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64화
#164.
루시가 머뭇거리자, 아스카는 승기라도 잡은 것처럼 더 세차게 몰아붙였다.
“어떻게! 광휘 오빠의 정실을 주장하면서! 아이에 대한 플랜조차 구상하지 않으신 거죠?!”
“우, 우리 왕가는 대대로 손이 귀하다. 기껏해야 딸 하나밖에…….”
“뭐어?! 하나요?”
루시의 움츠린 대답에 아스카가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건 핑계예요! 광휘 오빠의 신성한 혈통은 최대한 많이 퍼트려야 한다고 봐요. 그것이 바로 정실의 의무인 셈이지요! 자식을 하나만 낳으려 하다니이! 당신은 광휘 오빠 정실에서 완전 탈락인 것이에요!”
“정실의 의무…… 신성한 혈통…… 임신과 출산……. 나는 몇이나 가능하지? 다섯? 할 수 있을까? 그게 될까?”
루시는 아스카의 화법에 그대로 휘말려 두 눈이 빙빙 돌았다.
“호에에에~ 광휘 오빠가 오면 바로, 바로 덮치는 거야. 마법진과 결계를 촘촘히 만들어서 유인하는 거지. 일단 애부터 배면 오빠도 받아들이겠지? 그러면 내가…… 이히, 이히히히!”
아스카의 두 눈도 루시와 크게 다를 건 없어 보였다. 폭주를 거듭하여 뇌절에 이른 성녀의 눈은 어떤 의미로 빙빙 돌았다.
몽롱한 동공으로 천장을 보면서 입가에 헤롱헤롱한 미소를 짓는 성녀는 분명 이상했다.
제3자가 보았다면 둘 다 제정신이 아니라고 생각했을 법한 광경.
끼이잉.
그 성녀의 어깨에는 검은색 마리모처럼 생긴 주먹만 한 생명체가 낑낑거리고 있었다.
마기가 풀풀 풍기는 11차원의 생명체. 하지만 지금의 루시는 그것에 신경 쓸 여유가 없었다.
“좋아요, 결심했어요! 묻고 더블로 가는 것이에요. 다섯이 아니라 열 명을 낳는 것이에요! 한국식이랑 일본식으로 이름도 지어 놨다고요!”
“열, 열 명?!”
혼란에 빠졌던 루시는 아스카의 입에서 나온 숫자에 다시 한번 기겁했다.
“그래요! 열 명! 좀 무섭긴 하지만 괜찮아요! 저는 사랑(신성력이다)으로 충분히 이겨 낼 수 있어요!”
‘무슨 오크도 아니고……. 하지만 저 여자는 진짜로 할 각오야.’
대화를 나눈지 몇 분도 되지 않았건만 루시는 굉장히 진이 빠졌다.
“그래서 루시, 당신은 얼마나 낳을 거죠? 말해 봐요! 정말로 하나만 낳을 건가요?”
“말, 말했다시피 우리 왕가는 대대로 손이 귀하다. 대대로 딸 하나만 낳아 왔는데…….”
“헤에~ 끝까지 고집을 피우시겠다?”
아스카의 추궁 아닌 추궁에 루시는 주눅까지 들어 버렸다.
“물론 노력은 해 보겠다만…… 나는, 나는…….”
루시는 자신과 성녀의 아랫배를 기가 죽은 눈으로 번갈아 볼 뿐이다.
“좋았으! 1라운드는 제가 이겼네요!”
“어…… 어?”
이 방에 오기 전까지 단단히 각오했던 기싸움.
그 1라운드.
경기 시작과 함께 쏘아진 성녀의 변화구에 루시는 그대로 KO당했으니, 그리하여 이 경기의 시작과 1라운드의 끝은 여왕의 패, 성녀의 승.
스코어는 0 대 1.
첫 만남부터 보통이 아니다.
2라운드는 커피 한잔 나누지 않고 곧바로 시작되었다.
어차피 루시는 마시지 않았겠지만.
“좋아요! 이제 2라운드로 가 보아요! 당신은 광휘 오빠가 부인을 얼마나 두었으면 좋겠어요?”
“뭐, 뭣?!”
역시나 만만치 않은 주제.
“하, 하나나 둘…… 정도?”
루시는 마음의 빚이 있는 유리아를 떠올리며 조심스레 말했다.
“역시! 당신은 정실이 될 자격이 없어요! 정답은 ‘무한’이에요! 제가 정실이 되면, 도시 하나를 광휘 오빠를 위한 하렘 도시로 만들 것이에요!”
“……!”
아스카의 발상에 루시는 그저 입을 쩍 벌릴 뿐이다.
상상조차 하지 못했던, 기가 찬 망상들.
하지만 눈앞의 여자는 실제로 이를 행할 의지와 능력이 있다는 것이 문제.
“말 같지도 않은 소리 마라!”
루시는 반박했다. 저런 말도 안 되는 짓은 그녀가 온 대륙에서도 불가능했다. 제국의 황제들도 후궁을 몇 두는 정도였지, 도시 하나를 자신만의 여자로 두진 못했다.
“그런 게 법적으로 가능할 리가 있나!”
하물며, 이 지구라는 세계는 평등과 인권이 중시되는 세계. 그런게 법적으로 허용될 리가 없다. 설령 솔라가 이 세계에서 신과 같은 위치에 있다고 해도.
“아? 몰랐나요? 한국을 비롯한 대다수 국가는 현재 일부다처제랑 일처다부제가 합법이거든요? 심지어 한국은 그 숫자에 제한을 두지 않았아요! 정 한국에서 난리면 일본에서 해도 되고요?”
그러나 루시의 반박에 아스카는 문제없다는 듯 대꾸했다.
“……!”
“지난 대전쟁으로 너무 많은 남자가 죽었어요. 성비가 엉망이 되었지요. 그와 중에 새로 태어나는 아이들은 각성자일 확률이 높네요? 등급도 대체로 높고? 출생률 증가는 필수죠. 그러다 보니 어쩌겠어요? 이렇게라도 해야죠.”
“허…….”
결국 말문이 막힌 루시.
너무 당당하고 너무 비상식적이라 도저히 어떻게 상대해야 할지 감이 안 잡혔다.
“물론, 정실은 제가 되어야 하는 것이에요! 광휘 오빠의 하렘 도시의 시장을 제가 맡는 것이에요. 으음~ 루시는 부시장으로 내정해 드릴까요?”
그런 루시의 반응에, 더욱 태연한 표정으로 어깨를 으쓱이는 아스카.
“…….”
‘뭔가, 뭔가다.’
루시는 눈앞의 여자에게 두 번째 패배를 직감했다.
‘아니.’
하지만 그녀는 아직 포기하지 않았다.
‘나도 똑같이 응해 주면 돼!’
멋대로 어처구니없는 주제를 들이밀어 이렇게 된 것이라면, 루시라고 못할 건 없다.
에휴.
루시는 눈앞의 성녀에게 한심하다는 듯 한숨을 대놓고 내쉬었다.
“도대체 왜 이런 의미없는 대화에 시간과 감정을 낭비하는 것인지 모르겠군.”
저쪽이 먼저 판을 흔들었으면 판을 엎으면 된다.
“의미가 없다니요?”
“애초에 솔라의 의향은 전혀 묻지 않고 그대 멋대로 품은 망상 아닌가?”
“망상이라니! 아니거든요?”
“애초에 너는 솔라…… 태광휘와 연인 관계도 아니야.”
“광휘 오빠와 저의 각별한 사이를 모르는 사람은 이 세계에 없다고요!”
“그래서 솔라가 너를 여자로 봐 주었니? 기껏해야 동생 아니었나?”
루시는 인터넷 나무위키에서 보았던 성녀와 태광휘의 관계 ‘논란’ 목록을 떠올리며 물었다.
“?!”
루시의 질문에 아스카의 의기양양한 표정이 무너지기 시작한다.
“그…… 그러는 당신은! 뭐 잘났다고 그런 소릴 하는 것이죠?”
약점이라도 찔렸는지 아스카의 목소리가 떨렸다.
“나?”
반면, 루시의 얼굴에는 자신감과 비릿한 미소가 빛나기 시작했다.
“보렴.”
루시는 아스카에게 자신의 왼손을 펼쳤다.
“그, 그그…… 그건?!”
왼손을 본 아스카의 얼굴에 당혹이 물든다.
루시의 왼손 약지에 붉은색 반지가 반짝였기 때문이다.
저 반지, 아스카는 아주 잘 알았다. 이세계에 갔다가 돌아온 태광휘가 늘 손에 끼고 있던 반지다.
“…….”
아스카는 세상이 무너지는 기분을 느꼈다.
“나, 루한의 루시푸르네는!”
루시는 확인 사살을 행했다.
“그이와 함께 여행도 다녔고.”
잘 들어라.
“거룩한 과거도 공유 중이며!”
이것이.
“함께 쥴리아를 양육했던 관계였으며!”
너와 나의.
“진한 키스도 나눈 사이니라.”
넘볼 수 없는 차이다.
“!!”
효과는 굉장했다.
털썩.
아스카는 그 자리에 그대로 주저앉았다.
“……!”
아스카의 어깨와 양손이 잘게 떨렸다.
끼이이.
성녀의 어깨에 매달린 검은색 마리모가 벌벌 떨었다.
“유리아와 시몬으로부터 들었는지 모르겠는데, 태평양 게이트에 있던 솔라가 제일 먼저 연락한 사람이 바로 나다! 나, 루시푸르네라고!”
반대로 루시의 어깨와 기세는 이제 팽창의 끝에 도달해 있었다.
“나는! 그이의 부탁을 듣고, 목숨을 걸고! 차원을 넘어온 여자다!”
루시의 사파이어 눈동자가 바닥에 주저앉은 성녀를 내려다본다.
자! 이제 누가 정실이지?
그녀의 푸른 눈동자는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 * *
다시 늦여름을 되찾은 강원도는 빠르게 겨울의 흔적을 벗어던지는 중이다.
그런 복잡한 날씨 속에서, 폐문을 완료했지만 중간중간 흘러나갔을 몬스터와 혹시나 생성되었을지 모를 마경(몬스터랜드)을 체크하기 위해, 협회와 길드의 헌터들은 아직 복귀하지 않았다.
“그 여자와 아스카가 만났다고?!”
협회장 박태오 또한 아직 강원도에 있었다.
“그런 모양입니다.”
박태오에게 협회 본부에서 유리아가 보내온 소식을 알리는 시몬 또한 이곳에 남았다.
두 사람의 끗발이면 폐문 직후 강원도를 떠나도 뭐라 할 사람은 없었다.
하지만 박태오도 시몬도 둘 다 책임감과 선의로 무장한 인물.
도움의 손길이 필요한 곳을 이유 없이 떠날 인간은 못 됐다.
성격의 차이는 크지만 말이다.
“참으로 다행 아닌가요? 저희 여왕님께서 드디어 마음을 바꾸신 것 같으니 말입니다. 아마 이곳에서의 경험이 결정적 계기가 된 모양입니다.”
말을 하는 시몬의 표정은 매우 밝아 보였다.
“…….”
반면, 박태오의 얼굴은 여전히 무뚝뚝했다.
“그 루시라는 여왕, 평범한 성격은 아니지?”
오히려 더욱 심각해졌다.
“그렇지요?”
“아스카 그 애의 성격도 보통은 아니지?”
“성녀님도 자신만의 세계가 확고하시죠?”
“그런 두 사람이 만난다고? 심지어 연적 관계잖아?”
“확실히…… 두 분이 경쟁 관계인 것은 부인할 수 없겠습니다.”
“심지어 둘 다 어지간한 소국 하나는 그냥 없앨 수 있는 존재들이야.”
“그래도 그곳에는 문유리 집행관이 있습니다.”
“문 집행관 혼자서 두 여자를 막을 수 있을까? 오히려 휘말릴 지도 모르지. 무엇보다 문유리 집행관은 아직 그 힘을 완전히 컨트롤하지 못하는 걸로 아는데? 자네와 다르게 말이야.”
“…….”
박태오의 말이 이어지자, 처음 밝은 표정으로 이를 알렸던 시몬의 얼굴 또한 점점 파랗게 변했다.
“지, 지금이라도 평택으로 갈까요, 협회장님?! 제가 공간 이동 마법을 펼치겠습니다.”
떨리는 목소리로 묻는 시몬의 실눈이 간만에 크게 떠졌다.
“둘이 만났다는 소식을 언제 받았지?”
“문 집행관으로부터 약15분 전에 받았습니다.”
“……기도라도 해야겠군.”
부디 도착했을 때 협회 본부와 도시가 무사하기를, 박태오는 진심으로 기도했다.
협회 본부로 공간 이동한 시몬과 박태오는 일단 크게 안도했다.
도시는 물론, 협회 본부가 멀쩡했기 때문이다.
“그나저나 문유리 집행관은 어디 있는 거지? 문 앞에 대기라도 하고 있어야 하는 거 아닌가?”
“이런 부분에선 꽉 막힌 사람이니까요. 아마 성녀님이 멀리 가 있으라고 하니까 그대로 따른 모양입니다.”
“끄응…… 일단 우리라도 만약의 사태를 대비하자고.”
“예!”
둘은 급히 루시와 아스카가 있다는 부협회장실로 향했고, 굳게 닫힌 문 앞에 멈춰 서더니 귀를 문에 가져다 댔다.
방음이 확실한 문이지만, 초인의 경지에 이른 두 사람이 청력에 힘을 모으자 희미하게 대화 소리가 들렸다.
“평택에 있는 태광휘의 집에서 살고 싶다!”
“절대 안 돼요!”
대충 들어도 다투는 소리.
그러나 심각한 주제는 아닌 모양.
“그러고 보니 당시이이인!!”
주로 아스카가 발끈하고 루시는 받아치는 형상.
‘아스카가 밀리고 있다고?’
‘역시 우리 여왕님!’
대화를 엿듣던 박태오와 시몬이 서로 다른 의미로 시선을 교환한다.
“루시 당신! 어떻게…… 어떻게 그런 짓을 할 수 있죠?”
“뭘 말이냐?”
“당신이 광휘 오빠 집에 무단 주거 침입했을 때 말이에요! 광휘 오빠 침대에서 잤더라고요? 배게 밑에 오빠의 사진까지 있고?!”
“그게 뭐?”
“그게 뭐라니요옷! 그것은 엄연한 사생활 침해인 것이에요!”
‘나도 못 해 본걸! 스토커 짓 같아서, 광휘 오빠가 알게 되면 싫어할 거 같아서 못 해 본거어얼!’
흐에에엥.
아스카는 속으로 울면서 부들거렸다.
“일단 무단 주거침입이라는 말은 어폐가 있군.”
“뭐가 어폐인데욧?!”
“솔라가 그 집에서 살아도 된다고 했다.”
루시는 그런 아스카를 일부러 피폐하게 만들려는 것처럼 태연한 말투를 유지했다.
마치 솔라와 자신의 사이에서 이런 건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거짓말! 거짓말! 절대 광휘 오빠 집은 안 돼요!”
“이유를 말해.”
“그…… 그 집은 나중에……! 저랑 광휘 오빠가 살기 위해 준비했던 아늑한 신혼집이었던 것이에요!”
“흥, 네까짓 게?”
루시는 다시 한번 조소를 지으며 아스카에게 태양샘 반지를 보였다.
“갸아아아악! 아아아악!!”
그럴수록 아스카는 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