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61화
#161.
강원도 속초.
해변을 쓰다듬는 검푸른 바다 한가운데, 검은 아지랑이가 일렁인다.
마치 기름 유출이라도 일어난 것처럼 지저분하고 불쾌하게 항구의 전망을 더럽힌다.
크기는 운동장 다섯 개 정도를 합친 크기. 대형 게이트로 분류되었다.
푸아아아앗.
바다 안에 생성된 게이트에서 무수한 용오름과 함께 괴수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공격-!”
이를 고대하기라도 했다는 듯, 수백의 헌터들이 바닷속 게이트를 향해 공격을 개시한다.
총과 포탄, 미사일과 같은 국군의 화력은 보이지 않는다.
11차원은 마계. 저 흑염으로 이뤄진 괴수들은 하위 차원의 물리법칙을 우습게 여긴다. 고위 헌터들의 이능만으로 이들을 상대할 수 있었다.
“처음 걱정했던 거에 비해선 상황이 양호하군요. 저와 협회장님이 직접 나온 의미가 퇴색된 것 같아요.”
상공에 떠올라 전투를 구경하던 김시오 집행관(시몬)이 부드러운 어조로 입을 열었다.
전장 한복판과는 어울리지 않을 정도의 여유로움.
눈과 머리카락에서 발산될 힘을 가리기 위해 특수 제작된 모자와 선글라스를 꼈지만, 입가에는 숨겨지지 않는 안도의 미소가 있었다.
“게이트가 덩치만 컸지, 마족은 보이지 않는군. 죄다 쭉정이뿐이야.”
그런 시몬과 함께 바다 상공에 떠 있던 남성은 고개를 면밀히 게이트를 관찰 중이다.
“문유리 집행관(유리아)까지 데려왔으면 전력 낭비라는 소릴 들었겠어요.”
수도권에서 성녀와 함께 마인들을 감시하고 있을 유리아를 떠올린 시몬은 부드럽게 웃었다.
속초 앞바다에서 감지된 11차원의 대형 게이트 예보. 국내뿐만 아니라 인근 국가에서도 난리가 났었다. 그래서 이렇게 협회장인 박태오와 집행관인 김시오가 직접 나온 것이다.
하지만 이제 보니 저 게이트에서 나오는 괴수들은 잔챙이들뿐, 가장 위협적인 마족은 보이지 않았다.
“그나저나 문 집행관과 자네는 서로 멀리 떨어지면 안 좋다고 하지 않았나?”
부드럽게 미소 짓는 시몬을 향해 박태오가 문득 생각났다는 듯 물었다.
“그게, 어느 순간부터 점점 괜찮아지고 있습니다. 이제는 하루 정도는 떨어져 있어도 별 이상이 없습니다.”
“정말이지 늘 느끼는 것이지만, 완전 부부 사이 같아.”
시몬의 말에 박태오는 여전히 신기하다는 반응이었다.
“그럼에도 사적인 감정이 들지 않다니. 난 그게 더 신기해.”
특히, 저렇게 붙어 다님에도 사귀는 것 같은 기류조차 일지 않는다는 게 제일 신기했다.
“하하하하.”
박태오의 말에 시몬은 그저 웃을 뿐이다.
“얘기가 너무 딴 데로 샜군. 후딱 폐문을 진행하지, 김시오 집행관.”
박태오도 자신의 관심이 지나치게 오지랖 같았는지 대화의 주제를 확 돌렸다.
“물론입니다, 협회장님.”
박태오 협회장과 시몬은 다른 헌터들이 괴수를 상대하는 동안 폐문 준비를 했다. 게이트 폐문에 반드시 필요한 좌표 교란 장치를 손에 꼭 쥐었다.
그리곤 바닷속에 열린 11차원의 게이트로 다이브할 자세를 취했다.
“협회장님! 집행관님!”
하지만 그때, 한 헌터가 두 사람이 있는 곳으로 급히 날아왔다.
그 헌터의 등에는 각성자만이 사용할 수 있는 초상 부유 장비가 백팩처럼 달려 있었다.
“그럼 그렇죠. 변수가 안 생기는 게 이상하지요.”
“어째 쉽다 했지.”
딱 봐도 심각해 보이는 헌터의 표정에 시몬과 박태오는 허탈한 미소를 지을 뿐이다.
“무슨 일이지? 어서 말해.”
만약 시덥지 않은 보고라면 저 헌터까지 데리고 폐문을 할 생각을 하며, 박태오가 물었다.
“속초 근처 안흥리에서 게이트가 발생했습니다!”
“5차원의 마수계 말인가? 국군에서 처리하기로 했잖아?”
보고가 엇갈린 건가? 이미 받은 보고다.
“그게 2중 돌발 게이트였나 봅니다. 8차원의 용계로 밝혀졌습니다. 벌써 1개 중대가 전멸했다고 합니다.”
“거기로 3개 중대가 가지 않았나? 중형 크기면 기껏해야 와이번이나 이무기 정도일 텐데?”
헌터의 보고에 박태오가 고개를 갸웃했다.
“드래고니안, 약 6마리의 드래고니안이 포착되었다고…….”
“?!”
이어지는 헌터의 말에 박태오의 표정이 굳었다.
“진짜는 그쪽이었나 보군요?”
옆에 있던 시몬이 놀랐다는 듯 말했다.
“요즘 게이트가 이상할 정도로 전략적이군.”
‘드래고니안이면 11차원의 마족급이야. 나랑 김 집행관 중 한 명이 무조건 가야 해. 병력은 얼마나 빼지? 지금이라도 아스카와 문유리를 불러야 하나?’
박태오가 심각한 눈으로 병력을 어찌 나눌지 고민했다.
“……?”
그러다가 문득, 옆에 있는 이 이계인 집행관이 지나치게 여유롭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김시오 집행관은 왜 이렇게 여유롭지?”
“아, 제가 그 말을 안 했던가요? 마침, 돌발 게이트가 열린 곳에 저희 여왕님이 계십니다.”
“?!”
시몬의 말에 박태오는 눈을 크게 떴다.
* * *
드래고니안, 8차원의 귀족.
마계에 마족이 있다면 용계에는 드래고니안이 있었다.
용계에서 문명을 이루고 있는 고결한 지성체들.
깊게 잠든 ‘진짜’ 드래곤의 가장 유력한 적통.
“멸종한 줄 알았거늘…….”
그런 드래고니안을 실제로 본 루시의 얼굴에 놀람이 번졌다.
드래곤과 드래고니안.
그녀의 고향에도 기록된 존재들이었다.
“고대 시대가 끝나고 세계의 축이 변했다. 이로 인해 세계수와 함께 중간계를 수호하던 드래곤들이 자취를 감췄다. 영원에 가까운 잠에 들거나, 소멸하거나, 다른 우주로 떠났다.”
루한을 비롯한 대륙 공통 역사서에 적힌 구절이었다.
지금은 대부분 멸종했고, 와이번 정도만이 그때의 흔적을 보일 뿐이다.
솔라의 파트너인 붉은 드레이크 시즈 또한 멸종된 종 중 하나였다.
그랬던 신화 속 고대 종을 지구에서 보게 될 줄이야.
‘떠났다는 다른 우주가 8차원이었나?’
드래고니안을 본 루시는 적대감보단 마녀의 학구열을 잠시 품었다.
그러나 흥미와 분석은 잠시 재워 놓자.
중요한 것은 저들이 지구인에게 적대적이라는 것.
총 여섯의 드래고니안이 하늘에서 모든 것을 내려본다.
어느덧 끝없이 쏟아지던 몬스터의 소나기는 뚝 그쳤고, 지상에서 파괴를 일삼던 괴물들은 본능에서 우러나오는 공포심에 바들바들 떨 뿐이다.
그런 몬스터를 상대하던 헌터들도 고개만 처박지 않았을 뿐, 두려움과 압박감에 몸이 굳어 숨조차 제대로 쉬지 못했다.
이것은 현재 루시와 함께 건물 안에 있던 두 여자 또한 마찬가지.
“으어어어어어…….”
일반인인 구민주는 완전히 패닉에 빠져 드러누웠다.
“…….”
최하급 각성자인 신지영도 주저앉아 몸을 떨었다.
둘 다 제대로 움직일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다.
‘결국 나설 수밖에.’
어쩔 수 없는 상황.
고오오오오.
루시는 잠재웠던 설원의 힘을 이끌었다.
‘어차피 저들은 진짜 드래곤이 아니야.’
비록 루시의 세계에서는 멸종되었으나, 그 기록은 제법 남아 있었다. 드래고니안의 기원은 바로 고대 엘프와 ‘진짜’ 드래곤의 하프다.
저들이 뿜어내는 피어도 여섯이 모여 투사하니까 겨우 이 정도인 셈이다.
루한의 여왕이자 각성한 설원의 대마녀에겐 살짝 오싹한 정도일 뿐.
번쩍.
루시가 설원의 힘을 조심스레 달구자, 상공에 떠 있던 여섯 드래고니안이 자신의 뿌리를 상징하는 색을 진하게 발산하기 시작한다.
마력이 대규모를 움직이는 것이 피부로 느껴진다.
‘무슨 마법이지?’
이에, 루시도 서둘러 설원의 폭풍을 몰아칠 준비를 했다.
“마…… 막아! 놈들이 세계로 퍼지지 못하게 해! 지원군이 올 때까지 버텨!”
저 아래서 초상부대의 지휘관의 힘겨운 외침이 들렸다.
외침으로 추측컨대 드래고니안들은 공간 도약 마법을 쓰려는 모양.
“속초에는 협회장님과 김시오 집행관이 계신다! 검룡 길드도 있으며, 신검 마준경과 신궁 고주연도 있다! 조금만, 조금만 버티자. 할 수 있다. 할 수 있다아아!!”
으아아아아아!
할 수 있다아!
버티자! 3중대의 복수를!
복수를-!
초상 부대의 헌터들이 하나둘씩 기합을 내지르며 몸을 일으킨다.
끝끝내 두려움을 극복하지 못한 이들도 있었지만, 상당수는 마력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타앗, 타앗.
그들은 각자의 이능 혹은 등에 멘 초상 장비를 이용해 공중으로 떠올랐다.
퍼엉, 펑, 쾅!
얼마 후, 상공에서 불꽃놀이가 터진다.
하지만 얼마 안 가 빠르게 사그라진다.
“으음.”
하늘을 바라보던 루시는 눈살을 찌푸렸다.
설원의 폭풍으로 지상의 몬스터부터 상공의 고대종까지 한 번에 묶고 싶었는데, 이래선 힘들 것 같았다.
피슈우우웅!
때마침, 굉장히 빠른 속도의 철로 만든 새가 상공에 나타났다.
지구에선 전투기라고 불리는 것이 나타나 기총과 함께 초상기술로 만든 미사일을 쏘았다.
퍼엉, 퍼어엉, 피슈욱!
하지만 출격한 10기의 전투기 중 6기가 미사일을 제대로 쏘아 보지도 못하고 격추되었다.
가까스로 터진 미사일도 투명한 막에 막혔다.
쿠오오오!
키아아아악!
드래고니안의 피어에 짓눌렸던 지상의 몬스터들이 피어에서 벗어나기라도 시작했는지, 하나둘씩 고개를 치켜들었다.
“아이, 씨!”
루시는 결국 광역 마법을 세세하게 펼치는 것을 포기했다.
타앗.
대신 건물 밖으로 몸을 던졌다. 그녀의 몸이 상공으로 떠올랐다.
고오오오오오.
허리에 달고 있던 시선을 분산시켜 주는 열쇠고리를 해제했다.
그리고 방금까지 망설였던 마법을 준비했다.
[경외하라.]
여왕의 입에서 언령이 영창되었다.
군림하는 겨울.
루시의 고유 스킬 중 하나가 발동되었다.
태광휘의 새벽의 등불을 참고해 만든 마법.
아군의 사기를 증폭시키는 태광휘의 새벽의 등불과 반대로, 군림하는 겨울은 모두의 시선을 집중시킨다. 적아를 가리지 않고 두려움과 경외를 품게 만든다.
순식간에 셀 수조차 없는 몬스터의 시선이 루시를 노려보기 시작했다.
“……!”
그녀는 그 시선에 크게 흠칫했지만. 상황이 상황인지라 초인의 의지로 인내했다.
시선, 지구식 용어로는 어그로가 루시에게 모두 쏠리자, 여왕께서는 공중에 뜬 옥체를 움직이셨다.
그러자 몬스터들이 홀린 듯 그녀를 우르르 쫓았다.
여섯 드래고니안 또한 루시를 내버려 둬선 안 되겠다고 생각했는지 헌터들을 대충 쳐 내곤 그녀를 추적했다.
지구의 게임 용어로 몹몰이가 실시간으로 재현되었다.
그렇게 순식간에 촬영장이 비었다.
“추…… 추워…….”
남겨진 이들이 추위를 느낄 때쯤에, 사방에 서리가 드리울 때, 수백 미터 떨어진 수풀이 우거진 쪽에서.
콰아아아아아.
거대한 설원의 폭풍이 일었다.
진즉에 이렇게 할걸 그랬다.
그놈의 망설임 때문에, 그놈의 두려움 때문에, 이 가장 효과적인 마법을 쓰는 데 주저함이 있었다.
“후우.”
하지만 지금 와서 후회하는 것은 부질없는 짓.
어쨌든 결국 마법을 사용했고, 모든 몬스터와 드래고니안을 인적이 드문 수풀 속 공터로 유인할 수 있었다.
그 과정에서 시선에 대한 두려움이 크게 줄어든 느낌.
해방된 기분도 약간 났다.
해방감을 느끼는 루시와 반대로, 그녀가 서 있는 곳 주위는 전부 얼음에 의해 구속되었다. 그것도 영원한 구속이다.
방금 그녀가 펼쳤던 설원의 폭풍으로 일어난 결과물들이다.
고오오오오.
수풀 속은 온통 얼음으로 이뤄졌으며, 깊은 땅속부터 숲길,그리고 나무까지 전부 얼음 조각이 되었다.
루시를 쫓아온 무수한 몬스터들도 꽁꽁 얼어붙었다.
오직 이 설원의 폭풍에서 살아남은 존재는 단 여섯.
드래곤의 적통을 자처하는 여섯 드래고니안뿐이었다.
“너는 누구냐?”
“지구에 이런 마녀가 있다는 소리는…….”
“그 여자, 그 여자를 닮았어.”
하지만 살아남았다고 멀쩡한 것은 아니다. 여섯 드래고니안은 각각 부상 하나씩은 몸에 달고 있었다.
그나마 제일 멀쩡해 보이는 존재가 루시와 비슷한 속성의 은색 드래고니안 정도.
반면 가장 상태가 심각한 드래고니안은 붉은색 드래고니안이었다.
“카사타나가 위독해!”
녹색 드래고니안이 붉은색 드래고니안을 치유하면서 다급히 말했다. 하지만 누가 누굴 치유하는지 모를 정도로 녹색 드래고니안 또한 상태가 좋지 못했다.
“도대체 어디서 저런 존재가…….”
모든 드래고니안이 믿을 수 없다는 눈으로 루시를 바라본다.
그들의 눈에는 여전히 경악과 경계, 두려움이 가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