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67화
#167.
아스카는 미간을 좁히며 말을 이었다.
“길드부터 정부, 군대에 심지어 기업까지! 요즘 너~무 손해를 안 보려고 해요! 뭐만 하면 협회 탓만 하구! 그러다가 감당 못 할 일이 터지면 언제 그랬냐는 듯 협회를 찾고!”
성녀의 외침이 회의실을 울렸다.
“누구는 손해 보기 싫어서 지금까지 호구처럼 싸워 왔나? 진짜 광휘 오빠가 돌아오면 전부 혼내주 라고 할 거야!”
한마디 한마디에 감정이 담겼다.
“누구 덕분에 이렇게나마 평화를 누리는데?!”
목소리 또한 잘게 떨렸다.
“누구 덕분에 아직도 민주주의 세계가 유지되고 있는데?!”
성녀의 말을 회의실의 모두가 말없이 들었다.
“너무너무 얄미워! 루시보다 더 얄미운 것이에요!”
알게 모르게 지금껏 쌓인 게 많은 모양.
“안 그래요, 피스! 어떻게 사람들이 마계에서 온 피스보다 더 이기적일까요?”
피스는 이렇게나 귀여운데!
울분을 토하던 아스카는 언제 화를 냈냐는 듯이 어깨 위의 검은색 애완 괴수를 손에 집더니 자신의 볼에 비볐다.
끼이이이이!!
성녀의 신성력에 저 피스라는 애완 괴수가 고통을 호소한다. 악취미도 저런 악취미가 없어 보였다.
“…….”
루시는 그런 성녀를 보며 고개를 작게 저었다.
성녀의 외침 중간에 자신이 언급되었지만, 저런 거에 발끈할 정도로 미숙한 사람은 아니라고 루시는 스스로를 평가했다.
“길드는 사실상 기업이니까요. 상인이 손해를 보지 않으려고 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하기도 합니다. 지성을 가진 드래고니안이나 마족의 마석은 등급이 아주 높으니까요.”
묵묵히 성녀의 말을 듣던 유리아가 입을 열었다.
“돈으로도 구하기 힘든 게 그것들의 마석이지. 애초에 생포하는 것부터가 리스크가 매우 큰 데다, 초상 심문을 하면 금제를 푼 후유증 때문에 마석이 평범한 돌덩이가 되어 버리니까.”
협회장인 박태오는 그들의 처지를 설명하는 듯한 뉘앙스로 유리아의 말에 동조했다.
“하지만 그걸 고려한다고 해도 요즘 기업들의 행동은 눈살이 찌푸려집니다. 대놓고 마인과 거래하는 건수도 점점 늘어나고 있으니까요.”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를 긍정적으로 보고 있다는 뜻은 아니다. 유리아 또한 최근 집행관 임무를 하면서 보고 느낀 바가 있었기 때문이다.
“언젠간 대대적으로 손을 봐주긴 해야 해. 지금은 우리가 여력이 없으니까 놔두는 것일 뿐.”
이는 협회장 박태오도 마찬가지다.
“광휘 오빠만 돌아와 봐아! 다들 죽은 목숨인 것이에요! 팍, 씨!”
어쨌든 결론은 하나, 언젠간 이 은혜도 모르는 놈들을 손봐 줄 것임을.
어찌 되었든 대화는 원점.
침략자 지성체 포로의 수급 문제로 돌아왔다.
“결국엔 저희가 직접 움직일 수밖에 없겠습니다?”
“가뜩이나 마인들과 인스턴트 게이트가 범람 중인 시국이야. 그 일에만 매달릴 수는 없어. 애초에 이건 길드가 해야 하는 일이야. 이런 거 하라고 길드에 막강한 권한을 준 거고.”
유리아의 말에 박태오는 고개를 저었다.
“놈들이 응하지 않는다고 우리가 일일이 나서면 좋지 않은 선례를 남기게 돼.”
“하지만 차원 코어에 대한 추가적인 정보를 얻기 위해서라도 포로가 필요합니다. 어떻게 보면 이게 마인이나 게이트보다 더 중요할지도 모릅니다.”
박태오의 반대에도 유리아는 물러서지 않았다.
“아니, 포로는 무리해서 구할 필요는 없다고 본다. 어차피 그놈들도 차원 코어가 어디 있는지는 몰라. 단순히 저 루시라는 여자 앞에서 금제가 풀리는지 실험하기 위해 직접 움직이는 것은 낭비야. 겸사겸사면 모를까.”
그리고 이는 박태오도 마찬가지.
“우리가 그러는 동안에 날뛸 마인과 인스턴트 게이트를 생각해.”
“…….”
박태오의 말에 유리아는 더 반박하지 않았다.
“아스카, 그대는 검룡 길드의 길드장이라 하지 않았나?”
그러던 때, 루시가 아스카에게 질문을 던졌다.
“그들도 길드장이자 부협회장인 성녀의 말을 안 듣나?”
다른 길드가 말을 듣지 않아도, 협회에는 자회사로 치부되는 검룡 길드가 있지 않냐는 루시의 질문.
“그 검룡 길드…… 지금은 그냥 껍데기에 불과한 것이에요. 핵심 인력 대부분이 광휘 오빠를 따라 태평양에 가 있거든요”
그런 루시의 질문에 아스카는 배시시 웃을 뿐이다.
“…….”
“…….”
성녀의 해맑은 미소로 대화가 잠시 끊겼다.
회의실에 적막과 상념이 떠돌았다.
코오, 코오.
구석에서 자고 있는 구민주의 숨소리만이 방 안을 감돈다.
그렇게 1분 정도가 흘렀을 때.
“일단!”
갑자기 유리아가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그 적막을 끊었다.
“일단 정리를 해 보죠?”
그녀는 마치 사회자가 된 것처럼 대화를 정리하기 시작했다.
“일, 지구의 차원 코어를 찾아야 지구의 마계화를 막을 수 있다. 더불어 지구와 루한을 연결할 수 있다.”
맞습니까?
유리아는 루시에게 눈으로 물었고, 루시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 그 차원 코어를 다른 차원의 침략자들도 노리고 있다.”
맞습니까?
이번엔 유리아가 아스카와 박태오를 보며 물었다. 선글라스에 가려진 분홍 눈동자를 두 사람은 그대로 응시하면서 고개를 끄덕인다.
“삼, 차원 코어의 행방은 아직 우린 모릅니다. 하지만 루시 님은 차원 코어가 어떻게 생겼는지 직접 보셔서 아시지요? 그 코어의 느낌이나 기운까지도요?”
다시 유리아의 시선이 루시에게 향했다.
“그러하다.”
루시는 다시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일단, 협회의 인력과 설비를 총동원해서 루시 님이 말한 것과 비슷한 생김새의 초상 물질을 찾아야 한다고 봅니다. 세계 각국 정부와 정보 기관의 힘도 빌려서요.”
유리아의 말에 모두가 다양한 반응을 보였다.
“문유리 집행관은 순수하군. 각국 정보 기관을 믿나?”
박태오가 제일 먼저 우려를 표했다.
“또 협회 내에도 첩자가 있을 수 있어. 특히 이계에서 온 침략자들이 요즘 스파이로 많이 침투한다더군?”
박태오는 그렇게 말하면서 유리아와 시몬, 루시를 짧게 훑었다.
“그렇다면 뭘, 어떻게 하시겠다는 겁니까?”
박태오의 말에 유리아가 살짝 굳은 어조로 되물었다.
“광휘 오빠가 사라진 지금, 협회 내부는 물론 각국 정부와 심지어 초상 기업들까지 움직임이 심상치 않아요. 정보를 구하더라도 최대한 은밀하게 구해야 해요.”
성녀 아스카가 박태오 대신 입을 열었다.
“아니, 그러는 동안 차원 코어가 다른 이들에게 넘어가면 어쩌려고!”
이에 유리아가 답답하다는 반응이다.
“이거 참, 쉬운 일이 하나도 없군요? 협회장에 부협회장, 게다가 집행관만 둘인데도 쉽게 풀리지가 않습니다?”
문득 이를 지켜보던 시몬이 굉장히 드물게 비꼬는 투로 입을 열었다.
평소 웃는 실눈이었던 시몬의 눈이 모처럼 차갑게 떠졌다.
‘아니면 하기 싫으신 건가?’
차갑게 뜬 시몬의 실눈은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어쩌면 처음일지도 모를 시몬의 날선 반응.
“…….”
“…….”
“…….”
유리아는 물론, 박태오와 아스카도 놀랐는지 잠시 멍했다.
‘호오.’
루시는 시몬의 그런 모습을 의외라고 여겼다.
“차원 코어에 관한 얘기는 상황이 정리되면 그때 나눕시다. 제대로, 진지하게.”
다른 이들이 자신을 어떻게 보든 말든, 시몬은 다시 눈을 실눈으로 감더니 고개를 루시에게 돌렸다.
“루시 님, 일단 정하시지요?”
“뭘 말이지?”
“루시 님의 진로 말입니다. 각성자 등록만 하실 건가요?”
“나도 집행관을 하겠다.”
시몬의 물음에 루시가 잠깐의 고민도 없이 답했다.
“어…… 괜찮겠습니까? 이거 꽤 힘들고 박봉인데?”
루시가 이토록 바로 답하자, 오히려 놀란 것은 시몬이었다.
“어차피 돈은 크게 필요 없도다. 내게 당장 필요한 것은 권력이니까.”
“하긴, 권력 하면 집행관이 최고긴 합니다.”
“차원 코어를 찾으려면 집행관이 확실히 낫습니다. 정보의 접근도 용이하니까요.”
루시의 말이 타당하다고 생각되었는지, 시몬과 유리아는 공감하는 반응을 보였다.
그렇게 루시의 직업은 집행관으로 결정되었다.
S급 헌터의 등장, 심지어 그 S급 헌터가 한국에서 집행관을 하겠다고 한다. 귀화 신청부터 자잘한 행정 절차가 압도적으로 스킵된다.
새벽이지만 각성자 등록과 집행관 등록을 처리할 협회 직원들이 협회 본부로 소환됐다. 자다가 깨어나 머리도 제대로 못 감은 직원들이 비몽사몽한 얼굴로 자판을 두들긴다.
그들은 루시가 손 하나 까닥하지 않게 최선을 다해 행정 업무에 임했다.
“드디어! 올 것이 왔군.”
어느새 잠에서 깨어난 구민주가 협회 직원들과 비슷한 붕 뜬 머리를 하고서 고용주의 헌터 등극을 지켜본다.
“집행관이라. 돈을 좀 못 버는 게 아쉽긴 하지만~ 그래도 마인이 아닌 게 어디냐?”
캬하하하하하하.
워낙 루시와 있으면서 겪은 일들이 다사다난해서 그런지, 구민주는 자신의 고용주가 뭘 해도 그저 기쁠 뿐이다.
머릿속으로는 대통령보다도 힘이 세다는 집행관의 매니저로 누릴 라이프를 풀가동했다.
협회장 박태오와 성녀 아스카가 바로 옆에 있는 것도 이제는 그러려니 했다.
‘정말 태광휘 헌터와 그렇고 그런 사이인가? 정말로? 설마…… 그때 그 집이 태광휘 헌터의 집이라고?! 내가 태광휘 집에서 1박을 했다고?!’
두 거물보다 더 높은 최강자를 직간접적으로 경험한 탓일 터, 상식을 아득히 초월한 상황을 직접 겪으니 의외로 적응은 빨랐고 어느새 덤덤해졌다.
협회장과 성녀의 시선을 받으며 고용주의 어깨를 주무를 정도로 말이다.
“헤헤헤. 루시 님, 혹시 월급 선불로 가능한지 협회에 물어보시면 안 될까요?”
민주는 도도하게 자리에 앉은 루시의 어깨를 주무르며 물었다.
“나중에 저들에게 물어보렴. 내가 시켰다고 하고.”
“넹!”
루시는 그런 시녀의 악력을 즐기면서, 충성스럽고 귀여운 현지 시녀의 부탁을 받아 줬다.
어느덧 행정 절차가 거의 끝났다.
10분 정도밖에 걸리지 않은 듯하다.
루시가 직접 뭔가를 한 것은 협회 직원들의 몇 가지 질문에 짧게 답한 정도.
그러다가 막판에 서명 세 개 정도를 하니, 귀화와 각성자 등록과 헌터 등록 그리고 집행관 진급이 완료되었다.
그리하여 이제 남은 것은 딱 하나.
“저…… 루시 님? 이름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원래 쓰던 이름을 사용하셔도 되긴 합니다만?”
바로 귀화시 사용할 이름이다.
“아니. 이 나라의 이름으로 하겠다.”
“이 나라라면 한국식으로요?”
루시의 말에 귀화를 담당하는 협회 직원이 조심스레 되물었다.
“그래, 태루시! 이것이 나의 또 다른 이름이니라!”
루시는 기다렸다는 듯 한국에서 쓸 자신의 이름을 외쳤다.
“뭐라는 거야?! 저 여자가, 진짜아!!”
옆에서 그 말을 듣던 아스카가 노발대발한 것은 어쩌면 당연했다.
* * *
미로 같은 세계, 탁한 보랏빛과 회색이 뒤섞인 대기는 보는 이의 정신을 위태롭게 만들었다.
x, y, z축 전체가 꼬이고 꼬여서 어디가 어디인지 파악도 힘든 공간, 조금이라도 방심했다간 영원히 림보 속 미아가 될 것 같은 어비스.
번쩍.
그런 태평양 게이트 안에서 눈부신 태양이 오늘도 빛났다.
이 아스트랄한 세계를 비추는 유일한 태양이자, 등대이자, 빛.
“태양검! 태양검! 태양검!”
“태광휘 헌터를 따라라!”
“인류를 위하여!”
태광휘가 펼친 ‘새벽의 등불’이 망가져 가던 지구 헌터들의 정신을 다독여 준다.
극도로 지친 모두의 메마른 가슴속에서 끊임없이 희망이 나왔고 그 용기를 윤활유 삼아 희망으로 움직인다.
[아빠!]
회색 마검에서 태양을 발광하던 태광휘를 향해 불의 형상을 한 소녀가 멀리에서 날아왔다.
불의 형상의 소녀는 태광휘에게 반쯤 안기자, 서서히 인간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쥴리아, 어떻게 됐지?”
태광휘는 정찰을 마치고 온 쥴리아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물었다.
5년이라는 시간 동안 쥴리아 또한 많이 성숙해졌다.
“저게 마지막 같아.”
불의 정령에서 인간으로 돌아온 쥴리아는 육성으로 답했다.
“그리고 저 안에 그게 있는 거 같아!”
“드디어 끝이 보이는군.”
“나, 어서 집에 가서 치킨이 먹고 싶어.”
“돌아가면 원 없이 먹게 해 줄게.”
“응! 그런데 엄마는 지구에 왔을까?”
“루시가 세계수에 방법을 물어본다고 했으니까, 지구의 마계화를 막을 방법도 말이야.”
태광휘는 왼손 검지에 낀 반지를 쓰다듬었다.
“부디 좋은 소식이 있었으면 좋겠다. 이 태평양 게이트를 닫는다고 해도, 마계화를 조금 뒤로 미룰 뿐이니까. 궁극적인 해결법이 필요해.”
“우리는 지금 당장 할 수 있는 일에 집중하자. 최선을 다해서. 후회 없이.”
[응!]
화르르릇.
태광휘의 말을 들은 쥴리아는 자신의 몸을 다시 불태우더니 불의 날개로 변신했다.
태광휘의 등에 불의 날개가 생겼다.
쥴리아의 날개로 더욱 밝아진 그가 자신을 따르는 헌터들을 보았다.
모두가 광신도라도 되는 것처럼 그런 태광휘를 우러러본다.
태광휘는 그런 그들을 향해 입을 열었다.
“저게 마지막이다. 최선을 다하자.”
마지막 전투를 알리는 것 치고는 너무나 짧은 연설.
그러나 이만큼 와 닿는 또 다른 말이 존재할까 싶다.
태양검! 태양검! 태양검!
한 명 한 명이 지구에서 S급으로 이름 날리던 헌터들이 입을 모아 태양검을 칭송했다.
와아아아아!
태평양 게이트 속 림보. 그 림보의 또 다른 균열로 태광휘와 헌터들이 돌격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