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48화
#148.
대전쟁 시기, 괴수로부터 그나마 안전한 동네는 군부대가 있는 동네였다.
특히 과거에나 지금이나 세계 일류로 칭송받는 미군이 있는 동네는 더더욱 그랬다.
그랬기에 주한 미군이 있는 경기도 평택은 대한민국에서 가장 부자들만 사는 동네가 되었다.
각성자가 탄생하고 헌터들로 이뤄진 PMC와 길드가 우후죽순 생겨난 오늘날에도 그 기조는 변함없었다.
각성자협회 한국 지부가 있는 곳도 평택이었고, 태광휘와 관계가 깊은 검룡 길드의 본사가 있는 도시도 해군2함대가 위치한 평택항이었다.
그런 평택항 인근에 위치한 포승구(옛 포승읍)에 두 여자가 도착했다.
“대박!”
“흐음…….”
한국에서 손꼽히는 부자 동네를 보는 둘의 반응은 상반되었다.
‘내가 이런 어마무시한 동네에 오게 되다니!’
구민주는 입이 쩍 하니 벌어진 채로 정신없이 주위를 둘러보았고.
‘그이는 참으로 검소하구나.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그이가 살기엔 격이 맞지 않아.’
루한에서 태광휘에게 태양궁을 선물한 이력이 있던 루시는 불만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이 좁은 저택에서 신혼을 보내는 것도, 뭐, 아주 나쁘진 않겠군?’
그러다가 다시금 얼굴이 헤벌쭉해지는 것이었다.
부자 동네기 때문에 초대받지 않은 외지인의 출입이 통제된다.
동네 곳곳에는 지금도 PMC 소속의 경비들이 순찰을 돌고 있다.
하지만 여기까지 오면서 루시와 구민주는 어떤 제지도 받지 않았다. 푸른색 검을 허리에 찬 청은발의 외국인은 누가 보아도 고위 헌터로 보였고, 그 악독한 독신세마저 면제받는 고위 헌터가 부자인 것은 당연한 사실이기 때문.
그런 루시 옆에 있는 후줄근한 정장을 입은 구민주는 중위급 이상인 헌터라면 누구나 달고 다니는 매니저일 것이다.
‘곳곳에 마력을 탐지하는 진이 많군. CCTV라는 것도 골목마다 있고.’
동네를 둘러보던 루시는 새삼 공간 이동 마법을 사용하지 않기를 잘했다고 여겼다.
“그 택시라는 탈것 덕분에 편하게 잘 왔구나. 돈은 걱정 마렴. 나중에 배로 쳐서 주겠다.”
“넵! 저는 루시 님만 믿겠습니다. 에헤헤헤…….”
루시와 구민주는 택시를 타고 평택까지 내려왔다. 돈은 구민주가 냈다. 한국에 막 와서 쓸 수 있는 돈이 없다고 루시가 둘러댔기 때문이다.
애초에 목숨을 빚졌고 루시 같은 실력의 헌터가 돈이 없을 거라고는 생각되지 않았기에, 구민주는 흔쾌히 택시비를 냈다.
덕분에 루시는 꼭 한 번은 타 보고 싶었던 이세계의 철로 만든 마차를 타 보게 되었다.
“그럼, 안내하겠습니다, 루시 님. 저기 저쪽에 있는 집입니다.”
동네를 둘러보던 구민주가 루시가 말한 주소에 있는 집을 찾았다.
“음? 여기 있는 건물 전체가 한 집이 아니라고?!”
“……네?”
“아니, 아니다. 안내하렴.”
루시는 다시 한번 와 닿은 솔라의 검소함에 결국 속으로 안타까움을 삼켰다.
‘아공간 인벤토리만 복구되면…… 차라리 섬 하나를 사서 거기다 성을 짓는 게 낫겠어!’
그녀는 주먹을 불끈 쥐면서 결의했다. 그리고 쫄래쫄래 구 매니저의 뒤를 쫓는다.
태광휘가 머물었다는 전원주택 앞에 도착한 루시는 숨을 깊게 들이 쉬었다.
‘솔라의 냄새~.’
착각이겠지만 그의 냄새, 그의 마나가 느껴지는 것 같았다. 괜히 눈물이 나려 한다.
“저어…… 루시 님? 마력을…… 주입해야 하는데요?”
구민주가 옆에서 그런 루시의 감회를 끊었다.
“비밀번호를 말하지 않았느냐.”
“그…… 여긴 고위 헌터님이 사는 집이라서요. 마나도 주입해야 문이 열리게 되어 있어요.”
루시가 알려 준 비밀번호를 누른 구민주가 난감한 눈치로 말했다.
“호오? 이게 이곳의 마도구라는 건가?”
루시는 호기심 어린 눈으로 정문의 벨을 보았다. 숫자가 적힌 판 바로 옆에, 딱 봐도 손바닥을 올려야 할 것 같은 매끈한 판이 있었다.
텃.
그녀는 망설임 없이 오른손을 판 위에 올렸다.
우우우웅.
그러자 몇 년간 잠들어 있었던 보안 시스템이 작동하기 시작했다.
“아주 기초적이고 조잡하구나!”
루시는 설원의 대마녀, 어지간한 마법에는 도가 텄다. 그랬기에 단번에 이 집의 보안 마법을 파악할 수 있었다.
[인증되었습니다.]
몇 초도 안 돼서 문을 열었다.
* * *
서울 외곽, 사실상 치안이 거의 닿지 않는 버려진 건물로 경찰과 협회 소속 헌터들이 모여 있다.
요즘처럼 헌터가 부족하고, 그 공백을 군경의 피로 겨우겨우 메꾸는 시기엔 꽤 드문 장면.
특히나 이곳에 협회의 집행관이 둘씩이나 온 것이 사건의 중요성을 증명했다.
“같은 사람의 소행이 확실한가요?”
“그렇습니다. 이번 서울의 A급 인스턴트 게이트 때와 똑같습니다.”
“아, 거기 결국 A급으로 판명됐나요? 처음에 B급이라고 들었는데요.”
“정확힌 A-에서 B+ 사이입니다. 크기가 소형이라서 완전 A급은 못 된 모양입니다.”
“반올림해서 A급으로 합시다. 어쨌든, 그 A급 게이트를 단번에 닫은 얼음계열 원소술사라……. 그 정도 실력이면 S급은 확정이군요.”
건물 앞에 선 두 사람은 성별은 남녀로 달랐지만, 복장은 커플 룩이라도 맞춘 듯 똑같았다. 검푸른 코트에 검은 선글라스 그리고 머리카락 하나 보이지 않는 챙 넓은 모자를 깊게 눌러쓴 것까지.
한 가지 차이점이 있다면, 각각 허리에 찬 장비가 검과 지팡이로 달랐다.
“팀장님, 납치되었던 인질들의 증언을 모두 채집했습니다. 지원팀의 정신계 헌터들이 교차 검증까지 마쳤습니다.”
협회 소속 헌터이자 집행관인 문유리는 자신과 똑같은 행색을 한 남성을 향해 딱딱하게 보고했다.
“수고했어요, 문유리 집행관. 그리고 너무 저를 상관 대하듯 하는 거 아닌가요? 같은 동향 사람끼리. 편하게 해요, 편하게.”
이에 팀장이라는 직위를 가진 남성이 친근한 어조로 말했다.
“지금은 업무 중입니다, 팀장님.”
이에 문유리는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하여간 너무 철저하시다니깐…….”
결국 팀장은 서운하다는 듯 어깨를 으쓱인다.
“어쨌든 알겠습니다. 사람들 보고 물러나라 하세요. 지원팀에겐 이능을 거둬도 된다고 전하고요.”
그리고 언제 그랬냐는 듯 상황에 맞는 지시를 내렸다.
“네, 알겠습니다.”
이글루처럼 꽁꽁 얼었던 건물의 특정 층은 늦여름 날씨에 따라 녹고 있었다.
하지만 워낙 처참히 얼었기에, 층 하나가 완전히 물로 변하고 있었다. 즉, 눈앞의 건물은 붕괴가 예정되어 있었다.
지금도 피사의 사탑처럼 기울어져 있는 것을 지원팀의 중하급 염력술사 셋이 붙잡고 있었다.
이곳에 모인 경찰과 협회의 헌터들은 저 건물이 붕괴되기 직전까지 최대한 많은 증거를 수집해야만 했고, 방금 그 일이 다 끝났다.
“철수! 철수! 다들 멀리 물러나!”
“지원팀은 신호하면 염력을 거두고.”
콰아아앙!
염력술사들이 이능을 거두자, 기다렸다는 듯 건물이 무너졌다.
건물이 무너지면서 아직 다 녹지 않은 얼음 파편들이 튀었다.
“그 악명 높았다는 빙하의 여제를 떠올리는 사람이 많겠어요. 뭐, 우리도 다른 의미에선 비슷한가?”
선글라스를 깊게 쓴 팀장이 먼지와 함께 튀는 얼음 가루들을 보면서 감흥 없이 말했다.
“그래서 협회장님께서 몸소 여기까지 오신 거겠죠?”
이에, 문유리 집행관은 시선을 돌려 언제 도착했는지 모를 한 건장한 남성을 턱짓했다.
문유리가 턱으로 가리킨 곳에는 장례식장에 갔다 오기라도 했는지. 검은 정장에 검은 넥타이를 늦여름 대낮에 입고 있는 남성이 있었다.
그리고 평소 그를 잘 아는 사람들은 저 장례식 복장이 협회장 박태오가 늘 고수하는 패션임을 알았다.
태광휘를 대신해 세계각성자협회장과 그 본부가 있는 한국지부장을 역임 중인 박태오는 보기만 해도 분위기가 바위산 같았다.
그의 덩치는 굉장히 커서 키가 2미터는 넘을 것 같았고, 머리는 짧은 스포츠에 오른쪽 눈가에 길고 깊은 흉터가 나 있었다.
양손은 바지 주머니에 깊게 찔러 넣었고, 얼굴은 뭐가 그리 심각한지 미간을 잔뜩 구기고서 죽일 듯한 눈으로 무너지는 건물을 보고 있었다.
그런 남자의 분위기에 압도되었는지 협회의 헌터들은 물론 경찰들까지 숨도 제대로 못 쉬며 잔뜩 굳어 있었다.
유일하게 두 사람, 문유리 집행관과 그녀의 상관만이 여유로웠다.
* * *
태광휘가 루한으로 사라졌던 1년이라는 시간, 세상은 평화로웠지만 협회와 한국 정부는 난리가 났었다.
아무리 은퇴했다고 해도 태광휘라는 개인이 지닌 영향력은 어마어마했고, 협회는 물론 세계 각국 정부는 안빈낙도의 삶을 사는 태광휘를 늘 주시하고 있었다.
그리고 어느 날, 갑자기 그가 사라져 버렸다.
깨달음을 얻어 수련을 떠났느니, 대전쟁 중 입은 부상이 악화되어 소멸되었다느니, 온갖 추측이 난무했지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누구도 태광휘의 행방을 알 수 없었다는 것이다.
그렇게 약 1년 후, 사라졌던 태광휘가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동시에, 이제는 영원히 열릴 것 같지 않았던 게이트가 다시 열리기 시작했다. 2차 개문 사태가 터진 것이다.
태광휘는 협회와 세계 각국 정부에 자신이 1년 동안 무엇을 했는지를 간략히 전했다.
마왕의 저주를 받아 또 다른 차원으로 납치되었고, 그곳에서 또다시 마왕의 화신과 싸웠음을 말이다.
태광휘는 그곳에서 악순환의 고리를 완전히 끊겠다는 결심을 했고 마왕이 있는 마계로 직접 건너가 마왕에게 치명타를 입혔다고 했다.
마왕은 소멸에 가까운 타격을 입었고 소멸하지 않기 위해 발악하다가 사라졌다.
그리고 그 발악의 과정에서 11차원이 크게 뒤집혔고, 2차 개문 사태는 그렇게 일어났다.
하지만 2차 개문이 열렸다 해도 처음 인류는 패닉에 빠지지 않았다. 지구에는 1차 개문으로 단련된 헌터와 군대가 있었으니까.
그러나 그랬던 인류의 여유가 어느 날 등장한 ‘한 위협’에 확 꺾였다.
그 위협은 2차 개문이 열리고서 3년이 살짝 안 되었을 때 일어났다.
바로 ‘태평양 게이트’의 등장.
역대급 크기, 역대급 깊이로 추정되는 11차원 타입의 게이트가 태평양 한가운데에 떡하니 나타난 것.
크기는 대략 호주 대륙의 전반 크기. 그 안에는 마계에서 가장 강력한 괴수와 마족이 가득할 것이라 모두가 추측했다. 저게 완전히 열리면 마계와 지구가 덮어 쓰기 되어 버린다고 협회의 초상과학자들은 확신했다.
이것이 현재 태광휘를 비롯한 지구의 유명 헌터들이 지구에 없는 이유였다.
문제는 지구의 강자들이 태평양 게이트 안으로 가다 보니, 그 공백이 클 수밖에 없다는 것.
그 힘의 공백을 노리고 모습을 드러낸 존재들이 있었으니, 그것은 바로 오래전부터 협회를 적대하던 마인들이었다. 지금까지 숨죽이고 조용히 찌그러져 있었던 빌런들이 동시다발적으로 범죄를 일으키기 시작한 것.
심지어 2년이 지나도록 태평양 게이트에서 아무 소식이 없자 보이지 않는 거대한 공포가 인류를 잠식하기 시작했고, 마인뿐만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 범죄율이 치솟더니 작년 말부터는 대공황이 세계를 덮쳤다.
“이게에~ 나름 명문대에서 석사까지 딴 제가아…… 이렇게 취업난에 시달리는 이유기도 하지요오……!”
구민주는 냉장고에서 꺼낸 캔맥주를 반쯤 원샷 하고서 한숨과 함께 말했다.
“그랬구나. 우리 구진주는 아는 것도 많고 말도 조리 있게 잘하는구나. 내가 참으로 훌륭한 시녀를 얻었어. 너 같은 인재를 못 알아보다니, 이 나라 사람들은 참으로 눈이 삐었구나?”
“헤헤헤헤~ 감사합니다아~. 정말 최선을 다해서 루시 님을 모실게여어~ 루시 님은 저 버리시면 안 되여어…….”
반쯤 주정에 가까운 구민주의 말을 들은 루시는 고개를 끄덕이며 경청하는 리액션을 보였다.
첫 번째 개문 사태가 발생하고 대전쟁이 끝나기까지 10년, 이후 평화와 재건의 시대가 2년, 태광휘가 안빈낙도의 삶을 살다가 루한으로 납치되었던 1년, 그가 지구로 복귀하고 2차 개문 사태가 발생한 지 5년.
대강 20년의 역사가 루시의 머릿속으로 정리되었다.
‘루한에 대해서는 딱히 알려진 게 없나 보네?’
구민주의 말을 종합해 보니 루한에 대해서는 전혀 모르는 듯 보였다.
‘지구의 성녀라는 여자는 쥴리아를 통해 루한에 대해 알고 있다고 했어. 아마도…… 일부러 알리지 않은 모양이야.’
하긴, 이제 이틀째지만 이 지구라는 세계는 굉장히 욕망이 짙고 호전적인 사상으로 지배되고 있었다.
만약 지구의 다수가 루한에 대해 알게 된다면 그들은 분명 삿된 생각을 지닐 터.
‘그날 밤 솔라가 내게 나타난 것은 태평양이라는 게이트에 있을 때였어. 쥴리아의 도움을 받아서 말이야.’
무심코 왼쪽 약지에 있는 태양샘 반지를 쓰다듬었다.
어느덧 습관이 된 행동. 손목에 없는 어머니의 팔찌 대신이었다.
그 시들어 버린 세계수 팔찌는 세계수가 필요하다고 하여 현재 요정 숲에 가 있었다.
‘쥴리아가 이 태양샘 반지의 신호를 통해서 나와 솔라를 연결해 줬다고 했지.’
그랬기에 더더욱 각별하다.
이제는 설원의 저주도 완전히 해주해서 끼지 않아도 되거늘, 그녀는 변함없이 이 반지를 손가락에 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