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42화
#142.
마계의 문이 열리든, 마왕이 폭주하든, 중요한 것은 단 하나!
마왕이 제정신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오직 지금이 기회다.
“유리아, 지금입니다!”
시몬은 유리아의 손목을 잡고 외쳤다.
“하지만……!”
시몬의 생각을 공유한 유리아가 움직이지 않는다.
그녀의 시선이 순백궁 하늘 위에 떠 있는 마계의 문을 향했다.
왕도의 사람들은? 루한은? 무엇보다 여왕님과 로안 경은?!
마음속 배덕감이 차오른다.
“아까 힘을 빼앗기면서 느끼셨잖습니까? 우린…… 없는 게 도와주는 겁니다.”
이에, 시몬이 비참한 심경으로 말했다.
“…….”
감정을 공유 중인 유리아는 고개를 떨궜다.
“시몬의 말이 맞아. 어서 도망치도록.”
유리아와 시몬의 위로 그림자가 드리웠다.
그림자를 드리운 남자의 목소리가 떨궈진 유리아의 고개를 번쩍 들게 했다.
“로…… 로안……! 아니, 솔라시우스 전하……?”
요동치는 분홍색 눈동자, 시리도록 저린 심장을 참으며 유리아는 남자의 이름을 불렀다.
“여기서부턴 우리에게 맡겨.”
수고했다.
솔라시우스는 그녀를 내려다보며 짧은 격려를 전했다.
그리고 유리아와 시몬을 지나쳐 폭주 중인 마왕을 향해 걸어간다.
“…….”
자신을 지나친 솔라시우스의 뒷모습을 멍하니 보던 유리아는 들었던 고개를 푹 숙였다.
끝끝내 도움은커녕 일감만 준 것 같자, 스스로가 너무 비참했다.
“유리아…… 꽉 잡으세요. 다시 한번 아공간으로 이동하겠습니다.”
그런 비참함을 알면서도, 시몬은 유리아의 손을 꼭 붙잡고서 묵묵히 해야 할 일을 했고, 유리아는 밑바닥 친 자존감 때문인지 힘없이 시몬을 따랐다.
다시 한번 공간 도약을 준비하는 시몬은 속으로 매우 불안했다.
‘성공 확률이 낮아.’
하나, 둘, 셋, 넷…… 셀 수 없이 많은 균열이 폭주하는 마왕을 중심으로 생성 중이다.
시공간이 흔들리고 있다. 차원의 대기가 상위 차원의 마나와 얽혀 요동친다.
무엇보다 언제부턴지 모르겠지만, 이 폐허 주위로 고차원의 결계가 펼쳐져 있었다.
‘하지만 여기에 계속 있어 봤자 방해만 돼.’
그러나 다른 방법이 없다.
결계 밖으로 뛸 체력도 없다.
설원의 가호 중심부라서 몸도 무겁고 숨 쉬기도 힘들다.
‘부디 무사히 도착하길!’
시몬은 진심으로 기도하면서 유리아와 함께 아공간으로 도약했다.
시몬과 유리아, 두 사람이 사라졌고, 폐허가 된 왕궁에는 이제 솔라와 마왕만이 서 있을 뿐이다.
“진짜 여기로 올 줄이야. 왜 여기로 온 거지?”
대답을 해 주지 않을 줄 알면서도 솔라는 폭주 중인 세피로스를 향해 물었다.
세피로스의 몸에서는 거대한 마기가 태풍처럼 몰아쳤고, 사방에 열린 게이트에서는 마계의 괴물들이 하나둘씩 나오고 있었다.
[키키키키킥! 모든 세계선에서! 나는 이곳에서, 천계가 뿌린 안배의 씨앗, 설원의 여왕을 죽였다! 그랬기에 이곳은 상징적인, 의미가, 있는, 거지.]
기대하지도 않았건만, 마왕은 불완전하게나마 대답을 해 줬다.
[그나저나 머리를 썼군? 늦게 온 이유가, 이 때문인가?]
세피로스는 폭주를 진정시키며 솔라에게 물었다.
무너진 왕궁, 아직 잔해도 다 치우지 못한 순백궁의 폐허는 조용하다.
왕궁뿐만 아니라 왕도 전체가 조용하다.
결계다. 그것도 고차원의.
“지구에서, 제도에서 저지른 짓을 여기서도 하면 안 되니까.”
저 결계를 펼친 주인은 안 봐도 뻔하다.
[크흐흐흐흐, 나를 너무 잘 아는군?]
세피로스는 아직 폭주의 여운이 짙게 남은 눈으로 주위를 보았다.
솔라시우스 뒤쪽, 이 결계를 펼치고 있는 세 사람이 보였다.
청은발의 여왕과 금발의 마녀, 흑발의 하이엘프가 결계를 발동 중이다.
‘별의 아이는 어딨지?’
그의 눈이 여전히 보이지 않는 누군가를 찾았다.
“쥴리아를 찾나?”
세피로스의 눈알 굴러가는 것을 본 솔라가 차갑게 물었다.
화아아아앗.
이윽고 그의 등 뒤에서 불과 빛으로 이뤄진 한 쌍의 날개가 불쑥 펼쳐졌다.
[오! 아스트라! 나는 네가 지구에서 소멸한 줄 알았다! 그런데 이런 곳에서 인간으로 환생했다니!]
솔라의 등에 있는 쥴리아를 본 세피로스가 반갑게 아는 척을 한다. 마치 오래전부터 쥴리아를 알고 있었다는 듯.
[…….]
이에, 쥴리아는 말이 없었다. 기억은 나지 않는다. 다만 마왕을 볼 때마다 증오라는 감정이 발화된다.
쥴리아의 감정을 공유라도 하듯, 솔라는 세피로스를 보면서 마찬가지로 증오를 펼쳤다.
“드디어 무르익었군.”
증오와 함께 결전의 때가 되었음을 느꼈다.
황도에서의 만행에 이어, 방금 시몬과 유리아의 힘을 절반 정도 흡수한 것까지.
눈앞의 마왕의 화신은 이제, 마계의 마왕 그 자체라고 봐도 과언이 아니다.
파아아앗.
솔라의 몸에서 광휘가 몰아쳤고, 그의 몸이 빛의 갑옷에 감싸인다.
등에는 여전히 쥴리아의 날개가 펄럭이고, 양손에 윈테이라와 제노사이드를 들었다.
손가락에는 미리 루시로부터 건네받은 두 개의 태양샘 반지가 빛났다.
[지금의 너를 없앤다면, 마계에 있는 본체에도 타격이 크겠지.]
적어도 한동안은 온 차원이 평화롭겠지.
[그게 쉬울까?]
그 말을 들은 세피로스가 비릿하게 비웃는다.
쿠와아아아악!
그가 폭주하면서 생성한 게이트로 어느덧 무수한 마계의 군대가 쏟아져 나온다.
고오오오오오!
마왕을 중심으로 군단이 달려든다. 뒤이어 마왕도 날개를 펄럭이며 솔라시우스를 향해 돌진한다.
“오라버니!”
“로안.”
“솔라시우스!”
빛의 화신으로 변한 솔라시우스 주위로 루나와 로뮤 그리고 루시가 가까이 섰다.
이 세상의 운명을 결정 지을 결전.
[그래, 와라.]
태광휘는 검은 해일을 노려보았다.
* * *
요정 숲, 황금빛 세계수 아래서.
휘이이이이.
요정들의 여왕 리리아는 갑작스레 불어오는 송풍에 감았던 눈을 떴다.
바람은 따듯했고 은은했다.
“로안 샬루트.”
부드럽게 뜬 눈과 함께 리리아의 입이 열렸다.
로안 샬루트, 고대 요정어로 따듯한 송풍.
“때가 되었구나.”
그녀 얼굴에 반가움과 아쉬움이 교차하는 미소가 피었다가 졌다.
* * *
사람에겐 각각 주어진 일이 있다.
능력에 따라 위치에 따라 권리와 의무가 나뉜다.
루한의 섭정 루카스는 자신에게 주어진 일을 하면서도 시선은 종종 무너진 순백궁 쪽으로 향했다.
‘부디…….’
순백궁은 반투명한 돔으로 덮여 있었다. 여왕과 1황녀, 하이엘프가 펼친 고차원 결계를 상징하는 막이다.
마음 같아선 그 또한 저 안으로 들어가 함께 싸우고 싶었다.
하지만 도움은커녕 방해만 될 것을 그는 누구보다 잘 알았다.
애초에 자신은 배틀 메이지도 아니다.
대신 왕도에 있는 백성들을 대피시키고 만약의 상황을 대비할 뿐이다.
‘부디 승리하시길, 이 세상에 광명을 펼쳐 주시길…….’
심란한 마음을 애써 다잡으며 루카스는 자신이 맡은 일에 집중했다.
“하이마 경! 이제 빈민가만 남았네. 병사들을 지원해 줄 테니 그곳으로 이동해 주게. 시녀장 베네사, 시녀들과 함께 다친 이들의 치료를 맡아 주시오. 미나스트림 전하, 제국 첩자가 있을 수도 있으니 저희 기사들과 함께 왕도 수색을 부탁드려도 되겠습니까?”
자신과 마찬가지로 주어진 일을 묵묵히 수행하는 동지들과 함께.
* * *
눈앞의 적은 순수 악의로만 이뤄진 덩어리.
존재 자체가 부정(不淨)인 존재들.
마왕과의 싸움은 지난번과 유사하면서도 다르다.
루나시르네는 음영술을 이용해 마계의 괴물들을 상대했다.
로뮤는 옆에서 그런 루나를 호위한다.
솔라시우스의 열사의 필드가, 루시푸르네의 설원의 폭풍이 이를 돕는다.
하지만 솔라와 루시의 신경은 거기에만 집중할 수 없다.
부정과 악의로 이뤄진 존재, 세피로스를 상대해야 한다.
숱한 격돌이 있었고, 어느덧 빛의 기운과 어둠의 기운의 대리전으로 싸움은 유지되고 있었다.
“솔라시우스!”
“로안!”
“오라버니!”
현황은 솔라시우스에게 압도적으로 불리하다.
빛의 기운이 어둠에 압사당할 것처럼 밀린다. 그가 펼친 광휘의 빛줄기는 간신히 동료들을 수호할 뿐이다.
완전한 각성을 이룬 마왕.
지구의 초상과학자들은 마계에 있는 마왕의 본신이나 무수한 차원에 있는 마왕의 화신이나 힘에는 큰 차이가 없을 거라고 했었다. 그저 권능의 차이만 있을 거라고 추정했었지.
확실한 개소리다. 권능이 곧 힘이거늘.
그래서 태광휘는 마왕을 더 지켜보자는 과학자들의 은밀한 요청을 무시했다. 놈이 완전한 각성을 하기 전에 태양검으로 소멸시켰지.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그게 잘했던 것인지 아닌지 헷갈린다.
처음 루한으로 소환됐을 때는 과학자들의 말대로 하지 않은 것을 후회했다. 권능을 좀 더 찾게 만든 후에 죽여서 본신에 타격을 줘야 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지금은 모르겠다.
[……!]
완전한 권능을 발휘하는 마왕의 힘에 태광휘는 할 말을 잃었다.
만약 저런 존재를 지구에서 상대했다면 과연 이길 수 있었을까?
[…….]
빛의 갑옷을 입은 솔라는 시선을 옆으로 돌렸다.
청은발의 여인이 온 힘을 다해 그를 돕고 있다.
그녀가 내뿜는 설원의 힘이 마왕의 기운을 그나마 둔화시킨다.
‘그때 그 힘은 못 내는 건가?’
하지만 충분치 않다.
-아직도 저주를 풀지 못한 거야?
-이미 알고 있잖아?
-그래, 그 저주를 해주하면 그녀는 진정한 설원의 대마녀가 될 거야.
마법 통신구로 들었던 리리아의 대답이 떠오른다.
얼마 전, 리리아에게 마왕이 어디로 올지 물어봤었다. 겸사겸사 저주의 해주 방법을 다시 한번 물었다. 루시가 품은 미지의 힘에 대해서도.
리리아는 아직도 모르냐는 투로 오히려 되물었었지.
너는 이미 답을 알고 있다고, 왜 망설이냐고 되물었었지.
그래, 이미 알고 있긴 하다.
참으로 동화 같은 방법.
어쩌면 서로가 품은 저주를 보자마자 본능적으로 직감했을 거다.
그저 망설이고 외면했을 뿐.
솔라의 눈에 루시가 담겼다. 그녀의 몸, 심장 쪽에 휘몰아치는 설원이.
그리고 오랜 망설임이 끝났다.
“루시푸르네.”
결심이 섰고, 행동은 순식간이다.
솔라는 빛의 갑옷, 태양의 후예를 해제했다.
그러자 어둠의 기운이 더욱 빠르게 파고든다.
그는 코앞까지 다가온 어둠의 기운을 무시하고는 루시를 반쯤 안았다.
“솔, 솔라시우스!”
갑작스러운 솔라시우스의 행동.
“아……!”
처음에 그녀는 당황했으나, 곧바로 이유를 알아챘다.
덥석.
솔라는 루시를 안았고, 루시는 눈을 감고서 입술을 내밀었다.
그 입술 위에 솔라의 입술이 포개진다.
“……!”
루시는 오랫동안 기다렸다는 듯 순순히 눈을 감고 그의 손길에 몸을 실었다.
입술이 맞물렸고, 벌려졌으며, 서로의 혀가 얽혀 들어간다.
침과 함께 둘의 체온이 섞였다.
슈우우욱.
솔라의 심장과 루시의 심장 속에 있던 에너지가 서로의 입속을 향해 빨려 들어갔다.
-!
차가움과 뜨거움, 플러스와 마이너스, 음과 양.
빛과 공허가 핵융합처럼 부딪치고 폭발한다.
두 사람을 구속하던 11차원의 저주가 순식간에 해제되었고.
알에서 새가 깨어나듯이.
-! --!! --!!
하나된 거대한 힘이 폭발했다.
루시푸르네를 구속했던 마지막 족쇄가 끊어졌고, 진정한 설원의 대마녀가 탄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