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회귀여왕의 EX급 방랑기사-151화 (151/212)

제151화

#151.

날이 밝았다.

구민주는 비어 있던 아무 방에서 부스스 몸을 일으켰다.

어제와 그제의 혼란스러웠던 일들이 마치 꿈처럼 느껴질 정도로 이름 모를 고위 헌터(태광휘)님의 집은 평화롭고 아늑했다.

집은 넓었고 각층의 화장실에는 손님을 위한 일회용 칫솔과 세면도구가 구비돼 있었기에 씻는 데에는 어려움이 없었다.

이틀 동안 입었던 옷과 속옷도 깨끗했다. 집 안에 마련된 세탁실에서 어젯밤 세탁과 건조를 진행했기에 찝찝하진 않았다.

그래도 옷이 부족한 것은 사실이라, 그녀는 이따 3일 전까지 살았던 고시원에 들려 옷과 짐을 챙겨 올 생각이었다.

가볍게 아침 샤워를 마치고, 밤사이 세탁한 옷을 입고 나온 민주는 퀭한 얼굴로 거실 소파에 앉아 있는 루시를 보았다.

어젯밤 이 집의 주인이 주로 머물던 방으로 들어가는 것까진 봤는데, 언제 저렇게 나온 것인지 모르겠다. 뭐, 알아도 딱히 의미 없을 것 같기도 하다.

구민주의 고용주는 어쩐 일로 거실에 있는 TV를 보지 않고 있었다. 대신 비단으로 만든 것 같은 고풍스러운 동전 주머니 같은 것을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

그런 루시를 본 민주는 ‘지금이라도 도망칠까?’라는 생각을 했다.

‘성격이 이상하긴 해도 나쁜 사람은 아니야! 무엇보다 실력이 진짜야! 우리 루시 님이 방황만 끝내신다면! 그래, 조금만 더 버티자! 악으로 깡으로 버티자아!!’

세상은 각성자가 최고고 그다음이 각성자와의 인맥임을 뼈저리게 느꼈던 구민주는 흔들리는 마음을 잡았다.

“안녕히 주무셨습니까아!”

그리고 군 복무 시절을 떠올리며 힘차게 아침 인사를 올렸다.

구민주가 아침 인사를 하자, 루시는 성인 여성 주먹만 한 주머니에서 시선을 떼지 않고 물었다.

“일어났느냐? 어딜 가려고?”

“옛! 잠시 집에 좀 다녀올게요!”

어젯밤, 그토록 다양한 X랄을 보여 주셨던 고용주는 아침이 된 지금은 살짝 저기압으로 보였다.

“집?”

구민주가 집에 갔다 온다고 하자, 아공간 인벤토리를 수리 중이던 루시의 고개가 처음으로 움직였다.

“넵! 거기서 짐 좀 챙겨 오겠습니다.”

“그래? 같이 가자. 너의 집이 어떻게 생겼는지 궁금하구나.”

루시가 고개를 끄덕이면서 몸을 일으킨다.

수리하다 만 아공간 인벤토리는 품 안에 넣었다.

“가…… 같이요?”

고용주께서 따라가겠다고 하자, 구민주가 난색을 표했다.

“하지만 루시 님은 수배 중이신데…….”

“그건 걱정 안 해도 된다.”

루시는 의기양양한 표정을 짓더니 손을 들어 자신의 청은발을 쓰다듬었다.

그러자 그녀의 청은발이 이 나라에서 가장 흔한 흑발로 변했다.

“우와아……!”

구민주가 아침부터 눈을 크게 떴다. 미디어를 통해 무수한 이능을 보았지만 저런 마법 같은 이능은 처음 본다.

“밤에 잠이 안 와서 만든 마법이니라. 인지 저하 마법은 마도구가 아니면 힘든 것 같아서 대신 염색 마법 수식을 만들었지. 이건 마도구 없이도 되더구나. 물론, 유지 시간이 좀 짧은 게 흠이지만.”

그렇게 말하면서 나갈 채비를 하는 루시였다. 애초에 짐이라고 할 것도 없었다. 그녀는 소파 구석에 던져 놨던 국서의 검 윈테이라만 벨트에 찼다.

“저기, 루시 님…… 그 푸른색 검도…….”

“이것도 수배지에 적혀 있던가? 쓸데없이 꼼꼼하구나.”

구민주가 윈테이라를 지목하자, 루시는 미간을 구기곤 윈테이라에도 염색 마법을 적용했다. 푸른색 마검이 순식간에 검은색 마검으로 변했다.

“으어……?”

결국 민주는 빼도 박도 못하고 루시와 함께 외출을 해야만 했다.

“그럼 나가기 전에 간단히 아침이라도 드시겠어요……?”

자포자기한 그녀가 냉장고를 가리키며 조심히 물었다.

“너만 먹어라. 난 나중에 그이와 함께 먹을 거다.”

“그이라면……?”

어제는 수련 중이라서 안 먹는다고 하지 않았던가? 구민주는 고개를 갸웃거렸고.

“솔라시우스.”

“아, 예…….”

루시의 말에 민주는 그러려니 하고 넘겼다.

그리고 아침을 해결하기 위해 냉장고를 열었다.

“으음…… 그냥 나가서 먹는 게 낫겠습니다.”

그녀는 냉장고 안을 보고서 집에서 아침을 먹는 것을 포기했다.

도저히 아침부터 먹을 만한 게 없었기 때문이다.

집 현관문을 나서면서 구민주는 조심스레 루시에게 물었다.

“루시 님, 그런데 정말 협회에 등록을…….”

“할 생각 없다.”

“…….”

꽉 막힌 고용주의 태도와 그런 고용주에게 인생을 건 자신의 처지가 아침부터 처량하다.

* * *

“신기하도다. 이 조그맣고 가벼운 것 안에 이토록 많은 정보가 담기다니. 이건 도대체 무슨 마도 공학인고?”

루시는 자신의 손안에 놓인 스마트폰(구민주의)을 보며 연신 감탄했다.

“무엇보다 이 인터넷과 나무위키라는 것은 천계에 존재한다는 아카식 레코드와 유사하구나. 언제 어디서 누구든지 세상의 모든 정보를 탐독할 수 있다니.”

이쯤 되면 인정하지 않을 수가 없다.

지구의 문명은 모든 부분에서 루한을 압도한다는 것을.

물론 섬세한 마법과 주술적 노하우는 그녀의 세상이 일부 앞선다. 하지만 지극히 일부일 뿐이다.

특히 그녀가 살던 세계는 정보의 공유가 매우 폐쇄적이다.

지구처럼 매 순간 새로운 정보를 공유하는 수단은 없었다. 기껏해야 백성들의 입소문과 높으신 분들이 사용하는 마법 통신이 전부다.

‘나중에 루한으로 돌아가면…….’

차 안 조수석에서 루한의 여왕은 결심했다. 자신의 치세에선 루한에 마도 혁명을 일으킬 것임을!

“많은 도움이 되었나요, 루시 님? 에헤헤헤헤.”

옆에서 운전대를 잡고 있던 구민주가 다소 비굴한 어조로 곁눈질한다.

“그래, 참으로 대단하구나.”

“그으…… 빙하의 여제가 얼마나 안 좋은 이미지인지 아시겠죠? 그러니까…….”

“그런데 베아트리체라는 여인의 사진은 없는 거냐? 죄다 추상화만 있는 거 같은데?”

“예, 누구도 빙하의 여제의 얼굴을 모릅니다. 늘 얼음으로 된 가면을 쓰고 다녔거든요. 하지만 루시 님과 똑같은 청은발은 유명했어요.”

지금 루시는 구민주의 핸드폰으로 나무위키의 베아트리체 항목을 읽고 있었다. 스마트폰 사용법은 총명한 대마녀답게 금방 익혔다.

‘솔라가 나와 거리를 두려 했던 이유에는 이런 이유도 있었던 걸까?’

루시의 눈이 ‘베아트리체의 박소영(당시 검룡 길드 경영실장) 살해 항목’에 고정돼 있다.

“……이런 이유로 루시 님의 이능이 더욱 의심을 살 겁니다. 그러니 지금이라도 협회로 가셔서…….”

옆에서는 그녀의 현지 시녀장이 연신 협회로 가라고 조언하고 있다.

“이미 결심한 사안이다.”

그러나 여왕의 귀는 늘 열려 있으면서도 중용을 지켜야 하는 법.

빠아앙!!

“저 X발 새끼가! 깜빡이도 안 켜고 끼어들기를 해?! 운전 진짜 뭣같이 하네?”

“?!”

“여기 지금 누가 타고 계시는데! 앗! 죄송합니다, 루시 님, 제가 운전대를 잡으면 좀 예민해져서…….”

“…….”

운전을 하다가 갑자기 경적을 울리고 욕설을 내뱉는 시녀장의 모습에 루시는 경계의 눈빛으로 운전석의 핸들을 보았다.

‘이 자동차라는 마차를 몰게 되면 다들 성격이 공격적으로 변하나? 어제 택시라는 걸 몰던 마부도 그러더니.’

역시 세상에 공짜는 없는 듯하다. 편하게 이동할 수 있는 대신에 정신적인 대가를 치러야 하는 모양.

어째 저 성질이 자신을 향한 것 같은 느낌적인 느낌이 들었지만, 설마 아니겠지.

‘어찌 되었든 참으로 재능이 많은 아이야.’

루시는 현지 시녀를 참으로 잘 거뒀다고 생각했다. 배움의 깊이도 깊고, 말도 조리 있게 잘한다. 저 조그만 체구로 마차도 잘 몬다. 참으로 시녀에 적합한 인재가 아닐 수 없었다.

‘이건 충성심 테스트다. 충성심 테스트야! 후우.’

구민주는 애써 속으로 되뇌이며 운전에 집중했다. 방금 운전을 뭣같이 하는 새끼 때문에 혈압이 급 올랐다가 막 진정된 상황.

결코 옆에서 똥고집을 부리고 계신 마인(진) 때문이 아니다.

그녀가 현재 몰고 있는 차는 렌터카였다.

짐도 옮겨야 하고 루시의 눈길을 끄는 외모 때문에 고른 피치 못할 선택지였다.

당연한 말이지만 돈이 또 깨졌다.

물론 평택의 집을 생각하면 고시원에 매달 내는 월세를 아낄 수 있어 그게 그거다.

‘고위 헌터들은 유독 인간 불신이 심하다고 했어. 그래서 일부러 말도 안 되는 자존심을 부리는 걸 거야. 더불어 내가 얼마나 이런 상황에서 버티는지도 보는 거겠지!’

루시가 협회로 등록하러 가지 않는 이유도 민주는 그녀의 상식선에서 최대한 해석하려 했다.

그래, 이건 충성심 시험이다!

‘문제는 이걸 언제까지 하느냐인데…….’

슬슬 계좌에 꽁꽁 모셔 둔 생활비가 바닥을 보이기 시작한다.

‘물린 주식이라도 깨야 하나?’

그녀는 최악의 상황까지 고려했다.

주식 계좌에는 구민주의 20대 대부분이 들어 있다. 틈틈이 과외와 알바를 하면서 모은 돈이 들어 있었다.

‘태광휘와 헌터들이 태평양 게이트에 막 들어갔을 때! 그때 바로 뺐어야 했는데!’

따흐흑! 소리 없는 울음이 터졌다.

결코 망할 일이 없는, 존버만 하면 분명 목돈을 만들어 줄 유니콘 기업들이었지만 대공황의 파고는 피하지 못했다. 죄다 평균 마이너스 70%대에 물렸다.

‘이걸 깨? 주식 말고 사람에 투자해?’

“잠시 후, 100미터 앞에서 좌회전입니다.”

그녀가 그렇게 깊은 고민을 하는 중에도, 차량의 내비게이션은 어느덧 구민주가 살았던 고시원을 화면에 표시했다.

루시는 파란색 야구 모자를 깊게 눌러 쓰고서 구민주와 함께 고시원으로 들어갔다.

“구민주 시녀장아?”

그리고 자신의 시녀장이 살았다는 방을 보고는 눈을 떨었다.

“그대는 혹시 죄인 신분인가? 무슨 죄를 지었어?”

“에?”

이 똘똘한 현지 시녀가 화장실보다 좁은 방 안에서 살고 있었다는 것이 충격으로 다가온 모양.

“아닙니다. 저는 맹세코 착하게 살아왔습니다, 루시 님.”

“죄도 짓지 않았는데 왜 이런 집에?!”

“돈이 없어서…… 아하하하.”

부끄럽다는 듯 뒷머리를 긁는 구민주.

‘솔라의 세계는 뭔가 이상해.’

루시는 눈을 질끈 감았다. 잠깐만 있었는데도 답답함을 크게 느꼈다.

죄인이거나 노예라면 모를까, 눈앞의 아이는 루시가 보았을 때 모자라지 않았다. 똑똑했고 재능도 많았다. 절대 이런 곳에서 살 이유가 없는 아이였다.

“일단 가자, 짐부터 싸고.”

“예!”

루시는 측은한 심경으로 자신의 시녀를 재촉했다. 이 좁은 곳에서 최대한 빨리 나가고 싶었다.

애초에 방이 좁다 보니 짐은 얼마 되지 않았다. 여행용 캐리어에 옷들을 쑤셔 넣고, 커다란 백팩에 노트북과 각종 전자기기와 잡동사니를 넣으니까 이사 준비 끝이다.

“여보세요? 예, 사장님. 오늘까지만 머물고 바로 이사를 가려고요. 아하하! 취업이 되어서, 아이고! 감사합니다.”

짐을 들고 고시원 밖으로 나온 구민주는 이 좁아터진 집의 주인에게 전화를 하고 있었다. 자그마한 체구에 자신의 몸보다 큰 백팩을 멘 시녀의 모습이 참으로 애처롭기 그지없었다.

‘서둘러 아공간 인벤토리를 수리해야겠군.’

그런 구민주를 보면서 루시는 다짐했다. 이 불쌍한 시녀에게 급료를 한시라도 빨리 줘야겠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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