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60화
#160.
잠깐의 수다로 어색함을 풀었음에도, 촬영이 시작되자 다시 긴장한 티를 풀풀 풍기는 루시와 구민주.
“너무 긴장 마세요! 대사가 있긴 하지만 아주 짧으니까요.”
그런 두 사람을 신지영이 다독인다.
루시와 구민주가 맡은 역할은 협회 요원 역이다. 주인공 신지영을 지원하러 협회에서 도착한 이름 없는 지원군.
이번 신은 그들과 함께 건물 내에서 탈출하는 장면.
“액션!”
PD의 외침과 함께 카메라 불빛이 변했다.
“어서 탈출해야 합니다!”
구민주가 준비했던 대사를 외쳤다. 처음 하는 연기지만 제법 그럴듯하다.
참고로 루시는 대사가 없었다. 대사를 넣으니까 주연과 조연이 역전되는 느낌이 들었기 때문.
퍼엉, 콰아앙.
세트장에 설치되었던 폭발이 연이어 터졌다.
‘히이이익!’
유일한 비각성자 구민주는 간만에 군시절의 아찔함을 떠올렸다.
상병 때였나? 소대가 개마고원에 있는 마경으로 깊숙이 들어갔다가 포위되었던 적이 있었다. 소대장은 브로큰 애로를 요청했고, 적아를 구분하지 않고 터지는 포격 틈에서 간신히 그 지옥을 빠져나올 수 있었다.
지금이 딱 그 느낌이었다. 오전에 겪은 바깥 촬영은 그래도 긴장만 풀지 않으면 다칠 위험이 없는 정도였는데, 이번 거는 약간의 행운도 필요할 듯 보였다.
화아아악!
진짜 화염으로 된 불줄기가 루시와 구민주, 신지영을 덮친다.
화염술사 마인의 공격을 표현한 모양이다.
세 사람은 간신히 그 열기를 피했다.
퍼어엉.
이어서 폭약이 터졌다. 콘크리트 조각과 유리 조각이 세 사람을 때린다. 신지영과 루시는 각성자다 보니 그 파편에서 무사했다. 다만 구민주는 손등과 목, 볼에 흉터가 생겼다.
‘으윽!’
따끔한 고통에 구민주의 집중력이 흐트러졌다.
콰아앙.
이어서 또 한 번의 폭발로 바닥이 꺼지자, 신지영과 루시는 가뿐히 점프했지만 구민주는 그러지 못했다.
‘아악?!’
그녀의 몸이 아래로 쑥 떨어지려 한다.
하지만 발목까지만 내려가다가 다시 떠올랐다. 아주 미세하게 그녀의 몸이 붕 뜨더니 자연스레 착지한 것이다.
‘루시 님!’
구민주는 자신을 구해 준 이가 누군지 바로 직감했다. 저 앞에서 염색한 흑발을 휘날리며 뛰고 있는 여인이다.
루시는 뒤를 돌아 민주를 힐끔 보더니 다시 앞으로 시선을 돌렸다.
위이이잉.
카메라를 단 드론이 이 장면을 그대로 촬영 중이다.
위익, 쿵!
그러다가 갑자기 드론과 카메라의 전원이 나가더니 픽하고 추락한다.
드론뿐만 아니라 건물 내의 모든 전자 장비가 마비되기 시작했다.
루시는 살짝 거칠어진 숨을 몰아쉬면서 건물 끝을 향해 뛰었다. 어느새인가 자신들을 찍는 드론 카메라가 보이지 않았지만 그러려니 했다.
‘민주는 잘 따라오는군.’
오직 그녀가 신경 쓰는 것은 구민주의 안위.
‘괜히 돈을 두 배로 준다는 게 아니었구나. 평범한 사람에겐 위험하겠어.’
아까 자칫 사고가 날 뻔했기에 더더욱 신경 쓰였다.
“저기, 루시 님?”
그때, 옆에서 루시를 부르는 신지영의 놀란 목소리가 들렸다.
“혹시 각성자……세요?”
“각성자, 아니……에요.”
신지영의 물음에 루시는 일단 아니라고 대답했다.
“거짓말! 방금! 그리고 이 몸놀림도!”
하지만 루시의 말을 신지영은 믿으려 하지 않는다.
“…….”
난감한 기류가 흘렀다.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고민이던 찰나,
“어? 그런데 카메라가 왜 안 따라오지?”
다행히도 루시의 각성 여부보다 더 중요한 카메라 문제가 신지영의 관심을 돌렸다.
“장비 문젠가? 이거 다시 찍으려면 장난 아닐 텐데.”
제법 위험한 촬영이기에 그녀의 미간이 좁혀졌다.
그러다가 문득.
‘설마?!’
신지영은 괜히 아침에 보았던 속초 게이트 예보가 떠올랐다.
속초와 여기가 가깝긴 하지만 마력장의 영향을 받을 정도는 아니었다. 하지만 만약 속초 게이트의 영향으로 이곳에 인스턴트 게이트가 열렸다면?
‘에이, 설마.’
괜한 불안감이 그녀를 쓰다듬었다.
타앗!
“루시 씨?”
그때, 나란히 뛰고 있었던 루시가 갑자기 속도를 높이더니 순식간에 저 앞으로 앞질러 나갔다.
대본과 전혀 다른 행동. 하지만 지영은 이를 보고 뭐라 하는 대신 루시와 똑같이 전력 질주에 임했다.
그렇게 대본보다 빠르게 건물 밖으로 나온 그들을 맞이한 것은,
“꺄아아아악!”
“게이트, 게이트가 열렸어!”
비명 지르며 도망치는 사람들.
“어서 경찰이랑 협회에 연락해!”
“통신이 안 됩니다! 전화가 먹통이에요!”
하늘에 뚫려 있는, 운동장 크기만 한 검은색 구멍.
쿠오오오오!
콰아아악.
그 구멍에서 비처럼 내려오는 몬스터들이었다.
5차원. 마수계 타입. 중형. 등급은 C급.
게이트 크기, 몬스터 유형을 본 신지영은 자연스레 지금의 상황이 정리되었다.
처억.
신지영은 싸울 준비를 했다.
‘하지만 나 혼자서는…….’
하지만 안색은 검게 죽었다. 그녀는 E급의 최하급 각성자였기 때문이다. 헌터는 하고 싶어도 못했다. 기껏해야 짐꾼 정도만이 그녀가 게이트나 마경에서 할 수 있는 전부일 뿐.
“으헤에에엨!”
뒤늦게 건물 밖으로 나온 구민주의 소리가 들렸다. 전력 질주를 했는지 산만한 숨소리와 경악이 뒤섞인 비명이 인상적이다.
“헐, 게이트다.”
하지만 밖으로 나와 게이트를 본 구민주는 패닉에 빠지진 않았다.
‘민주 씨, 의외로 침착하네?’
의외로 처음에만 놀랐을 뿐. 그 뒤로는 덤덤한 반응을 보인다.
패닉에 빠져 도망 다니고 있는 촬영장 쪽 사람들과 전혀 다른 모습.
‘역시 루시 씨가?!’
신지영은 그 이유가 자신의 옆에 선 아름다운 여자에게 있다고 생각했다. 그녀는 확신했다. 루시라는 여인은 각성자다 그것도 꽤 고위의.
‘으음.’
민주와 지영의 은근한 시선을 느낀 루시는 난감했다.
하늘에서 몬스터가 떨어진다. 트롤부터 오거, 놀, 웨어울프, 자이언트 웜 등등. 인간형부터 사족보행과 기타 등등까지, 루한에서는 몬스터라고 불리던 마물들이다.
‘우리 세계에서도 몬스터의 기원을 다른 세계서 건너온 존재라 봤었지.’
그리고 루시는 저 몬스터들이 어디서 온 거였는지 이제야 눈으로 확인할 수 있었다.
‘나서야겠지?’
문제는 자신이 지금 나서야 하느냐다.
여기서 또 힘을 쓰게 되면 이목이 집중될 것이다. 조연으로 참여한 이 일도 더 이상 못할 거다.
‘유리아 경과 시몬 경에게 미안하지만 어쩔 수 없지.’
시몬과 유리아가 협회에 잘 말해 뒀다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그녀가 조용히 있는 경우만이겠지.
어쨌든 상황은 상황이다.
귀찮음을 피하기 위해 위기에 처한 사람을 외면할 정도로 루시는 냉혈하지 못했다.
고오오오오.
설원의 힘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거대한 한기가 늦여름의 강원도를 춥게 만든다.
하지만 막 수풀에 서리가 생기려던 그때,
투두두두두.
퍼엉, 퍼엉.
프로펠러 소리와 기관포, 미사일 소리가 연이어 터졌다.
마력장 안에서도 기동 가능한 아날로그 타입의 공격 헬기가 모습을 드러냈다.
“헌터다! 헌터가 왔어!”
“살았다! 우린 살았어!”
지금과 같은 상황을 대비해 속초 인근에 오대기 중이던 예비대 헌터들이 군용 헬기에 빽빽이 들어차 있었다.
스윽.
루시는 준비 중이던 설원의 힘을 거뒀다.
“살았다아. 국군 초상 부대야. 휴우…….”
옆에선 신지영의 안도하는 목소리가 들렸다.
“헬기 마크를 보니 포항 쪽에 있는 3사단 소속인가 보네요?”
신지영의 목소리에 이어서 구민주의 호기심 어린 목소리도 들렸다.
“그러게요. 아마 속초 게이트 때문에 예비대로 와 있었나 봐요.”
제법 소상히 알고 있는 두 군필자의 대화.
그 대화를 엿들으면서, 루시는 흥미를 담은 눈으로 어느덧 전장이 된 촬영장을 보았다.
‘이 세계의 기사와 군인들은 어떻게 싸울까?’
생각해 보니 여기 와서 이 세계 사람들이 어떻게 싸우는지 제대로 본 적 없었다.
‘일단 저 하늘을 나는 철 마차부터가 대단하군. 브레스처럼 쏘는 저것은 총기라는 마도구를 강화한 건가?’
제일 먼저 그녀의 눈길을 사로잡은 것은 헌터들이 타고 온 헬기였다. 그 헬기에서 미사일과 기관포가 남김없이 자상을 향해 쏘아진다.
게이트에서 나오는 마력장으로 사격 통제 장치나 통신, 레이더는 먹통. 아날로그 감성으로 조준하고 쏘는 폭격은 정밀함과 거리는 멀었지만.
콰아아앙, 퍼어엉.
그만큼 과감하고 사나웠다.
크아아아악!
쿠웨에엑.
단단하고 질긴 몬스터들의 뼈와 가죽이 찢긴다.
지상에 쌓였던 몬스터가 순식간에 증발한다.
하지만 상공에 생성된 게이트는 운동장 크기의 중형 게이트.
그 안에서 포탄보다 더 많은 몬스터가 내려오고 있었고, 현장에 맞춰 실시간 적응이라도 하는지 폭격 이후부터 내려오는 몬스터는 화염 저항을 품어 폭격의 열기에서 멀쩡했다.
점점 폭격을 견디는 몬스터가 늘어나고 탄약도 금세 바닥났다.
그렇다면 이제부터 헌터들이 나설 차례.
타앗, 탓!
헬기는 아직 50미터 정도 하늘 위에 있었지만, 초상부대의 헌터들은 어느 누구도 망설이지 않고 헬기에서 뛰어내렸다.
“전부 쓸어 버려!”
“1중대는 몬스터를, 2중대는 시민 대피에 임하도록. 3중대는 교란기를 들고 게이트를 닫는다!”
초상부대의 지휘관으로 보이는 장교가 목소리에 마나를 담아 명령했다.
지휘관의 목소리는 어지간한 무전기보다 더 정확하게 헌터들의 귀에 박혔다.
‘……엄청나군.’
얼마 안 되는 시간이지만, 제대로 된 지구식 전투를 목도한 루시는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염력으로 몬스터가 날아간다.
중력으로 몬스터의 육중한 몸이 단체로 찌부러진다.
놈들이 불에 강하다면 물과 냉기로 조진다.
이도 저도 아니면 그냥 물리적인 힘으로 몬스터를 찢는다.
전장은 팽팽하다. 살짝 인류가 우세하다. 시민들을 간신히 대피시킨 2중대가 1중대와 합류했다.
그러나 전황은 어느 한쪽으로 확 기울지 않았다.
숫자가 너무 많았다. 몬스터는 줄어들지 않고 계속 하늘에서 채워졌다.
“3중대는 뭐 하는 거야?”
“기껏해야 5차원의 C급이잖아!”
상황이 이렇게 흐르자, 슬슬 불만을 터트리는 헌터들이 생겼다.
“무전 때려 봐!”
“여기는 대거 1, 대거 3 응답하라! 여기는 대거 1, 대거 3 응답 바란다. 폐문 상황 어떻게 되는지?”
치직, 치이익.
마석이 박힌 초상 무전기를 든 헌터가 연신 3중대를 호출한다.
[…….]
그러나 게이트를 닫으러 간 3중대는 응답이 없었다.
그렇게 몇 초가 지났을까?
투욱, 퍼억.
갑자기 하늘에서 무언가가 퍽 하고 떨어졌다.
“……?!”
발아래로 떨어진 무언가를 본 초상부대 지휘관은 2초 정도 멍하니 있다가 눈을 부릅떴다.
“으…… 은실아?”
뜬금없이 하늘에서 떨어진 그것은 바로 게이트를 닫으러 날아간 3중대원의 머리였다.
후두두둑, 퍽, 퍽, 퍽, 퍼억.
뒤이어 3중대 헌터들의 잘린 머리와 절단난 사지가 우수수 땅으로 떨어졌다.
“……!”
“…….”
모두가 싸우던 것도 잊고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맙소사.”
지휘관은 하늘 위 게이트를 보곤 힘 빠진 혼잣말을 내뱉었다.
고오오오오.
고공의 게이트에서 누군가가 그들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여섯으로 이뤄진 무리. 인간을 너무나 닮은 외모. 머리에는 기다란 뿔이 있었고 날개와 꼬리가 달려 있었다. 눈동자는 파충류처럼 생겼다.
머리 색과 눈 색은 빨강, 노랑, 파랑, 검정, 초록, 실버 등으로 다채로웠으며 뿔과 날개 그리고 꼬리의 색은 그들의 머리, 눈 색과 일치했다.
인간을 닮은 매끈한 피부 곳곳에는 비늘 같은 게 얼핏 보인다.
“드래고니안…….”
절망과 막막함이 대기를 채운다.
“속, 속초에 지원 요청해! 8차원의 드래곤 타입 게이트라고! 그것도 드래고니안이 있는 S급이라고!”
초상부대의 지휘관은 당장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을 행할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