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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여왕의 EX급 방랑기사-139화 (139/212)

제139화

#139.

솔라시우스는 자신의 진심을 말이 아닌 눈빛으로 전했다.

솔라시우스의 황금 눈동자와 루시푸르네의 푸른 눈동자가 마주쳤다.

그의 진심 어린 눈빛.

‘……!’

루시는 알 수 없는 감정을 느끼며 또다시 눈가에서 흰 꽃을 떨궜다.

가슴속이 간지러웠고, 얼굴이 뜨거웠으며, 이상하게 기뻤다.

“나의 여왕이시여!”

솔라시우스는 그런 루시를 향해 외쳤다.

“제가 당신을 딱하게 여길 수 있도록 허락해 주소서. 당신의 저주와 고독을 같이 짊어질 수 있게 해 주소서.”

“……!”

분명 동정받고 있음에도 이상하게 기뻤다. 긴 세월 동안 홀로 감당하던 외로움을 이제야 위로받는 느낌이 들었다.

여전히 가슴속 한구석에 의문이 남아 있긴 하다. 나는 끔찍한 저주를 품은 몸인데! 심지어 그에게 그토록 나쁜 짓을 했는데! 이딴 나를 위해 목숨을 건다고? 도대체…… 왜?

하지만 그런 혼란과 의문만으로 눈앞의 남자를 거부할 용기는…….

지금의 그녀에겐 존재하지 않았다.

“……!”

루시푸르네는 떨리는 눈동자로 자신을 바라보는 황금 눈동자를 응시했다.

저 순수하고 흔들림 없는 황금빛 눈동자에 가슴이 아렸다.

‘왜 이제야 알게 된 것일까?’

사과하고 싶었다. 용서는 바라지도 않는다. 그저 속죄라도 하고 싶었다. 하지만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긴 시간 동안 입에 담지 못할 짓을 무수히 했다. 고작 사과 한마디로 속죄하기엔 그녀의 과오는 너무도 컸다.

“……내 곁에 오래 있으면 힘들 거다. 어서 가서 쉬거라. 상으로 왕실 보고를 출입할 수 있는 권한을 주겠다. 그곳에서 필요한 게 있으면 마음껏 가져다 써라.”

입을 열면서도 후회했다. 무릎 꿇고 사과를 해도 모자랄 판에 이딴 소리나 하다니. 자기혐오가 늪처럼 올라왔다.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하지만 눈앞의 기사는 바보 천치처럼 맑게 웃을 뿐이다.

혹여나 그에게 다른 의도가 있더라도. 루시는 웃으면서 받아들이기로 결심했다.

솔라시우스에게 자신의 모든 것을, 심장과 피, 영혼을 눈앞의 남자에게 바치기로 맹세했다.

그걸로 일부나마 속죄를 할 수 있다면, 기꺼이.

둘은 그날을 기점으로 급격히 가까워졌다. 매일매일, 하루 종일, 비록 3미터 거리를 뒀지만 함께 이야기를 나눴고 미래를 논했다.

처음 루시는 미안함과 부끄러움에 소극적이었다. 그런 그녀를 솔라는 매일매일 알현했고, 종일 곁에 있었다. 솔라는 여왕에게 일방적으로 이야기를 건넸고, 여왕은 조용히 그의 이야기를 경청했다.

어릴 적 설원의 계승을 실패하고 설원의 저주에 걸린 이후로, 처음으로 누군가와 이렇게 가까이서 온종일 대화를 나누게 된 것이다.

솔라시우스는 여왕에게 다양한 이야기를 해 줬다.

자신이 지금까지 어떻게 살아왔는지를 이야기해 줬다. 그녀가 내린 다섯 가지 시련을 어떻게 해결했는지도 이야기해 줬다. 철 지난 바깥소식도 얘기해 줬다.

고독한 설원의 여왕은 외로움과 고독을 잊었다.

감동과 설렘이 햇볕처럼 그녀의 마음에 뿌려졌고, 얼음덩어리 같았던 여왕의 심장에 서서히 사랑이 싹트기 시작했다.

과오에 의한 죄책감으로 그에게 사랑한다는 말을 감히 할 수 없었지만, 너무도 늦게 알아차린 진실에 마음은 늘 안타까움과 후회로 범벅되었지만.

그럼에도 여왕 루시푸르네는 행복했다.

나 따위가 이런 행복감을 느낀다는 것이 미안하고 부끄러웠지만, 그녀는 서서히 다가오는 마지막을 대비하며 솔라시우스와 함께했다.

얼마 후, 악황제는 마왕이 되었고, 마왕의 각성과 동시에 암흑제국의 군대가 루한을 침공했다.

거짓의 대마녀 옥타나의 오랜 수작으로 약해질 대로 약해진 설원의 가호는 더 이상 루한을 지켜 주지 못했다.

어둠의 군대는 루한의 변경백을 넘어 수도 윈테라를 범했고, 마침내 순백궁까지 침입했다.

루시와 솔라는 마지막에 마지막까지 함께했다.

함께 암흑제국의 군대를 막아 냈고, 함께 마왕의 검에 대항했다.

하지만 너무 늦었다. 설원의 가호가 없는 루한은 대륙을 통일한 암흑제국의 거대함에 압사당할 뿐.

깨달음을 얻었다는 솔라시우스도 각성한 마왕 앞에선 무력했다.

퍼억, 퍽, 카앙, 챙그랑.

그는 마왕과 일대일 승부를 벌였고, 10여 분의 혈투 끝에 피를 흘리며 바닥에 쓰러졌다.

“허억…… 커억……!”

그를 상징하는 빛과 열, 바람은 마왕의 어둠에 허무하게 먹힐 뿐이다.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

솔라는 흐려지는 의식에 몸과 영혼을 맡기며 생각했다.

주마등이 흘렀고, 요정 숲을 나와 처음 루한 땅을 밟았을 때가 유독 길게 보였다.

‘그때 무리를 해서라도 토벌대에 자원했어야 했어…….’

제일 후회되는 순간이라서 그런 걸지도 모른다.

‘그때 토벌대에 참여했다면…… 어쩌면 루나를…….’

여왕을 빨리 알현하고 싶다는 조급함과, 도적들과의 싸움으로 지쳐 망설였던 것이 너무 큰 어긋남을 만들었다.

‘만약 신께서 나를 굽어살피신다면…… 다시 한번 기회를! 못난 내가 아닌, 나보다 훨씬 뛰어난 존재를 통해 이 세상과 그녀에게 구원을…… 주시길…….’

죽음에 영혼을 맡기며 솔라는 진심으로 바라고 기도했다.

깊은 후회와 아쉬움, 남겨진 여왕에 대한 걱정이 최후의 사념을 남겼다.

“안 돼!! 솔라, 솔라시우스!!”

제일 먼저 솔라시우스가 마왕의 검에 죽자, 이를 지켜보는 여왕 루시푸르네는 비명을 질렀다.

“아아아악! 솔라아아아!!”

두 눈을 감고 창백한 얼굴로 바닥에 쓰러진 솔라시우스를 여왕은 애타게 불렀다.

제국 흑마법사들이 펼친 각종 족쇄가 그녀가 품은 설원의 저주마저 약화시켰고, 그녀는 족쇄에 묶인 몸으로 엉금엉금 솔라에게 기어갔다.

“솔라시우스……! 내 사랑, 내 모든 것!”

마지막에야 여왕은 솔라시우스를 안을 수 있었다.

“미안해……. 미안해……. 미안해…….”

그녀는 미친 사람처럼 솔라의 머리를 안고서 흐느끼며 중얼거렸다.

푸욱!

뒤이어 마왕의 검이 여왕의 심장을 꿰뚫었다.

* * *

루시푸르네는 밤새 솔라를 간호했다.

정확히는 살짝 폭주 중인 별의 저주를 관리했다.

그렇게 두 사람은 때론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면서, 때론 아늑한 적막을 나누면서 밤을 보냈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루시푸르네는 자신도 모르게 잠들었다.

시원함이 가득한 침실에서, 여왕은 누군가 자신의 머리를 쓰다듬고 있다는 것을 느끼며 잠에서 깨어났다.

“?!”

그리고 자신의 머리를 쓰다듬고 있는 남자를 멍하니 보았다.

그의 황금색 눈동자와 눈이 마주쳤다.

그러자 머리를 쓰다듬던 솔라의 손이 급히 멈추더니 쑥 내려간다. 시선 또한 창밖으로 급히 돌아간다.

잠깐 존 것 같았는데 꽤 깊고 긴 꿈을 꿨다.

회귀 전 마지막에 있었던 일들을 꿈으로 꾸었다.

행복했던 기억도 조금이지만 있었다. 하지만 대부분은 끔찍하고 후회만 가득한 기억뿐이다.

회귀했다는 것을 확신한 이후에도 루시푸르네는 종종 몰려오는 각양각색의 감정에 전율해야 했다.

안도, 후회, 미안함, 애틋함 등등…….

그럴 때마다 루시는 어깨를 들썩이며 오들오들 떨었다.

추위 따윈 느끼지 못하는 몸인데도 소름이 돋았다.

만약 지금처럼 솔라가 옆에 없었다면, 여느 때처럼 그녀는 몸을 부르르 떨었을 것이다. 살얼음의 식은땀을 흘렸을 것이다. 어쩌면 홀로 소리 죽여 울고 있겠지.

‘정말 끔찍하게도 못돼 먹었지’

여왕은 사랑을 담은 눈으로 애써 창밖에 시선을 고정 중인 남자를 바라보았다.

‘그때의 내가 저주스러울 정도로 멍청하고 어리석고 바보 같아서.’

얼마나 후회했는지 모른다.

현재의 그녀가 과거의 루시를 본다면 뺨을 아주 크게 때려 줬을 것이다. 어쩌면 죽였을지도 모른다. 죽이고서 자신이 그 역할 대신 했겠지.

‘솔라, 솔라시우스. 나의 기사. 그리고…… 나의 사랑.’

마지막까지 자신을 지켜 줬던 남자, 누구보다 자신을 챙겨 줬던 남자.

그 마음을 너무도 늦게 알았었다.

알아챘을 땐 이미 모든 게 늦었다.

‘하지만 이번엔 달라.’

사랑에 깊게 빠진 여인의 눈에 지키고자 하는 열망이 번졌다.

회귀 전이나 지금이나, 변함없이 자신을 위해 희생하는 솔라시우스.

그런 그를 볼 때마다 루시는 미칠 것 같았다. 미안해서 미칠 것 같았고, 후회돼서 미칠 것 같았고, 그런 그를 너무 사랑해서 미칠 것 같았다.

‘이번엔 내가 증명하겠다. 솔라, 그대를 향한 나의 마음을!’

루한의 여왕, 설원의 대마녀 루시푸르네는 결심했다.

솔라시우스는 애써 창밖으로 시선을 두면서 속으로 당황했다.

‘내가 왜……?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고 있던 거지?’

잠시 회복하면서, 무의식적으로 루시의 꿈과 기억을 공유했던 것 같았다.

그녀가 자신에게 호감이 있다는 사실은 알았지만, 이 정도로 자신을 사랑하는 줄은 몰랐다.

‘나는 어떻지?’

회귀 전 그녀의 모습은 정말이지 짜증 그 자체였다. 적어도 게임 속 솔라시우스를 플레이하던 태광휘는 그렇게 여겼다.

‘하지만 지금은?’

후회와 속죄 그리고 사랑으로 가득 찬 눈앞의 여인은 아름다웠다.

두근, 두근, 두근.

이어서 가슴이 뛰었다.

‘이건 솔라시우스의 감정인가?’

이질적인 간지러움이 가슴속 깊은 곳에서 느껴진다. 아마도 그와 합쳐진 또 다른 이세계의 나, 솔라시우스의 감정 같았다.

방금 그녀의 머리를 무의식적으로 쓰다듬었던 것도, 이상하게 그녀가 밉지 않았던 것도, 오히려 그녀에게 점점 애정이라는 감정을 가지게 되는 것도.

태광휘와 합쳐진 또 다른 나, 솔라시우스의 영혼과 기억, 감정 때문일 것이다.

-루시, 루시를 부탁해요.

이어서 예나체리나의 환청이 들린다.

루시와 대면 후, 한동안 들리지 않았던 예나의 목소리가 머릿속을 울린다.

‘당신의 부탁대로 행했어. 거의 끝나 가고 있지.’

솔라는 속으로 말했다.

‘하지만…… 쭉 같이 있어 줄 순 없어.’

머릿속 예나의 목소리와 대화를 나눴고, 어느새 명상에 임했다.

태광휘는 오랜만에 자신의 심상을 관조했다.

건조하고 차갑고 어두운 심연.

‘?!’

그 심연 속에서 태광휘는 푸른색 새싹 하나를 보았다.

지구에서 처음이자 마지막 사랑을 잃은 후 처음으로 발견한 빛이었다.

‘!!’

놀란 그가 푸른 새싹을 잡으려 손을 뻗었지만, 푸른색 새싹은 급히 어둠 속으로 숨어 버렸다.

* * *

다음 날, 솔라는 털고 일어났다.

여왕의 간호 덕분인지, 아니면 로뮤가 행한 의술 때문인지는 모르지만 경사는 경사인 법.

루한을 넘어서, 이제는 대륙의 용사이자 희망인 솔라의 쾌유 소식은 그가 마왕과의 일전으로 쓰러졌다는 소식보다 더 빨리 퍼졌다.

그래서 몇몇 사람들은 광휘의 기사가 쾌유했는데, 마왕과의 싸움에서 부상을 입고 쓰러졌다는 순으로 소식을 접해야 했다.

하지만 그 소식을 들은 사람들은 놀라거나 웅성거리지 않았다.

이보다 더 충격적인 소식이 먼저 세상을 강타했기 때문이다.

“제국의 황도가 땅으로 꺼졌다고?!”

“악황제가 황도를 제물로 바쳐서 마왕이 되었다고 하는데…….”

“믿어지지 않는군…….”

“하지만 제도로 상행을 갔던 상인들이 한둘이 아니네. 그들 모두가 똑같은 증언을 하고 있어!”

암흑제국의 수도가 하루아침에 사라졌다는 소문은 폐쇄적인 제국을 넘어 대륙 변두리까지 널리 퍼졌다.

후드를 깊게 쓰고, 로브 형태의 망토를 이불 삼아 두르고, 여관에 앉아 있던 유리아와 시몬은 자연스레 들리는 사람들의 대화에 집중했다.

들리는 소문 중에는 최근 루한에서 일어난, 솔라시우스와 마왕의 일전도 있었다.

유리아와 시몬은 그것도 신경 쓰였지만, 아무리 신경 쓰인다고 해도 제국의 수도가 날아간 것과 비교하면 스케일이 달랐다.

어찌 되었든 솔라시우스는 여왕의 지극한 간호로 쾌차했다.

반면, 하루아침에 지상에서 사라진 제국 황도는 현재진행형이다.

“황도의 사람들은 그럼…….”

“먹혔을 겁니다. 악황제에게.”

“…….”

시몬의 대답에 유리아가 믿어지지 않는다는 듯 소리 없는 탄식을 뱉는다.

“우리는…… 괜찮을까요, 시몬?”

뒤이어 유리아가 두려움과 걱정이 뒤섞인 눈으로 시몬을 보았다.

“만약을 위해 대비를 해 놓긴 했습니다.”

시몬은 고개를 끄덕이며 유리아를 안심시켰다.

“마법 사용은 최대한 자제해야 되지만 여차하면…….”

끼이이이익.

유독 불길하게 들리는 경첩 소리에 시몬의 말이 끊겼다.

“……여차하면…….”

저벅, 저벅, 저벅.

다시 말을 이으려 했지만, 불길한 경첩 소리를 내며 여관으로 들어온 한 남자의 모습에, 시몬은 문장을 끝내 완성하지 못했다.

남자는 여느 여행자와 똑같은 후드가 달린 망토를 쓰고 있었는데 기이할 정도로 깨끗했다.

체격은 여성이 아닌가 싶을 정도로 호리호리했다.

번쩍.

깊게 눌러쓴 후드 속에서 백금색의 탁한 눈동자가 서늘하게 빛났다.

“……도망쳐!”

시몬의 눈이 크게 떠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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