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79화
#179.
아스카가 물어 왔다는 첩보와 박태오의 설명.
뭔가 의심스럽고 허술했다. 마인들이 고의로 흘린 정보인지, 아니면 눈앞의 협회장이 루시를 시험하려는 것일지도 모른다.
‘까불면 혼내면 되겠지.’
그러나 찝찝하단 이유로 피할 정도로 루시가 약한 것은 아니다.
“……일단 안내해.”
그녀는 고개를 까딱이며 집무실에서 다시 나갈 준비를 했다.
“좌표는 여기야. 남쪽에서 살짝 서쪽으로 튼 방위지. 거리는 약 500킬로미터. 자세한 장소는 여기 이 사진이랑 동영상을 참고해.”
루시가 수락하자, 박태오가 자신의 휴대폰을 들고서 그녀에게 가까이 다가왔다.
저벅, 저벅, 쿵, 쿵.
큰 덩치의 그가 접근하자 집무실 바닥과 벽이 울린다. 위압감 또한 중대형 몬스터가 다가오는 것처럼 장난이 아니다.
“공간 이동할 줄 알지?”
박태오는 루시와 한 발자국 떨어진 거리에서 물었다.
“나와 그쪽이 비행기라도 타면 바로 알려질 거야. 아무리 변장을 하고 기밀로 한다고 해도 결국엔 정보가 새기 마련이거든.”
경계를 놓지 않는 루시를 향해 박태오는 낮게 설명했다.
“사실, 김시오와 문유리, 아스카의 미국행은 위장에 가까워.”
“…….”
뒤이어 더욱 작게 뒷말을 이었다.
잠시 후.
번쩍!
삐비비비빗.
집무실에서 빛이 번쩍이더니, 마력 파동을 알리는 경고음과 함께 루시와 박태오가 사라졌다.
“루시 님?! 협회장님?”
집무실에서 빛과 흔들림을 느낀 구민주가 급히 커피와 차를 챙기고 집무실 문을 노크했다.
집무실 바로 앞에서 대기를 타고 있었기에 바로 대응할 수 있었다.
“…….”
그러나 방음으로 조용한 집무실 안에서는 아무 대답이 없었다.
“실례하겠습니다아.”
끼익.
“헐?”
조심스레 문을 열자, 민주의 눈에 보이는 것은 공간 이동 마법 후폭풍으로 엉망이 된 집무실 내부였다.
“……공간 이동은 루시 님 이능이겠지? 아마?”
이를 목도한 민주의 머릿속에 경종이 울렸다.
“싸, 싸, 싸, 싸웠나? 나, 납치?”
우리 고용주께서 설마 협회장님을…… 납치?!
서로 사이가 안 좋아 보이긴 했는데 기어코 저질렀구나아!
으아아아아.
민주의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자신 같은 일반인은 감당할 수 없는, 거대한 무언가가 벌어진 기분이다.
“아니야, 아니야. 무조건 나쁜 일이 생겼을 거라고 볼 순 없지!”
일시적으로 부정적인 생각을 하던 민주는 이내 고개를 세차게 저었다.
“암, 그렇고말고!”
부정적인 생각을 일단 접었다. 나쁘게 생각해서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설령 사실이더라도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을 텐데.
“……두 분이 데이트라도 가신 거겠지.”
그리하여 민주는 최대한 긍정적으로 생각하기로 했다.
애써 맑게 생각하면서, 엉망이 된 집무실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 * *
네오서울(NeoSeoul), 서울의 한 마천루.
초상 시대에 재건된 빌딩답게 마천루의 외형은 투박했다. 내구성과 가성비가 극대화된, 여차하면 전시에 대괴수전 요새로 쓸 수 있을 것 같은 빌딩이 네오서울을 밝힌다.
투박한 빌딩의 외벽엔 이 건물의 소유주의 이름인 ‘대명’이 홀로그램으로 반짝인다.
그 빌딩의 최상층에서 초로의 한 남성이 말없이 창밖을 보고 있었다. 한 손에는 주먹만 한 얼음으로 된 구슬을 쥐고서.
-회장님, 성녀와 김시오, 문유리 집행관이 탄 전용기가 미국으로 출발했다고 합니다.
대명그룹의 회장 김은찬의 뒤에서 비서의 목소리가 전화음을 타고 들려왔다.
-협회장 박태오와 태루시 집행관은 협회 본부에 남아 있다는 보고가 방금 들어왔습니다.
고급스러운 원목 책상에 놓인 인터폰에서 보고가 이어졌다.
꽈드득!
인터폰에서 태루시라는 이름이 언급되자, 얼음 구슬을 쥔 김은찬 회장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그가 손에 쥔 얼음 구슬은 투명하지 않았다. 각종 무언가가 뒤섞여서 얼어 버린 것처럼 탁한 구정물로 된 얼음덩어리에 가까웠다.
“면밀히 감시해! 뉴시카고로 향하는 것을 보니 뭔가 냄새를 맡은 게 분명하다.”
-알겠습니다.
“그리고…… 정부에는 얘기를 해 봤나?”
-예, 안 그래도 그게 마지막 보고 내용이었습니다. 정부에서는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습니다. 추측으로는 정부도 이미 레드문과 손을 잡은 듯 보였습니다.
“?!”
인터폰에서 나온 말에 김은찬 회장은 처음으로 고개를 책상 쪽으로 돌렸다.
“하핫…… 하하하하하하하!”
그리고 박장대소했다.
“알았다. 계속 수고하게. 그 태루시라는 망할 년은 더욱 철저히 감시하고!”
-예! 회장님.
통화가 끝났다.
잠시 적막이 찾아온 회장실 안.
“자네들은 다 계획이 있었구먼?”
김은찬 회장은 회장실 구석을 응시하며 입을 열었다.
스으으윽.
그러자 회장실 구석, 그림자 안에서 두 인영이 모습을 드러냈다.
온몸을 검은색 옷으로 감싸고 후드를 깊게 눌러쓴 남자와 청은발에 가면을 쓴 여성이었다.
“…….”
김은찬 회장은 자신의 아들을 죽인 원수와 유독 닮은, 가면 쓴 여성을 말없이 응시하다가 얼마 후 시선을 남자에게로 돌렸다.
“섭섭하군. 그래도 나름 돈독한 관계인 줄 알았는데?”
“그런가요?”
회장의 말에 검은 후드를 깊게 눌러 쓴 남자가 대꾸한다. 육성이 아닌 전파음에 가까운 목소리가 뇌리에 스친다.
촤악.
동시에 검은 후드 속에 탁한 백금색 안광이 빛났고, 등에서는 회색 날개가 돋았다.
“타천사 루시프, 따지려던 뜻은 아니었네.”
검은색 남자의 반응에 김은찬은 급히 어깨를 움츠리며 뒤로 한 발자국 물러났다.
“저도 딱히 위협을 가하려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렇다면 다행이군.”
남자의 말에 김은찬은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 자신의 손에 들린 얼음 구슬을 슬쩍 보았다.
“그 심해에 있다던 물건은 찾았나? 보아하니 협회장이랑 성녀도 비슷한 걸 찾는 것 같던데?”
그는 얼음 구슬에서 시선을 거두지 않은 채로 물었다.
“대명그룹의 지원 덕분에요. 레드문은 회장님의 투자를 잊지 않을 겁니다.”
“다행이군.”
레드문의 간부 루시프의 대답에 김은찬은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다행이라는 말이 물건을 찾은 것에 대한 의미인지, 레드문이 대명의 지원을 잊지 않겠다고 한 말에 대한 의미인지는 명확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이제 진짜로 내 아들을 살릴 수 있겠지? 성녀도 포기한 것을 말일세.”
김은찬은 얼음 구슬에서 시선을 여전히 고정한 채로 루시프에게 물었다.
“가능합니다, 충분히.”
노인의 물음에 루시프가 답했다. 그러면서 뒤에 있던 가면 쓴 여인을 힐끔 보았다.
“…….”
빙하의 여제로 알려진 청은발의 여인은 여전히 말이 없었다.
눈앞 두 사람의 반응이 어떻든 간에, 김은찬 회장은 말을 이었다. 말을 잇는 그의 눈동자에는 손아귀의 얼음 구슬이 계속해서 고여 있었다.
“정말 비참한 몰골이 아닌가? 내 아들 명찬이가…… 마지막 남은 대명그룹의 유일한 후계자가 이딴 몰골로 있다니…….”
말을 하는 노인의 목소리가 떨렸다.
첫째 아들은 대전쟁 초기에 죽었다. 죽은 장남과 나이 차이가 많이 났던 둘째 김명찬만이 김은찬 회장의 유일한 후계자였다.
그랬던 아들이 하루아침에 죽었다.
세포까지 전부 얼어서 마치 눈꽃 빙수처럼 부서졌다.
어찌나 완벽한 죽음이었는지, 초상 시대의 도래로 죽은 지 얼마 안 된 사람도 돈만 있으면 부활시킬 수 있는 시대임에도 그의 아들은 부활이 불가능했다.
결국 아들의 영혼이라도 구하기 위해 조치를 취해야 했다.
영혼이 10차원의 연옥으로 가기 전에 이 얼음 구슬에 넣은 것.
“빙하의 여제여, 이 얼음 구슬은 고맙소. 아들이 없는 허전함을 그나마 데워 주더군.”
김은찬의 시선이 루시프 뒤에 있는 여인에게 향했다.
“…….”
청은발의 여인 베아트리체는 말이 없었다.
“눈꽃이 된 아들의 육신을 녹이고 뭉쳐 만든 이 구슬. 처음엔 껄끄러웠지만 지금은 아니야. 무엇보다. 이 구슬에 우리 명찬이의 영혼이 담겨 있어서 참으로 위안이 돼. 위안이…….”
사실상 유골함에 가까운 얼음 구슬.
저 얼음 유골함을 만들어 준 장본인이 바로 빙하의 여제 베아트리체였다.
“묻겠네. 그 태루시라는 여자를 빙하의 여제께서는 이길 수 있겠나?”
“…….”
김은찬의 물음에 베아트리체는 말이 없었다.
끄덕.
그러다가 몇 초 후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대답을 마쳤다.
어떻게 보면 무례한 반응.
“그렇군.”
하지만 회장은 만족한 모양.
“참으로 든든해. 세금만 처먹는 협회보다 훨씬.”
김은찬은 그렇게 말하고는 책상 위에 조심히 아들의 유골 구슬을 놓았다.
“지난번의 보관소 때처럼 어이없게 실패하지만 않으면 좋겠네.”
말의 내용과 달리, 김은찬의 어조는 부탁에 가까운 간곡한 뉘앙스였다.
“그때와는 전혀 다를 겁니다. 그때는 단순히 저들의 실력을 확인하기 위한 정찰에 가까운 거였으니까요.”
이에 루시프가 대표로 나서서 답했다.
“이번에는 저희가 직접 나설 겁니다.”
루시프의 어조에는 자신감이 가득하다.
“…….”
김은찬은 그런 루시프를 말없이 응시했다.
‘저 몸도 아바타겠지?’
협회도 믿지 않는데 레드문이라고 신뢰할 김은찬이 아니다.
‘듣기로는 12차원에서 11차원으로 추방당한 타천사라고 했지. 근본은 천사라지만 하는 짓은 마족과 다를 게 없군.’
그는 무심히 생각을 마치고는 다시 입을 열어 루시프에게 물었다.
“그럼 우리의 지원 덕분에 찾았다는 물건은 지금 어디에 있소?”
“제주도에 있는 해양 기지에 있습니다.”
“하! 정부와 손을 잡았다더니 진즉에 손을 쓰셨군.”
아무리 대명 그룹에선 돈과 물자만 지원해 주기로 했다지만, 이렇게 정보 공유가 되지 않는 점에 김은찬은 언짢음을 느꼈다.
‘저놈들도 우리와 비슷하겠지.’
본질적인 불신이다. 재벌가와 기업 생태계에서 평생을 자라 온 김은찬에게 이것은 오히려 당연했다.
그저 늘 갑의 위치에 있던 자신과 대명이, 이번에는 철저한 을의 위치에 있어야 함이 마음에 들지 않을 뿐.
하지만 어쩌겠는가? 당장 아쉬운 것은 그와 대명그룹인 것을.
세계의 무수한 기업과 정부에서 레드문의 지식과 힘을 탐낸다.
정확히는 마인들과 계약한 11차원 마족들의 힘과 지식을.
기업과 정부는 많고, 레드문은 하나다.
아마 저들에게 자신과 대명그룹은 수많은 투자자 중에 하나에 불과할 것이다.
‘기업과 레드문과 한국 정부의 야합이라. 재밌군.’
김은찬은 잠깐의 언짢음을 가슴속 깊은 곳에 묻었다.
지금 중요한 것은 갑을 관계 따위가 아니니까.
“레드문과 정부는 태광휘가 복귀했을 때 어떻게 대응할 것이오?”
다시 입을 연 회장은 한편으론 가장 걸리는 부분을 물었다.
바로 태광휘.
기업과 정부와 마인이 이렇게 대놓고 움직일 수 있는 이유는 바로 태광휘와 협회, 검룡 길드의 최상위 헌터들이 지구에 없었기 때문이었다.
“태광휘가 돌아오기 전에 세계를 장악해야 합니다. 정부와 기업, 길드, 협회 그리고 대중까지.”
김은찬의 질문에 루시프의 담담한 의지가 회장실을 울렸다.
“그가 돌아오는 것은 맞는가 보군?”
“마왕을 소멸 직전까지 몰고 간 자입니다. 시간이 오래 걸릴 뿐, 처리 못 할 게이트는 아닙니다.”
“…….”
루시프의 말에 김은찬 회장은 이걸 아쉬워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모를 애매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그런 노인을 향해 루시프가 다소 밝은 어조와 안광으로 말을 이었다.
“태광휘가 들어간 태평양 게이트는 마계에서도 가장 크고 깊은 림보. 적지 않은 고위 헌터들이 그곳에서 죽을 겁니다. 태광휘와 극소수의 헌터들만이 목숨을 부지해서 돌아오겠지요.”
등에 달린 타천사의 회색 날개가 습관적으로 퍼덕인다.
“지구로 돌아온 그와 헌터들은 선택해야 할 겁니다.”
루시프는 말을 이었다.
“자신들이 수호하고 지켰던 것들을 마음에 안 든다는 이유로 파괴할 것인지.”
회장실에 긴장감이 감돈다.
“아니면 체념하고 그저 군림하는 자로 남을 것인지.”
“만약 태광휘가 우리와 대적하려 든다면? 지구의 모든 것을 정화하겠다고 한다면?!”
루시프의 말을 듣던 회장은 다급히 물었고.
“그때는 싸워야지요. 하지만 걱정 안 해도 됩니다.”
루시프는 동화책을 읽어 주는 듯한 평온한 어조로 답했다.
“태광휘 또한 그곳에서 많은 힘을 잃을 것입니다.”
타천사가 내뱉은 의미심장한 문장이 김은찬의 마음을 때렸다.
“!?”
“이번에 우리가 심해에서 발견한 물건이 차원 코어가 맞는다면.”
타천사와 계약한 마인은 무언가를 알고 있는 것 같았다.
“약해진 태광휘는 결국 패배할 것이고.”
“!!”
“지구에는 새로운 수호신이 탄생하겠지요.”
루시프의 대답이 이어질수록.
“그때쯤이면 회장님의 아드님도 살아날 수 있을 테고요”
“……!”
김은찬은 자신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켰다.