 된 것처럼, 앞에서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이고, 눈도 못 마주치는 여왕을 보며 로안은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폐하, 이제야 밝히지만 제 본명은 로안 샬루트가 아닙니다. 제 본명은 솔라시우스 디 미테일 룬 마하. 폐하 못지않게 악황후와 악황제를 증오하는 몰락한 옛 제국의 1황자입니다.”

로안 샬루트, 아니, 이제는 솔라시우스가 된 광휘의 기사는 지금까지 숨겨 온 자신의 정체를 밝혔다.

“!!”

루시가 숙였던 고개를 번쩍 들어 저 앞의 남자를 바라본다.

“정체를 숨긴 이유는 제국의 감시를 최대한 피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저의 존재로 인해 다른 사람이 피해를 보지 않았으면 했습니다.”

그녀를 바라보는 솔라시우스의 금색 눈동자에는 루시와 비슷한 후회가 있었다.

“하지만 제국은 제 정체를 이미 알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더 이상 숨길 필요 없을 거 같아…… 이제야 제 본명을 말합니다. 참고로 로안 샬루트라는 이름은 엘프들이 지어 준 고대 요정어입니다. ‘따듯한 송풍’이라는 뜻이죠.”

솔라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결국, 우린 쉬운 길을 놔두고서 힘들게 빙빙 돌았던 것입니다. 이 쉬운 길을 놔두고서.”

그는 품속의 반쪽짜리 로사리오를 만지작거리며 한탄을 담아 말했다.

“……왜 나를 떠나지 않은 거지?”

솔라시우스의 고백을 들은 루시푸르네는 힘없이 물었다.

이미 모든 것이 뒤틀렸다. 너무 늦었다. 희망은 없다. 그럼에도 눈앞의 방랑 기사는 여왕을 떠나지 않았다.

“늘 고독하게 홀로 앉아 있는 당신을…… 저는 외면할 수 없었습니다.”

“……나를 동정하는 건가?”

“예, 동정합니다. 세상에서 가장 가련한 여왕이시여,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나의 여왕이시여.”

그 말을 끝으로 솔라시우스는 발을 움직였다.

저벅, 저벅, 저벅.

5미터, 4미터, 그리고 3미터.

“!!”

루시푸르네의 두 눈이 경악으로 크게 떠졌다.

3미터의 거리.

솔라시우스는 그녀에게 역사상 가장 가까이 섰다. 오랫동안 있으면서도 괴로워하지 않았다.

“안타깝게도 여기가 한계인 듯싶습니다. 좀 더 가까이 가고 싶었는데…….”

“……!”

여왕은 입을 작게 벌렸다. 설원의 저주에 걸린 이후, 이렇게 가까이서 사람을 보는 것은 처음이었다.

“…….”

솔라시우스 또한 이토록 가까이에서 여왕을 보는 것은 처음이었다.

푸른 은발에 사파이어가 떠오르는 푸른 눈동자. 어떤 화가나 조각가도 감히 모방조차 하기 힘든 고결하고 아름다운 얼굴. 너무나 가녀려 안아 주고 싶은 체구.

처음 그녀를 알현했을 때 느꼈던 것과 비슷한 감정을 느꼈다.

첫눈에 운명임을 직감했던 그 느낌.

-루시, 루시를 부탁해요.

그리고 반드시 지키기로 한 기사의 맹세.

“폐하께서 저를 오해하고 저의 진심을 몰라 줘도 상관없습니다.”

솔라는 무릎을 꿇고는 주저앉아 있는 그녀와 눈높이를 맞췄다.

“당신 곁에 남을 수 있다면, 곁에서 미움이라도 받을 수 있다면, 그걸로 족합니다.”

“왜…… 왜, 나 같은 암군을 위해 이렇게까지 하는 것이냐!”

여왕은 눈앞의 미련한 기사에게 울부짖으며 물었다.

“나는 너에게 너무나 못된 짓을 많이 했다. 재상의 이간질이 있었다 해도! 이를 분별하지 못한 것은 엄연한 나의 과오다.”

스스로에 대한 분노, 후회, 혐오가 가득 담긴 눈물이 흘렀다.

“나는 그대에게 동정받을 자격도 없어. 도대체 이딴 나를 왜……?”

이런 자신을 끝까지 보좌해 주는 마지막 기사, 솔라시우스를 향한 미안함과 후회가 눈물에 담겨 흘렀고, 눈꽃이 되어 바닥에 떨어졌다.

“그야…….”

여왕의 울부짖음에 솔라는 슬프면서도 개운한 표정으로 고개를 숙였다.

왜일까?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져 본다.

단순히 예나체리나가 죽으면서 부탁한 기사의 맹세 때문일까?

아니, 근본적인 이유는 따로 있었다.

‘……당신을 사랑하니까.’

하지만 이 말은 입 밖으로 낼 수 없다.

스스로도 이해 못 하는 감정이다. 말해 봤자 그녀도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믿지 않을 것이고 더 혼란스러워하겠지.

‘저주에 갇힌 당신을 구해 주고 싶었으니까. 지켜 주고 싶었으니까. 조금이라도 가까이서 오랫동안 함께 있고 싶었으니까.’

외롭고 힘들 때마다 수차례 포기하고 싶었다.

하지만 자신이 떠나고, 차갑고 넓은 왕궁에 홀로 남겨질 그녀를 생각하면 도저히 떠날 수가 없었다.

가망이 없다고 해도, 이미 늦었다 해도. 상관없다.

그녀 곁에만 남을 수 있다면 다 좋았다. 그녀에게 죽임을 당해도 좋았고, 그녀를 지키다 죽는다면 더할 나위 없을 것 같았다.

이것이 태광휘가 플레이했던. 게임 속 솔라시우스의 진심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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