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회귀여왕의 EX급 방랑기사-170화 (170/212)

제170화

#170.

물물교환에서 시작되어 인류의 화폐는 문명이 발전하면서 은화와 금화로 넘어갔다. 시간이 좀 더 흘러 은본위제와 금본위제를 중심으로 한 지폐가 화폐로 자리 잡았다.

금본위제는 영국 파운드화에서 미국의 달러화로 그 패권이 이어졌다.

하지만 베트남전쟁으로 금본위제가 흔들렸고, 결국 금본위제를 포기할 수밖에 없었던 미국은 금 대신 석유로 달러의 패권을 유지했다.

오직 달러로만 석유를 구매할 수 있게 된 석유 본위제의 시작이었다.

그랬던 석유와 달러의 시대가 1차 개문 사태로 종말을 맞이한다.

석유보다 월등한 효력을 지니며, 어떤 오염도 발생하지 않는 꿈의 에너지 자원 ‘마석’이 탄생한 것이다.

특정 지역의 유전에서만 얻을 수 있던 석유와 달리, 마석의 원천 게이트는 세계 곳곳에 고르게 퍼졌다.

헌터들은 그 게이트를 공략하면서 마석을 수급했다.

게이트를 폐문하지 못하면 해당 지역은 이계화가 된다. 이렇게 이계화 된 몬스터 랜드를 ‘마경’이라고 부른다.

그 마경에도 몬스터는 존재했고, 마석 또한 수급이 가능했다.

마석의 수급을 위해서 고의로 몬스터 랜드를 만들면 되지 않냐는 주장이 있을 법하지만, 협회와 태광휘는 결코 이를 허용하지 않았다.

어지간한 국가들 또한 협회와 태광휘의 말을 따랐다.

이계화가 진행된 마경에서 나오는 몬스터는 지구 환경에 적응해 버려서 사냥 난이도가 배로 상승하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잡아도 잡아도 바퀴벌레처럼 튀어나오는 번식력이 제일 큰 문제.

핵폭격을 해도 반년만 지나면 다시 몬스터 랜드를 만들어 버리는 번식력은 인류가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의 것이 아니었다.

심지어 11차원의 괴수들처럼 핵무기에 면역력을 지닌 괴수가 탄생하는 경우도 있었다.

실제로 꽤 많은 나라가 마석에 눈이 멀어 협회 몰래 마경을 만들었다가 멸망했다.

그 멸망한 나라의 국토는 전부 몬스터 랜드가 되었고, 그 몬스터 랜드는 한때 마왕의 영토가 되어 인류를 위협했다.

태광휘의 활약으로 마왕군이 전멸하고 마왕의 화신이 소멸하였지만 세계 곳곳의 마경은 끝내 사라지지 않았고, 지금도 사하라 사막처럼 조금씩 영역을 넓히는 중이다.

인류는 이미 지구에 깔린 마경을 관리하는 것도 벅찼다.

새로 마경을 만든다는 생각은 사치 중에 사치.

마인들이나 할 법한 생각.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렇게 깔린 마경은 1차 개문과 2차 개문 사이에 인류에게 마석을 공급했던 유일한 초상 유전이기도 했다.

태광휘와 인류가 새로 열리는 게이트는 필사적으로 폐문하면서도 기존 마경을 완전히 엎지 않는 데는 이런 속사정이 있었다.

위와 같은 이유로 현재 지구에서 마석을 수급하는 방법은 주로 두 가지였다.

게이트 폐문 과정에서 얻는 마석과 마경에서 사냥을 통해 얻는 마석.

무수한 길드와 PMC에서 마석을 캐려고 몬스터를 사냥했고, 그렇게 모은 마석은 은행처럼 마석 보관소에 보관되었다.

각국 정부는 이 보관소의 마석을 오직 정부에서 발행한 화폐로만 거래할 수 있게 했고, 그리하여 석유 본위제는 저물고 오늘날 초상 시대를 상징하는 마석 본위제가 자리 잡았다.

대명그룹의 마석 보관소 내부.

핵 벙커처럼 엄중하고 튼튼한 보관소 안으로 루시와 시몬, 유리아가 진입했다.

셋은 주위를 샅샅이 살폈다.

내부는 밝았다. 전기는 나가지 않았는지 LED 조명이 대낮처럼 내부를 밝혔고, 마석 보관소 아니랄까 에어컨 기능을 하는 초상 제품들이 선선한 기온으로 늦여름의 더위를 식혔다.

“인질들은 한곳에 모은 건가?”

유리아가 주위를 둘러보며 혼잣말을 한다.

밝고 쾌적한 사무 공간과 별개로 인기척이 느껴지지 않았다.

건물 내부가 마치 주말에 나 홀로 출근한 회사처럼 조용하고 적막하다.

사무실 책상에 켜져 있는 모니터와 문서 작업 중이던 화면만이 방금까지 이곳에서 경제 활동이 있었다는 것을 증명할 뿐.

“우리가 올 것을 대비해서 이 상단의 상단주가 직원들을 피신시켰을지도 모르지.”

루시가 무심한 어투로 중얼거렸다.

“으음, 제가 아는 대명그룹은 그 정도로 직원을 챙기는 곳은 아니라서…….”

시몬이 조심스레 부정적인 답을 내놓았다.

셋은 건물 내부로 좀 더 깊숙이 들어섰다.

깊숙이 깊숙이, 아래로 아래로.

지하 가장 깊은 곳, 대명의 PMC와 대명과 계약한 길드들이 일개미처럼 모으고 모은 마석, 그 마석이 보관된 지하 창고로 내려갔다.

꽤 깊고 거리가 있는 길이었지만, 어떤 장애물도 나타나지 않았다. 마치 어서 여기로 와 달라고 애걸복걸하는 것처럼.

그리고 마침내 지하 보관소 앞에 도달한 세 사람은 동시에 걸음을 멈추었다.

순간적으로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

“……!”

“……?”

그들은 눈앞에 펼쳐진 광경을 보고는 잠시 동안 말이 없었다.

마석이 보관된 두꺼운 보안 문 앞에는 높게 쌓인 시체 더미가 여럿 있었기 때문이다.

“인질은…… 구할 필요가 없을 것 같군요.”

“직원들을 버린건가?”

시체 더미를 본 시몬과 루시가 인상을 찌푸렸다.

“아무렇게나 쌓은 시체 더미가 아닙니다. 이건 인신 공양을 위한 제단이라고 봐야 할 것 같습니다.”

유리아가 모자와 선글라스를 벗으며 말했다.

“대놓고 꼬리를 자르겠다는 전형적인 발상이군요. 설령 실패해도 피해자 코스프레하기 딱 좋습니다.”

시몬 또한 모자와 선글라스를 벗었다. 선글라스를 벗은 시몬의 실눈이 모처럼 차갑게 떠졌다.

인질은 없다.

힘을 조절할 필요도 없다.

한편으론 이런 식으로 무고한 학살을 자행한 마인들에 대한 분노도 치밀어 오른다.

어쩌면 이 일의 배후일지도 모를 이 기업의 윗놈들에게도 혐오가 향한다.

그리고 때마침, 세 사람이 보안 문 앞에 도달하길 고대했다는 듯이.

우우우웅.

의미 모를 공명음이 공간을 메아리치기 시작했다.

우우우우.

세 사람이 시체 더미 제단 앞에 서는 것을 기다렸다는 듯이.

아아아아.

인신 공양된 죄 없는 이들의 통곡 소리가 귓가에 맴돌기 시작한다.

파아아앗.

지하 천장을 밝히던 조명이 깨지거나 꺼졌고, 그들이 선 바닥에 여러 구속진과 디버프진이 빛을 내기 시작한다.

저벅, 저벅, 저벅, 저벅.

이어서 십수 명의 인기척과 구둣소리가 루시와 시몬, 유리아를 포위한다.

모두 합쳐 17명.

“웰컴!”

마인 무리의 대표로 보이는 자가 무표정한 얼굴로 입가에 호선 하나만 그리며 인사를 건넨다.

“이찬희?”

시몬이 남자를 보며 물었다.

보관소로 입장해서 테러를 일으킨 B급 헌터.

“뭐, 그렇소. 이찬희라고 하지. B급 헌터였었고.”

비록 각성 등급은 중상에 불과했지만, 오랜 시간 헌터로 성실히 활동해 왔기에.

“커밍아웃은 되도록 하기 싫었지만, 위에서 까라고 하니 별수 없지.”

그래서 쉽게 배신할 수 있었고, 더 큰 피해를 야기한 장본인.

“여하튼 이름이 자자한 집행관님들을 뵙게 되어 영광이오.”

B급 헌터 이찬희가 목소리에 짙은 마기를 흘리며 세 집행관에게 인사를 건넨다.

“B급이 아니군. 못해도 A급입니다.”

이찬희의 마기를 느낀 유리아가 차갑게 말했다.

“마족과 계약을 해서 마인이 되면 큰 힘을 얻지.”

유리아의 말에 이찬희는 어깨를 으쓱이며 말을 이었다.

“즉, 마인이 되는 것은 아주 합리적인 선택이야. 초상 시대에 가장 중요한 것은 돈도, 명예도, 권력도 아닌, 오직 이능뿐이니까.”

말을 하던 이찬희가 문득 시몬과 유리아를 보더니 피식 조소한다.

“그리고.”

고오오오오.

이어서 그의 몸에서 탁한 마기가 아지랑이처럼 피어오른다.

“보자마자 느낀 것이지만.”

이찬희를 시작으로 세 사람을 포위한 17인의 마인들이 너도나도 마기를 펼쳤다.

“김시오와 문유리, 당신네 두 사람도.”

파아아아앗!

미리 준비한 바닥의 마법진 또한 그들의 마기에 영향을 받아 세 사람을 더욱 조여 온다.

“마인 같은데?”

고오오오오.

마기와 살의가 절정에 올랐다.

“우리와 같은 냄새, 아니, 우리가 계약한 마족보다 더 짙은 타락의 냄새가!”

이찬희의 말을 듣는 루시와 유리아, 시몬의 표정은 그저 무표정할 뿐.

“이렇게 풍기는데!”

타앗!

제일 먼저 이찬희가 몸을 움직였다.

아공간 이능을 보유한 헌터라는 정보가 거짓으로 느껴질 정도로, 강력한 마기로 생성한 기다란 손톱을 시몬을 향해 휘두른다.

콰아아아악.

“어느 마족이지? 우리 백작님이 말하시길 모르는 기운이니 죽여도 된다고 하시던데?”

이찬희는 양손의 검은 손톱에 이어 자신의 아공간 이능을 이용해 허공에서 여섯 개의 검은 손을 더 꺼냈다.

총 8개의 검은 팔, 40개의 검은 손톱이 시몬을 찔렀다.

“그런가요?”

그러자 시몬은 실눈과 함께 연민 어린 조소를 지을 뿐이다.

“맞습니다. 저와 유리아는 끔찍하고 위험한 힘을 가지고 있지요.”

시몬은 입과 함께 양팔을 크고 빠르게 움직였다.

촤아아악.

그의 양팔이 순식간에 징그러운 생체 촉수가 되어 잘게 갈라졌다.

꽈아아악!

그렇게 갈라진 촉수들이 이찬희의 무수한 검은 손톱을 잡았다.

시몬의 고향에서는 키메라 마법이라 부르고, 지구에서는 변신계라고 부르는 이능.

“!!”

자신의 공격이 너무나 쉽게 저지당하자, 이찬희는 눈을 부릅떴다.

“하지만 이 구원 불가한 타락한 양들이여.”

그런 마인의 얼굴을 싸늘한 실눈으로 바라보며 시몬은 입을 열었다.

“마법도, 흑마법도, 그리고 이능도.”

그의 양팔에서 나오는 촉수들은 나무가 가지를 뻗듯이 더더욱 그 수가 늘었다.

“그 본질은 같습니다.”

하나하나가 질기고 예리했다.

“어떻게 사용하느냐에 따라.”

이제는 상대의 팔과 손톱을 막는 것을 넘어서.

“축복이 되거나.”

쫘악, 쫘악, 촤악.

상대 본체의 몸 또한 탐내기 시작하니.

“재앙이 되지요.”

콰드득! 콰드득! 우적, 우적.

눈앞 마인의 몸이 조이고 터지고 찢어지기 시작했다.

마치 손으로 푹 익힌 고기를 주물럭거리는 것처럼.

이 모든 것이 불과 5초도 안 돼 일어났다.

“으…… 으으…… 끄아아아악!”

뒤늦게 자신의 몸이 만신창이가 되었음을 깨달은 이찬희의 비명이 애처롭게 울렸다.

“과연 S급 집행관이라는 건가?!”

“공격! 공격해!”

“절대 봐주지 마!”

“죽여!”

뒤늦게 16인의 마인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들은 각자의 이능을 시몬은 물론, 루시와 유리아에게 골고루 쏘았다.

하지만 그사이 지하실에는 붉은 안개가 피 냄새와 함께 옅게 퍼져 있었다.

마기에 뇌가 절여져 오감이 둔화된 마인들이지만 적어도 피냄새만큼은 누구보다 잘 맡았기에.

“크어어어억!”

“카아아아아!”

모두가 복합적이면서도 강렬한 충동을 느꼈다.

집중력도 흐트러졌다.

붉은 안개 또한 점점 짙어져서 그들의 시야를 흐리게 만들었다.

서걱, 서억, 서걱!

이때를 이용해 유리아는 검을 휘둘렀다.

촤악, 촥!

이찬희를 수 초 만에 찢어 버린 시몬도 양팔의 촉수를 마음껏 휘두르며 제노사이드에 임했다.

승리의 저울이 한쪽으로 일방적으로 기울었다.

“말도 안 돼!”

상황이 이렇게 되자 마인들은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구속 마법진이랑 저주 마법진이 작동 중일 텐데?!”

“어째서 멀쩡한 거지?”

마인들의 시선이 미리 설치해 둔 바닥의 마법진을 스쳤다.

“저 청은발! 저 냉기술사 집행관 때문이야! 저 여자가 마법진을 무력화시키고 있어!”

“말도 안 돼. 백작급 마족에게 전수받은 고위 마법진을 어떻게?!”

세 사람을 약화시키고 구속하려 들었던 마법진은 애처롭게 빛만 발할 뿐, 어떤 효과도 내지 못했다.

집행관 김시오와 문유리의 바로 뒤, 청은발을 휘날리며 푸른색 마검을 바닥에 꽂은 여인이 있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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