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71화
#171.
마인 학살에 정신없는 시몬과 유리아 뒤에서.
‘이 마법진에는 이노센티아의 흔적이 없군.’
루시는 조용히 마인들의 마법진을 분석했다.
‘백작급 마족의 마법진이라고 했나? 설계는 잘하긴 했다만, 이걸 따라 그린 이들의 실력이 미숙하구나.’
굳이 평가하자면, 스승의 마법을 어설프게 흉내 낸 견습 마녀 수준.
대강 분석을 마친 루시는 본격적인 파훼에 들어갔다.
화아아앗.
윈테이라의 푸른 검 끝에 설원의 권능이 볼펜 심처럼 응축되었고, 루시는 바닥에 꽂았던 윈테이라를 움직였다.
마치 바닥에 낙서라도 하듯 칼끝을 바닥에 대고 긁었다.
키기기긱, 키긱.
철과 돌의 마찰음이 발생했고, 마력으로 빛나는 여왕의 청색 스케치가 마인이 새긴 마법진 위에 덧씌워진다.
지하실을 꽉 채웠던 온갖 지저분한 마법진들이 그녀가 수놓는 윈테이라의 검선에 훼손되었다.
파사사삿.
윈테이라의 검 끝이 긋고 지나간 자리에는 두터운 서리가 남았고, 각종 구속과 저주를 품은 마법진은 그리하여 완전히 빛을 잃었다.
천장 조명이 꺼져서 가뜩이나 캄캄했던 지하가 더 어두워졌지만.
번쩍.
아래에는 무드 등처럼 푸른 빛을 내는 윈테이라가, 위에는 어느새 시몬이 던져 올린 빛나는 지팡이가 공간을 밝혔다.
그리하여 마석 보관실에서의 싸움은 시작과 동시에 승자와 패자가 극명히 구분되었다.
“도…… 도망…….”
“커어어억!”
“살려 줘……. 살려…….”
“추워……. 너무 추워…….”
마인들은 하나둘씩 추위와 패닉에 허우적거리다가, 시몬과 유리아가 휘두르는 촉수와 검날에 절명하였다.
그리하여 순식간에 17인의 마인이 전부 몰살당했다.
상황이 종결되었다.
싱거운 싸움.
저들이 영혼까지 팔아 A급 이능을 소유했다지만, 상대는 셋 모두 이계의 초인. 지구식 표현으로 최소 SSS급의 각성자.
대표적으로 루시는 루한의 여왕이자, 각성한 설원의 대마녀다.
태광휘와 마찬가지로 EX급 대열에 오른 반인반신의 존재.
시몬과 유리아는 또 어떤가?
시몬은 마왕과 맞먹는 힘을 보유한 키메라 성자이고, 유리아는 고대 마족 알파의 심장을 품은 혈기사다.
둘의 능력 또한 루시와 태광휘와 비교해서 결코 꿀리지 않았다.
이런 세 사람에게 덤벼든 이들의 운명은 불나방보다도 못했다.
허공에 떠 있는 시몬의 지팡이가 일자 모양의 조명처럼 빛났다.
“…….”
세 사람은 무심한 눈으로, 한편으론 개운한 표정으로 주위를 보았고.
“어……!”
그러다가 루시가 “어!” 하는 탄식을 내뱉었다.
“잠깐?!”
“앗!”
모두가 낭패 어린 반응을 보였다.
“한 명 정도는 생포해야 했는데!”
“너무 기분에 취해서 그만…….”
“기본 중에 기본을 잊다니…… 부끄럽습니다.”
그랬다. 세 사람은 포로의 필요성을 뒤늦게 깨달았다.
대명그룹과 마인 조직과의 연관성을 입증할 가장 확실한 방법을 스스로 없애 버린 것이다.
“…….”
“크흠, 흠!”
“하하하.”
이 어처구니없는 실수에 루시는 침묵했고, 유리아는 헛기침했으며, 시몬은 쓰게 웃었다.
포로를 챙기지 못한 것은 아쉽지만, 이미 지나간 일. 후회해 봤자 무의미하다.
루시와 시몬, 유리아, 세 사람은 후회 대신 반성하면서 다음의 스텝을 밟았다.
처참하게 쌓여 있는 마석 보관소 직원들의 시신과 무참히 널브러진 마인들의 시신을 정리해야 한다.
“집행관 김시오입니다. 상황 종료되었으니 내려오세요.”
시몬이 무전기를 켜고서 지상에서 대기 중인 치안관에게 통신했다.
―노고 많으셨습니다, 집행관님. 의료진도 필요합니까?
1초도 안 돼 치안관의 목소리가 수신됐다.
“필요 없을 것 같습니다. 대신 정화 장비를 가지고 오세요. 인신 공양 제단이 있습니다. 오염도도 높으니 방호복 필히 입으시고요.”
시몬은 그렇게 말하면서 모자와 선글라스를 꺼내 썼다.
―…….
시몬의 말에 무전 속의 치안관은 잠시 말이 없었다.
집행관의 말이 무슨 의미인지 아주 잘 알았기에 보인 반응이었다.
―치이익…… 알겠습니다. 장비가 준비되는 대로 바로 출발하겠습니다.
잠깐 말이 없던 치안관은 능숙한 현장 요원답게 빠르게 정신을 수습하고는, 자신이 해야 할 일을 찾았다.
“네, 저희는 그동안 여기서 증거 수집을 하고 있……?!”
시몬은 무전으로 응답하다가 갑자기 말끝을 흐렸다.
그리고는 문득 주위를 둘러보았다.
“……?”
뭔가 느낌이 싸하다.
널브러진 마인들의 시신, 보안문 앞에 쌓여 있는 보관소 직원들의 시체 더미.
“…….”
특히나 보안 문 주위에 쌓인 시체 더미의 배치가 눈에 거슬린다.
아니나 다를까.
아아아아아!
꺄아아아악.
시몬이 눈치챘음을 인지라도 했는지, 시체 더미에서 원혼들이 본격적으로 유체 이탈하기 시작했다.
스으으으읏.
쌰아아아아.
이어서 마인들의 시체에서도 마기와 원혼이 똑같이 빠져나왔다.
그것도 모자라.
우르르르, 구구구궁.
뜬금없이 작은 규모의 지진이 일어났고, 핵 벙커보다 튼튼하게 지은 마석 보관소이기에 무너질 위험은 없었지만.
“보관소의 마석이!”
문제는 저 보안문 뒤에 모여 있던 마석에서 나타났다.
끼이익, 퍼엉.
지진 때문인지, 아니면 마석 때문인지, 마석 창고를 굳게 지키고 있던 두터운 보안 문이 터지듯이 열렸고, 그리하여 보게 된 보관소의 무수한 마석들이 세 사람의 시야에 잡혔다.
보관소의 마석들이 빛을 내면서 공명하기 시작한다.
우우우우웅.
마석들은 빛과 함께 공명하면서 마석 안에 품고 있던 마력을 흘려보냈고, 그렇게 흐른 마석의 마력은 원혼과 마기가 응집 중인 허공에 합류하기 시작했다.
“!!”
이를 본 시몬의 실눈이 부릅떠졌다.
“대기! 대기하세요! 제가 말하기 전까지 절대 내려오지 마세요!”
시몬은 급히 무전으로 치안관들에게 내려오지 말라고 외쳤다.
―예? 무슨 일이십니까? 집행관님! 지원이 필요하신가요?
“와 봤자 시체만 늘어나니까! 절대 가만히 있어요!”
뚝!
통신을 마친 시몬은 무전기를 집어넣고는 다시 전투 준비를 했다.
휘익, 휘익.
루시 또한 상황의 심각성을 인지했는지, 이미 윈테이라를 휘두르고 있었다.
염력 마법의 일종.
그녀의 손길에 높게 쌓였던 시체 더미들이 무너진다.
우당탕, 쿠웅, 철퍽.
윈테이라를 든 팔을 휘두를 때마다, 수북히 쌓였던 시체 더미가 무너졌고, 망자의 차갑게 굳은 육신들이 무질서하게 널브러졌다.
인신 공양을 위해 만든 제단을 엉망으로 하기 위한 작업 같았다.
시체 더미를 무너뜨린 루시는 이어서 허공에 응축되고 있는 마기와 원혼, 마석의 마력을 윈테이라로 끊으려고 했지만…….
“이미 늦었군.”
이내 이 모든 짓이 소용없음을 깨달았다.
“두 분 모두 준비하십시오!”
때마침 옆에서 유리아의 외침이 들렸다.
유리아도 어느새 모자와 선글라스를 벗은 상태.
스릉.
그녀는 검을 들고 싸울 준비를 마쳤다.
촤아아.
시몬 또한 한 손에는 신성력이 담긴 지팡이를, 다른 한 손은 뾰족한 촉수로 만들고는 사태에 대비했다.
이윽고.
치지지직!
그들이 있는 지하실 허공에서 균열이 일었다.
“게이트?”
균열을 본 루시가 미간을 구겼다.
“게이트치고는 너무 작습니다. 파동 주기도 짧고요. 이건…… 소환입니다.”
균열의 상태를 분석한 시몬이 설명했다.
“소환은, 보통 누굴 소환하지?”
“신수나 마수 정령을 소환하는 경우도 있지만, 마인들은 십중 팔구…….”
유리아가 검푸른 코트 자락으로 검을 닦으며 답했다.
“마족을 소환하지요.”
유리아의 대답이 끝나자마자.
파아앗.
어둡고 무거운 파동이 터졌다.
파치치치칙!
뒤이어 스파크가 어지럽게 튀면서 균열이 열렸다.
쿠오오오오오.
그 균열 안에서 흑염으로 이뤄진 인간형 괴수가 모습을 드러냈다.
[크하하하핫, 성공이다! 드디어 하위 차원으로 유희를 나오게 되었어!]
마침내, 11차원의 마족이 균열을 깨고 나왔다.
[경배하라! 두려움으로 섬겨라! 나는 마계의 폭발 백작 붐베른이다!]
녀석은 위풍당당 자신을 소개했다.
[크하하하하! 하위 차원의 공기는 언제나 나를 실망시키지 않는구나!]
오만하면서도 산만하게 흑염과 텔레파시를 사방으로 뿌렸다.
고고고고고고.
11차원의 흑염으로 이뤄진 마족의 형상은 점점 고체화되더니 구체적인 덩어리를 만들어 냈다.
지하 천장을 꽉 채운 3미터의 키, 흑백의 흐릿한 스킨, 환 공포증을 유발할 것 같은 11개의 눈, 이마의 M자 구간에 난 뿔이 인상적이다.
등에는 작은 박쥐 날개 같은 게 흔적기관처럼 의미 없이 파닥거린다.
전체적으로 심각하게 비만인 체형이고, 특히 비대하게 부풀어 오른 뚱뚱한 배가 언제든 터질 것처럼 압박감을 준다.
11차원 마계의 백작위 귀족, 붐베른은 현신했고 자신의 존재감을 마기와 함께 뿜어냈다.
[음? 너희는 누구냐? 나와 계약한 종은 아닌 거 같은데?]
그러다가 마족 붐베른은 자신을 물끄러미 보고 있는 시선을 인지했다.
[아! 그렇군. 나의 계약자들을 죽인 집행관이라는 고위 기사들이구나.]
녀석은 지금까지 있었던 일에 대해서 대강 아는 모양.
[셋 중 둘에게서는 마계의 냄새가 강하게 나는구나?]
붐베른은 유독 시몬과 유리아를 유심히 보았다.
[그러고 보니 아까 내 계약자 중에 하나가 너희 둘의 마기에 대해 물어 왔지.]
그리고 혼잣말하듯이 말을 이었다.
[뱀피르와 크리처 계파 같구나! 지금처럼 마계가 분열된 상황에선 맛 좋은 먹이일 뿐이지만.]
두 사람을 보는 붐베른의 입가에 침이 고이더니 뚝뚝 떨어졌다.
“…….”
“…….”
“…….”
그런 붐베른을 보는 루시와 시몬, 유리아는 그저 말없이 무심한 눈을 할 뿐이다.
[크흠! 무엄하구나! 어서 나를 향해 경배를 올려라! 하는 짓을 보아서 흡수 대신 나의 종으로 거둬 줄 수 있다!]
붐베른은 여전히 오만한 태도로 세 사람을 내려다보았다.
파아아앗!
추궁이라도 하듯 마기를 쏘아 혼내기 시작했다. 붐베른의 11개의 눈동자와 두 개의 뿔에서 탁한 빛이 났다.
쿠우우우.
중상위 마족이 쏘아 대는 피어가 지하실에 들끓었다.
붐베른의 마기와 피어가 자신들을 압박하자.
우우우웅, 파아앗!
루시와 시몬, 유리아는 각자의 힘을 활성화시켜 이에 대응했다.
고오오오오!
세 사람의 힘이 본격적으로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잡아먹히기 싫다면 성의 표시를 해야지. 제물은 더 어디 있느냐? 내 권능을 얻고 싶으면 더 많은 인신 공양을……. 어……?]
그제야 폭발 백작 붐베른은 셋의 진정한 힘을 감지하고는 말을 멈췄다.
[어어어??]
뒤늦게 제대로 인지한 세 필멸자의 존재감.
[……!!]
루시, 시몬, 유리아. 세 사람에게서 나오는 그 끝을 알 수 없는 심연의 기운.
[……딸꾹! 딸꾹!]
마족 붐베른은 딸꾹질을 했다.
잠시 후.
꿰에에에엑, 꾸이이이익.
지하실에서 돼지 잡는 소리가 가득 울려 퍼졌다.
* * *
자신의 계약자들이 모두 죽은 것까지는 알고 있었다.
이것은 오히려 마족 붐베른이 유도했고 바랐던 일이었다.
계약자를 통해 간접적으로 상황을 알 수 있었던 붐베른은 이찬희를 비롯한 마인들의 계획을 대강 알았고, 그 계획을 이용해서 자신의 현신을 노렸다.
마석 보관소 직원들의 시체 더미와 보관소에 보관된 마석과 마인들의 예정된 죽음은 반쯤 붐베른의 의도였다.
일은 정말 순항을 만난 범선처럼 부드럽게 진행되었고, 그렇게 붐베른은 지구에 현신할 수 있었다.
하지만 간만에 즐거웠던 그의 기분은 지구에 온 지 1분 만에 지하로 추락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어쩐지 자신과 계약한 종들이 너무 빠르게 죽었다 싶었다.
그와 계약한 마인들이 집행관이라는 고위 기사 셋을 노린다는 것은 알았다.
붐베른은 자신과 계약했던 종들이 그 고위 기사 셋에게 전멸당하는 상황을 노렸다.
이를 위해 백작위 마족의 권능도 아주 조금만 풀었다.
그럼에도 저 하등한 것들은 세상을 다 얻은 것 같은 반응을 보였었지.
어쨌든 결과는 바라던 대로 이뤄졌다.
정말 운이 좋게도 계약자들이 한번에 전멸했고, 계약자 몰살에 의한 보상 명분을 챙길 수 있었다.
더불어 계약자들이 조성한 마석과 원혼까지.
덕분에 붐베른은 가장 실체화된 모습으로 현신할 수 있었다.
[으아아아악! 살려 줘어어어!]
그리하여 지금 이렇게, 사지가 꽁꽁 언 상태에서 돼지 멱따는 소리를 낼 수 있는 것이기도 하다.
“말하라. 저 마인들은 누구의 지시를 받고 이 일을 벌인 것이지?”
솨아아아아.
“차원 코어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이 있으면 그것도 말해!”
솨아아아아.
“태평양 게이트에 대해 아느냐? 그 게이트에 대해 아는 게 있다면 전부 말해!”
청은발의 암컷 필멸자가 마계에서도 악명 높았던 냉기를 쏘면서 붐베른을 심문한다.
[모르오! 나는 정말 몰라아! 진짜야아아아!]
꿰에에에에엑!!
만물을 얼릴 것 같은 차가운 고통에 폭발 백작은 절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