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회귀여왕의 EX급 방랑기사-150화 (150/212)

제150화

#150.

드라마가 끝나고 잠시 광고가 이어졌다.

‘호오, 물건 홍보를 아주 기가 막히게 하는구나.’

루시는 저 광고마저도 재밌게 보았다.

그녀가 살았던 세계의 연극에서도 막이 끝나면 중간중간 후원 상단들이 무대에 올라 홍보를 하긴 했었다.

하지만 저 TV에서 나오는 광고처럼은 아니다.

‘비교조차 되지 않는구나.’

지구의 문화는 현란하고 강렬했으며 재밌었다.

‘음? 저건!’

그렇게 광고를 보는데, 익숙한 멘트가 TV에서 나왔다.

[오늘도 3초에 한 명씩 게이트 난민이 발생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남의 일이 아닌, 어쩌면 나의 일.]

그녀가 지구에 오자마자 보았던 광고가 TV에서도 나오기 시작했다.

‘솔라, 솔라가 곧 나오겠구나!’

어느덧 루시는 반쯤 일어나서 몰입했다.

[오늘도 3초에 한 명씩 게이트 난민이 발생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남의 일이 아닌, 어쩌면 나의 일.]

[여러분의 작은 관심과 도움이 필요합니다.]

[UN게이트난민구호회]

“……?!”

서서히 미간을 구겨졌다.

“저, 저, 저, 저년은 누구냐! 구민주, 민주야! 구민주 시녀장아!”

그녀는 갑자기 광고를 보다 말고 다급히 구민주를 불렀다.

“저분을 모르신다고요?! 성녀님이시잖아요? 지구의 성녀, 아스카 레이나.”

“성녀어?? 저 살모사 같은 게?!”

이에 루시는 격양된 반응을 보였다.

그녀의 시선이 광고를 죽일 듯이 노려본다.

지금 방영 중인 UN게이트난민구호회 광고는 도심에서 보았던 것과 다른 버전이었다. 태광휘와 지구의 성녀 아스카 레이나가 함께 난민 거리를 걸으면서 봉사 활동을 하는 버전이었다.

그런 둘의 모습은 서로 손도 잡지 않았음에도 어찌나 사이좋아 보이는지 루시의 이성을 뒤흔들었다. (자본주의 세계에서 연출한 장면이기에 더더욱 그랬다.)

“솔라, 아니, 태광휘와 저 성녀는 무슨 관계지?”

광고는 어느덧 끝이 나고 다른 광고가 뒤를 이었지만, 루시는 여전히 TV를 노려보며 다소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사실상 커플 관계죠?”

“커억!”

구민주의 짧은 대답에 루시의 입에서 숨 넘어가는 소리가 나왔다.

“솔라가, 솔라가 바람을……? 아니, 아니야. 그럴 리가 없어!”

화아아앗.

또다시 집 안의 공기가 얼어붙는다.

“어억!”

이번엔 구민주의 입에서 숨 넘어가는 소리가 났다.

사태의 심각성을 인지한 민주는 급히 뒷말을 더 했다.

“물, 물론! 태광휘 헌터는 부인하고 있고, 성녀가 일방적으로 구애하는 것으로 유명하지만요!”

휘우우욱.

그제야 그녀를 짓누르던 차가운 압박감이 사라졌다.

“아아……! 그럼 그렇지. 나의 솔라가 그럴 리가 없지. 다 저 살모사 같은 여자가 문제였구나.”

“네! 그렇습니다, 루시 님! 에헤헤헤. 태광휘 헌터는 아직 전 여…… 아니! 연애에 관심이 없어 보였습니다아!”

구민주는 태광휘가 아직 전 여친을 잊지 못했다고 말하려다가 급히 혀를 깨물고는 바꿔 말했다.

“그래, 솔라가 한눈을 팔 리가 없지! 암, 그렇고말고!”

이에 루시는 크게 안심한 눈치였다.

‘후우…….’

그런 고용주의 눈치를 살핀 민주 또한 안도의 숨을 작게 쉬었다.

‘솔라가 태광휘여……?’

구민주는 방금까지 눈앞에서 X랄 발광을 떤 고용주를 보며 머리 위로 물음표를 띄웠다.

‘보통 팬이 아닌가 보네?’

지구에서 태광휘는 단순한 영웅이 아니었다. 신앙 그 자체였다.

눈앞에서 루시처럼 발작을 일으키는 광신도와 사생 팬을 구민주는 미디어를 통해 여럿 보았다. 딱히 이상할 건 없었다.

‘설마 이 집이 태광휘 헌터의 집? 그리고 루시 님이 가족이라고 밝힌 사람이 태광휘?!’

그러다가 혹시나 하는 생각이 그녀의 머리를 스쳤다.

‘에이~ 설마. 애초에 태광휘 헌터 정도 되는 사람이 이런 집에 살 리가 없잖아? 루시 님이 그 사람 가족이면 혼자서 한국을 돌아다닌다는 게 말이 안 되지!’

이내 고개를 저었다. 그녀가 있는 이 집은 분명 엄청나게 좋은 집이지만, 지구 유일의 EX급 헌터 태광휘가 살기에는 많이 부족해 보였다.

루시 또한 마찬가지. 만약 루시가 태광휘의 가족이었다면 공항에서부터 국정원과 협회가 에스코트했을 것이다.

이렇게 세상 물정을 모르지도 않았을 것이고.

‘그나저나 성녀를 모른다는 건 좀 이상한데?’

설마 했던 자신의 생각을 외면한 구민주는 그러면서도 여전히 눈앞의 고용주가 이해되지 않았다.

‘아무리 속세와 떨어진 곳에서 살아왔다고 해도 태광휘는 알면서 늘 그 옆에 붙어 있던 성녀를 모른다고?’

하지만 구민주의 의문은 이어지지 못했다.

“구민주 시녀장, 저 성녀라는 여자는 지구에서 무슨 직위를 맡고 있지?”

루시의 목소리가 그녀의 상념을 짓밟았기 때문이다.

“예! 현재 부협회장을 맡고 있지요. 검룡 길드의 길드장이기도 하고요.”

“그녀도 태평양 게이트에 갔나?”

“아니요? 현재 성녀는 지구에 있어요, 협회장과 함께.”

“잠깐, 협회장이 지구에 있다고? 솔라가 협회장이 아니라?!”

“각성자협회장은 한국지부장인 박태오 헌터가 역임 중이에요.”

“그럼 솔라는?”

“솔라…… 태광휘 헌터님은 공식적으론 어떤 직함도 보유하고 계시지 않을걸요? 물론 셀 수 없이 많은 명예직은 가지고 있지만요. 명예 협회장, 명예 길드장, 명예 학위, 명예 시민권, 명예 장관 등등…….”

구민주는 루시에게 설명을 하면서 점점 가슴속에 불길함이 치솟았다.

이 루시라는 고용주, 세상 물정을 몰라도 너무 모른다.

그래, 모를 수는 있다.

문제는, 이렇게 되면 진짜 문제는…….

‘에이…… 설마…….’

애써 부인하려 했지만, 이상하게 진짜일 것 같아서 더욱 두렵다.

그녀는 혹시나 하는 생각에 급히 휴대폰을 켰다.

휴대폰 홈 화면에 배치한 뉴스 위젯이 이런 속보가 떠 있다.

[청은발에 냉기 이능을 사용하는 미등록 여성 각성자 수배 중.]

덜덜덜덜.

휴대폰을 들고 있던 구민주의 손이 덜덜 떨렸다.

“결심했다. 나는 길드나 협회 따위에 가지 않겠어!”

“……?!”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루시의 청천벽력같은 선언이 그녀의 뺨을 때린다.

줄줄줄줄.

구민주의 이마에서 식은땀이 샤워기처럼 내리기 시작한다.

“어, 음, 루시 님……? 아직 협회에 각성자 등록을 하지 않으신 겁니까?”

구민주는 애써 이성을 유지하면서 아까부터 들었던 불길함을 확인했다.

“그렇다.”

‘맙소사!’

그 불안감은 현실이 되었다. 방금까지 낙원에 있던 그녀의 영혼이 지옥으로 떨어졌다.

“미, 미, 미, 미, 미등록 각성자가 되면…… 아, 안 되는데요오……. 히잉.”

그녀는 최선의 용기를 내서 루시를 향해 말했다.

“왜 안 되지?”

“그게에…… 법이이…….”

“필요 없다.”

이에 루시는 시큰둥하게 반응할 뿐이다.

‘나보고 그 여자 아래로 들어가라고? 절대로 싫어!’

루시는 결심했다. 협회에 가지 않기로. 검룡인지 뭔지 하는 길드에도 가지 않기로.

지금 거기에 들어가면, 아무리 조직도상이라도 성녀인지 변녀인지 하는 살모사 아래로 들어가는 꼴이 된다.

‘성녀는 루한에 대해 알고 있어. 괜히 그걸 가지고 나를 이용하려 들지도 몰라!’

이것은 지고한 루한의 여왕이자, 설원의 대마녀의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다.

‘무엇보다 솔라는 협회와 길드에 마인과 연관된 자들이 잠입해 있다고 했어.’

태광휘는 루시에게 협회와 길드에 들어가더라도 너무 신뢰하지 말라고 한 뜻이었으나, 지금의 그녀에겐 이 부분은 멋대로 왜곡된 상황.

“나처럼 협회에 등록하지 않은 각성자가 아예 없나?”

“그으, 없는 건 아닌데요오……. 아까 루시 님이 참교육하신 놈들도 미등록 각성자일 테니까요.”

“그럼 뭐가 문제지?”

‘으어어어어어!’

구민주는 속이 까맣게 타들어 갔다.

“문제는…… 그런 미등록 각성자를 세간에선 보통 빌런이나 마인이라고 부르거든요…….”

말을 하는 구 매니저이자 구 시녀장의 얼굴은 눈앞에서 사탕을 빼앗긴 아이처럼 울상이었다.

“루시 님! 부디 협회에는 들어가 주심 안 될까요? 지금 이렇게 속보로 루시 님 수배령까지 떴단 말이에요!”

“그걸 보니 더더욱 가기 싫구나. 감히 나를 수배해? 무례해도 너무 무례해.”

“그럴 수밖에 없는 게! 루시 님의 이능은 협회 헌터들에게 지울 수 없는 트라우마이기 때문이에요!”

매니저는 자신을 고용한 고용주를 향해 답답하다는 듯 외쳤다.

“자세히.”

그 모습이 꽤 절박했는가 보다. 루시가 모처럼 눈을 빛내며 현지 시녀를 응시한다.

“루시 님은 아주 강력한 냉기 계열 원소술사시죠. 물론 비슷한 이능을 지닌 각성자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루시 님처럼 S급에 가까운 사람은 매우 드물어요!”

“호오? 나와 비슷한 힘을 지닌 설원의 마녀가 있다는 건가?”

“설원의 마녀가 뭔지는 모르겠지만…… 비슷한 이능을 보유한 가장 악명 높았던 마인은 있었죠. 바로 인류를 배신하고 인류의 공적이 된 헌터! 옛 마왕의 사천왕이었던 빙하의 여제요!”

“빙하의 여제?”

“하아, 네에…….”

‘그래, 까짓거 매니저 업무에 인간 나무위키 하나 추가되는 거지 뭐.’

거의 백지에 가까운 루시의 상태를 민주는 이제 완전히 포기하고는 설명을 이었다.

“빙하의 여제 베아트리체! 태광휘 헌터의 연인 박소영을 죽이고, 그의 반려 정령 아스트라까지 소멸시켰던 인류의 공적이지요!”

이젠 될 대로 되라지! 그녀는 아까 하려다 말았던 태광휘의 옛 여자에 대한 말까지 루시에게 했다.

“?!”

그 말에 루시는 확실히 제대로 충격을 받은 것 같았다.

충격으로 패닉에 빠진 고용주의 얼굴을 본 구민주는 어째 속이 시원한 기분을 느꼈다.

“뭐, 애…… 애인……? 그리고 베아트리체……?”

“물론 그 베아트리체라는 사천왕은 이제 이 세상에 없지만요. 태광휘 헌터의 태양검에 죽었거든요. 그 과정에서 아스트라가 소멸되었지만. 저기, 괜찮으세요? 루시 님?”

멍한 표정을 짓고 있는 루시의 귀로 구민주의 걱정 어린 목소리가 모기처럼 앵앵거린다.

마왕의 사천왕이었다는 빙하의 여제 베아트리체와 솔라의 옛 애인이었다는 박소영이라는 여자.

새로 알게 된 두 사실이 루시의 머릿속을 혼란스럽게 했다.

‘베아트리체면…… 초대 여왕님의 성함인데?’

그래도 이건 동명이인으로 넘어가면 된다.

찝찝하긴 해도 우연의 일치 정도로 치부할 수 있다.

‘박소영? 애인? 솔라의 첫사랑?!’

오히려 지금 루시를 신경 쓰이게 만드는 것은 바로 박소영이라는 여자다.

원래 사랑하는 이의 전 연인만큼 마음에 걸리는 것은 없는 법.

빙하의 여제 베아트리체에 의해 목숨을 잃었다고 했지만, 마음속 충격의 물결은 컸다. 자신이 첫 번째가 아니라는 생각이 의미 없는 질투심을 자극했다.

‘그것도 하필이면…….’

특히, 자신과 비슷한 냉기를 품고 루한의 초대 여왕과 이름이 같은 여자에게 죽었다는 꺼림칙함.

‘설마 그 빙하의 마녀가 정말로 초대 여왕님과 관련이 있는 것은 아니겠지?’

그 꺼림칙함이 루시의 숨을 조였다.

무엇보다.

‘솔라는 내게…… 이런 얘기를 해 주지 않았어.’

머릿속으로는 이해할 수 있었다.

딱히 좋은 얘기도 아니었으니까.

하지만.

하지만.

“…….”

이상하게 서운한 감정이 든다.

매우 정신 없었던 밤을 뒤로하고 루시와 구민주는 각각 잠을 잘 방을 골랐다.

“아무 데나 쓰거라. 나는 네가 말한 방을 쓰겠다. 사진이라는 것이 있는 방이 어디에 있다고 했지?”

“저기 2층으로 올라가시면 제일 끝에 있습니다.”

구민주는 이 집에서 유일하게 사용감이 있던 방의 위치를 순순히 알려 줬다.

그리고 자신은 손님용으로 마련된 것 같은 방으로 향했다.

다른 방과 마찬가지로 텅텅 비어 있었지만, 그래도 손님용 방에는 퀸 사이즈의 침대와 침구류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두 사람은 각자가 선택한 방으로 몸을 움직였다.

루시는 힘없는 걸음으로 태광휘가 주로 머물던 방문 앞에 섰다.

‘여기가 솔라가 쓰던 방…….’

그녀는 침을 꿀꺽 삼키고는 조심스레 방문을 열었다.

흐읍!

문을 열자, 그리운 그의 냄새가 루시를 감싸 안는다.

괜히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아아……!”

가지런히 정리한 침대와 이부자리에는 장시간 자리를 비울 것을 예상이라도 했는지 먼지 천으로 덮여 있었다.

뒤이어 크고 단순한 책상이 보였고 그 책상 위에는 TV와 비슷하게 생긴 것이 올려져 있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방 한편에 모여 있는 액자들.

“솔라시우스……!”

사진이라고 했던가? 루시도 비슷한 것을 본 기억이 있다. 회귀 전의 루한에서 말이다.

루한에서는 굉장히 귀했던 사진. 심지어 회귀 마지막 때에나 처음 등장했던 사진이지만. 이 발전된 세계에선 매우 흔한 모양.

여왕은 한참을 멍하니 서서 사진들을 보았다. 중간중간 성녀와 함께 찍은 사진은 엎어서 안 보이게 해 놨다.

그러다가 솔라의 단독 사진이 담긴 액자 하나를 들고는 침대 위에 몸을 뉘었다. 먼지 천을 치운 이부자리엔 이 세상에서 가장 진하게 태광휘의 냄새가 남아 있었다.

그녀는 밤새 사진을 보면서, 그이의 냄새를 맡으며, 가슴에 드리웠던 이유 모를 서운함을 지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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