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72화
#172.
정신이 나갈 것 같은 추위.
하위 차원을 더욱 밀도 있게 즐기기 위해 만들었던 영체는 붐베른에게 더 큰 고통을 선사했다.
입자 하나하나를 찢는 통증. 이런 강렬한 고통은 수천 년 만이다.
평범한 유희였다면 이 고통 또한 즐겼겠지만, 지금은 아니다.
이 고통은 차원이 다른 공포.
‘어째서 그 여자의 힘이 여기에?! 게다가 저 뒤에 있는 두 존재도 보통의 뱀피르와 크리처계가 아니야!’
단순한 역소환을 넘어서 존재 자체가 소멸될 것 같은 생존 본능!
‘내가 미쳤지! 미쳤어! 저런 괴물들 앞에서 현신할 생각을 했다니…….’
저 셋 중 어느 한 명도 만만한 존재가 없었다.
하나하나가 감히 호승심조차 들지 않을 정도.
‘이 빌어먹을 것들! 이런 힘을 가진 존재였으면 자세히 말을 했어야지!’
그는 자신이 팽했던 계약자들을 욕했다. 계약자들은 이미 고인이 되어 붐베른의 욕을 못 듣겠지만.
‘뱀피르랑 크리처 계열이길래 기껏해야 준남작위인 줄 알았는데! 어떻게 고대종이 하위 차원에 있는 거지?! 게다가 빙하의 여제를 똑 닮은 이 필멸자는…… 으아아아악!’
망자를 향한 저주도, 불우한 후회와 의문도.
끄웨에에에엑!
붐베른에겐 쉬이 허락되지 않았다.
온 차원의 물리법칙을 초월한 무한한 추위가 붐베른을 옥죄었기 때문이다.
시몬은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눈앞의 심문을 지켜보았다.
“다행입니다. 저 균열로 게이트가 열렸거나 다른 차원의 역병이 퍼졌다면 엄청 귀찮아졌을 겁니다.”
그리고 부드러운 미소와 잘 어울리는 밝은 어조로 입을 열었다.
“맞습니다. 운이 참 좋았습니다. 의도치 않게 지성을 지닌 고위 마족을 생포하였군요.”
유리아 또한 담담한 눈으로 시몬 옆에 서 있었다.
자신을 폭발 백작이라 소개한 붐베른이 저 앞에서 냉기 고문을 당하고 있었고.
이를 시몬과 유리아가 불구경하듯 본다.
“차원 코어에 대해 아는 걸 전부 말해! 사지가 꽁꽁 얼어서 절단되고 싶나?”
그러는 중에도 루시의 심문은 계속되었다.
[그게 전부라니까아! 우리도 차원 코어에 대해선 자세히 몰라!]
“왜 지구에 있는 차원 코어에 유독 집착하지? 다른 차원의 코어도 있을 텐데?”
[그야 지구에는 수호신이 없으니까! 태광휘라는 자가 있다지만 어디까지나 대리직이니까!]
“너희가 차원 코어를 찾는 방법은?”
[흐으으…… 몇 번이나 말했잖아! 하위 차원의 계약자를 이용해서 찾는 게 전부라고! 그리고 나는 세피로스의 충성파도 아니야! 차원 코어 따위 필요도 없……!]
솨아아아아.
루시는 뭔가 의심스럽고 허전할 때마다 설원의 징벌을 펼쳤다.
쿠에에에에엑.
그럴 때마다 붐베른의 크고 흉한 영체에서 가축의 비명 소리가 어김없이 나왔다.
“좋아, 다음 질문이야. 마인을 통해 지구에 대해 조사한다고 그랬지? 그럼 태평양 게이트에 대해 알겠구나? 말해! 솔라는 지금 무사한가?”
쏴아아아아아!
태광휘의 안위가 걸린 질문이라서 그런지, 아까보다 더 맹렬한 설원의 징벌이 루시의 손에서 쏘아졌다.
[11차원이 얼마나 넓은지 알고 그런 질문을 하는 거냐!]
“내 알 바 아니야!”
쏴아아아아!
[끄아아아악! 나도 몰라! 정말이야! 그 림보에 대한 건 나도 계약자를 통해서 처음 알았…… 끄에에엑! 제발…….]
크허어어어어엉.
고통에 견디다 못한 붐베른은 어느 순간 흐느끼기 시작했다.
참으로 귀한 광경이다. 필멸자에게 사로잡혀 고문을 받다가 흐느끼는 마족이라니.
“루시 님 앞에서는 금제가 효력을 발휘하지 않는 게 확실한 모양입니다?”
“그런 것 같습니다. 이유가 뭘까요? 저희는 안 됐잖아요?”
“루시 님께 그것도 물어봐 달라고 할까요?”
시몬과 유리아는 그런 루시와 붐베른을 보면서 이런저런 대화를 나눴다.
“생각날 때마다 가서 부탁하면 실례니까, 리스트를 적어서 드리는게 좋을 것 같네요.”
“동의합니다. 적을 게 필요할까요?”
“저한테 수첩과 펜이 있습니다, 유리아.”
“그럼 제일 먼저…….”
그렇게 둘이 루시에게 건넬 질문지를 작성하기로 막 합의했을 때였다.
―치익, 김시오 집행관님? 괜찮으십니까? 상황이 어떻게 되어 갑니까?
시몬의 무전기에서 무전음이 나왔다.
“다행히 큰일은 아닙니다.”
시몬은 무전기를 들고 바로 대답했다.
―참으로 다행입니다! 그럼 내려가도 되겠습니까?
“일단 저희가 말하기 전까지 대기 바랍니다. 아직 완전히 끝난 게 아니라서요.”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진 건가요?
“이따가, 이따가 완전히 종결되면 얘기할게요.”
시몬은 어느새 영체의 절반이 얼어 버린 마족을 보면서 답했다.
―알겠습니다. 지상은 준비 완료되었습니다. 말씀만 주시면 언제든 달려가겠습니다. 이상.
치이익 소리를 끝으로 지상과의 무전이 끝났다.
“시몬 님, 저 마족에 대한 정보는 협회에 얘기 안 하실 겁니까?”
무전을 끝낸 시몬을 향해 유리아가 낮게 물었다.
“그게 나을 거 같아요. 무엇보다 우리 여왕님 앞에서는 저렇게 술술 진실을 고한다는 사실이 협회에 알려지면, 우리를 보는 시선에 더욱 경계심이 낄 겁니다.”
“그건 일리가 있습니다.”
유리아는 시몬의 의견에 동의한다는 반응을 보였다.
세 사람의 신원은 대외적으로 이민자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박태오와 아스카를 비롯한 협회의 최고위층들은 유리아와 시몬, 루시의 진짜 출신을 안다.
만약 루시가 금제 없이 심문 가능하다는 사실이 정식으로 확인되면?
셋의 이용 가치와 별개로 ‘역시 너희도!’와 같은 인식이 심어질 수 있었다.
시몬은 이를 우려했고 유리아 또한 공감하는 바였다.
이대로 가면 죽는다!
단순히 마계로 역소환되는 것이 아닌, 진짜로 소멸한다!
아바타를 통해 유희하는 마왕 세피로스와 달리, 일부 붐베른 같은 마족들은 본신으로 직접 현신한다.
그렇게 해야만 본신의 권능 중 대부분을 하위 차원에서 쓸 수 있었기 때문이다.
더욱 실감 나는 유희를 즐길 수 있는 것은 덤이고 말이다.
하지만 그랬던 선택이 지금 가장 큰 과오가 되었다.
‘아아아아!’
붐베른의 머릿속에 생존의 경고등이 반짝반짝 빛났다.
“마인들에게 이 테러를 지시한 게 누구지? 대명이라는 상단에 대해 아는가?”
[끄아아아악! 몰라……. 진짜 모른다니까아! 계약자의 자잘한 사정까지 알 정도로 한가하지 않다고오!]
너무나 고통스럽고 무서워서 이미 아는 바를 다 말했건만, 눈앞의 미친 필멸자는 만족을 몰랐다.
의심하고 불신하고 끝없이 자신을 추궁한다.
‘저 여자는 날 살려 줄 생각이 없다!’
척하면 척이다. 이 정도 눈치 본능이 없었다면 마계에서 백작위를 유지하지 못했을 터.
‘결단, 결단을 내려야 해! 이대로 비참한 소멸을 맞느냐! 아니면 큰 힘을 잃고 0에서 다시 시작하느냐!’
고민은 길지 않았다.
그런 붐베른의 생각을 모르는지.
“다음 질문이다. 빙하의 여제에 대해 아나? 베아트리체라고.”
루시는 질문을 이었다.
“루시 님, 이것도 같이 좀…….”
시몬이 어느새 루시에게 다가와 유리아와 함께 작성한 질문 리스트를 건넸다.
설원의 징벌이 몰아치고 있었기에, 시몬은 루시에게 질문지를 건네자마자 쏜살같이 뒤로 빠졌다.
“오호, 금제에 대한 질문이랑 알파에 관한 질문은 확실히 필요하겠어. 지금 하고 있는 질문이랑 태평양 게이트에 있는 솔라에 대한 질문을 마저 한 다음에 하겠다.”
루시는 시몬과 유리아가 함께 작성한 질문지를 보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베아트리체에 대해 아는 게 있으면 말해! 그리고 태평양 게이트에 대해서 조금이라도 떠올려 봐!”
그리고 더욱 힘차게 심문을 이었다.
[…….]
하지만 방금까지 괴성을 질러 대던 붐베른은 답하지 않았다.
처음으로 보는 거북한 침묵 상태.
쉬지 않고 질러 대던 돼지 멱따는 소리와 질질 짜는 울음소리도 멈췄다.
“뭐지? 죽었나?”
이에 루시는 살짝 당황했다.
힘을 너무 많이 써서 눈앞의 마족이 소멸한 것인가 싶어 속으로 ‘아차!’ 했다.
아직 물어볼 게 너무나 많은데!
꿈틀, 꿈틀, 꿈틀.
하지만 그것은 기우였다.
오히려 문제는 다른 데 있었다.
터질 것처럼 거대한 붐베른의 복부.
그 복부에서 엄청난 에너지가 융합되기 시작한 것이다.
물리학자가 보았다면 핵융합이라고 외쳤을 정도의 거대한 에너지가 폭발 백작의 뱃속에서 아우성쳤다.
번쩍-
침묵했던 붐베른의 11개의 눈동자가 동시에 번뜩였다.
[크흐, 크하하핫! 내가 왜 폭발 백작인 줄 아느냐? 적어도 폭발 하나만큼은 자신 있거든!]
폭발 백작이 비릿한 미소와 함께 입을 열었다.
[너희는 다 죽는 거다! 이제 곧 이 나라 전체가 증발할 것이다!]
놈의 입에서도 엄청난 폭발의 기운이 입 냄새처럼 풍겼다.
[아마도 모든 힘을 잃겠지. 그러나 본인은 영생을 사는 11차원의 주민! 시간은, 나의, 편이도다!]
자폭! 자폭이다!!
붐베른의 거대했던 배는 점점 더 커졌고, 손가락으로 누르기만 해도 터질 것처럼 팽팽해졌다.
“오, 이런!”
뒤에서 이를 목도한 시몬의 얼굴이 파랗게 변했다.
“미친!! 어서, 어서! 피해야 합니다!”
옆에 있던 유리아가 비명 지르듯 외쳤다.
“아니, 피해선 안 됩니다. 저게 터지면! 못해도 한반도는 지구상에서 사라질 거예요!”
피해야 한다는 유리아의 외침에 시몬이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저걸 어떻게 막습니까?”
시몬의 말에 유리아는 혼란스러운 얼굴로 루시와 폭발 직전의 붐베른을 보았다.
루시는 붐베른 앞에 멀뚱히 서 있었다.
“…….”
거대한 폭발 에너지를 눈앞에 둔 그녀의 뒷모습은 조금의 위축도 보이지 않았다.
‘저 마족을 얼리고 계셔!’
루시는 자폭하려는 마족 붐베른을 무한한 추위로 얼리고 있었다.
폭발하기 전에 완전히 얼려서 재앙을 막을 계획으로 보였다.
하지만.
고오오오오오.
루시가 펼치는 냉기가 무색하게도 붐베른의 배 속에 있는 폭발은 힘을 잃지도, 굳지도 않았다.
번쩍.
이윽고.
“루시 니임!!”
퍼어어엉, 콰아아아아아.
폭발 백작의 몸이 펑 하고 터졌다.
한반도는 물론 그 주변 산둥반도와 일본열도까지 영향을 줬을 폭발.
하지만 그 폭발의 반경은 마석 보관소가 있는 지하실을 넘지 못했다.
사아아아아.
마치 초저온 냉동고 내부에 온 것같이 보관소 지하실은 푸르스름한 안개와 함께 내부의 모든 것을 꽁꽁 얼렸다.
무참히 널브러진 시신들 또한 딱딱하게 얼어 버렸다.
“엄청나군.”
시몬은 자신의 양팔을 보면서 중얼거렸다.
그의 두 팔이 거대한 냉기의 여파로 꽁꽁 얼어 부서져 있었다.
하지만 다행이도.
촤아아악, 촤악.
부서진 절단면으로 키메라의 생체 촉수가 돋아나 금방 두 팔이 원상 복구됐다.
“유리아? 괜찮나요?!”
자신의 몸을 살핀 시몬은 뒤이어 유리아를 찾았다.
“예, 시몬 님 덕분에요.”
유리아는 다소 질린 목소리로 시몬의 뒤에서 자신의 무사함을 알렸다.
시몬만큼은 아니지만, 그녀 또한 몸 곳곳에 심각한 동상이 보였다.
하지만 유리아 또한 반은 뱀피르, 놀라운 속도로 부상을 회복했다.
모든 것을 얼려 버린 푸른 안개 속에서.
“후우…… 그럼 폐하는? 폐하! 루시 니임!!”
“루시 니임!! 괜찮으십니까?!”
간신히 몸을 사린 유리아와 시몬은 루시가 있는 쪽을 향해 외쳤다.
둘의 목소리가 지하실을 가득 울렸다.
“나는 괜찮다!”
푸른 운무 속에서 루시의 대답이 들렸다.
이윽고 푸른 안개를 뚫고 청은발의 여인이 혀를 차면서 모습을 드러냈다.
“쯧, 비대한 몸과 어울리지 않게 머리를 썼더구나.”
그 모습이 어찌나 고고하고 고결해 보이는지, 유리아와 시몬은 절로 설원의 여왕을 향한 충성심이 끓었다.
“그 마족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유리아가 루시를 향해 공손히 물었다.
“폭발과 동시에 놈의 영혼이 도망치는 것을 잡았지.”
루시는 대어를 낚은 낚시꾼이 연상되는 미소와 함께, 둘에게 무언가를 보였다.
그녀의 오른손에 골프공 크기의 구형 얼음이 쥐어져 있었다.
얼어붙은 폭발 백작의 영혼이었다.
파스스슷.
루시는 들고 있던 그 얼음을 악력을 주어 부쉈다.
그리하여 마계의 무수한 마족 중 하나였던 폭발 백작 붐베른은 완전히 소멸했다.
“마족의 마석은 안타깝게도 얻지 못했다. 아까 놈이 자폭할 때 사용한 에너지가 놈의 마석에 있는 에너지였더군.”
어느덧 푸른 안개가 완전히 가셨다.
지하실 중심부에는 무한한 저온으로 멈춰 버린 폭발의 시작점이 있었다.
원자 단위까지 꽁꽁 얼어 버린, 12차원의 엔트로피 역전마저도 통하지 않을 것 같은 침묵이 그곳에 있었다.
그곳은 마치 현실과 동떨어진 분위기를 자아냈다.
시공간마저 얼어 버린 것 같은 착각을 일으키게 했다.
루한의 여왕이자, 설원의 대마녀는 저 거대한 에너지 폭발을 기어코 얼려 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