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69화
#169.
첫날은 이런저런 초상장비 지급과 숙소 배정으로 하루를 다 보냈다.
그렇게 하루를 마칠 때쯤에 광주에서 일어난 테러.
빙하의 여제를 사칭한 테러가 일어났다. 어쩐지 루시를 의식한 것 같은 타이밍에 말이다.
그것만 빼면 별문제 없는 첫날이었다.
집행관이 된 루시는 둘째 날부터 일을 시작했다.
“저희가 하는 방법대로 하시면 됩니다.”
“루시 님 실력이면 어려울 일은 없을 겁니다.”
대부분의 일터에서 신입은 견습의 신분으로 시작한다.
나는 새도 떨어트리는 집행관도 마찬가지.
형식적이지만 처음 몇 번은 유리아와 시몬을 따라다니면서 집행관 업무를 익힐 예정이다.
이런 이유로 세 사람은 차를 타고 도심을 질주했다.
평소엔 협회 본부에서 대기하지만, 오늘은 루시도 있으니까 관광 삼아서 겸사겸사다.
“어…… 그리고 루시 님, 어제저녁에 있었던 뉴스는 신경 안 쓰셔도 됩니다.”
그러다 문득, 운전을 하던 유리아가 뒷좌석의 루시를 슬쩍 보며 말했다.
조수석에 앉아 있던 시몬도 유리아를 의식한다.
“어제? 빙하의 여제 말인가?”
“예, 냉기 원소술사가 흔한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아주 희귀한 것은 아니니까요. 그리고 해당 사건은 성녀와 협회장이 직접 담당하기로 했습니다.”
“……신경 안 쓰니 걱정 마렴.”
루시는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서울, 요즘 말로는 네오서울이라 불리는 도시의 도심은 사람으로 붐볐다. 차도 많았다.
대전쟁 이전의 서울을 기억하는 사람은 굉장히 썰렁하다고 평하겠지만, 적어도 루시가 보기엔 이토록 붐빌 수 없었다.
띠리리.
멍하니 차 밖을 보던 루시의 주머니 속에서 벨 소리가 들렸다.
루시는 집행관을 상징하는 검푸른 코트 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냈다.
그리고 살짝 어색한 손동작으로 전화를 받았다.
―루시 님! 통화 괜찮으신가요? 문자 했는데 보지 않으셔서요!
본래라면 매니저인 구민주가 운전해야 하지만, 견습 신분인 지금은 아니다. 유리아와 시몬이 교대로 운전하니까.
그래서 구민주는 현재 재택근무 중이었다.
“통화 가능하단다. 말하렴.”
―루시 님 지시대로 레드문이라는 조직에 대해서 알아봤는데요.
루시는 구민주에게 인터넷으로 레드문에 대해 알아보라고 지시했다. 대외적인 정보뿐만 아니라 찌라시나 음모론까지 전부.
협회의 고급 정보는 유리아와 시몬이 알려주겠지만, 그것만으론 신통치 않았다.
SNS와 커뮤니티 같은 것은 지구 생활 2년 차인 둘에게도 여전히 어색했기에 구민주의 힘을 빌린 셈.
―일단 레드문과 관련된 가장 유명한 음모론이 바로 지구에 표류한 마왕군의 잔당이라는 설이에요.
“마왕군의 잔당?”
―네, 마족들이 인간의 몸에 들어와서 사람, 정확히는 마인 행세를 하고 다닌다는 설이에요. 물론 모든 마인이 그런 게 아니라 수장급 되는 마인들이요.
구민주는 말을 이었다.
―대표적인 예로 마인들이 유독 집착하는 인신 공양이 있어요. 잔혹성과 무분별한 테러도 단순히 협회에 대적하는 수준을 넘어섰다는 것이 주된 여론이고요.
“그 외에는?”
―그 외에도 마인과 유력 대기업 간의 연계설이랑 또…… 이건 좀 조심스러운데 협회와 마인이 뒤에서 밀월 관계라는 음모론도 있네요?
“?!”
협회 이야기가 나오자 루시는 자신이 든 휴대폰을 괜히 의식했다. 이 휴대폰은 협회에서 준 것. 지구에 온 지 얼마 안 된 그녀지만 도청이라는 개념은 어렴풋이 알고 있다.
“그렇구나. 일단 통화는 그만 마치자꾸나. 내가 집에 가면 바로 볼 수 있게 정리 좀 부탁하마.”
그녀는 서둘러 통화를 마쳤다.
―넵! 아주 책자로 만들어서 드리겠습니다!
힘찬 민주의 대답을 끝으로 휴대폰을 넣은 루시는 생각에 잠긴다.
‘마인, 마계 잔당, 빙하의 여제, 드래고니안, 이노센티아. 도대체 뭐지?’
어제 광주에서 있었던 테러. 루시는 겉으로는 신경 쓰지 않는다고 했지만 속으로는 아니었다.
마인 집단 레드문의 마법진에 묻어 있던 이노센티아의 흔적.
골드 드래고니안이 펼쳤던 이노센티아.
자신이 집행관이 되자마자 모습을 드러낸 빙하의 여제 베아트리체.
“…….”
이 모든 게 루시의 머릿속을 복잡하게 만들었다.
어쩌면 차원 코어보다 더 그녀의 다급함을 긁었다.
“시몬 경, 마인들이 사용하는 마법진에 대한 조사는 어떻게 되었나?”
루시는 답답함을 가슴에 묻고서 시몬에게 물었다.
지구에 온 첫날 상대했던 마인 조직 레드문. 그 조직에서 본 마법진에는 이노센티아의 수식과 배열이 일부 흔적기관처럼 남아 있었다. 루시는 이것에 대한 얘기를 두 사람에게 진즉 했었다.
직접적으로 이노센티아를 언급하진 않았고, 대강 마인들이 사용하는 마법진에 고향의 흔적이 있다는 식으로 말이다.
“안 그래도 말씀드리려 했습니다.”
루시의 물음에 조수석에 앉아 있던 시몬이 고개를 돌리곤 입을 열었다.
“루시 님이 말씀하신 레드문 아지트의 구속진은 12차원 계열로 추정됩니다.”
“12차원?!”
“네, 마인들의 마법은 대부분 흑마법 계열입니다. 마인 대부분이 마족들로부터 마법을 전수받았으니 어쩌면 당연한 셈이지만요.”
아무래도 아까 구민주로부터 들은 마왕군 잔당 음모론은 기정사실로 여겨지는 모양이다.
“하지만 몇몇 마인의 이능에서는 마계의 것으로 볼 수 없는 신성함이 존재합니다. 바로 신성력과 빛의 힘, 천계의 힘이지요.”
“하지만 마인들은 대부분 잔인하고 무분별한 살생을 벌이는데? 천계에서 그런 자들에게 힘을 준다고?”
“협회에서는 몇몇 마인들이 펼치는 12차원 이능을 타천사들의 것으로 추정 중입니다.”
“타천사?”
“타락한 천사들. 천계의 주민이었지만 추방당한 천사들입니다.”
시몬은 말을 이었다.
“11차원과 12차원은 무수한 차원에 걸쳐 직간접적인 영향력을 펼칩니다. 루한에서 본 배열과 수식을 여기에서 볼 수 있는 것도 이런 이유로 추정됩니다.”
“…….”
시몬의 보고가 끝나자 루시는 미간을 좁혔다.
대마법진 이노센티아는 아리아 데스모가 착안하고 루시가 함께 구축했던 대마법진이다.
‘악황후 옥타나는 거짓의 대마녀, 즉 흑마법의 대가지. 리리아의 서신에 따르면 아리아 데스모와 옥타나는 동일 인물이자, 초대 황후 아낙시아라고 했어.’
루시는 지구로 떠나기 전에 받았던 서신을 떠올렸다.
요정 숲에서 로뮤가 들고 온 요정 여왕 리리아의 서신을.
‘거짓의 대마녀 옥타나가 계약한 존재가 그럼…… 마왕이 아닌 타천사라고?’
그렇게 생각하니까 퍼즐이 맞춰지는 느낌이 들긴 했다.
아리아 데스모, 정확히는 옥타나가 착안한 이노센티아에서는 흑마법의 느낌을 루시는 전혀 받지 못했었으니까. 오히려 신성함마저 느껴져서 깜빡 속아 넘어갔지.
‘타천사의 천계 마법이면 8차원의 드래고니안들이 껌뻑 넘어갈 만하기도 해. 그런데…….’
그러나 여전히 루시를 찝찝하게 만드는 한 가지가 남았다.
‘베아트리체…… 수상할 정도로 초대 여왕님과 연관이 있어 보이는 그 여자!’
지구뿐만 아니라 8차원 용계에서도 활동했다는 빙하의 여제가 신경 쓰였다.
지구와 용계의 이노센티아는 베아트리체와 연관 있어 보인다.
‘그럼 빙하의 여제 베아트리체가 타천사라는 뜻인 걸까? 도대체 무슨 목적으로 여러 차원을 돌아다니면서 이런 짓을 벌이는 거지? 초대 여왕 폐하와 어떤 관련이 있는 걸까?’
의문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루시의 상념을 삼킨다.
‘빙하의 여제는 솔라의 손에 죽었다고 했어…….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도 아닌 것 같아.’
무엇보다 솔라는 빙하의 여제를 알면서도 왜 자신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던 것일까?
루시는 생각에 잠겼고, 시몬은 생각에 잠겨 말이 없는 루시를 물끄러미 보다가 어깨를 으쓱이곤 고개를 앞으로 돌렸다.
“…….”
복잡한 침묵이 차 안을 채웠다.
그렇게 5분 정도 흘렀을 때.
삐이이이.
[치익, 사건 발생! 사건 발생! 레드 등급 범죄 발생!]
집행관용 무전기가 그 침묵을 깼다.
* * *
길드나 정부에서 처리하기 힘든 게이트가 아니면, 집행관은 각성자 범죄에 집중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아무 각성자 범죄에 집행관이 나서진 않는다.
자잘한 범죄는 협회 소속의 중급 이하 헌터(치안관)들이 사건을 담당한다.
어쩌다 인력이 부족할 때가 아니면 보통은 중상급 각성자 범죄에만 집행관의 무전기가 불을 밝힌다.
“B급 헌터가 마석 보관소를 털고 있단 말입니까?”
무전을 들은 유리아가 어처구니 없다는 반응을 보였다.
“……?”
옆자리의 시몬도 황당한 표정.
뒷좌석의 루시만이 담담히 팔짱을 낀 상태.
―그렇습니다. 보관소에서 서둘러 지원 요청을 한 상태입니다.
“보관소를 지키는 PMC 소속 헌터들이 있을 거 아닙니까? B급이 낮은 등급은 아니지만 보관소를 공략할 정도는 아닐 텐데요?”
협회 본부 상황실에 있는 오퍼레이터의 말에 유리아가 의문을 표했다.
―그게, B급 헌터 한 명이 아닌가 봅니다! 보관소로부터 이찬희라는 헌터에게 공격받고 있다는 보고가 온 직후. 모든 통신이 끊겼습니다.
“보관소 이름을 말해 주세요.”
조수석에 앉은 시몬이 네비게이션의 키패드를 켜고서 무전기를 향해 말했다.
오퍼레이터와 문답할 시간에 그냥 현장으로 가는게 나았다. 어차피 당장 할 일도 없으니까.
―대명 마석 보관소입니다.
“?!”
“!!”
오퍼레이터의 말에 시몬과 유리아가 서로를 쳐다본다.
“……?”
뒷좌석에 앉은 루시 또한 팔짱을 낀 상태로 눈썹을 꿈틀거렸다.
찝찝하다. 너무 공교롭다.
이건 대놓고 그들을 유인하는 함정이다.
다른 집행관도 있음에도 루시가 있는 팀을 콕 찍은 본부의 오퍼레이터도 수상했다.
하지만.
“만약 이게 도발이면 참으로 재밌겠구나.”
“루시 님이 A급 집행관으로 등록되어서 만만히 본 모양입니다.”
오히려 루시와 유리아에겐 반가운 도발이기도 했다.
“하하하하.”
루시와 유리아는 피식거렸고, 시몬은 그저 맑게 웃을 뿐이다.
“나는 A급이지만 경들은 S급으로 등록되지 않았나?”
“저희가 S급으로 되어 있긴 하지만, 논란이 많은 편이긴 합니다. 능력이 과장되었다는 식으로요.”
“힘을 다 펼치지 않은 건가?”
“예, 힘을 마음껏 펼쳤다간 북한에서 일으켰던 일을 서울 한복판에서 재연할 수 있거든요.”
“한마디로 우리 모두 얕보이고 있다는 거구나.”
“그렇습니다. 심지어 그 보관소에서 이런저런 방어진을 쳤다면 저들 딴엔 해볼 만하다고 볼 겁니다.”
“하하하하. 첫 집행관 임무부터 아주 스펙터클합니다?”
세 사람은 그렇게 떠들면서 찝찝함보다는 기대감이 더 큰 마음으로 마석 보관소에 도착했다.
대명 마석 보관소 주위는 폴리스 라인이 길게 쳐 있었다.
10여 대의 경찰차가 바리케이드처럼 보관소 주위에 주차되어 있었고.
언론사의 기자들이 좀 더 떨어진 곳에서 취재를 시도 중이다.
“문유리 집행관님! 김시오 집행관님! 그리고 태루시 집행관님, 어서 오십시오.”
세 사람을 태운 차가 현장에 도착하자, 먼저 도착한 협회 치안관 둘이 마중을 나왔다.
“상황은요?”
시몬이 대표로 협회 치안관에게 물었다.
“보관소 내부는 이미 놈들에게 장악된 상황입니다. 저희는 일단 놈들이 못 도망가도록 포위만 한 상황이고요.”
“위에서는 세 집행관님이 도착하면 함께 진입하라고 지시가 내려왔습니다.”
두 치안관이 바로 답했다.
“놈들은 마인 조직 레드문으로 추정됩니다. 이 정도 짓을 벌일 조직은 그놈들뿐일 테니까요.”
“처음 보관소로 들어온 B급 각성자 이찬희는 아공간을 조작하는 서포트 계열 헌터였는데, 그 아공간 안에 수십의 마인을 숨겨서 보관소로 들어간 모양입니다.”
두 치안관은 번갈아가면서 각자가 조사한 결과를 세 집행관(실제로는 두 집행관)에게 말했다.
“내부에서 기습적으로 터진 습격이라 보관소의 초상 보안 시스템이 쉽게 무력화되었습니다. 보관소를 지키던 보안 요원들도 마찬가지고요.”
“그럼 보관소 안의 인질들은 어떤 상황이지요?”
“그게 아직까지 생사 확인이 어려운 상황입니다.”
인질이 있는 상황.
힘을 마음껏 휘두르기에는 조심스럽다. 시몬과 유리아의 얼굴에 아쉬움이 떠올랐다.
하지만 무섭다거나 하는 감정은 들지 않았다.
“치안관들은 여기서 대기하시기 바랍니다. 밖으로 도망치려는 마인들만 처리 부탁드려요.”
시몬은 두 치안관에게 부드럽게 지시를 내렸다.
“예? 예!”
“알, 알겠습니다.”
시몬의 지시에 치안관들은 처음에는 머뭇거렸지만, 이내 안도하는 표정으로 경례를 올렸다.
기껏해야 중하급에 불과한 그들이 마인 소굴로 간다는 것은 보통 쫄리는 일이 아니었다.
집행관이 셋이나 있다지만, 마인 소굴에서는 자신의 목숨 하나 지키는 것도 버겁다.
“이 일은 저와 문유리 집행관 그리고 태루시 집행관이 처리하겠습니다.”
시몬은 모자와 선글라스를 매만지며 보관소로 걸었고, 그 뒤를 루시와 유리아가 따랐다.
경외 가득한 무수한 시선이 이들 세 사람의 등을 따랐다.
늦여름임에도 전혀 더워 보이지 않는, 오히려 든든하기까지 한 검푸른 코트가 바람에 휘날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