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회귀여왕의 EX급 방랑기사-162화 (162/212)

제162화

#162.

설원의 힘을 사용하느라 염색 마법이 풀렸다.

청은발이 바람에 휘날렸다.

그 모습이 더욱 설원의 여왕을 고고하게 만들었다.

고요히 머릿결을 흘리며, 루시는 드래고니안들을 훑어보면서 입맛을 다셨다.

‘하나둘 정도는 사로잡고 싶은데.’

세상 어느 마녀가 고대종 드래고니안을 직접 보았을까?

물어볼 것도 많았고, 연구 욕구도 치밀어 오른다.

‘순순히 말로 해선 투항하지 않을 것 같고.’

파아아앗.

루시는 저들을 제압하기 위해 다시 한번 힘을 펼쳤다.

설원이 다시 날뛰었고, 이보다 더 깊은, 기원을 알 수 없는 무한한 추위가 흐르기 시작한다.

루시의 몸에서 더 큰 기운이 흘러나오자.

“모두 본신으로 현하라!”

황금색 드래고니안이 급히 외쳤다.

쿠오오오오오.

크르르르르르.

의식을 잃은 레드를 제외한 다섯이 기다렸다는 듯 용의 모습으로 변했다.

“호오.”

드래고니안의 진정한 모습을 보게 된 루시는 흥미롭다는 감탄사를 내뱉었다.

“으음……?”

그러나 얼마 후 드래고니안들이 본신으로 변신을 마치자.

“뭔가 시시해.”

그녀의 흥미는 김빠진 반응으로 변했다.

“리저드맨이랑 비슷하네? 뿔이랑 날개가 달린 정도인가?”

드래고니안의 진짜 모습은 작았다. 드래곤이라기 보단 리저드맨과 비슷했다.

“그런 하등종이랑 우릴 비교하다니! 단명종 마녀 따위가!”

그녀의 무심한 평에 검은색 드래고니안이 발끈한다.

“빙하의 여제와 놀랍도록 닮은 마녀여! 우리를 무시하지 마라! 실버 일족인 나 또한 너희처럼 공허의 냉기를 사용할 수 있나니.”

이어서 이들 중 제일 멀쩡했던 은색 드래고니안이 루시를 향해 경고했다.

처억, 척, 척!

약 3미터에서 4미터 크기의 이족 보행 용들이 각자의 무기를 들고 루시를 포위한다.

파아아앗.

동시에 본모습에서 나온 해방된 힘이 하나로 합쳐진다.

공간의 주도권을 탐한다.

대기에 가득 찼던 대마녀의 마나가 밀려나기 시작했다. 저들에게 제공권을 점차 내주고 있다.

“……?!”

루시는 설원의 영역이 침공당함에도 바로 반응하지 못했다.

‘방금 뭐라 했지? 빙하의 여제? 그 여자가 여기서 왜 나와?!’

저들의 입에서 나온 ‘빙하의 여제’라는 이름 때문이었다.

그러나 루시의 충격은 길게 가지 못했다.

지금은 전투 중이었기 때문.

파앗, 파앗, 파앗.

창끝 또는 기다란 손톱, 더불어 반쪽짜리 용언으로 캐스팅한 마법들이 루시를 포위했고, 그녀가 장악했던 공간에 들어섰다.

“…….”

“…….”

잠시 침묵이 적막 위에 올라탔다.

-!

소리로 표현할 수 없는 충격파가 싸움의 시작을 알렸다.

루시와 같은 속성인 실버와 물 속성인 블루는 자신들의 원소가 이 전투에서 효과가 없음을 잘 알았다.

퍼엉, 카앙, 캉!

그래서 근접 공격에 집중했다. 둘이 휘두르는 창과 긴 손톱이 설원의 방어막을 때린다.

설원의 방어막만으로는 두 드래고니안의 근접 공격을 막을 수 없었기에, 루시 또한 얼음으로 창을 만들어 중간중간 쳐 냈다.

파스으으으으.

2 대 1로 근접전을 벌이는 사이, 주위에는 녹색의 독 연기와 음영으로 꿀렁이는 그림자 물결이 루시를 포위했다.

그린의 독 공격과 블랙의 음영술이다.

음영으로 꿀렁이는 그림자 물결은 루한에 있을 루나시르네의 음영술과 흡사했다.

“오냐! 오너라!”

이에 루시 또한 가만히 있지 않았다.

[얼어라!]

대마녀의 영창을 외쳤다.

고오오오오오오.

아군 하나 없는, 조심할 것 하나 없는 공터.

무차별한 설원의 대폭풍이 휘몰아친다.

무한한 공허 속 추위가 이곳에 현했다.

“……!”

“?!!”

제일 가까이에서 창과 손톱을 휘두르던 블루와 실버가 타격음 입었다.

꼬드드득, 콰악.

물 속성 드래고니안인 블루는 미처 피하지도 못하고 그 자리에서 꽁꽁 얼어 즉사했다.

루시와 같은 속성인 실버만이 자신의 것을 아득히 초월하는 냉기에서 간신히 몸을 피한다.

솨아아아아, 팍!

주위를 뒤덮었던 그린과 블랙의 마법도 꽁꽁 얼어 녹색 얼음벽과 검은색 얼음벽으로 변했다.

눈앞에서 블루를 잃은 실버는 먼저 의식을 잃고 전투 불능이 된 레드가 떠올랐다.

실버는 시선을 레드가 있던 곳으로 슬쩍 돌렸다.

“…….”

시선을 돌린 그곳에는 사람의 형상을 한, 어떤 생명력도 감지되지 않는 얼음덩어리만이 외로이 누워 있을 뿐이다.

“어딜 보느냐!”

“?!”

잠시 한눈을 판 실버를 향해 루시의 공격이 작렬한다.

콰아아앙!

그녀가 휘두른 얼음창이 은색 드래고니안을 저 멀리 날렸다.

힘 조절을 했는지 즉사는 면한 모양.

하지만 그사이.

[삼켜 버려라!]

[파멸하라!]

블랙과 그린이 거리를 유지한 채 용언을 재창한다.

파스으으읏.

독의 운무와 음영의 파고가 다시 한번 모습을 드러냈다.

“이까짓!”

이에 루시도 대마녀의 언령을 영창했다.

[지워져라!]

아까보다 조금은 다른, 설원의 폭풍보단 좀 더 매서운, 설원의 대마녀가 펼친 ‘궁극기’

무한의 냉기를 활용한 언령 마법 ‘이레이저’가 캐스팅되었다.

쏴아아아아.

공허로 가득한 한파.

블랙과 그린이 펼친 용언 마법이 존재의 의의를 잃는다.

언령 마법 ‘이레이저’의 뜻대로, 두 드래고니안의 마법은 지워졌다.

솨아아아아악.

하지만 여기서 끝이 아니다.

“아아아!”

“끼아아악.”

블랙과 그린, 두 존재마저 순식간에 공허에 잡아먹혔다.

그런데 그때.

[빛이여!]

무한의 추위를 펼치던 루시 발아래로 눈부신 마법진이 생성되더니 그녀의 양팔과 양다리를 구속했다.

“!!”

루시는 경악을 담은 두 눈으로 이 마법진을 펼친 주인을 보았다.

지금까지 존재감을 드러내지 않았던 황금색 드래고니안이 멀찍이서 루시를 노려보고 있었다.

“도대체 이 마법이 왜 여기저기 있는 건데?!”

한편으론 자신의 발아래에서 빛나고 있는 마법진을 보면서 루시는 어처구니없는 표정을 지었다. 너무 황당하고 놀라 화도 나지 않았다.

“말해라! 왜 이노센티아를 너희가 쓰고 있지?!”

말해!!

고오오오오.

루시는 노성을 터트리며 물었다.

[……빛이여!]

골드 드래고니안은 답하지 않았다. 그저 대마법진 인노센티아에만 집중할 뿐이다.

드래고니안이 펼친 이노센티아는 지구에서 처음 보았던 이노센티아와 급이 달랐다. 더욱 정교하고 철저했다.

그래서 더욱더 루시의 트라우마를 자극했다.

“말하라고!”

구속, 궁금증, 짜증, 답답함 그리고 트라우마.

이 모든 것이 뒤섞인 루시의 기분은 결코 좋지 않았다.

[없어져라아!]

쿠고오오오오.

그녀는 온 힘을 터트려 자신을 구속하려는 대마법진에 대항했다.

파치지직.

용언으로 펼친 이노센티아지만, 그래 봤자 좀 더 오래, 그리고 많이 처먹을 뿐이다.

설원을 넘어선 무한한 추위 앞에서는 결코 오래 버틸 수 없다.

기어코 루시를 구속하던 인노센티아가 파훼되었다.

“이럴 수가…….”

이를 본 골드의 망연자실한 탄식을 끝으로.

-!

거대한 냉기가 폭발했다.

강원도 전체가 한겨울이 되었다.

늦여름이라는 사실이 무참하게 사방이 설원이다.

여름이라 땅 밖으로 모습을 드러냈던 뱀과 개구리 같은 동물들이 급격한 추위에 동사했고, 태백산맥의 수풀 또한 서리에 데어 한순간에 푸름을 잃었다.

뽀드득, 뽀드득.

이 대규모 기상 이변을 일으킨 장본인. 겨울 군주이시자, 설원의 대마녀께서는 순백의 수풀 속을 걷다가 한 인영 앞에 멈춰 섰다.

“아주 대단하시군. 빙하의 여제보다 더 강한 거 같아.”

루시의 인기척을 느낀 은색의 드래고니안이 죽어 가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파충류처럼 생긴 은색 눈동자는 초점이 없었다. 그저 멍하니 허공을 응시 중이다.

눈앞의 은색 드래고니안은 여섯 침략자 중에 유일하게 남은 생존자였다.

“저 마법진은 뭐지? 어떻게 이노센티아를 알고 있지? 빙하의 여제가 알려 줬나?”

루시는 이 은색 드래고니안을 향해 질문을 시작했다.

“빙하의 여제에 대해 말해.”

대답 없는 질문이 나직하게 이어졌다.

“그리고 그대들은 마계의 마족도 아닌데 왜 다른 차원을 침공하지?”

궁금한 게 너무 많았다.

‘또 힘 조절에 실패했어.’

하지만 눈앞의 은색 드래고니안은 죽어 가고 있었다.

“아아, 용계에 계신 로드를 볼 면목이 없구나.”

실버는 그런 루시의 질문에 대답해 줄 생각이 없는 모양이다.

“차원 코어, 이 세계의 차원 코어를 구해야 하는데…….”

녀석은 죽어가면서 푸념 어린 중얼거림만 늘어놓았다.

“그래야 위대하신 존재께서 깨어나는데…….”

하지만 저 푸념 속에서 루시는 몇 가지 정보를 얻을 수는 있었다.

“위대한 존재? 드래곤을 말하는 건가?”

죽어 가는 실버가 흘리는 말에 루시의 귀가 쫑긋거렸다.

“빙하의 여제가 그랬어. 이곳의 차원 코어가 있어야 진정한 이노센티아를 완성할 수 있다고. 그분들을 깨울 수 있다고.”

실버의 목소리가 점차 쪼그라든다.

“하지만…… 과연 그게 맞을까? 어쩌면 우리는 그 여자에게 속고 있는 게 아니었을까?”

파스슷!

그 말을 끝으로 은색 드래고니안의 몸이 눈꽃처럼 잘게 부서졌다.

휘이이잉.

차가운 바람이 불어 잘게 부서진 눈꽃 파편을 널리 뿌렸다.

“…….”

루시는 말없이 자신이 만들어 놓은 광경을 보았다.

‘결국 그 조연이라는 일도 물 건너갔군.’

뒤이어 밀려오는 생각에 한숨을 깊게 뱉었다.

일당이나 제대로 받을 수 있으려나 모르겠다.

싸움이 완전히 종식되었음을 확인한 루시는 자신의 몸을 살폈다.

‘너무 무리했어, 너무.’

결코 좋지 않다.

겉으로는 멀쩡해 보이지만 몸속이 엉망이다. 당장 안정을 취해야 했다.

터덜터덜 마법으로 몸을 띄운 루시는 자신의 시녀가 있을 촬영장으로 방향을 잡았다.

“!?”

그러나 루시는 나아가지 못했다.

“지켜보고 있었다고?”

언제부터인지 모르지만 그녀를 감시 중이던 시선을 느꼈기 때문이다.

‘어떻게 몰랐지? 이 정도 존재감을?’

그녀는 서둘러 존재감을 느꼈던 방향을 노려보았다.

500미터 떨어진 상공에 한 덩치 큰 남성이 루시를 노려보고 있었다.

방금 상대한 드래고니안 둘 정도를 합친 존재감이.

저 멀리, 덩치의 남자에게서 뿜어져 나왔다. 어쩌면 지금 뿜어내는 힘도 일부일지도 모른다.

“……!”

적어도 지금 그녀의 상태로는 결코 승리를 장담하지 못했다.

협회장 박태오는 멀찍이서 루시와 드래고니안의 전투를 지켜보았다.

‘힘은, 마력은 확실히 대단하군. 어쩌면 광휘보다 더. 하지만 기교는 중급 헌터보다도 못해.’

박태오는 저 이계의 여왕이 펼친 무용을 하나도 빠짐없이 머릿속에 새겼다.

부르르르.

그의 꽉 쥔 주먹이 격하게 떨렸다.

볼수록 비슷하다. 그의 하나뿐인 여동생을 살해한 그 여자와.

“……!”

당장이라도 저 여자에게 달려들어 목을 꺾고 싶었다.

하지만 초인적인 인내심으로 참았다.

저 루시라는 이계의 대마녀는 빙하의 여제가 아니다. 베아트리체가 아니다. 그저 닮은 것일 뿐.

무엇보다 태광휘와 각별한 사이라고 했다.

빠드득!

박태오는 초인적인 인내심으로 참았다.

하지만 그 인내의 과정에서 자신의 존재감을 드러내고야 말았다.

약 500미터의 거리.

박태오와 루시의 눈이 마주쳤다.

“…….”

불편한 대치가 이어졌다.

아직은 적이 아니고. 굳이 적으로 돌릴 이유도 없는 여인.

가장 베스트는 그냥 무시하고 서로 갈 길 가는 거다.

하지만 박태오는 이상하게 그렇게 하기 싫었다.

우두둑, 두둑.

그는 천천히 목과 어깨, 양손의 관절을 풀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