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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여왕의 EX급 방랑기사-153화 (153/212)

제153화

#153.

다행히 루시의 시녀 구민주는 아직 무사했다.

이 나라는 평범한 여인도 출산을 하지 않는 한, 군복무를 해야 한다고 들었다. 그래서인지 군대를 다녀온 구민주의 눈치와 몸놀림은 상당했다.

“루시, 루시 님!!”

루시가 차에서 나오자마자, 구민주가 급히 쪼르르 달려와 그녀 뒤에 섰다.

그리고 오들오들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저, 저 사람들 전부 각성자예요! 그리고 뭔가 위험한 거 같아요! 경찰에 신고해야 하나? 아이씨, 신고하면 미등록 그게 걸리나?”

“괜찮다. 너는 뒤에 있으렴.”

루시는 불안에 떠는 시녀를 달래곤 차가운 얼굴로 방해꾼들을 노려보았다.

부우우웅, 끼익, 끼익.

앞쪽에서도 검은색 승용차 두 대가 나타나 두 사람을 포위했다.

포위가 끝나고 사방에 적막이 찾아오자, 앞쪽에 있던 차량에서 한 남자가 내렸다.

“이런, 누군가 했더니! 루시 님이었군요? 이거 또 뵙습니다?”

차에서 나온 사람은 구면이었다. 아까 백화점에서 처음 그녀에게 다가와 수작을 걸었던 김명찬이라는 남자다.

“그나저나 미안합니다. 이거, 저희 직원이 뒤따라오다가 졸음 운전을 했나 봐요. 100퍼센트 우리 실수입니다. 어디 다치진 않으셨지요?”

그는 루시를 보자마자 속사포처럼 준비했던 멘트를 이었다.

지금 이 사고는 고의로 낸 것이 명확해 보였다.

“저희가 전부 손해 배상에 위로금까지 드릴 테니, 잠시 시간 좀 낼 수 있을까요? 보험사에서 처리하는 동안 같이 식사라도 하지요?”

우르르르.

앞뒤를 가로막은 검은색 차량에서 검은 정장을 입은 사람들이 우르르 나오더니 루시의 주위를 에워싼다.

“그런데 그사이 염색이라도 하셨나? 뭐, 그 색도 아주 예쁘다! 잘 어울려.”

의기양양해진 김명찬은 마치 예술 작품을 감상하듯 루시를 훑어보았고 연신 기분 나쁜 감탄사를 내뱉었다.

“…….”

이 극도로 무례한 상황에 루시는 당연하게도 상당히 빡이 칠 수밖에 없었다.

이계에서 온 여왕은 혹한을 담은 것 같은 쌀쌀한 얼굴을 했다.

‘죽일까?’

진심으로 생각했다.

고오오오.

설원의 권능을 움직였다. 주위 온도가 서서히 내려가기 시작한다.

마음속에 살심을 띤 루시의 상태를 아는지 모르는지.

“거, 표정 좀 푸세요? 누가 보면 일부러 사고를 낸 줄 알겠어요. 나, 그렇게 막 나가는 놈 아니라니까?”

김명찬은 욕망에 찌든 미소로 말을 이었다.

“불순한 의도는 없다 그러네? 보세요, 저기 경찰들도 오잖아?”

사고가 난 지 1분도 안 지난 것 같은데 경찰차가 기다렸다는 듯 나타났다. 사이렌은 울리지 않았다.

“경찰입니다.”

“다치신 분은 없습니까?”

경찰들이 뒤쪽 범퍼가 찌그러진 구민주의 렌터카 쪽으로 다가왔다.

“그나저나, 보험사는 불렀나요?”

현장에 도착한 두 경찰 중 나이가 많아 보이고 직급도 높아 보이는 경찰이 루시와 구민주를 향해 물었다.

“아뇨, 아직…….”

구민주가 대표로 말했다. 그녀의 얼굴은 경찰이 왔음에도 펴지지 않았다. 오히려 더 창백하다.

“보험사 안 불러도 되니까 그냥 가면 안 될까요? 보상 안 받아도 돼요!”

민주는 떨리는 목소리로 경찰에게 말했지만,

“에이~ 그쪽이 피해자인데? 여긴 저희가 보험사랑 같이 잘 해결할 테니, 그동안 저분들이랑 식사라도 하고 오시죠? 이렇게 보니 선남선녀야? 이건 내가 봤을 때 운명이다! 운명!”

언제부터 경찰의 업무에 보험사 일과 결정사 일이 추가되었는지 모르겠다.

평소라면 요란한 사이렌 소리와 함께 도착했을 레커차조차도 지금은 코빼기도 보이지 않는다.

“그나저나 저 청은발에 푸른색 검. 혹시, 협회에서 수배로…….”

“쉿! 조용히 해!”

주위에서 직원들이 루시의 외모를 보고 수배자 얘기 꺼내는 것이 들렸으나, 철저하게 묻혔다.

“아니, 저희는 저분들이랑 식사하기 싫다니까요?”

구민주는 계속해서 강하게 거부 의사를 밝혔다.

“피할 수 없으면 즐기시는 게 어때요? 남자가 이렇게 좋아하는데 너무 빼면 안 좋아요.”

오히려 경찰은 대놓고 김명찬의 편을 들었다.

“나 같으면 이참에 팔자 고쳤다.”

경찰과 직원들의 시선이 두 여자의 옷을 훑었다. 동시에 렌터카 트렁크와 뒷좌석에 있던 짐들도.

구민주는 저가 브랜드로 된 옷을 입고 있었다. 반면 루시는 브랜드를 추정하기 힘든 옷이었다. 고급 원단에 수제로 만든 옷이었으나 여기서 이를 제대로 평가할 사람은 없었다.

기껏해야 날 때부터 재벌 4세였던 김명찬 정도지만, 지금의 그는 욕정에 눈이 멀어 루시의 얼굴과 몸매에만 정신이 팔려 있을 뿐.

“보아하니 사연이 있어서 떳떳하지 못한 것 같은데, 나랑 함께 있으면 다 해결해 줄게! 어때?”

염색 마법이 풀린 루시를 본 김명찬은 그녀가 수배지에 있는 미등록 각성자임을 눈치챈 모양. 그러나 개의치 않았다. 오히려 이를 이용하려 들었다. 어느덧 존대보다는 반말을 더 많이 하면서.

고오오오.

“…….”

그리고 이는 루시의 분노 게이지를 맥스로 만들기에 충분했다.

대놓고 납치 협박을 일삼는 장사치.

그 장사치 옆에 기생하는 공권력.

‘이게, 나라?’

루시는 루한보다 훨씬 앞선 지구라는 세계의 이면에 깊은 실망감을 느꼈다.

‘이딴 게…… 솔라의 세계?’

뚜욱.

머릿속에서 무언가가 끊어지는 것을 느꼈다.

“그나저나 왜 이렇게 추워?”

“여름 맞아?”

“그러고 보니 저 미등록 수배자 이능이 냉기잖아!”

여왕의 역린을 건드린 반응은 빠르게 찾아왔다.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 대기가 변했다.

“……맙소사!”

민감한 각성자들은 대기에 분포된 마나가 빠르게 동결되고 있음을 알고는 경악했다.

살기가 모두의 피부를 콕콕 찌른다.

고오오오오오!!

이성이 반쯤 끊어진, 머릿속이 분노와 짜증으로 가득 찬 여왕의 소리 없는 포효가 터져 나왔고.

그리하여 루시푸르네의 머릿속에 든 생각은 오직 하나!

‘내조!!’

본래 군주가 자리를 비우면 정실부인이 내정을 맡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

그러니 명분은 충분하다 못해 넘쳤다.

고오오오오.

설원의 권능이 기지개를 펴기 시작했다.

-!

늦여름은 혹한이 되어 두 여인을 포위한 자들을 덮쳤다.

……여름이었다.

* * *

구민주는 질끈 감았던 눈을 슬며시 떴다.

“으흐으으으으…….”

두려움 때문인지, 추위 때문인지, 둘 다인 것이 분명한 오한이 그녀의 어깨와 몸을 연신 떨게 만든다.

오들오들 떨면서 주위를 살피다가 이윽고 자신이 지금 누구의 다리를 껴안고 있는지 인지한다.

“춥지?”

이어서 위쪽에서 들려온 목소리.

“히이이익!!”

고용자가 고용주의 한쪽 다리를 매미처럼 껴안고 있는 모습은 꽤나 인상적이다. 각자 서로에게도.

“죄, 죄송합니다아!”

구민주는 서둘러 루시의 다리를 놓고 거리를 1미터 정도 벌렸다.

껌딱지처럼 여왕의 다리를 꼭 껴안았던 시녀. 그 시녀를 제외한 모든 것이 설원이 되었다.

잠시 후 기온 차이로 일어난 수증기가 가시고, 서서히 목도하게 된 광경에 구민주는 할 말을 잃고 그저 입을 쩍 벌릴 뿐이다.

“으아…….”

이 상황, 이 장면. 전에도 본 적 있다. 취업 사기를 당해 인신매매에 처했을 당시에도 이랬었지.

설원이 된 대지 위로 무수한 얼음 동상이 보였다. 세포를 넘어 영혼까지 꽁꽁 얼렸을 것 같은 무참함이 저기에 있다.

대전쟁을 겪은 이들에겐 빙하의 재앙으로 더욱 다가올 트라우마가 재현되었다.

‘이,이건 진짜 빙하의 여제급이잖아?’

구민주는 악당을 무찔렀다는 속 시원함보단 자신의 고용주께서 결국 마인이 되었다는 현실이 암담했다.

‘이젠 빼도 박도 못하는구나…….’

눈앞에서 십수 명의 사람이 몰살당했다는 충격은 1도 와 닿지 않았다. 그저 이 일로 인해 더욱 집요해질 협회의 추격과 루시와 함께 사은품으로 엮이게 될 그녀의 인생만 신경 쓰일 뿐.

‘나, 난 뒈졌다!’

구민주는 유년기부터 청소년기까지 대전쟁을 겪었던 몸.

그랬기에 눈앞에서 사람들이 무참히 얼어 뒈져도 크게 충격을 먹지 않았다.

애초에 군 복무 때에도 죽음은 심심치 않게 보았다.

5차원의 마수계에서 왔다는 몬스터들까지 비각성자들의 몫이었으니까, 한 발에 5만 원 정도 하는 마석 코팅된 대괴수탄으로 중하급 몬스터는 줄곧 사냥했었지. 그 몬스터에게 살해당한 민간인과 전우들도 직접 여러 번 수습했었고.

“이제 어쩌지요?”

구민주는 멍한 얼굴로 돈도 상식도 없으면서 힘만 더럽게 많은 고용주를 올려다보며 물었다.

“어쩌긴? 집에 가면 된단다.”

자신의 물음에 놀랍도록 평온하게 반응하는 고용주의 모습.

“……!”

루시를 향한 구민주의 마음속에 처음으로 두려움과 경외 대신 짜증이 서렸다.

“하, 하지만 이런 학살을 벌여 놓고서요?”

그래도 초인적인 자제력으로 고용주께서 해 놓은 참사를 가리켰다.

“민주야, 이건 학살이 아니란다. 암살이지. 목격자가 없지 않느냐.”

“허업!”

그 말은 마치 계속 토 달면 너도 저렇게 만들어 버리겠다는 뜻으로 들렸다.

‘블랙박스와 CCTV랑 경찰의 보디캠이랑…….’

아직 하지 못한 얘기가 있었지만 속으로 삭였다.

“예, 예! 어서 이동하겠습니다.”

대신 구민주는 허겁지겁 고용주께서 지시한 바를 행하는 티를 냈다.

우선 렌트한 차를 살폈다.

“아, 차, 차가…….”

하지만 차 또한 꽁꽁 얼어 버린 모양.

빠득.

핸들을 돌려봤는데, 고드름처럼 뚝 하고 부러져 버렸다.

바스스슷.

뒤이어 깜빡이 막대가 눈꽃 빙수처럼 부서졌다.

‘적어도 블랙박스나 CCTV 복구는 못하겠네?’

그 와중에 구민주는 생각했다.

‘이건 과실 비율이 어떻게 될까? 저 고용주께서 손해 보험을 들진 않았을 테고.’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차를 살피다가, 혹시나 싶어 아까 쇼핑하면서 산 뒷좌석의 짐들을 보았다.

“…….”

역시나 꽁꽁 얼어 있다.

“민주야, 뭐 하니? 어서 가자꾸나.”

차 밖에서 루시의 채근하는 목소리가 들렸다.

“차, 차가 고장났는뎁쇼?”

구민주는 왠지 눈물이 날 것 같은 감정을 삼키며 대꾸했다.

살짝 목소리를 높여서 따지듯 대꾸한 것이지만, 천만다행히도 그녀의 고용주는 눈치채지 못한 모양.

“나도 그건 안단다, 민주야.”

오히려 자상하게 웃으면서 가까이 오라고 손짓한다.

“……!”

문득 민주는 눈앞의 저 손짓이 운명의 갈림길로 느껴졌다.

저 손짓대로 루시와 함께 쭉 가느냐, 아니면 이제라도 손절을 하느냐.

무엇이 되었든 돌이킬 수 없는 선택의 순간.

‘어차피 망한 인생!’

그녀의 선택은 이미 정해져 있었다.

* * *

늦은 밤, 평택시 외곽, 텅 빈 운동장.

파아아앗.

지구에선 매우 낯선 모양의 마법진이 갑자기 생성되더니 빛을 터트린다.

그 빛무리 안에서 두 여인이 모습을 드러냈다.

‘이…… 이중 능력자?!’

공간 이동을 뜻하는 빛무리의 여운 속에서 구민주는 그저 기겁할 뿐이다.

S급의 원소술사도 모자라서 공간 이동이라니?!

게다가 재벌 3세, 4세들이 너도나도 집착하는 비현실적인 외모까지.

신이 존재한다면 지나치게 편애한 것이 분명하다고 확신이 들었다.

“피곤하니 어서 가자.”

“네에…….”

자동적으로 생성되는 고용주님을 향한 경외심.

구민주는 절로 조신해졌다.

인근에서 공간 이동을 마치고 뚜벅이가 되어 터벅터벅 집으로 향한 두 사람의 고난은 결코 끝날 것 같지 않았다.

“루시 님, 이제 어쩌죠?”

구민주는 눈물을 뚝뚝 흘리며 저 멀리 보이는 루시의 집을 가리켰다.

“…….”

루시 또한 미간을 구기곤 말이 없었다.

태광휘의 집 주위에는 경찰과 군부대 그리고 협회의 헌터들이 우르르 모여 있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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