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47화
#147.
사방이 고요하다. 실내지만 춥다. 밖은 늦여름의 고온과 습기가 열대야를 이뤘고, 내부는 북극의 추위로 건조하다.
“후우…….”
뒤늦게 이성을 되찾은 루시는 다소 멍한 눈으로 주위를 둘러본다.
전부 얼었다. 전부. 그녀의 역린을 건드렸던 바닥의 마법진은 거대한 설원의 힘을 1할도 담지 못하고 터져 버렸다.
그녀가 서 있던 층 전체가 이글루처럼 되었다. 무기를 겨누고 이능을 겨누던 이들도 이글루가 되었다.
생존자는 없다.
“으으, 또 흥분해 버렸어……!”
뒤늦게 마른세수를 하며 스스로를 자책한다.
한 놈 정도는 살려 둬서 이 마법진의 정체를 알아냈어야 했거늘.
초점이 돌아온 눈동자를 아래로 내려 바닥을 본다. 설원의 힘을 감당 못하고 터져 버린 마법진은 이미 그 흔적조차 희미하게 찢어져 버렸다.
하아.
얕은 한숨을 입김과 함께 내쉬고, 푸른색 마검 윈테이라를 손에 들었다.
일단 지하에 있는 사람부터 구하자.
다행히 폭주하던 중에도 최소한의 이성은 있었기에, 지하는 설원의 징벌을 피했다.
‘잡혀 있는 사람 중에 저 마법진에 대해 아는 사람이 있을지도 몰라.’
지하와 이어진 문은 설원의 폭풍으로 꽁꽁 얼어 있었다.
윈테이라를 뽑아 든 후에 문을 향해 대각선으로 휘둘렀다. 푸른 에너지 볼 같은 게 마치 검기처럼 쏘아졌고, 그녀를 가로막는 잠긴 문과 두꺼운 벽들을 갈랐다.
그렇게 쭉쭉 3층을 더 내려갔다. 마침내 건물에서 가장 깊은 층. 정령의 도움 없이도 흐느낌을 들을 수 있는 문을 열었다.
* * *
구민주는 올해에 막 대학원 석사 과정을 졸업한 파릇파릇한 사회초년생이었다.
대학과 대학원은 명문으로 이름 높은 K대를 나왔다.
대전쟁 이후, 여성 징병제가 실시되었기에 해병대에서 24개월 군복무도 했다.
명문대 석사 졸업에 군대는 해병대. 비록 그녀의 키가 150센티미터 초반이고 마른 체형이라지만, 외모가 아닌 서류만 보았을 때는 충분히 일꾼으로 쓸 만하다고 스스로 자부했다.
면접도 자신 있었다. 해병대 예비역 병장답게 그녀는 늘 다부진 강단을 몸에 품고 다녔고, 무엇보다 깔끔하고 귀여운 외모로 이성으로부터 대시도 심심치 않게 받았었다.
만약 면접관 중에 해병대 출신이 있다면 금상첨화가 아닐까 싶은 생각도 들었다.
하지만 막상 취업 전선에 뛰어드니 세상은 역시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비각성자에 심지어 인문학을 전공한 그녀가 갈 수 있는 직장은 너무나 부족했다.
오히려 명문대 석사 졸업이라는 타이틀이 그녀의 취업을 방해했다.
중견 이상의 대기업에서는 그녀보다 뛰어난 스펙을 가진 사람들이 넘쳤고, 흔히 좋소라 불리는 중소기업에서는 명문대 석사 학위를 가진 그녀를 부담스러워했다.
구민주 본인 또한 나름 명문대에서 장학금까지 받으며 석사까지 딴 입장이다 보니, 눈을 쉽게 낮추지 못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날도 어김없이 추레한 몰골로 취업사이트를 전전하던 그녀의 눈에 웬 채용 공고가 눈에 띄었다.
국내에서도 제법 알려진 외국계 길드에서 사무직 채용 공고를 낸 것이다.
습관적으로 지원 서류를 넣었고, 이틀 후 서류 합격 문자를 받았다.
그것이 이 모든 비극의 시작이었다.
인류의 영웅 태광휘 헌터가 마왕을 무찌른 지 5년째 되는 날, 2차 개문(開門) 사태가 일어났다. 다시 한번 익숙한 혼란이 찾아온 것이다.
준전시 상황이 되었고, 헌터들이 징집되었으며, 이로 인한 치안 공백이 생겼다. 그리고 기다렸다는 듯이 마인이라고 불리는 각성자 범죄자들이 활개를 치기 시작했다.
최근 들어 인신매매가 활개 친다는 뉴스를 접했지만, 구민주는 정작 자신이 당할 줄은 꿈에도 몰랐다.
유명한 길드라고 해서 너무 안심했었다. 어쩐지 채용 과정이 기업 이름 치곤 대충이다 싶었지.
‘이제 어떻게 되는 거지……?’
구민주는 텅 빈 눈동자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8평 크기의 좁은 방 안에는 그녀와 비슷한 또래의 여성 10명이 갇혀 있었다.
가구는 아무것도 없었고. 천장에 떡하니 설치된 CCTV 하나와 가림막 없는 변기 하나가 구석에 있을 뿐이다.
몇 명이 흐느끼는 소리가 여전히 났다.
만난 지 제법 시간이 지났음에도 아직 서로 통성명도 하지 않았다.
모두 20대 초반에서 후반 사이. 복장은 면접용 정장. 가지고 있던 소지품은 전부 압수당했고, 듣기로는 내일부터 어디로 이동한다고 했다.
보나 마나 팔려 가는 것이겠지.
그나마 다행인 것은 상품 가치 때문인지 아직 해코지는 하지 않았다는 정도다.
하지만 현재가 무탈하다고 기분이 좋아지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사람은 지금이 괴롭더라도 미래가 희망차야 살아갈 수 있다.
곧 예정된 암담한 미래. 먹으라고 가져다준 삼각김밥과 음료수는 누구도 손을 대지 않았다.
우울함이 가득한 방은 하루라도 더 있다간 중증 조현병 환자가 될 것 같은 위기감마저 준다.
‘팔려 가면 뭘 하게 되는 걸까? 매드 초상과학자의 실험? 제물? 아니면…… 마인들의 식용?’
초상 시대가 열린 지 20년이 다 되어 간다. 세상은 새로 열린 세계에 맞춰 발전했다. 발전보다는 적응해 갔다, 가 맞을 것이다. 인신매매 또한 과거처럼 노동 착취나 장기 매매, 성 착취만을 목적으로 하지 않았다.
그래서 더더욱 지금의 신세가 불안하고 비관적인지도 모른다.
‘각성만 했다면…… 각성만!’
구민주는 이를 바득바득 갈았다.
이 모든 것은 자신이 약해서라고 생각했다. 그런 그녀의 생각은 지금 시대 기준으론 가장 정확하고 심플했다.
‘하다못해 고위 각성자와 인맥이라도 있었다면!’
답답함은 갈망이 되었다. 전에도 비슷한 바람을 품었지만 지금만큼 간절한 적은 없다.
군대를 해병대로 나오고 명문대에서 석사까지 마치면 뭐 하나.
이 세상은 각성자들의 세상이거늘.
기숙사와 학교만을 왕복하던 재미 없는 20대를 보내지 말았어야 했다. 목숨 걸고 짐꾼 알바라도 하면서 헌터들과 인맥을 쌓았어야 했다.
후회로 점철된 번뇌는 점점 더 깊어져만 갔다.
‘아아, 인생……. 내 인생은 왜 이 모양일까?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 나는 어디로 가게 되는 걸까? 도대체 여기서 뭘 하고 있는 걸까?’
구민주는 요즘 세상에서 가장 살기 힘들다는 비각성자이면서 비혼주의자인 고학력 여성이었다.
그녀는 살인적인 부모 보험료(독신세)를 부담하는 한이 있더라도,차라리 군복무를 해서라도, 경단녀가 되기 싫었다.
그래서 군대도 일부러 빨리 간 거였다.
또래 여자들이 20대 중후반에 군 복무를 할지, 결혼 출산으로 군 면제를 받을지를 결정하는 반면에, 그녀는 남자 동기들과 함께 스무 살에 입대를 해 버렸다.
전역 후에는 연애에 관심도 안 두고 공부만 했었다. 하지만 석사까지 마친 그 공부는 쓸모없었다.
전공을 살려 취직해야 하지만, 그녀의 전공은 인문계열. 그것도 99% 인맥을 통해 들어가는 음서제였다.
‘그 변태 교수를 패지만 않았어도!’
늘 자신을 음흉한 눈으로 쳐다보고 은근슬쩍 허리와 등을 만지던 담당 교수. 결국 못 참고 캠퍼스에서 반병신이 되도록 패 버린 것이 모든 일의 화근이었다. 심지어 대학원 졸업 두 달 전에 말이다.
다행히 학교의 체면을 생각한 총장의 중재로 간신히 석사는 땄지만, 전공과 관련된 취업은 안드로메다로 멀어져 버렸지.
겁나 열심히 삽질을 했는데, 집채만 한 바위가 묻혀 있는 땅 위에서 삽질을 한 셈이다.
그놈의 커리어 우먼 좀 해 보겠다고 아득바득 버텨 온 게 허무하다. 20년 공부한 게 아깝고 아쉬웠다.
‘차라리 연애나 열심히 해서 결혼이나 일찍 할걸 그랬어. 어차피 취업해 봤자 독신세로 죄다 뜯기는 걸 생각하면……. 왜 공부랑 취직에 필사적이었던 걸까?’
후회와 후회, 의문과 의문이 꼬리를 물고 끝없이 이어진다.
‘요즘 부모 월급이 애 한 명당 얼마였지? 군필 여성이면 3할 더 줬던가? 둘만 낳아도…… 아니, 셋을 낳아서 그중 하나라도 각성자가 뜨면!’
절망 가득한 방 안에서 멍하니 쭈그려 앉아 있다 보니 별별 생각이 다 난다. 최근 젊은 부부 사이에서 유행이라는 자식 가챠까지 떠올랐다. 평소에는 생각도 않았던 별별 번뇌와 망상이 파도처럼 흘렀다.
그저 암담할 뿐이다.
얼마나 지났을까?
창문 하나 없는 지하. 시계도 없기에 그저 납치된 지 하루 정도 지났겠거니 여길 때였다.
“왜 이렇게 춥지?”
쭈그려 앉아 고개를 숙이고 있던 구민주는 갑작스러운 냉기를 느끼며 어깨를 오들오들 떨었다. 깊게 숙였던 고개를 슬그머니 들어 CCTV가 있는 천장을 멍하니 보았다.
늦여름, 에어컨 하나 없는 방. 지하라서 그나마 나았지만 시원하다고 할 정도는 아니다.
그렇게 구민주를 비롯한 납치된 여성들이 하나둘씩 추위에 오들오들 떨고 있을 때였다.
콰앙!
“꺄악!”
“!!”
갑자기 굳게 닫혔던 문이 거친 소리와 함께 부서졌다.
부서진 문의 잔해를 밟고 누군가가 당당히 방 안으로 들어왔고, 그리하여 구민주를 비롯한 모두는 목도했다.
어둠 속 양 눈에서 푸른 안광을 은은히 흘리는 청은발의 여인을.
장난감처럼 생긴 푸른색 검을 한 손에 들고, 당당히 자신들을 내려다보는 여왕 같은 분을.
너무나 아름다워 감히 시기할 마음조차 들지 않는 미모의 헌터를.
* * *
상황은 정리되었다.
납치된 사람들을 구출했고, 다른 방에 보관해 두었던 물품을 찾아 줬다.
혹시나 싶어 마법진과 이 범죄 집단에 대해 물어봤으나 역시나 모르는 눈치였다.
‘언젠간 다시 마주할 날이 오겠지.’
루시는 찝찝함과 각오를 다지며 건물을 나섰다.
듣자하니 경찰이라는 곳에 신고를 했다고 한다.
괜히 귀찮아지고 싶지 않았던 루시는 은밀히 몰래 자리를 떴다.
태광휘의 집 주소는 결국 물어보지 못했다. 구출한 여인들의 입을 믿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뒤늦게 올 경찰에게 자신의 행적을 흘릴 것 같았다.
‘날도 밝았으니 길에 사람도 많겠지.’
대신 길 가다 스치듯 만난 행인을 통해 물어볼 예정이다.
그렇게 20분 정도 걸었을까?
아침해가 떠오르며 어두웠던 창공을 서서히 밝히던 즈음.
“……?”
루시는 걸음을 멈추고는 뒤를 돌아 보았다.
“너, 왜 나를 따라오지?”
용케도 방금 건물에서부터 그녀의 뒤를 쫓는 한 사람이 있었다.
“허억…… 허억…… 헉!”
루시는 헥헥거리면서 포기하지 않고 따라온 작은 체구의 여인을 살폈다. 이 나라 사람들의 특징인 검은색에 가까운 짙은 갈색 눈동자가 빛난다. 그 눈빛에서 간절함이 보였다.
루시는 용건이 있으면 말해 보라는 듯 고개를 까딱였다.
그녀가 고개를 까딱이자, 구민주는 속사포처럼 90도로 허리를 숙이면서 외쳤다.
“안녕하십니까! 저는 구민주라고 합니다. 올해 27살로 K대학교를 나왔습니다. 군대는 해병대를 나왔으며 현재 취업 준비생입니다! 나름 배울 만큼 배웠고 체력도, 순발력도 자신 있습니다!”
“……내 이름은 루시라고 한다. 루한에서 이곳으로 어제 막 도착했단다. 그래서 왜 따라온 거지?”
소개를 받았으면 자신 또한 소개를 해야 하는 법. 루시푸르네는 눈앞의 작은 체구의 여인이 어째 싫지 않았다.
‘루시 헌터님! 그리고 루한에서 오셨다고?! 처음 듣는 나란데……? 상관없어, 어쨌든 외국에서 오신 것은 확실해!’
다행히도 청은발의 여신 같은 헌터님은 의외로 자상하신 분 같다. 구민주의 머릿속을 빠르게 회전했다.
엄청난 실력으로 인신매매단을 몰살시키고 자신들을 구해 준 헌터님. 어떤 대가를 바라지도 않았고 SNS에 이를 자랑하지도 않은 저 쿨함. 거기다 경찰이 오기도 전에 현장을 슉 하고 떠나는 모습.
너무나 멋있었다. 같은 여성임에도 반해 버릴 것 같았다.
그리고 한편으론 취직에 미친 그녀의 눈에 이것은 기회로 보였다.
“혹…… 혹시! 헌터님! 매니저, 매니저 필요 없으신가요? 외국에서 막 오셨으면 한국에 대해 잘 모르시잖아요? 돈은 진짜 조금만 주셔도 좋으니까…….”
“매니저……?”
“네! 제가 루시 님의 모든 수발을 다 들겠습니다! 관광 가이드부터 각종 예약, 운전까지! 돈만 주시면 적어도 한국에서 생활하는 데 어떤 불편함도 느끼지 못하게 하겠습니다. 부려만 주십시오! 잘할 수 있습니다! 헌터님의 견마가 되겠습니다아!!”
필터조차 하지 않고 내뱉는 말에는 취준생의 간절함이 묻어 있었다.
‘아아, 시녀 같은 건가 보군?’
루시는 나름의 기준으로 매니저라는 뜻을 이해했다.
‘하긴, 군주의 격이 있거늘, 이계라고 해도 시녀 한 명 없이 지내는 것은 예가 아니지. 게다가 자발적으로 하겠다고 하지 않던가?’
고민은 길지 않았다.
“그러거라.”
루시는 흔쾌히 수락했다.
“?!”
너무나 쉽게 취업해 버린 구민주는 오히려 어쩔 줄 몰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