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76화
#176.
오! 처형을 아니하고 처벌을 끝냈도다.
여왕을 모욕했음에도 불구하고.
이 얼마나 자비로운 판결인가?
루시는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푸른 눈동자로 주위를 훑었다.
하지만 네놈들은 나의 자비에도 감사함을 모르겠지.
잠시 만족스러웠던 그녀의 눈동자가 차갑게 가라앉았다.
“…….”
“…….”
방금까지만 해도 질문으로 가득 찼던 폴리스 라인이 조용하다.
공포가 충격이 되었고 싸늘한 적막을 일으켰다.
그 누구도 감히 플래시를 터트리지 않았다.
붉게 빛나는 카메라의 불빛만이 지금 이 순간이 생방송임을 알릴 뿐이다.
툭툭.
이제는 완전히 얼어 버린 하정민 기자의 오른팔을 루시가 무심히 툭툭 친다.
툭툭툭툭.
얼음을 두들기는 소리가 적막 속을 울렸다.
“잘 들어.”
그 고요함 속에서 루시의 입이 열렸다.
“내게 질문을 해도 된다. 악의가 담긴 도발을 걸어도 좋다. 나를 비난해도 괜찮아.”
그녀의 사파이어 빛 눈동자가 버릇없는 기자들과 카메라를 응시한다.
덜덜덜덜.
하정민은 두려움이 가득 차 눈동자부터 온몸을 덜덜 떨었다.
바지는 오줌을 지렸는지 김과 지린내가 모락모락 피었다.
유일하게 떨지 않는 것은 꽁꽁 얼어 버린 자신의 오른팔뿐.
“다만, 나를 도발할 거면 지금처럼 팔다리 하나는 걸고 하도록.”
하정민과 살짝 거리를 벌린 기자들도 벌벌 떨면서 루시의 사파이어 눈동자를 쳐다보지 못했다.
“악플과 가짜 뉴스를 비롯한 각종 유언비어도 마찬가지야.”
차가운 태루시의 목소리가 카메라를 통해 전 세계로 퍼졌다.
“걸리는 순간, 이렇게 될 것이야.”
툭, 파사사삿.
그 말과 함께 꽁꽁 얼어붙은 하정민의 오른팔이 산산조각 났다.
“으…… 으아아아……!”
한순간에 오른팔을 잃은 그는 그대로 주저앉았다.
“끄아아아아아아!”
짐승처럼 흐느꼈고 벌벌 떨었다.
절망과 공포에 전 하정민의 머릿속에는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았다.
자신의 뒷배인 조직과 기업도 지금 이 순간엔 도움이 되지 않았고, 그가 사고를 치면 해결해 주겠다고 장담한 방송사의 임원들도 머릿속에 떠오르지 않았다.
“팔 하나 값으로 질문인지 도발인지 모를 것에 대한 답을 해 주마.”
그러든 말든 루시는 싸늘한 푸른 눈동자로 입을 열었다.
“만약 인질이 살아 있으면 최대한 구출하도록 ‘노력’하겠다. 마인 또한 가급적 체포하여 법의 심판을 받을 수 있게 ‘시도는’ 해 보지. 이상.”
루시는 그 말을 끝으로 몸을 홱 돌렸다.
“그…… 잘하셨습니다, 루시 님. 하하하하…….”
몸을 돌리자, 유리아가 반쯤 해탈한 미소로 루시를 반겼다.
“가자.”
루시는 그런 유리아의 안내를 받으며 백화점으로 향했다.
그날 저녁.
오산의 한 백화점에서 일어난 마인 범죄가 대대적으로 미디어에 퍼졌다.
12명의 마인은 등급에 상관없이 전부 체포되었다.
그들은 사지가 하나같이 꽁꽁 얼어 부서졌고 결국 오뚜기가 되어 체포되었다.
망연자실한 표정을 하고 비참한 몰골로 구급차에 실려 가는 마인들. 그 모습이 미디어에 여과 없이 소개되었다.
더불어 매장 직원으로 있던 인질 둘은 무사히 구조되었다.
인질들은 가벼운 동상을 입었지만, 생명에는 큰 지장 없는 것으로 밝혀졌다.
매우 성공적인 테러 진압 작전.
하지만 이 모든 결과가 그 직전의 사건으로 묻혔으니.
“신임 집행관 태루시 헌터는 MBS의 하정민 기자의 팔을 부수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를 도발할 거면 지금처럼 팔다리 하나는 걸고 하도록.’ 이에 국민들은 충격과 두려움에 할 말을 잃었으며, 결국 협회도 레드문과 다를 게 없는 조직이라며 부정적인 반응을 보였습니다.”
“각성자협회에서는 ‘집행관을 대놓고 도발하고 모욕을 준 MBS의 하정민 기자에게 1차 적인 원인이 있다면서’ 책임을 회피하는 모습을 보였습니다.”
“정부에서는 해당 사건에 대해 강한 우려를 표했지만, 집행관의 면책 특권을 이유로 들어 태루시 집행관에 대한 징계를 협회에 요청하기로 하였습니다.”
“한편 국회에서는 도를 넘은 협회와 집행관의 면책을 제한할 특별법을 발의하기로 여야가 합의를…….”
루시가 자신을 도발한 기자의 팔을 얼려 부순 사건이 대대적으로 보도되었다.
심지어 이런 짓을 벌였음에도, 정부에서도 협회에서도 별다른 제지를 하지 않음에 더 큰 충격을 받았다.
‘헌터들은 국민들을 함부로 위협하지 않아! 왜냐면 태광휘 헌터와 협회 임원들이 주시 중이거든’이라는 대전제가 깨지는 순간이었다.
무수한 국민들이 두려움과 충격에 빠졌지만, 한편으로는 ‘결국 올 것이 왔다’라는 체념 어린 반응도 이어졌다.
그날 이후, 루시는 ‘견습 집행관’을 졸업하였고 유리아와 시몬처럼 단독으로 활동하게 되었다.
온 세상이 태루시라는 새로운 집행관을 주시했다.
“오늘 태루시 헌터는 인천의 악명 높은 A급 마인 오주희를 체포하였습니다. 마인 오주희는 이전의 마인들과 마찬가지로 사지가 꽁꽁 얼어 제압된 상태로…….”
“태루시 헌터가 B급 마인 스티븐 유를 체포하였습니다. 하지만 체포 과정에서 스티븐 유의 조직원들이 모두 동사하는 참사가 벌어졌습니다. 인권위원회에서는 비록 범죄자들이지만 각성자가 비각성자를 학살하는 것은 민주주의와 법치를 훼손하는 일이라며…….”
루시는 언제나 한결같이 마인 범죄자들을 설원의 권능으로 제압했다.
죽이는 경우는 거의 없었고 대부분 사지를 꽁꽁 얼리고 부숴 오뚜기로 만들어 버렸다.
“금일 태루시 헌터와 관련된 가짜 뉴스를 퍼트리던 유튜버, 위아래 연구소가 사과 방송을 올렸습니다. 사과 방송에서, 채널 위아래 연구소를 운영하는 세 유튜버의 팔 한쪽이 각각 사라진 것이 시청자들의 눈길을 끌었습니다.”
징벌의 대상에는 범죄자뿐만 아니라 조회수에 눈이 멀어 루시를 도발하는 자들도 포함됐다.
“인권위원회와 비각성자들로 이뤄진 시민 단체에서는 태루시 헌터와 협회를 규탄하는 성명과 집회를…….”
‘속보! 고위 각성자 관리법이 일부 의원들의 반발로 법사위원회에서 표류할 것으로 예상. 일각에선 협회의 압박에 국회가 굴복한 게 아니냐는 의혹.’
비각성자들은 발버둥 쳤지만, 각성자들 또한 가만히 있지 않았다.
온 세상이 한국을 집중했다.
한국은 지구의 수호자 태광휘의 모국이고 세계각성자협회 본부가 있는 곳이기도 하다. 또 지구에서 가장 초상 산업이 발전한 나라기도 했다.
즉, 한국에서 어떤 법이 의결되거나 제도가 시행되면 이는 도미노처럼 전 세계로 퍼진다는 뜻이다.
‘충격! 태루시 헌터의 이능에 당한 부상은 회복이 불가능한 것으로 밝혀져!’
그리고 얼마 뒤 세상에 알려진 소식.
태루시 집행관에게 당한 상처는 그 어떤 치료계 각성자가 와도 치유가 불가능하다는 소식이 세상을 덮쳤다.
“가벼운 동상 정도면 모를까, 태루시 집행관이 직접 얼리고 부순 부위는 성녀인 저도 치유가 곤란한 것이에요. 그러니 다들~! 죄짓고 살면 안 돼욧! 나쁜 사람은 태루시 헌터가 나타나서 이놈! 하고 때찌때찌 할 테니까요~.”
지구 최고의 치료계 헌터, 성녀 아스카 레이나의 인터뷰는 안 그래도 높았던 루시를 향한 두려움을 더 크게 만들었다.
“죽여 줘……. 이런 병X이 되어서 뭘 어떻게 살라고오. 그냥 다 말할 테니 죽여 줘! 흐으으으윽!”
뒤이어 루시에게 팔다리를 잃은 마인 범죄자들이 차라리 죽여 달라면서 흐느끼는 인터뷰가 방송을 타고 널리 퍼졌다.
‘태루시 효과일까? 마인 범죄율 한 달 사이 –50%.’
‘인권위원회 1주일째 침묵. 일부 관계자의 증언에 따르면 인권위 임직원들 두려움에 떨어…… 출근한 직원 손에 꼽아.’
‘협회와 태루시 집행관을 규탄하던 시민 단체 집회, 어느 순간 싹 사라져.’
‘쉿! 절대 그분의 이름을 언급해선 안 돼! 커뮤니티와 SNS에서 유행하는 신조어와 밈을 소개한다.’
태루시의 이름은 이제 한국뿐만 아니라 세계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가 되었고, 어느 순간 사람들은 루시를 ‘빙하의 집행관’이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적지 않은 이들이 빙하의 집행관 태루시와 빙하의 여제 베아트리체를 동시에 떠올리기 시작했다.
그렇게 시간은 흐르고 흘러, 계절은 늦여름을 지나 늦가을에 이르렀다.
시간이 흐름에도 루시를 향한 사람들의 관심과 경계는 최고조였다.
그 누구도 그녀를 A급의 집행관이라 보지 않았다. 실제 이능은 S급인데, 사연이 있어서 숨긴 것이라고 너도나도 추측했다.
그리고 루시를 향한 세상의 관심과 경계가 최고조로 올랐을 때.
‘속보! 부산 해운대에서 대규모 이능 테러 발생!’
‘사상자 700여 명에 육박! 대부분 무고한 시민들.’
‘이능의 유형은 냉기 원소와 공간 이동!’
‘레드문 ‘우리가 한 짓. 빙하의 여제는 살아 있다!’’
‘카메라에 찍힌 빙하의 여제, 청은발에 가면 쓴 얼굴까지 너무 일치해!’
빙하의 여제 베아트리체가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 * *
‘태루시 집행관과 베아트리체의 관계는? 둘의 이능과 외모 놀랍도록 닮아.’
허, 참.
루시는 휴대폰으로 기사의 제목을 보면서 피식 웃었다.
“정말이지, 이 기레기라는 것들은 바퀴벌레 같구나. 치워도 치워도 끝이 없어.”
이제는 이런 기사로 기분이 상하지도 않았다.
불경기라서 그런가? 저렇게 오늘만 사는 기자들이 너무 많다.
때문에 작정하고 가짜 뉴스를 뿌리는 것들만 아니면 사실상 내버려 뒀다.
‘빙하의 여제, 도대체 누구일까? 왜 테러를 일으키자마자 바로 사라진 것일까? 시몬과 유리아는 물론, 협회장과 성녀도 추적 중이라고 했는데…….’
빙하의 여제. 분명 거슬리는 존재인 것은 확실하다.
하지만 공간 이동 이능까지 있는 마인이라 잡기가 쉽지 않았다.
‘지금은 두 사람을 통해 최대한 정보를 수집하는 수밖에.’
루시가 움직이면 이목을 너무 많이 끌기 때문에 일부러 가만히 있었다. 인지 저하와 변신 마법도 각성자들 사이에선 효력이 떨어지기 때문이다.
현재는 시몬과 유리아가 베아트리체와 관련된 연락을 주면, 그때 움직이기로 얘기가 된 상황.
‘낮에는 협회의 집행관, 밤에는 가면 쓴 마인?!’
“……!”
루시는 이어서 자신과 베아트리체를 동일 인물로 추정하는 기사를 눌렀다.
만약 가짜 뉴스를 퍼트린 것이라면 협회를 통해 이 기자의 주소를 알아낼 생각이었다.
쯧.
제목에 이어 기사를 읽은 루시는 혀를 찼다.
“하여간.”
제목만 어그로일 뿐 내용은 전혀 상관없는 기사였다.
루시는 뒤로 가기를 눌렀다. 그러자 온갖 난잡한 광고 창이 휴대폰 화면을 어지럽혔다.
‘이 망측한 그림들은 도대체가 사라질 생각을 안 하네?’
보통 이런 하루살이 식의 기사는 이름 없는 인터넷 언론사에서 주로 냈다.
그리고 그런 언론사 기사에 들어가면 홍등가에서나 볼 법한 여자들 사진이 정신없이 떴다.
처음엔 호기심에 몇 번 들어갔지만, 개인정보를 입력해야 하는 장벽이 있었다.
무엇보다 루시는 이성애자였기에 그렇게까지 인증을 해서 들어가고 싶지도 않았다.
‘완전히 나갔다가 다시 들어와야겠군.’
루시는 성인 광고로 범벅된 기사에서 나가기 위해 홈 버튼을 누르려 했다.
하지만 그때,
“?!”
어떤 한 성인 광고 배너가 루시의 눈에 띄었다.
금발 금안의 잘생긴 남자가 상체를 훤히 까고 있는 광고.
‘오늘 밤 침대 위에서 내가 너의 태양이 되어 줄게!’
적나라하지 않은, 서정적이면서도 야릇한 문구.
딱 보아도 여심을 공략한 성인 광고다.
‘솔라?!’
문제는 저 배너에 있는 남자의 외모였다.
루시의 가슴에 쿵! 하는 소리가 났다.
그녀는 눈을 부릅뜨고서 광고를 노려보았다.
“후우.”
이윽고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자세히 보니, 다행히도 태광휘가 아니었다.
태광휘와 비슷하게 생긴 배우였다.
보정을 했음에도 모든 부분에서 루시가 아는 태광휘보다 5단계 아래였다.
배너 속의 남자가 태광휘가 아님을 확인했음에도 그녀의 가슴은 여전히 빠르게 뛰었다.
“…….”
루시는 괜히 주위를 살폈다. 주변에 아무도 없음을 확인한 그녀는.
“크흠, 흠! 잘못 눌렀군. 이런!”
헛기침을 하고는 실수인 척, 그 배너를 눌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