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44화
#144.
― 설원의 고독한 여왕이여, 볕이 너를 품을 것이다. ―
예로부터 우리 루한에는 아름답고 고귀한 여왕님이 계셨도다.
그분은 자애로웠으나 몸도 마음도 얼음이셨으니, 아무도 가까이하지 못했도다.
세상은 우리 임금을 설원의 마녀라 부르며 두려워했고, 그분은 늘 혼자였고 고독하셨도다.
그러던 어느 날, 외로운 우리 여왕을 따듯하게 안아 줄 수 있는 반려가 나타났으니, 오직 그분의 검, 태양 대공이시다.
세상에 단 한 명뿐인 얼음 여왕을 안을 수 있는 자.
백성들은 그를 루한의 국서라 칭송했도다.
* * *
회색으로 가득 찬 삭막한 도시. 서서히 하늘을 드리우는 붉은 노을이 도시의 황혼을 자극한다.
중간중간 이 삭막함을 희석하기 위해 원색의 간판과 촌스러운 현수막, 하늘의 별을 따 온 듯한 조명이 악을 쓴다.
예전에는 밝은 색으로 페인트칠한 건물, 건물 전체를 유리로 만든 빌딩도 많았다는데 지금은 옛말.
그날, 대전쟁 이후로 심심하면 부서지는 것이 건물이기에 사람들은 건물 외형에 큰 투자를 하지 않았다.
그 도시에서 유독 생기 없는 폐허 지대.
파츠측.
지금은 버려진 옛 외곽 골목에서 게이트를 뜻하는 스파크가 튀었다.
워낙 외진 곳이었기에 이를 목격할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과거에는 나라 전체를 거미줄처럼 수놓았다는 CCTV도 요즘 세상에는 부자 동네에만 있는 귀한 몸. 도시 외곽까지 영향력을 뻗치지 못했다.
파아앗!
허공에서 일어난 게이트의 균열은 작았고 은밀했다.
사람 하나가 간신히 통과할 크기. 도시 상공에 24시간 떠 있는 마력 측정 드론도 포착하지 못할 정도의 파동.
파아앗.
그러나 그 게이트 안에서 누군가가 나오자, 순간적으로 마력 폭풍이 휘몰아쳤다.
폭풍과 함께 인영이 모습을 드러냈다.
젊은 성인 여성의 실루엣. 실루엣만으로도 바로 알 수 있는 고결함과 아름다움. 허리에는 푸른색 마검을 찼고, 왼손 약지에는 붉은 보석이 박힌 반지 하나가 빛난다.
휘이이이.
휘날리는 청은발과 함께 차가운 강풍이 골목을 가득 채운다. 골목은 순식간에 설원으로 덮였다.
‘새언니, 명심하세요! 지금 차원 코어로는 이게 한계예요! 또 다른 차원 코어를, 솔라 오라버니가 있는 세계의 차원 코어를 꼭 구해야 해요!’
‘지구의 차원 코어, 그걸 최대한 빨리 구하셔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 세계와 로안의 세계가 안정적으로 이어질 수 있습니다. 세계수의 가호가 여왕님의 빈자리를 대신해 준다고 하더라도 아주 잠깐일 뿐입니다.’
청은발을 아름답게 휘날리며 눈을 옅게 감고 있는 여인의 머릿속으로 다양한 이들의 목소리가 회상처럼 들린다.
‘폐하, 설원의 가호는 아직 굳건합니다. 내정은 걱정 마시고 다녀오소서! 부디…… 무운을 빌겠사옵니다.’
떨어진 지 얼마 되지도 않았건만, 차원을 넘나든 거리라서 그런지 벌써 그리웠다.
골목을 채우던 혹한의 강풍이 어느 순간 사라졌다.
설원의 흔적이 짙었지만, 며칠 내로 녹을 것이다.
다만 걱정이 있다면 상공에 떠다니는 마력 감시 드론.
그러나 이제 막 지구로 온 루시푸르네는 하늘 위를 떠다니는 위성이나 드론에 대해 알 리가 만무했다.
“여기가…… 지구? 솔라의 고향…….”
그녀는 자신의 몸을 살폈다. 혹여 이상이 없는지 꼼꼼히 체크한다.
‘역시 새언니만 차원 이동을 견딜 수 있는 몸이네? 운명이야, 운명!’
‘최대한 빨리 지구의 차원 코어를 확보하십시오. 그래야 저희도 도움을 드릴 수 있습니다.’
‘폐하, 가실 때 가시더라도 딱 이것까지만 결재를……!’
여운처럼 귓가에 남아 있는 목소리들을 곱게 접는다. 몸은 멀쩡한 거 같다. 영혼과 심장에 똬리를 틀고 있는 설원의 권능도 처음 살짝 날뛰었을 뿐 지금은 잠잠하다.
루시는 냉장고 같은 골목을 나와 삭막한 회색 거리를 걸었다.
도심 쪽으로 걷다 보니 서서히 멀쩡한 건물들이 보인다. 꽤 높은 빌딩에는 드물지만 광고판도 있었다.
“……!”
지구라는 이세계의 경관은 그녀에게 신선함 그 자체였다.
아름다움과 거리는 멀었지만 거대한 빌딩과 도시의 규모, 무엇보다 루한의 인구 전체가 모인 것 같은 무수한 인파는 기가 질리게 만들었다.
거대한 도로에는 철판으로 만든 말 없는 마차가 쌩쌩 오갔고, 그 갓길로 이 세계의 주민들이 무표정하게 걷고 있었다.
루시는 눈치껏 주민들을 따라 행동했다. 멈출 때는 멈추고 다시 걸을 때는 걸었다. 중간중간 커다란 마차에 몸을 싣는 사람도 있었는데, 그것만큼은 따라 할까 하다가 관뒀다.
그렇게 멍하니 도시를 둘러보고 있는데,
“?!”
그녀의 눈을 버럭 뜨게 만드는 것이 보였다.
“솔…… 솔라!”
빌딩에 설치된 광고판에 미치도록 그리운 그이의 모습이 보였기 때문이다.
금발 금안의 잘생긴 남성의 상체가 선명하게 빛나고 있었고, 그 옆에는 지구의 문자가 한 문장씩 나오면서 뭐라 떠들고 있었다.
‘진정하자, 진정해……. 진짜처럼 움직이지만 생명력이 느껴지지 않아. 저건 아주 정교한 그림 같은 거야. 무슨 마법을 쓴 거지?’
당장이라도 저 빌딩 꼭대기로 날아오르려던 루시는 애써 이성을 되찾았다.
‘뭐라고 하는 거야?’
루시는 통역 마법을 캐스팅했다. 그제야 이 세계의 언어와 글자가 해석되기 시작한다.
-오늘도 3초에 한 명씩 게이트 난민이 발생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남의 일이 아닌, 어쩌면 나의 일.
-여러분의 작은 관심과 도움이 필요합니다.
-UN게이트난민구호회
“아아…… 솔라.”
광고판의 내용을 이해한 루시는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그이는 정의롭고 착하다.
‘나도 나중에 저 구휼에 참가해야겠어!’
‘금화와 보석도 받아 주겠지?’라고 생각하고는 그녀는 다시 관광 온 사람처럼 주위를 둘러보았다.
“음?!”
그런데, 통역 마법을 사용하기 전에는 잘 몰랐던 것들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야야, 저 여자 봐!”
“와 미친……. 존X 개쩐다!”
“외국인인가? 저런 셀럽이 있다는 소식은 처음 듣는데?”
“어디 유명 기획사에서 바이럴이라도 하나?”
처음에는 듣지 못했던 사람들의 목소리들이 해석되자, 저 웅성거림과 은근한 시선들이 전부 자신을 향한 것이었음을 인지하게 된 것이다.
“가서 말이라도 걸어 봐?”
“그러다가 죽으려고? 딱 봐도 각성자잖아!”
사방에서 그런 루시를 힐끔 보면서 쑥덕거린다. 남녀노소 할 것 없이 전부다.
‘내 복장이 특이한가?’
이 세계 주민들의 시선이 점점 쏠리는 것 같자, 루시는 자신과 행인들의 복장을 비교해 보았다.
현재 그녀는 여행용 부츠에 짙은 갈색 가죽 바지와 하얀 면 튜닉을 입었고 그 위에 검은색 가죽 코트를 입었다.
지구의 지식을 일부나마 알고 있는 리리아의 조언에 맞춰 주문 제작하여 입은 옷이었다.
자세히 보면 재질에서 차이가 나겠지만 그걸 제외하면 크게 튄다고 생각지는 않았다.
허리춤에 찬 윈테이라 때문일까, 라고 생각했지만 이 또한 아님을 알았다.
거리를 걷는 이들 중 자신처럼 검이나 스태프를 차고 있는 사람을 드물지만 보았기 때문이다.
즉, 아무리 생각해도 복장에는 문제가 없다.
‘내 얼굴이 그렇게 눈에 띄나?’
그렇다는 것은 남은 하나. 자신의 얼굴 때문이다.
‘딱히 유쾌하진 않군……. 솔라가 저렇게 봐 주는 거라면 모를까.’
태어나서 처음 느끼는 노골적인 관심이다. 루한에서는 그녀를 경외하고 찬양할 뿐이지, 저렇게 원초적인 눈으로 보지 않는다.
‘감히……!’
점점 더 과도해지는 시선에 루시는 불쾌함마저 느껴야 했다.
당장이라도 저 눈알을 모두 얼려 버리고 싶었다.
‘참자!’
그러나 그이의 세계에 손님으로 온 주제에 날뛸 수는 없는 노릇. 지구에서 솔라는 제국 황제에 근접하는 존재라 들었다. 그런 그의 반려로서 조신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바이다.
‘인지 저하 마도구를…….’
이 상황을 평화적으로 해결하기 위해, 루시는 아공간 인벤토리를 열려고 했다.
‘?!’
하지만 차원 이동의 영향 때문인지, 아공간 인벤토리가 열리지 않았다. 그녀의 얼굴이 굳어졌다.
찰칵, 찰칵.
이젠 하다 하다 사진까지 찍히는 중이다. 물론 루시는 저 소리와 플래시가 뭘 뜻하는지 몰랐다. 다만, 자신을 향해 무슨 수작을 부리는 것 같아 기분은 좋지 않았다.
‘어쩌지?’
매우 난감한 상황.
위이이이이잉.
때마침 그때 그런 루시를 구해 준 것이 있었으니, 바로 도시 전체를 갑자기 채운 사이렌 소리였다.
[국민 여러분께 안내 말씀드립니다. 현재 옛 도봉역 인근에서 거대한 마력 폭풍이 탐지되었습니다. 옛 도봉역 인근에 계신 분들은 지금 즉시 지정된 대피소로…….]
통역 마법으로 방송의 메시지가 그녀의 귀로 정확히 전달된다.
“마력 폭풍이면, 게이트?!”
“잠깐, 옛 도봉역이면 이 근처잖아!”
“어서 대피소로 도망쳐!”
눈앞의 눈부신 미녀가 있다고 해도 자기 목숨보단 안 중요한 법.
루시에게 쏠렸던 시선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마력 폭풍……? 게다가 저 방향은……!’
루시는 어리둥절한 얼굴로 마력 폭풍이 발생했다는 쪽을 보았다.
방금 그녀가 차원 문을 열고 설원의 폭풍과 함께 착지했던 쪽이다.
“…….”
이 소란의 원인이 바로 자신임을 확신한다.
얼마 후 다소 혼란스럽게 대피소를 찾는 시민들 앞으로 경찰들이 도착했다.
“다들 경찰의 안내에 따라 움직여 주시기 바랍니다! 싸울 수 있는 헌터님들은 옛 도봉역 쪽으로 지원 가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경찰이 안내를 시작하자 사람들은 놀라울 정도로 안정을 되찾았다.
“몬스터는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방금 인근 헌터들이 급히 출동하였으니 곧 닫힐 겁니다. 잠시 대피소에 피신해 있다가 생업에 복귀하면 됩니다.”
다들 이런 상황이 낯설지 않은지 침착하고 조용하다. 대부분 익숙하다는 듯한 표정으로 경찰의 지시에 질서정연하게 움직인다.
질서 있게 움직이는 행렬 사이에는 청은발의 여인도 있었다.
이럴 땐 피신하는 사람들과 함께 이동하는 것이 상책.
루시는 휘파람을 애써 불면서, 헌터들이 달려가는 방향과 정반대로 걸었다.
‘이제 뭐 하지?’
이동하면서 이후의 일에 대해 고민해 본다.
‘아공간 인벤토리가 고장난 게 가장 큰 문제야.’
가장 중요한 보급이 끊겼다. 어느 세계든 돈이 없으면 고달프다.
‘내가 솔라의 반려라는 말을 그 협회라는 곳에 하면 믿어 줄까?’
제일 먼저 이 세계의 기사회 역할을 한다는 세계각성자협회를 떠올렸다. 그곳에 가서 자신의 실력만 보여 주면 의식주는 해결될 것 같기는 하다.
‘아니야! 솔라는 될 수 있으면 협회를 믿지 말라고 했어. 그곳 임원 중에 배신자가 숨어 있다고 했지.’
하지만 이내 고개를 저었다. 하룻밤의 환상 속에서 만났던 솔라의 말 때문이었다.
‘그렇다고 협회에 가지 말라는 말은 아니었잖아? 가급적 내 힘과 신분을 숨기고서 활동하라고 그랬어.’
루시의 마음과 생각이 갈팡질팡한다.
다시 생각해 보니, 지구에서 헌터라는 신분으로 활동하면서 그를 기다리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믿지만 않으면 되는 거 아닌가?
‘애초에 협회에 등록되지 않은 각성자는 흑마법사 취급을 받는다고 했어. 일단 등록만 하고 소일거리나 하면서 그이를 기다리는 거야.’
겸사겸사 차원 코어도 찾으면서…….
‘음?’
그렇게 생각에 잠겨 걷고 있는데, 갑자기 맞은편에서 또 다른 마력이 느껴졌다.
루시는 급히 걸음을 멈췄고, 얼마 후 루시와 마찬가지로 피신하던 사람들의 발걸음도 하나둘씩 멈춘다.
확성기로 시민들을 대피시키던 경찰들의 목소리도 어느새 뚝 끊겼다.
파츠츠츳.
대피소 방향 허공에서도 스파크와 함께 균열이 일고 있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