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45화
#145.
허공에서 스파크와 함께 일어나는 균열.
저 현상을 사람들은 모를 수가 없었다. 지난 20년 가까이 지겹도록 보고 듣고 경험한 현상이니까.
“……설마?”
“여기에도 게이트가?!”
침착해 보였던 시민들의 표정에 두려움이 드리웠고.
“관측 드론은 조용한데?!”
“인스턴트 게이트다!”
경찰들도 당황하는 모습이 역력하다.
“모, 모두……! 뒤쪽으로! 뒤쪽으로 대…….”
퍼억!
확성기를 들고 있던 경찰이 급히 외쳤지만, 말이 끝나기도 전에 게이트에서 튀어나온 검은 촉수가 경찰의 머리를 꿰뚫었다.
쿠오오오오.
키아아아악!!
이윽고 게이트 안에서 무수히 많은 이계의 존재들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한다.
“꺄아아아악!”
“도망쳐!”
“헌터들은 어디서 뭘 하는 거야!”
“엄마아아아!”
아까까지만 해도 침착하게 대피소로 향하던 시민들이 지금은 너도나도 패닉에 빠졌다.
“사격 개시!”
투다다다다닷!
경찰들이 들고 있던 자동 소총을 괴수들에게 쏘았다.
마석으로 코팅된 철갑탄이 마계의 검은 괴수들에게 유의미한 타격을 입혔지만, 그래 봤자 생채기 조금 내는 수준.
“역시 최상위 차원의 괴물! 대괴수탄조차 먹히지 않아……!”
트롤이나 오우거 같은 C급 이하 몬스터까지만 비각성자들이 화기로 처치할 수 있다.
“B급 이상의 11차원 괴수 출현! 다시 한번 알림, B급 이상의 11차원 괴수 출현!”
눈앞의 B급 이상의 괴수, 최상위 차원의 존재는 오직 마력을 직접적으로 다룰 줄 아는 각성자만이 상대할 수 있다.
“……젠장! 게이트의 마력장 때문에 무전이……!”
소총을 쏘던 경찰은 무전기로 지원 요청을 하려 했지만.
쏴아아악, 퍼억, 퍽!
제대로 무전조차 하지 못한 채, 괴수가 휘두른 촉수에 좌우로 두 동강 나 버렸다.
순식간에 두 명의 경찰이 즉사했다.
“어서, 어서 다른 대피소로 뛰세요! 저놈들은 최소 C급 이상 되는 괴수입니다. 총알도 잘 안 통합니다!”
꺄아아아악!
비켜어, 비키라고오!
그럴수록 사람들의 공황은 더 심해져 가고.
“헌터! 헌터가 올 때까지 버텨!”
“총알이 부족합니다! 탄막 형성이 더 이상 어렵습니다!”
헌터들은 처음 마력 폭풍이 터졌다는 곳으로 몰려갔는지, 이곳엔 코빼기도 보이지 않는다.
아니, 헌터가 아주 없는 것은 아니다.
“으아아아아! 다 틀렸어! 이제 죽는, 어……? 갑자기 왜 춥지……?”
헌터는 아니지만 지구상 어느 각성자보다 강한 존재.
“아이고오! 집에나 있을걸! 어쩐지 꿈자리가 사……? 왜, 웬 강풍이?!”
청은발을 휘날리며, 푸른 눈동자에서 마력을 흘리며.
“이보세요! 경찰들 죽는 거 못 봤어요?! 여긴 위험하니까 최대한 물러……. 어?! 설마! 헌터십니까? 실례지만 등급이……?”
순식간에 온 세상을 설원으로 만들 수 있는 루한의 여왕이자.
“비키거라.”
설원의 대마녀.
쏴아아아아아!
루시푸르네는 게이트와 괴수들을 향해 설원의 권능을 발휘하였고, 괴수는 물론 괴수를 토해 내던 마계의 게이트까지 꽁꽁 얼려 버렸다.
대기가 급속도로 냉각된다. 늦여름임에도 입김이 난다. 하늘에서 눈꽃이 뿌려진다. 어느덧 도로와 건물 벽면에 서리가 드리운다.
도심과 외곽 사이에 위치한 거리. 피와 살덩어리가 난자하고 비명으로 꽉 찬 공간. 두려움에 허우적대는 사람으로 가득한 거리.
그곳에 설원이 찾아왔다.
죽을 차례를 기다리던 사람들에게 이 설원은 다른 의미로 다가왔다.
희망 그리고 구원.
콰아아아아앗.
외계의 흉측한 마물들이 순식간에 꽁꽁 얼었다. 단순히 움직임이 느려졌다거나 멈춘 것이 아닌 완전한 죽음.
세포는 물론, 어쩌면 영혼까지 완전히 얼어 버렸고, 지구와 상위 차원을 잇는 게이트까지 통째로 멈췄다.
서걱.
혹시나 저것들이 녹아서 다시 움직이면 어쩌나, 하는 걱정조차 사치라는 듯, 순식간에 모든 적을 얼려 버린 루시는 허리춤에 있던 윈테이라를 횡으로 길게 휘둘렀다.
윈테리아의 검 끝에서 레이저 같은 광선이 쑥 쏘아졌다.
콰가가강, 쿠웅.
중심축이 끊어진 얼음 동상들이 무너지면서 부서졌다.
실용성과 거리가 멀어 보이는 예식용 마검을 마법 지팡이 삼아 확인 사살을 한 것이다.
“…….”
“…….”
이를 목도한 사람들은 할 말을 잃고 멍한 눈으로 멍하니 입만 벌릴 뿐.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허어…….”
“살았어……? 나 산 거야……?!”
몇몇 사람에게서 육성으로 짧은 감탄이 흘렀고.
와아아아아아아!!
이를 시작으로 어마어마한 함성이 터져 나왔다.
“S급! S급 헌터님이야!”
“꺄악! 언니이! 사랑해요!”
“헌터님! 구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아!!”
아까의 기분 나빴던 관심과는 전혀 다른 관심.
경외와 환희의 함성, 시선들이 루시를 포위했다.
“?!”
루시는 급히 설원의 권능을 거뒀다. 기쁘기도 하면서도 한편으론 당황스러워 어찌할 바를 몰랐다.
‘큰일이야! 힘을 숨겨야 하는데!’
힘과 신분을 숨기자고 스스로 결심했던 것을 어기고 말았다. 너무나 빨리, 너무나 쉽게.
눈앞에서 무고한 이들이 죽었고 죽어 나갈 상황이 되다 보니까 자제력을 잃은 모양이다. 루시푸르네 본인과 설원의 권능 둘 다 말이다.
‘어…… 어쩌지?!’
자괴감과 함께 머릿속이 복잡해짐을 느꼈다.
“헌터님! 사인! 사인 부탁드려도 될까요?”
“핸드폰이 멀쩡해지면 사진 좀……!”
“헌터님, 사례를 하고 싶습니다. 혹시 시간이 되시면…….”
“혹시 소속된 길드가 있으신지요? 다름 아니라 저는 성현PMC에 재직 중인 사람입니다. 저희 PMC로 할 것 같으면 그 유명한 검룡길드의 2차 벤더로…….”
“헌터님, 도와주셔서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그리고 정말 죄송하지만, 경찰서로 잠시 같이 가 주실 수 있겠습니까? 동료가 둘씩이나 죽었는데, 마력장으로 보디캠이 망가져서……. 헌터 입장에서 몇 마디만 해 주시면 정말 큰 도움이…….”
사람들이, 사람들이 점점 다가온다.
이런 식의 과하고 격식 없는 반응은 시누이 이후로 처음이다.
지금 그녀에게는 이 상황은 수십 명의 루나시르네가 호들갑 떨면서 포위해 오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
‘으으으!’
결국 루시는 견디지 못하고 마법을 사용해 버렸다.
우우웅, 파앗.
바닥에서 마법진이 생성되었고 순식간에 그녀의 몸이 사라졌다.
루시가 순간 이동으로 사라지고서 약 1분 뒤, 협회의 헌터들이 도착했다.
“이거 마석은 캘 수 있으려나 모르겠네…….”
“마석까지 전부 얼어 버린 거 같습니다.”
“11차원 괴수의 마석이면 진짜 귀한 건데…….”
“도대체 누가 이런 힘을?”
협회의 헌터들은 꽁꽁 얼어붙은 괴수들의 시체를 살폈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증언이 필요합니다.”
일부 헌터는 마력장으로 CCTV 하나 찍지 못한 방금 전 상황을 취합하고 있었다.
“냉기 원소를 다루는 헌터님이셨습니다. 청은발이 인상적이었지요. 정말 아름다운 여성 헌터였어요.”
새로운 영웅의 탄생에 환호하는 대중들 속에서 그나마 침착한 경찰들의 증언을 협회 헌터들이 경청한다.
“청은발에 냉기 계열의 여자 헌터요?”
협회 소속 헌터들 중 가장 높은 직위로 추정되는 여성 헌터가 대표로 경찰에게 되묻는다. 그녀는 늦여름임에도 검푸른 코트를 입었고, 근접계 헌터인지 허리춤에는 검을 찼다.
“예! 그렇습니다! 마치 빙하……. 흐흡! 아니, 아닙니다. 아무것도.”
흥분한 경찰은 ‘마치 옛 빙하의 여제 같았습니다’라는 말을 하려다가 간신히 자신의 입을 통제했다. 아무리 흥분했다고 해도 해서는 안 될 말이 있는 법이다.
“태광휘 헌터님과 협회의 고위 헌터들이 장시간 자리를 비운 지금 같은 때에 이런 분이 나타나시다니! 역시 죽으란 법은 없는 모양입니다!”
경찰은 서둘러 말머리를 돌렸다.
“하긴, 2차 개문 사태가 터지고 여러 가지로 많이 혼란스러웠지요. 치안도 안 좋아지고.”
“…….”
다행히도 눈앞의 집행관은 무덤덤히 넘어가 줬다.
“새로운 영웅, 그것도 아름다운 영웅의 탄생은 인류에 큰 희망이 될 겁니다.”
경찰은 슬금슬금 협회에서 온 헌터들의 눈치를 보면서 수다를 이었다.
그러나 집행관을 포함한 협회의 헌터들은 반응이 없었다. 그들은 그저 심각한 표정으로 자기들끼리 중얼거리면서 꽁꽁 얼어 버린 현장을 꼼꼼히 살필 뿐이다.
“순간 이동으로 아무 말 없이 사라졌다라…….”
늦은 저녁임에도 선글라스와 챙 넓은 모자를 깊게 눌러쓴 집행관은 눈앞의 경찰을 반쯤 무시하고는 취합한 정보를 중얼거렸다.
그녀의 목소리와 체형을 보면, 여성임에도 쇼트컷이라도 쳤는지 모자 사이로 머리카락 하나 보이지 않는 것이 인상적이었다.
“그, 그렇습니다! 냉기 이능도 모자라 순간 이동이라니! 이중 능력 각성자가 틀림없습니다. 처음 보는 헌터님 같던데 외국에서 파견 오신 분인가 보군요?”
집행관의 중얼거림에도 경찰은 성심성의껏 리액션을 해 댔다.
“게다가 푸른색 검을 사용했다고?”
“예, 맞습니다……?”
흥분에 겨워 증언하던 경찰들도 서서히 뭔가 이상함을 눈치챈다.
“그…… 각성한 지 얼마 안 된 헌터님이시겠죠?”
루시에게서 목숨을 구원받은 경찰이 조심스레 물었다.
“…….”
협회 소속 헌터는 대답하지 않고 휴대폰을 켰다. 일반적인 전자제품과 달리 마력장에서도 작동하는 밀스펙용 휴대폰이다.
“예, 서울 4팀의 문유리 집행관입니다.”
어디론가 전화를 거는 헌터의 눈이 차갑다.
차가운 시선은 꽁꽁 얼어 부서진 괴수의 사체와 게이트를 쓱 훑은 뒤, 설원으로 뒤덮인 거리를 둘러본다.
아까 옛 외곽 골목에서 본 풍경과 지금 눈앞의 광경이 겹친다.
‘설마……?’
강렬한 기시감이 그녀를 스쳤다.
설원의 강풍이 문뜩 불어와 집행관의 상징이기도 한 검푸른 코트를 휘날린다.
“미등록 각성자가 탄생한 것 같습니다. 최소 A등급 이상. 어쩌면…… S급일 수도 있습니다. 이능은 옛 마왕의 사천왕이자 마인이었던 빙하의 여제와 유사합니다. 중대 사항이니 협회장님께도 보고하겠습니다.”
본부와 통화 중인 집행관의 말이 심상치 않다.
“아직 마인으로 확정할 단계는 아닌 듯합니다. 각성하자마자 협회를 찾지 않은 것과 도망치듯 순간 이동을 한 것은 수상하지만……. 네, 네! 저도 팀장님의 의견이 타당하다고 생각됩니다.”
“……!”
“……?!”
흥분으로 달아올랐던 분위기가 급냉각되었고, 상황이 이렇게 흐르자 경찰들은 사색이 된 얼굴로 문유리 집행관에게서 애써 멀어진다.
“자, 자! 상황이 모두 종료되었으니 시민 여러분께서는 생업에 종사해 주시기 바랍니다.”
“혹시 다치신 분이 계시면 인근 병원으로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서둘러 확성기를 들고서 자신들의 소임을 한다. 방금 들은 찝찝한 진실을 애써 머릿속에서 지우며.
순간 이동으로 장소를 벗어난 루시는 급히 자신이 이동한 주위를 살폈다.
무작위로 가급적 인적이 드문 곳으로 좌표를 설정했는데, 괜찮게 온 것 같다.
처음 도착했던 곳과 달리, 이곳은 폐허 지대도, 도심과 가까운 곳도 아니다.
대신 꽤 넓은 평지에 녹음이 펼쳐져 있었고 중간중간 낡은 건물들이 보이긴 했다.
“저렇게 넓고 튼튼한 도로라니!”
그러나 루시가 감탄한 것은 따로 있었다. 그녀의 눈에 평지를 크게 가른 회색의 거대한 도로가 보였다.
그 도로에는 아까 도시에서 보았던 것과 같은 철로 만든 마차가 더 많이 질주 중이다.
도시에서 낸 속도는 최대 속력이 아니었다는 듯, 철로 만든 마차는 말도 없는 주제에 전마가 달리는 속도를 아득히 초월했다.
멍하니 고속도로를 보는 루시의 머릿속으로 태광휘의 목소리가 재생된다.
‘기억해, 루시. 여기가 내가 살던 집 주소야. 만약에 네가 먼저 지구에 오게 되면, 여기에 머물러도 돼.’
누구의 당부인데 감히 잊겠는가. 루시는 반려의 목소리를 방금 들은 것처럼 되새기면서 그가 말한 주소를 완벽히 기억해 냈다.
‘좌표를 알아야 하는데.’
그녀에게는 공간 이동 마법이 있다. 하지만 만능은 아니다. 적어도 그곳이 어느 방향에 있는지, 어느 정도 떨어져 있는지 정도는 알아야 했다.
루시는 일단 걷기 시작했다. 각성 이후 자유롭게 하늘을 날 수도 있었지만, 지금은 최대한 힘을 숨겨야 할 때.
‘길 좀 묻겠다. 아니, 아니지. 실례합니다. 여기로 가려면 어느 방향으로 얼마나 걸릴지 알 수 있겠습니까?’
걸으면서 속으로는 이곳 주민들과 하게 될 대화를 연습했다.
그렇게 얼마나 걸었을까. 하늘이 자정에 안긴 깊은 밤이 되었을 때, 시외 쪽에 드문드문 있는 건물 중 한 곳에 도착한 루시는 저 건물 안에 사람이 거주하고 있음을 느꼈다.
그리고 마치 그녀가 여기로 오고 있음을 알고 있었다는 듯, 건물 안에서도 두 사람이 마중을 나왔다.
마중 나온 사람은 둘 다 남성이었는데 한 명은 중년으로 보였고 다른 한 명은 20대 후반 정도로 보였다.
행색은 아까 도시에서 봤던 주민들보단 거칠어 보였다. 목과 양팔을 비롯해 옷 사이로 지저분한 문신이 눈에 띄었고 머리와 수염 또한 관리를 안 했는지 지저분했다.
“외국인?!”
“각성자인가……?”
루시를 멍하니 보던 두 남자는 서로를 힐끔 쳐다보더니 은밀히 시선을 교환한다.
‘좀 수상한데…….’
자신 앞에 나타난 두 남자의 낌새가 수상하다는 것을 루시 또한 자연스레 느꼈다.
하지만 사람을 외모로만 판단해서는 안 되는 법.
“큼, 흠! 실례합니다. 외국에서 온 지 얼마 안 돼서 그런데, 여기로 가려면 어느 방향으로 얼마나 가야 하는지 알 수 있겠습니까”
루시는 여기까지 오면서 수도 없이 연습한 대사를 국어책 읽듯이 내뱉었다.
“여기로, 가 어딜 말하는 거지?”
“도로명 중에 그런 곳이 있었나?”
이에, 두 남성이 고개를 갸웃하며 서로를 쳐다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