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63화
#163.
루한의 여왕과 지구의 협회장.
그러나 둘의 싸움은 일어나지 않았다.
“이거, 혹시나 해서 왔더니, 바로 오길 잘했습니다?”
뒤늦게 속초 쪽 게이트를 폐문하고 온 시몬의 개입 덕분이었다.
“……칫. 이럴 때만 빠릿하군? 김시오 집행관.”
시몬의 등장에 박태오는 전투 태세를 해제했다. 지글지글 끓이던 대기 중의 마나를 식혔다.
“이 동네에 발생한 인스턴트 게이트는?”
“초상 부대 헌터들이 방금 폐문했다고 하네요. 우리 여왕님께서 몰이를 잘해 주신 덕분입니다.”
게이트 내부는 다른 세계와 이어진 아공간 통로. 루시가 드래고니안과 몬스터를 전부 유인해 준 덕분에 사실상 빈집 털이였다.
“그럼, 슬슬 가시죠? 협회장님.”
간략히 보고를 마친 시몬은 어깨를 으쓱이며 박태오에게 말했다.
“저 여자를 이대로 두고? 진심인가?”
시몬의 말에 박태오가 턱 끝으로 루시를 가리켰다.
강원도 전체를 겨울로 만들어 버린 여자다.
그녀가 정식 등록된 헌터라면 오히려 인류의 건재를 알릴 수 있는 홍보의 장이 되겠지만, 현재는 쓸데없는 똥고집으로 인류의 일원이 되길 거부하고 있는 상황.
당장 이 강원도에서 일어난 기후 변화를 언론에 뭐라고 둘러댈지가 문제다.
‘모르겠다. 이런 건 PR팀에서 알아서 지어내겠지.’
박태오는 복잡해진 머릿속을 세차게 흔들어 훌훌 털었다.
그리고 다시 전투 의지를 담은 눈으로 루시를 노려본다.
“그냥 두기엔 너무 위험해. 강제로라도 연행해 가는 게 편하겠어.”
“강제로 어떻게 할 수 있는 분이 결코 아닙니다, 협회장님.”
그런 협회장을 향해 시몬은 다소 진지한 어투로 말했다.
“…….”
“…….”
박태오와 시몬 사이에 묘한 기류가 잠시 흘렀다.
그렇게 몇 초가 지났을까.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김시오 집행관이 책임져야 할 거야.”
결국 박태오가 먼저 미간을 구기며 한발 물러났다.
그리곤 아무 말 없이 휑하니 사라졌다.
박태오가 가 버리고, 시몬은 고개를 돌려 여전히 여기를 주시 중인 여왕을 보았다.
꾸벅.
시몬은 작게 미소 지었다. 고국의 여왕을 향해 고개를 살짝 숙였다. 그리고 박태오가 사라진 방향으로 떠났다.
평택에 있는 집으로 돌아가는 길.
강원도 전체가 겨울이 되었지만, 구민주와 루시가 타고 온 차는 멀쩡했다.
촬영지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주차해 격전에 휘말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도 일당은 준다고 하니까 다행이에요!”
차 안에서 구민주는 해맑게 웃으면서 운전했다.
“…….”
루시는 해맑게 운전 중인 자신의 시녀를 지긋이 보았다.
민주는 얼굴을 비롯한 몸 곳곳에 반창고와 붕대를 둘렀다. 운전대를 잡은 손에는 가벼운 깁스까지 했다.
공간 이동으로 이동해도 되었지만, 구민주는 자신의 고용주께서 매우 피곤한 것을 눈치챘다. 그래서 굳이 자신이 운전을 하겠다고 고집을 피웠다.
루시는 그런 구민주에게 괜히 미안했고 한편으론 부끄러웠다.
‘내 잘못이야.’
많은 것을 느낀 하루였다.
‘내가 안일했어.’
어쩌면 이계의 신문물에 들뜬 것일지도 모른다.
태어나서 처음 누리는 자유에 자신도 모르게 나태해진 것이다.
‘한시라도 빨리 차원 코어를 찾아야 하는데!’
자존심이니, 대인 기피니, 고집을 부릴 때가 아니었다.
‘솔라가 지구로 돌아왔을 때, 적어도 차원 코어의 행방 정도는 알고 있어야 되는데.’
솔라는 차원 코어의 존재를 몰랐다. 그저 그녀의 세계와 지구가 힘을 합쳐야 한다는 정도만 태평양 게이트 속에서 깨달았을 뿐이다.
루시 또한 루나와 로뮤가 전한 세계수의 메시지를 통해 차원 코어에 대해 알았다.
‘마음 같아선 그 태평양 게이트 안으로 따라가고 싶지만.’
하지만 그럴 수 없었다. 태광휘와 헌터들이 입장하자마자 게이트의 림보가 닫혔기 때문이다.
루시는 이를 악물었다. 태광휘가 지구로 왔을 때 부끄러운 모습을 보여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이렇게 피하기만 해선 안 돼!’
그래도 다행인 것은 이번 일을 계기로 더 이상 시선이 두렵지 않아졌다는 것이다.
아까 청은발을 휘날리며 차에 오를 때도 무수한 시선이 그녀를 찔렀다. 여전히 메스꺼웠지만 꽤 견딜 만하다고 생각했다.
‘그 신지영이라는 여배우가 나에게 보낸 시선은 좀 아팠지만.’
다만, 아까까지만 해도 격식 없이 대화를 나눴던 신지영의 시선이 변한 것이 씁쓸했다.
루시가 몹몰이를 거하게 하고 지역 전체를 겨울로 만들고, 무엇보다 청은발을 휘날렸다는 것이 문제였다.
아마 신지영은 최근 협회에서 수배 중이라던 청은발의 미등록 각성자를 떠올렸겠지.
호기심에서 두려움과 경계로 바뀐 신지영의 시선이 아직도 뇌리에 스치운다.
“음, 루시 님? 제 얼굴에 뭐가 묻었나요?”
그때, 루시의 시선을 느낀 구민주가 천진난만한 표정으로 물었다.
그러고 보니 구민주를 보면서 잠시 상념에 잠겼었다.
상념에서 깨어난 루시는 자신의 전속 시녀의 몰골을 꼼꼼히 살폈다.
‘내 사람도 지키지 못하는 주제에, 어찌 군주이길 자처할까?’
민주의 얼굴 곳곳에 붙은 반창고와 붕대가, 운전대를 잡은 손에 댄 깁스가, 여왕의 결심에 기름을 얹었다.
“루시 님, 피곤하시죠? 곧 집에 도착하니까 어서 푹 쉬어요!”
구민주는 자신에게 향한 고용주의 멍한 시선이 피곤함에 의한 것으로 해석한 모양인지, 엑셀을 밟은 발에 힘을 줬다.
“아니, 협회로 가자.”
그런 구민주에게 루시는 담담한 어조로 말했다.
“네, 협회로 출발…… 에? 에에?”
고용주의 갑작스러운 행선지 변경에 구민주는 전방을 주시하던 눈을 조수석으로 돌렸다.
“혀, 협회요? 왜요? 뭔데요?!”
기대 반, 걱정 반.
드디어 협회와 화해(?)하기로 결심한 것인지, 아니면 그곳에서 또 다른 깽판을 치시려는 것인지.
믿어지지 않아 얼떨떨하면서도 마침내 올 게 왔구나 싶은 다채로운 심경이 구민주를 적셨다.
* * *
경기도 평택시, 세계각성자협회본부&한국지부.
다사다난한 하루를 마치고 협회본부에 도착했을 때에는 이미 늦어도 너무 늦은 밤이었다.
“생각해 보니 얘네도 준공무원이었네요?”
즉, 협회의 문은 굳게 닫혀 있었다.
굳게 닫힌 협회 정문 주위에는 협회 유니폼 위에 방탄조끼를 입고 있는 보안요원들이 경계를 서고 있었다.
“…….”
루시는 말없이 굳게 닫힌 협회 정문을 노려보았다.
“……가서 얘기라도 해 보렴.”
그러다 옆에 서 있는 구민주를 향해 명을 내렸다.
이대로 돌아가기엔 오늘 다진 결심이 퇴색될 것 같았다.
그래서 쉽게 발걸음을 돌릴 수 없었다.
“아이 참, 다 퇴근하고 없다니까요? 애초에 들여보내 주지도 않을 거고…….”
고용주의 채근에 구민주가 협회 정문에 선 보안요원들을 힐끔거리며 투정한다.
아무리 억척같은 민주라도 저 보안요원에게 말을 거는 것은 부담스러운 모양.
“네가 하기 싫다면 내가 하지.”
시녀가 망설이자, 루시가 직접 나섰다.
“아니, 아니에요! 제가 할게요! 제가!”
루시가 직접 나선다고 하자, 화들짝 놀란 민주가 급히 나섰다.
괜히 고용주가 또 사고를 칠 바엔 자신이 직접 나서는 것이 낫다고 구민주는 생각했다.
그녀는 뻘쭘함을 무릅쓰고 쫄쫄쫄 정문 쪽의 보안요원을 향해 다가갔다.
“저기…… 안녕하세요? 각성자 등록을 하러 왔는데요.”
제일 먼저 어색하게 인사를 건넨 민주.
“…….”
보안요원이 천천히 시선을 돌려 그녀를 쳐다본다.
“그으…… 제가 아니라 저기 뒤에 계신 루시라는 분이신데, 굉~장히 실력이 좋으시고요. 또 협회 높으신 분들이랑도 인연이 있으시고…….”
구민주는 보안요원이 묻지도 않은 말을 주저리주저리 늘어놓았다. 속으로는 집행관 김시오와 문유리의 이름을 직접 말할까 말까 갈등도 했다.
그렇게 주절주절 말을 마치자마자, 괜히 심장이 덜컹거린다.
‘괘, 괜히 잡혀 가는 것은 아니겠지?!’
괜한 불안감이 엄습했고, 민주는 빠르게 사과 태세로 전환했다.
“아하하…… 역시 안 되겠죠? 저희가 너무 진상이었죠?”
“들어가셔도 좋습니다.”
“히익! 죄송합니다! 그냥 내일 오겠습니다아!! 어차피 집도 이 근처니까…….”
“들어가셔도 좋습니다.”
“……네?”
“기다리고 계십니다. 들어가셔도 좋습니다.”
“기다리다니? 누가요?”
하지만 예상외로 순순히 출입이 허가되었다.
구민주는 얼빠진 표정으로 보안요원과 루시를 번갈아 보았다.
“폐…… 루시 님께서 생각보다 마음을 빨리 바꾸셨군요?”
때마침, 정문 안에서 누군가가 마중을 나왔다.
“아앗! 문유리 집행관님!”
밖에서는 챙 넓은 모자와 선글라스를 끼고 있는 여자 헌터, 문유리(유리아)였다.
그녀가 정문에 등장하자.
“집행관께 경례!”
“충성!”
마네킹처럼 서 있던 정문의 보안요원들이 신병처럼 유리아를 향해 경례를 올린다.
“수고가 많다. 여기 두 분은 내가 직접 안내하겠다. 루시 님, 제가 안내하겠습니다. 민주 양도 오세요. 헌터 매니저가 되려면 별도의 교육이 필요하니까요.”
유리아는 익숙하다는 듯 그들의 경례를 받고는 구민주와 루시를 안내했다.
세계각성자협회 본부의 건물 안.
드라마와 영화 등등 무수한 미디어에 연출되었던 내부가 실제 눈앞에 펼쳐졌다.
본부 건물 내부로 들어선 두 여자, 구민주와 루시는 각자 다른 반응을 내비쳤다.
“우와, 대박. 구민주, 성공했구나! 성공했어! 살면서 이렇게 협회 본부에도 와 보고.”
구민주는 감회에 젖은 눈으로 협회 내부를 관광객처럼 구경했다.
“그런데 유리아 경이 나를 기다리는 게 아니라고?”
루시는 유리아와 함께 나란히 걸으면서 아까부터 의문이었던 것을 물었다.
“그렇습니다.”
“나를 누구에게 안내하는데?”
“지구의 성녀, 아스카 레이나가 루시 님을 뵙고자 하십니다.”
“……그 살모사가?!”
유리아의 대답에 루시의 인상이 찡그려졌다.
“커허어어업!”
옆에 있던 구민주는 숨이 넘어갈 뻔했다.
“살모……? 으음, 일단은…… 그렇습니다.”
유리아는 루시가 성녀를 부르는 호칭에 살짝 당황한 눈치.
“그래, 언젠간 한번 만나야 한다고 생각은 했었지. 이번 기회에 단단히 서열을 가르겠다. 경, 앞장서게!”
루시는 씩씩거리며 발걸음에 힘을 줬다.
“그…… 루시 님, 지구의 성녀님 말입니다. 좀 많이 특이할 겁니다. 이상한 말을 해도 당황하지 않으시는 게…….”
그런 여왕을 유리아가 걱정이 가득한 눈으로 충언을 했다.
“걱정 안 해도 된다! 내가 그깟 살모사 한 마리 제압 못 할 것 같은가?”
그러나 투지로 활활 타오르는 루시에겐 와 닿지 않는 충언일 뿐.
“……아무쪼록 파이팅입니다.”
유리아는 그저 별일이 없기를, 성녀가 선만 넘지 않기를 기도할 뿐이었다.
“성녀님을 만나다니…… 우리 고용주께서 세계각성자협회 부협회장이자, 검룡길드 길드장을 만나시다니……. 미쳤다. 설마! 정말로 태광휘 헌터와……?”
뒤에서는 구민주의 믿겨지지 않는다는 혼잣말이 1층 홀을 메아리쳤다.
협회 본부 최상층에 위치한 방.
각성자협회 ‘부협회장’이자 검룡길드의 길드장을 역임 중인 아스카 레이나의 집무실이기도 하다.
그 집무실 안에 금발의 아름다운 여인과 청은발의 고결한 여인이 마주했다.
둘 다 우열을 가리기 힘든 절세의 외모.
참고로 루시의 현지 시녀 구민주는 유리아와 함께 다른 방에 있었다.
헌터, 그것도 S급 헌터가 될 루시의 매니저를 맡아야 한다. 구민주를 위한 기본적인 교육은 필수일 터.
그렇게 구민주를 떠나보내고, 심지어 유리아마저도 다른 방에서 대기 중인 상황이지만, 루시는 딱히 긴장 같은 걸 하진 않았다.
‘뭔가…… 친숙하군.’
오히려 그녀는 눈앞의 성녀를 보고서 이유 모를 친숙함을 느꼈다.
‘그러고 보니 저 살모사도 솔라와 같은 빛의 힘을 쓰지?’
그래서 그런 걸까? 루시는 뒤늦게 이 친숙함에서 괜히 짜증을 느꼈다.
“흐응~.”
“…….”
루시의 기분을 아는지 모르는지, 눈앞의 성녀 아스카는 초롱초롱한 눈동자로 루시를 스캔했다.
‘살모사 같은 게!’
루시 또한 마찬가지로 아스카를 대놓고 쓸어 보았다.
그렇게 불편한 대치가 얼마나 이어졌을까.
“그래서 당신은 몇이나 낳을 거죠?”
제일 먼저 입을 연 사람은 다름 아닌 아스카였다.
“뭘 말이지?”
정말 뜬금없는 질문이었기에, 루시는 아스카의 질문의 뜻을 이해조차 못했다.
“아이 말이에요! 아이! 광휘 오빠랑 나중에 몇이나 낳을 거냐고요.”
“아, 아이? 글쎄, 그게 내 마음대로 되나? 아니! 잠깐, 왜 갑자기 이딴 말을 하는 거지?”
루시는 아스카의 뜬금없는 질문에 휘말릴 뻔함을 느끼며 반박했다.
“뭐긴요! 이것은 정실 싸움인 것이에요!”
“정……실?”
“저는 못해도 다섯은 낳을 생각이에요. 물론~ 그이가 원하면 더 많이도 가능할지도?”
하지만 아스카는 이미 자신이 꺼낸 대화의 주제에 완전히 매몰된 모양.
“다, 다섯?!”
루시는 그런 성녀의 말에 말을 더듬었다. 사파이어를 닮은 눈동자가 부르르 떨며 아스카의 잘룩한 허리와 복부, 골반을 응시한다.
‘저기서 어떻게 다섯을?’
괜히 긴장되고 침이 삼켜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