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회귀여왕의 EX급 방랑기사-158화 (158/212)

제158화

#158.

처음 구민주는 피팅 모델 알바를 알아봤었다. 사회성이 부족한 그녀의 고용주에게 그나마 어울릴 것 같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건 돈이 안 되지.’

피팅 모델 구인 공고에 적힌 급여를 본 구민주는 바로 뒤로 가기를 눌렀다.

‘요즘은 워낙 가상 모델이 판을 치니.’

당장 돈을 보지 않고 장기적인 홍보를 노린다고 해도, 이쪽 업계는 전망이 밝지 못했기 때문.

그랬기에 그녀는 다른 구인 공고를 찾았다. 아직 인공 지능이나 CG로 하기엔 가성비가 되지 않는 직군을.

“루시 님! 너무 긴장하지 않으셔도 돼요!”

구민주는 눈을 힐끔 옆으로 돌리면서 조수석을 향해 말했다.

작게 말한 것이지만 자동차 내부가 워낙 정숙해서 잘 들렸다.

“긴장? 무슨 말이야? 나는 긴장 같은 거 안 한다!”

“역시 루시 님이야!”

딱딱 끊어지는 고용주의 말투에는 긴장한 티가 역력했지만, 구민주는 방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 그나저나 이 차는 참으로 승차감이 좋은 것 같구나.”

루시는 긴장감을 풀기 위해서인지 아니면 자신이 긴장했다는 것을 숨기기 위함인지 애써 다른 주제로 말을 꺼냈다.

“그렇죠? 보세요! 저기 교통경찰들이 우리 보고 경례하는 거.”

“나도 봤다. 심지어 누구도 끼어들 생각을 안 하는구나.”

“대한민국에서 집행관만큼 존경받는 직업은 없으니까요.”

현재 구민구와 루시는 검은색 고급 세단을 타고 있었다. 김시오(시몬)가 타라고 빌려 준 협회 차량이다.

이차는 승차감은 물론 하차감 또한 장난이 아니었다.

일단 트림부터가 국내에도 몇 없는 특수 제작된 한정판 세단이다.

자동차 번호판도 다르다. 협회의 고위 헌터(대부분 집행관을 뜻한다)를 상징하는 검은색 바탕에 노란색 번호가 새겨져 있고, 협회의 마크도 자동차 앞뒤 범퍼에 각인돼 있었다.

이 차 주위에서 멋대로 운전할 수 있는 사람은 사실상 없다고 봐야 한다.

“좋아! 밟아! 밟아!”

구민주는 간만에 욕을 한 번도 하지 않고서 운전을 끝낼 수 있었다.

강원도 안흥리의 어느 드라마 촬영장.

이른 새벽에 출발한 두 사람은 아침이 되어서 간신히 도착했다.

협회 소속의 차량을 촬영 장소에 주차하면 시선 집중이기에, 구민주는 집결 장소에서 좀 떨어진 갓길에 차를 댔다.

당연한 얘기지만 어느 공무원도 집행관의 차량에 딱지를 끊지 않는다.

‘그냥 공간 이동으로 와도 되었는데.’

긴 드라이브를 마치고 차에서 내린 루시는 마법을 떠올렸다.

이 마차라는 것이 처음에나 신기했지, 타면 탈수록 공간 이동보단 못했다.

‘아니, 공간 이동으로 괜히 이목을 끌 수 있어. 이 세계는 하늘 곳곳에 마력 탐지 드론이라는 것이 수시로 떠다닌다고 했었으니까.’

하지만 이내 고개를 저었다. 지금 그녀는 미등록 각성자. 가급적 시선을 끌지 않는 것이 낫다고 생각되었다.

“민주야, 가자.”

루시는 우아한 보폭으로 촬영장이 있는 방향으로 발을 움직였다.

“네! 루시 님!”

그 뒤를 구민주가 병아리처럼 따랐다.

차에서 내려 목적지로 향하면서, 구민주는 루시를 살폈다.

‘협회에서 가져왔다는 초상 장치를 사용했지만 미모는 숨겨지지 않네? 그래도 시선을 덜 끄는 것은 확실한 것 같아.’

문유리 집행관이 협회에서 몰래 슬쩍 해 온 초상 장비는 열쇠고리처럼 생겼다.

시선을 분산시켜 주는 기능이 있다고 했다. 보통 협회 요원들이 특정 집단에 잠입할 때 소지하는 모양.

루시는 그 열쇠고리를 벨트 쪽에 걸었다. 늘 허리에 있던 윈테이라는 메고 온 배낭에 넣어 둔 상태.

마법으로 검게 염색한 긴 머릿결이 바람에 휘날린다.

확실히 전보다 사람들의 시선을 덜 받는 것이 피부로 느껴진다.

그렇지만 일부 사람이 힐끔 쳐다볼 정도의 평범한(?) 아름다움은 남아 있다.

‘오히려 딱 좋은 거 같아!’

루시의 외모로 인해 수난을 겪었던 구민주는 오히려 이를 다행이라고 여겼다.

‘각성하면 어떤 느낌일까?’

한편으론 저 초상 장비를 쓰는 루시가 부럽기도 하다.

비각성자들은 초상 장치가 있어도 사용할 수 없었다. 설령 초상 장치를 사용한다고 해도 매우 제한적이고 추가 비용도 많이 든다.

“그런데 민주야, 우리는 무슨 드라마 촬영에 동원되는 거니?”

멍하니 고용주를 보면서 걷고 있는데, 자신을 부르는 루시의 목소리가 들렸다.

“예! ‘S급 헌터는 쉬고 싶다’라는 드라마예요.”

아, 생각해 보니 무슨 드라마인지도 말 안 해 주고 왔었다.

“호오.”

역시 관심 영역이다 보니 고용주의 리액션이 남다르다.

“초상 액션이 다소 들어간 장르다 보니 좀 거친 배역도 있나 봐요. 그래서 페이도 세고.”

“그건 걱정 없다.”

“헤헤! 저도요! 그래 봤자 도망치는 시민 역할이니까요. 루시님이랑 저는 그냥 뛰기만 하면 될 거예요.”

“쉽구나!”

“그렇죠!”

구민주의 말에 루시는 가슴 속에 설렘과 떨림이 어우러지는 느낌을 받았다.

그리고 잠시 후.

“도망치는 행인 알바라며어! 그냥 도망치는 행인 알바라며어어어!!”

퍼엉, 콰아아앙.

세트장 곳곳에서 터지는 화염과 폭발 속에서 자칫 잘못 맞았다간 전신 화상을 입을 것 같은 격렬한 열기 속에서.

“으아아아아앙! 루시 님! 같이 가요오오! 저 버리지 마세요오!”

갸아아아아악!!

구민주는 엉엉 울면서 비명을 지르며 뛰었다.

“이번 엑스트라들은 연기력이 뛰어나군.”

사전 제작 중인 드라마 ‘S급 헌터는 쉬고 싶다’의 강PD는 카메라에 잡힌 엑스트라들을 보면서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저건 아마 진짜 비명일 텐데.’

PD의 혼잣말을 들은 스태프들은 속으로 생각했다. 생각만 했다.

스태프와 엑스트라들의 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강PD는 초집중으로 카메라를 보았다.

“그런데 저 여자는 뭐지? 마치 러닝머신 뛰는 사람처럼. 으음.”

그러다가 도망치는 엑스트라 중 유독 시선이 가는 여성 출연자를 발견했다.

‘몸놀림이 보통이 아닌데? 일반인 맞아?’

몸놀림은 진짜 좋았다. 특수부대를 넘어 헌터가 아닌가 싶을 정도로.

‘너무 평온하잖아! 도망치는 시민인데 무슨 조깅하는 사람처럼!’

하지만 그래서 더욱 문제다. 저 장면은 평범한 시민들이 8차원에서 침략한 드래고니안의 마법 폭격을 피해 도망치는 설정이었으니까.

심지어 외모도 굉장히 예쁜 편이라 시선이 더욱 갔다.

평상시였다면 아무리 예뻐도 ‘야! 쟤, 빼!’라고 단호히 외쳤을 그였지만,

“…….”

지금은 아니다.

단순히 예쁜 외모 때문만은 아니다. 이상하게 시선이 간다. 이상하게 계속 보고 싶은 기분이 든다.

“…….”

꿀꺽.

무엇보다 PD의 생존 본능이 알려 왔다. 저 여자에게 함부로 굴면 안 된다는 것을.

“컷!”

강PD(감독이라고 부르면 화낸다)는 이유 모를 오싹함과 찝찝함을 뒤로하고 컷을 외쳤다.

평온한 모습으로 달리던 조연이 걸렸지만, 재촬영은 현실적으로 힘들다. 나중에 안 나오는 구간만 편집하면 자연스러울 것 같다.

“수고하셨습니다!”

“잠시 쉬었다가 오후 촬영 들어가실게요~!”

세트장 쪽에서 스태프들이 기진맥진한 조연들을 안내하는 외침이 들렸다.

강PD는 괜히 시선이 가던 여인에 대한 생각을 애써 접었다. 그리고 고개를 돌려 옆에 있던 조연출을 보았다.

“그러고 보니 강원도에 게이트 예보가 있었던가? 속초에서 게이트가 열릴 예정이라고?”

“그런가 봅니다. 그것 때문에 협회랑 국내 길드 대부분이 속초에 집결한 모양이에요. 이거 때문에 뉴스랑 유튜브가 아침부터 시끄럽더라고요?”

“11차원 타입이면 못해도 A급인가? 그나저나 뭔 놈의 예보를 아침에 내는 건지.”

조연출의 대답을 들으면서 강PD는 휴대폰을 보았다. 재난 안내 문자가 몇 개 와 있었다.

“최근 산발적인 게이트가 많이 늘어나긴 했습니다. 예보도 자주 틀리고.”

“속초면 여기서 멀지 않은데, 괜히 여기까지 불똥 튀진 않겠지?”

“설마요. 괜히 그런 말 마세요.”

“하하하, 미안, 나도 모르게 플래그를 세웠네?”

뜨헉 하는 조연출의 반응에 그는 순순히 사과를 했다. 그러면서 일정표와 콘티를 번갈아 살핀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후딱 촬영 끝내자고. 스턴트 팀은 언제 도착한대?”

이제 오후 촬영이 남았다. 꽤 난이도가 있는 촬영이라서 스턴트 팀이 필요하다. 그런데 이미 도착했어야 할 스턴트 팀이 아직 도착하지 않았다.

“큰일났습니다!!”

그때였다. 한 스태프가 휴대폰을 든 상태로 PD에게 다가왔다.

“……?!”

‘왜? 설마? 진짜로?’

강PD는 괜히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 기분을 느꼈다.

“무슨 일이야?”

“그게, 스턴트 팀이 시간 내로 도착이 힘들 것 같다고 합니다. 앞에서 사고가 났는지 교통정체가 심각한 모양입니다. 도착해도 밤에나 도착할 것 같다고…….”

“후우.”

스태프의 말에 강PD와 조연출이 동시에 안도의 숨을 뱉었다.

좋지 못한 소식은 맞지만, 그래도 게이트가 열렸다거나 몬스터가 흘러왔다는 소식은 아니다. 덜컹했던 심장이 천천히 제자리를 찾았다.

“끄응, 천재지변 때문이니 어쩔 수 없지.”

“스턴트 팀 촬영은 그럼 내일 오전으로 미루겠습니다. 오늘 고용한 조연들 데리고 최대한 찍을 수 있는 건 찍어 보겠습니다.”

“그래, 혹시 내일까지 고용 연장되는지도 물어보고.”

“네.”

눈치 빠른 조연출이 바로 움직인다.

스태프들이 부랴부랴 일정을 수정하고, 수정된 일정에 맞춰 카메라와 조명 세팅을 다시 하기 시작했다.

“강PD님, 무슨 일입니까?”

그때, 어수선함을 눈치챈 주연 배우의 매니저가 강PD를 찾았다.

“아! 김 매니저, 그게…….”

강PD는 매니저를 향해 스턴트 팀이 오지 못한다는 얘기를 간략히 설명했다.

“이런! 그럼 우리 지영이 스케줄이 꼬이는데. PD님, 지영이 오늘 무조건 촬영 다 끝내야 합니다. 내일 아침 스케줄은 위약금이 세게 걸린 거라 바꿀 수도 없어요!”

이에, 매니저는 곤란하다는 듯 반응했다.

“으음.”

매니저의 말에 강PD는 뒷머리를 긁적였다.

배우 신지영은 이 드라마의 주연인 데다 E급 각성자였다. 어지간한 액션 신은 대역 없이 할 수 있었다. 헌터는 아니지만, 미모의 각성자 여배우기에 몸값도 더럽게 비싸다.

그런 배우의 스케줄을 붕 뜨게 만들면 강PD 또한 여러모로 곤란해진다.

“어떻게 안 되겠습니까, PD님?”

“잠시만요.”

강PD는 콘티를 보며 생각에 잠겼다. 신지영 분량만 최대한 어떻게 가라로라도 해 볼 수 없을까?

머리를 열심히 굴렸다.

‘그래도 두 명은 필요해.’

최적의 시뮬레이션에 도달했다. 그럼에도 전문적인 스턴트맨이 두 명은 있어야 했다.

‘!!’

그때, 강PD의 머릿속에 누군가가 떠올랐다.

오전 촬영이 끝나고 잠시 쉬는 시간.

“이거 참으로 재밌구나! 속이 뻥 뚫리는 것 같아. 안 그러니, 민주야?”

루시는 촬영의 여운으로 거친 호흡을 가다듬으며 말했다.

이렇게 마음껏 뛰어 본 적이 얼마 만인가? 곰곰이 생각해 보니 어린 시절 이후로는 처음인 것 같았다.

처음 우려했던 시선이나 카메라도 자신에게 집중되지 않으니까 전처럼 공황이 오지 않았다.

“으어어어어…….”

오히려 공황은 구민주에게 온 것 같았다.

“으으으으…….”

“집에 가고 싶어.”

“그냥 행인 역할이라며!”

“젠장, 카드 빚만 아니었어도!”

“엄마아.”

구민주뿐만 아니라 함께 촬영에 임한 대부분의 사람들이 넋이 나간 상태. 하지만 경제가 어렵긴 한지 누구도 줄행랑을 치진 않았다.

“5분 후에 두 번째 촬영 시작하겠습니다!”

그렇게 멍 때리며 쉬고 있는데, 한 스태프가 오더니 촬영의 재개를 알려 왔다.

“그리고 혹시, 특수 촬영에 자원할 분 있나요? 두 분만 받습니다.”

부가적으로 자원자도 모집했다.

“어떤 건가요?”

누군가가 호기심에 물었다.

“아까보다 아주 살~짝 위험한 신입니다. 주연 배우이신 우리 신지영 씨와 함께 건물을 탈출하는 신이에요. 원래는 스턴트맨이 하기로 예정됐는데, 도로 사정으로 못 오는 모양입니다.”

방금 촬영도 죽을 뻔했는데 이것보다 더 위험하다고?

심지어 각성자 배우인 신지영과 함께 뛰어야 된다고?

오전에 찍었던 것도 스턴트맨을 사용해야 하지 않았나 싶었거늘.

“…….”

출연자 대기실에 침묵이 감돌았다.

“세트장에서 도망치는 것은 똑같은데, 화염이나 폭발, 장애물 등이 추가될 예정이에요. 그리고 건물 안이라 좀 더 위험할 겁니다. 물론 출연료는 더 드립니다.”

“…….”

모두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없습니까? 공고에 있던 일당에서 더블로 드립니다.”

아무도 손을 들지 않자, 답답해진 스태프가 다시 한번 물었다.

그럼에도 손드는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한번 해 봐?’

스태프의 제안에 루시는 속으로 혹했다. 방금 촬영으로 뭔가 자신감이 서렸다.

고민은 길지 않았고 루시는 자신의 시녀를 보았다.

“민주야, 우리가 하자!”

그리고 작지만 또렷한 목소리로 말했다.

“저요?”

구민주가 황당한 표정으로 스스로를 가리킨다.

“그래, 두 명 뽑는다고 하지 않느냐.”

“왜요?”

“돈도 많이 준다고 한다. 너, 돈 필요하다고 했지?”

“……제가요?”

고용주의 급발진에 구민주는 뇌 정지가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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