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57화
#157.
1차원에서 12차원.
하지만 이 차원이라는 개념이 점과 선, 면, 테서렉트와 같은 구분은 아니었다.
개문 사태로 자신들 외에도 지적 생명체 있음을 목도한 인류.
이것은 지구를 침략한 외계인들을 연구하는 과정에서 분류한 정의.
지구식으로 해석한 이계의 구분이라고 보는 것이 정확하다.
그리고 지금까지 지구의 초상과학자들이 정립한 열두 차원의 정의는 이렇다.
1차원 - 이제 막 태동한, 어떤 생명체도 존재하지 않는 태초계.
2차원 - 원시적인 생명체가 존재하는 마나가 없는 원시계.
3차원 – 과거 지구와 같은, 지성체는 있지만 마나가 없던 물질계.
4차원 - 루한과 같은, 문명과 마나가 공존하는 중간계.
5차원 - 마나를 능숙하게 사용하지만, 지적 능력이 떨어지는 마수들이 사는 마수계.
6차원 - 마나를 능숙하게 사용하고, 지적 능력이 있지만 문명은 이루지 않는 영물들이 사는 신수계.
7차원 - 자연과 원소들의 영혼이 거주하는 정령계.
8차원 - 드래곤을 신으로 모시는 드래고니안 문명이 있는 용계.
9차원 - 온 우주의 지성체들이 내뿜는 온갖 감정과 생각이 모이는 정신계.
10차원 - 지성체들이 죽고서 일시적으로 머무는 연옥.
11차원 - 우주의 모든 악한 감정이 모여 마왕과 마족, 괴수를 구성한 마계.
12차원 - 우주의 모든 선한 감정이 모여 주신과 천사를 만든 천계.
지구는 본래 3차원이었으나, 개문 사태 이후 각성자가 탄생하기 시작하면서 4차원으로 분류되었다.
‘호오, 나름 체계적이구나. 역시 이곳의 가장 무서운 점은 발전 속도 같단 말이지. 정보의 교류가 월등해서 그런가?’
루시는 어느새 익숙해진 자세(컴퓨터 의자에서 양반다리)로 마우스 휠을 천천히 내렸다.
그러다가 중간중간 독수리 타법으로 느릿느릿 궁금한 것들을 검색했다.
그녀는 지금 유리아와 시몬의 집에서 컴퓨터를 하고 있었다.
“왜 사람들이 저 TV라는 것을 잘 안 보는지 이제야 알 것 같구나.”
입고 있는 옷도 유리아가 평상시에 입던 분홍색 잠옷을 입은 상태. 속옷도 빌려 입었는데, 가슴 쪽은 좀 작은 느낌이다.
“확실히 TV만 보기에는 재밌는 것이 너무 많지요.”
그런 루시 뒤에는 구민주가 서 있었다. 구민주는 심심했는지 빗과 머리띠를 들고서 루시의 청은발을 빗고 있었다.
루시는 그런 구민주의 손길을 당연하다는 듯 받는 중이다.
‘그래, 러시아 농촌은 인터넷도 잘 안 들어온다고 했으니까.’
구민주는 어느덧 루시의 몰상식을 자연스레 여겼다. 오히려 최근에는 어린아이에게 세상살이를 가르쳐 주는 부모의 기쁨마저 느낄 정도.
“루시 님, 그럼 협회에 등록을…….”
그래서 이 정도로 세상에 대해 알았다면 마음이 바뀌지 않았을까 싶어 넌지시 의향을 물어보면.
“말하지 않았느냐. 그곳에는 가기 싫다.”
여전히 어림도 없었다.
‘으휴, 저 똥고집!’
구민주는 이를 갈았다. 아무래도 당장 급여를 받기엔 틀린 것 같았다.
그러나 당장 월급을 받지 못함에도 구민주가 루시를 떠나지 않는 것은 루시가 지닌 능력 때문이다.
구민주가 봤을 때 눈앞의 여인은 금광이자, 유전이자, 제2의 비트코인이었다.
‘지금 포기하면, 강태공 마누라 꼴이 되고 만다!’
가뜩이나 물렸던 주식들을 피눈물 흘리면서 손절했다.
심지어 어제 아침, 성녀의 성명으로 손절한 주식들이 죄다 오르는 바람에 구민주는 그날 밤 가위마저 눌렸다.
이런 상황에서 루시를 버린다면? 그랬다가 나중에 세계적인 각성자가 된다면?!
구민주는 상상도 하기 싫었다.
“루시 님, 꼭 헌터가 될 필요는 없어요. 일단 협회에 각성자 등록만 하는 거예요. 각성자가 되어서 비전투 쪽에서 일할 수도 있고 그러면 협회의 지휘도 받지 않아도 돼요.”
단, 헌터를 하지 않으면 세금을 독신세 포함해서 6할 정도 내야 하지만, 구민주는 굳이 그 말까지 하진 않았다.
“나도 알아는 보았다. 하지만 그 조항 또한 유사시에는 협회에 동원되는 것으로 되어 있더구나.”
구민주의 설득에 루시는 시선을 모니터에서 떼지 않고 대꾸했다.
“……아하.”
진짜 쓸데없는 부분에서 꼼꼼하고 눈치 빠른 고용주라고 민주는 생각했다.
어쨌든 월급은 가급적 빨리 받아야 한다. 물론, 문유리 집행관께서 생활비로 쓰라고 구민주에게 카드를 주긴 했다.
하지만 나는 새도 떨어트린다는 집행관님의 카드다. 사용할 때마다 괜히 그녀의 수명도 깎이는 느낌을 받아야만 했다.
그래서 구민주는 전략을 바꾸기로 했다.
‘우리 루시 님은 초상 능력뿐 아니라 외모 또한 출중하지!’
고용주의 초상 능력은 포기하자, 대신 그녀의 미모를 이용하자!
수배자 문제는 두 집행관 덕분에 지금은 보류된 상태. 역시 인맥이 최고시다.
루시의 청은발이 걸리지만 이 또한 염색만 하면 어찌 될 거 같았다.
“개인 방송을 하자고?”
“그렇습니다! 이건 초상 능력이 없어도 충분히 돈을 벌 수 있을 겁니다! 콘텐츠는 제가 이렇게 준비해 봤습니다.”
여자 목소리로 게임만 해도 돈이 생기는 세상이다.
‘여왕벌, 아니, 아니, 귀족 콘셉트로 방송을 해도 호응이 있겠어!’
그런 세상에서 루시 같은 절세 미모면 사진만 팔아도 돈을 벌 수 있을 거라고 구민주는 확신했다.
“춤? 노래?”
루시는 자신의 시녀가 건넨 종이를 보곤 고개를 갸웃했다.
“나보고 얼굴도 모르는 불특정 다수 앞에서 이걸 하라고?”
고용주의 반응이 딱히 긍정적이지 않다.
이에 구민주는 머리를 빠르게 회전하며 말을 이었다.
“그으, 루시 님이 즐겨 보시는 TV 드라마도 어떻게 보면 불특정 다수 앞에서 우.아.하.게. 연극을 하는 거잖아요? 그거랑 비슷하다고 보면 됩니다.”
평소 그녀가 소파에 반쯤 누워 즐겨 보던 드라마를 예시로 든 것이다.
“으음, 그렇게 비유하니 나빠 보이진 않는구나. 어디 한번 예시를 보자.”
루시 또한 양심은 있었다. 아공간 인벤토리는 당장 수리가 불가하고 신하의 집에 묵고 있었으며, 눈앞의 현지 시녀에게는 제대로 된 급료도 주지 못했다.
그랬기에 경제 활동의 필요성은 공감했다.
“네! 지금 제일 인기 있는 방송이 뭐가 있냐면…….”
‘좋았으! 좋았으!’
처음으로 고용주께서 긍정적인 반응을 보이자, 구민주는 하늘 위에서 광명이 비추는 것을 느꼈다.
잠시 후, 구민주가 예시로 보여 준 BJ들(여캠)의 영상을 본 루시는 대경실색했다.
“절대 안 해!”
루시의 얼굴은 붉었고 눈동자는 경악과 충격으로 지진이 일었다.
[어머! A급 헌터님, 백만 달풍선 감사링~! 쪽!]
모니터 화면에는 한 여BJ가 도네를 받고 섹시 댄스를 추는 영상이 상영되고 있었다.
복장 또한 지나치게 달라붙고 짧았으며, 머리에는 수인족 행세라도 하는지 고양이 머리띠를 썼다.
“아하하, 이건 좀 천박하지요? 그, 그럼 이건 어떠십니까?”
그나마 얌전한 영상을 보여 준 것임에도 경기를 일으키는 루시의 모습에 구민주는 아찔한 기분을 느끼며 급히 다른 방송을 찾았다.
바로 게임 BJ 방송. 게임은 못 해도 상관없다. 구민주가 사전에 기본만 알려 주면 된다. 아니, 오히려 못하면 더 좋다. 시청자들이 알려 주고 이를 루시가 익히면서 함께 소통 방송을 이어 가면…….
[게임 드럽게 못하네.]
[아, 그거 그렇게 하는 거 아닌데.]
[왜 나에 대한 기준만 엄격한 건데에!! 나쁜 놈들아아!]
[야야, 쟤 또 운다.]
구민주는 희망을 안고서 루시와 가장 비슷한 콘셉트의(어여쁘면서 게임은 못 하는 주제에 존심은 세 보이는) 여BJ의 방송을 보여 줬다.
그리고.
“감히 나보고 저런 대우를 받으면서 돈을 벌라고?! 나에게 뭐라 할 수 있는 사람은 솔라와 아버지 그리고 베네사뿐이다!”
이 또한 기각.
“…….”
구민주는 군 복무 때에도 피우지 않았던 담배가 이상하게 피우고 싶어졌다.
생에 첫 흡연 욕구를 느끼는 구민주 못지않게, 루시 또한 갑갑함을 느꼈다.
‘하아, 이렇게 무력감을 느끼는 건 근래에 처음이야.’
그녀 또한 모르지 않았다.
이 세계는 자유민주주의와 자본주의라는 사상이 존재하는 세계.
신분제는 없으며, 자본에 의한 보이지 않는 계급만 있을 뿐, 법적으로는 모든 사람이 평등하다.
이런 나라에서 여왕의 자존심은 도움이 되지 않는다.
‘구민주 시녀장에게 미안하게 되었어. 나잇값 못하는 철부지 귀족 영애 꼴을 보이고 있으니.’
이것도 싫어, 저것도 싫어, 그러면서 밥과 시간만 축내고 있으니 스스로 생각해도 한심함 그 자체다.
‘하지만…….’
앞서 개인 방송을 거절한 이유에는 단순히 여왕의 품위 문제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저 화면 뒤에서 수백, 수천, 아니, 수만 명이 날 본다고 생각하면…….’
상상만 해도 소름이 돋았고 숨이 잘 쉬어지지 않았다. 현기증까지 났다.
지구식 용어로 대인기피증 또는 공황장애와 유사할 것이다.
‘성녀는 핑계에 불과할지도 몰라.’
대마녀의 세한 느낌이라든가, 연적 아래로 들어간다든가 같은 이유는 핑계일지도 모른다.
협회에 높은 등급의 헌터로 등록되면 자동으로 언론에 알려진다고 했다.
당장 유리아와 시몬 또한 인터넷에 검색하면 별별 자료가 다 나온다. 뉴스에서도 심심치 않게 두 집행관의 일거수일투족이 소개되었다.
즉, 루시 또한 협회의 각성자가 되면 온 세상이 그녀를 바라볼 것이다. 헌터가 되지 않는다고 해도 말이다.
‘상상만 해도 토할 거 같아.’
루시는 거의 평생을 왕궁 안의 침실에서 지내 왔다. 설원의 저주가 해주 된 이후에도 딱히 궁을 나서지 않았다.
그녀가 궁을 나선 경우는 딱 한 번. 과거 솔라와 데이트를 하러 갔을 때뿐이다. 솔라가 떠난 이후에는 커다란 상실감에 왕궁 밖으로 나가지 않았다.
그랬던 그녀가 지구에 와 버렸다. 그것도 혼자.
심지어 지구에 도착한 그녀를 보는 시선은 태어나서 처음 받아 보는 노골적인 시선들.
평생을 왕궁 안에서 살아왔던 루시에게는 알게 모르게 적지 않은 충격을 준 셈이다.
‘무서워.’
그랬다. 그저 무서웠을 뿐이다.
그런 고용주의 속마음을 모르는 굳센 시녀 구민주는 포기하지 않았다.
구민주의 ‘고용주 사람 만들기(?) 프로젝트’는 계속해서 이어졌다.
그렇게 이틀 뒤.
“어딜 간다고?”
“아르바이트 자리가 마침 생겨서요~. 루시 님께서 당장 수입이 없으시니까 저라도 돈을 벌어야지유. 언제까지 집행관님의 카드에 기댈 수는 없으니까요.”
“……그건 안타깝게 생각한다. 그나저나 무슨 일을 하는 거지? 나도 할 수 있는 일이라면 같이 하겠어.”
“정말요? 하지만 루시 님 품격에는 맞지 않을 수도 있는데.”
“뭔데 그러지?”
“저런 드라마에 길가는 행인 같은 조연으로 나오는 것이에요.”
드라마!
루시는 자신도 모르게 양손에 주먹을 꽉 쥐었다.
평소 즐겁게 보는 드라마. 그런 드라마에 나오는 행인이나 점원이라니.
‘그 정도면 할 수 있지 않을까?’
모든 시선이, 카메라가, 자신에게 집중되어서 무서웠던 것이다.
반면, 그 시선이 빗나간 상황이라면 충분히 해낼 수 있을 것 같기도 하다.
‘그리고 이걸 시작으로 차근차근 이겨 내는 것이지.’
고민은 길지 않았다.
“나도 같이 가겠다! 마침, 어제 문유리가 협회에서 가져온 게 있다. 바로 써먹을 수 있겠어.”
루시는 군주였고 어려움에 처했다고 자포자기하는 마녀가 아니다. 차근차근 어떻게든 극복하려고 발버둥 치는 여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